asiamusic.net 에 올라온 나미님의 프로필 입니다.
나미
198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대표적인 가수 나미. 독특한 헤어스타일에 현란한 율동, 탁월한 무대매너 등 종합적인 연출력을 가진 그녀는 여성가수로서는 최초로 랩, 리믹스를 도입하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다.
1957년 경기도 동두천 태생인 나미(본명: 김명옥) 그녀의 부친은 미군부대 근처에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린 그녀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뜻도 모르는 팝송들을 곧잘 따라불러 가게를 찾아오는 미군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녀의 재능을 관심있게 지켜본 한 미군에 의해 미8군쇼에 관계하는 한국인 프로모터에게 소개된 그녀는 7세때 꼬마가수로 미8군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점점 유명세를 얻게 된 그녀는 초등학교 5학년때 이미자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엘레지의 여왕’에서 이미자의 어린 시절을 연기, 2년 후 윤복희의 자전적 영화 ‘미니 아가씨’에서 윤복희의 어린시절을 연기하는 등 어려서부터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1971년 중학교를 진학하던 해에 5인조 여성그룹 ‘해피돌즈’에 가담하면서 본격적인 가수활동을 시작,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1급뮤지션 대접을 받았다.
그녀가 14세 되던 해 월남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위한 위문공연단에 선발된 ‘해피돌즈’는 월남에서 2년간 활동을 한 후 1973년에 귀국했다.
미8군쇼에서 팝의 본고장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해피돌즈’는 기라성 같은 스타들과 경쟁하여 성공을 도모하였으나 좌절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7년여 동안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중 잠시 귀국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그녀는 남동생의 죽음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국내에 눌러앉게 되었다.
국내에서 이탈리안 남성들이 주축이 된 ‘후랑코 노마노 밴드’에 몸담아 활동을 시작한 그무렵 작곡가 장세룡에게 픽업되었다.
줄 곧 팝을 추구해 왔던 그녀가 1979년에 후랑코 노마노와 함께 ‘나미와 머슴아들’이라는 조인트 그룹을 결성하여 첫 앨범 ‘미운 정 고운 정’을 발표, ‘미운 정 고운 정’과 디스코풍의 댄스곡 ‘영원한 친구’가 다운타운을 주축으로 히트하였다.
이듬해 출반된 그녀의 2집 ‘난 사랑했어요’는 당시 유행하던 부기우기, 디스코, 뉴트로트를 적절히 배합하였으나 나미의 음악적 색깔을 드러내지 못해 상업적으로 실패, 1983년에 발표한 3집 ‘기다림은 멀어라’ 역시 뉴웨이브, 팝 등 다양함을 추구했으나 발라드 곡인 ‘애니의 연가’가 다운타운에서 약간의 반응을 얻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녀가 절정의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84년에 발표한 과거의 히트했던 그녀의 노래들을 모은 앨범 ‘빙글빙글’덕분. 나미 특유의 굴리는 듯한 발음과 허스키하면서 비음섞인 목소리가 돋보이는 ‘빙글빙글’은 당시 국내 댄스뮤직 사상 최고의 히트를 기록하며 지금가지도 그녀의 독특한 댄스와 함께 애창되고 있다.
이후 레게 댄스곡 ‘보이네’, 슬로우 곡 ‘슬픈 인연’, 디스코풍 ‘사랑이란 묘한 거야’ 등을 연속적으로 히트 시키며 댄스 가수로서 입지를 굳혔다.
1989년에 2인조 DJ ‘붐붐’과 함께 랩과 리믹스로 붐을 일으킨 노래 ‘인디안 인형처럼’은 댄스뮤직의 새로운 사조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선하고 경쾌한 이 노래의 폭발적인 히트 후에 스캔들에 휘말린 그녀는 활동을 중단해야 했고, 2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1992년 앨범 ‘카멜레온’을 발표했다.
그리고 1996년 4년의 공백기를 깨고 ‘오랜 겨울’, ‘설득’, ‘슬픈 인연’ 등이 담긴 실글앨범을 발표한 그녀는 간간히 TV에 출연하면서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예전의 인기를 되찾지는 못했다.
-끝-
*유료회원에게만 노출되는 내용이군요. (무료회원도 신청하면 3일간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요.)
카피도 금지되어 있는 텍스트를 보고 제가 타이핑해서 올립니다.
나미님의 자료가 너무 없고...찾기도 힘들군요.
이렇게 올려도 되나 모르겠네요..
^^;;;;
첫댓글 이렇게 열심히... 오아오아.. 행수님 멋져!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