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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경 이원영(鳳卿 李源永)’ 연구
에큐메니즘에 입각한 지역교회사연구의 사례1)
임희국2)
1. 이원영이 누구인가?
이원영(李源永, 1886-1958)은 ‘퇴계 이황선생의 14대 손이며, 안동지역 제 1세대 개신교회의 목회자’였다. 그는 1886년 7월에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에서 태어났고, 5세부터 퇴계 집안의 학문전통에 따라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는 구한말시대 급변하는 사회변혁 속에서 성장했다. 조선정부의 문호개방(1876)이래로 본격화된 근대화와 이에 따른 서양문물의 유입에 대해서 안동과 경북 북부지역의 유림(儒林)은 위정척사(衛政斥邪)전통을 지키며 개화물결을 배척했다. 그런데 을미의병(1895)을 계기로 안동의 유생들 가운데 일부가 척사전통을 버리고 개화사상을 받아들여서 혁신유림(革新儒林)이 되었고, 이들은 1904/5년 이래로 전개된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과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에 동참했다. 이 운동의 열매로 도산면에 설립된 사립 문중학교 보문의숙(寶文義塾)에 이원영이 다녔고, 그는 제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리해서 위정척사전통 속에서 한문을 배웠던 그는 이제 혁신유림의 한 사람이 되었다.
온건파 혁신유생으로서 이원영은 기미년(1919) 3월에 예안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시위도중에 체포된 그는 1년 동안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옥중에서 그는 이상동(李相東)의 전도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1920년 봄에 출옥하고 향촌으로 돌아와서 신앙생활을 하며 선교사 권찬영(John Y. Crothers)에게 세례받았다. 그는 인노절기념성경학교(안동)를 제 1회로(1925) 졸업하고, 또한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제 25회로(1930) 졸업하였다. 그는 신학교에 재학하면서 조사로 일했고,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 6월부터 영주의 중앙교회와 용상교회를 동시에 맡아 강도사로 일했다. 1933년 1월부터 그는 안동의 안기교회(지금의 서부교회)와 신세교회(지금의 동부교회)를 동시에 맡아 담임목회자로 일하다가, 1934년부터 안기교회만 담임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담임목회자가 없는 인근의 여러 교회에서 임시당회장을 맡아 일했다. 그는 또한 인노절기념성경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목회자 이원영은 예안의 3.1만세시위를 주동한 정신을 여전히 내면 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장로교회 농촌운동(1928-1937)의 지류인 경안노회 농촌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해서 지역의 농촌계몽과 농사개량을 위해 일했다. 이러한 그를 일제는 ‘요 시찰인물’로 지목하였다. 1938년에 ‘조선교육령개정’을 필두로 강화된 일제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에 이원영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즉, 그는 조선교육령개정․신사참배강요․창씨개명을 모두 다 거부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시무하던 안기교회에서 쫓겨났고 경안노회로부터 강제로 목사직 시무사면을 당했다. 그와 가족은 교회와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그를 ‘예비금속’이란 이름으로 네 번 구금시켰고 그 때마다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경산경찰서에서 풀려난 이원영은 ‘산 순교자’로 존경받으면서 무너진 교회를 복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용서와 화해의 복음정신으로 자신을 면직시킨 교회를 끌어안았고 유대교적 율법주의를 배격하는 복음정신으로 고려파로 합류하자는 제의를 뿌리쳤다. 그는 지역교회의 지도자양성을 위해 ‘경안고등성경학교’(1946)를 설립했다. 1954년에 열린 장로교회 제 39회 총회에서 그는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해의 총회는 ‘신사참배취소성명서’를 발표했다.
1950년 6.25전쟁직후에 그는 전쟁고아를 돌보는 ‘경안신육원’설립과 전쟁미망인을 돌보는 ‘기독자매원’설립에 적극 나서면서 사회봉사에 헌신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적 가치관을 가진 사회지도자를 양성하려는 취지에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일에도 헌신해서 ‘경안고등학교(안동)’와 ‘계명대학교(대구)’의 설립이사로 일했다.
1958년 6월 21일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2. 에큐메니즘에 입각한 지역교회사 연구
봉경 이원영연구는 얼마 전부터 제기되고 있는 교회사연구의 새로운 방법론논의와 맞물려 시작되었다.3) 18세기 후반에 유럽의 개신교회는 카톨릭교회에 이어 세계 여러 대륙에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오늘날 기독교는 적어도 지리적인 측면에서 세계보편종교가 되었다. 그런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개신교회는 -지역의 전통문화와 고유한 생활양식에 따라- 저마다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다. 이러한 현상 곧 기독교의 ‘보편성과 지역적 특성’이 동시에 반영되는 세계교회사서술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20세기 중반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에 독일의 젤러(Winfried Zeller)는 세계교회사서술을 위한 두 개의 중심 축 곧 보편성과 유일성(Universalität u. Originalität)에 관해서 언급하였다.4) 즉,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역사 속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보편성과 다른 지역의 교회사에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특성을 동시에 수렴하는 교회사서술에 대한 구상이었다. 그의 구상은 학술토론장에서 조금씩 언급되다가 1963년에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제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교회사를 서술해야 하는 과제를 공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루카스 피셔(L. Vischer)는 스위스개혁교회 에큐메니칼 신학의 책임자로서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세계교회들이 하나의 보편적 신앙공동체(universale Gemeinschaft)를 구현하려면 각 교회/교단/교파가 오랫동안 철저하게 지켜온 전통과 신조의 절대화(Absolutheitsanspruch)를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상대화(Relativierung)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5) 그의 주선으로 1981년에 스위스 바젤에서 국제 교회사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협의회는 맨 먼저 역사적-신학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세계 여러 교회/교단/교파의 현실과 또 전통문화의 배경이 다른 각 지역교회의 특성을 인정하고, 그러면서 이 다양한 특성들을 묶어서 하나의 통합교회사로 서술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토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다양성 가운데서 일치’를 모색하는 에큐메니칼 교회사서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에큐메니칼 교회사서술과 관련해서, 유럽의 교회사연구는 -아직은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으나- 교리/신조/교파의 담을 허물고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대화하는 가운데 통합교회사(interkonfessionelle Kirchengeschichte)를 서술하고자 한다.6) 일부 교회사가들은 아시아․아프리카대륙의 교회들이 이전에는 유럽교회의 선교대상이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유럽지역의 교회보다 더 왕성한 현상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세계교회사를 서술하려면 ‘유럽중심’의 교회사서술을 탈피해야 한다고 말했다.7) 또 다른 한편, 아시아의 교회사가들은 대륙내 각 나라와 민족마다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과 전통문화가 있음을 인정하고 각각의 지역특성을 담아내는 아시아교회사(interkontextuelle Kirchengeschichte)를 서술하고자 노력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아시아의 교회사서술은 이제까지 주입 받은 서양의 신학과 교리체계에서 벗어나서 아시아의 관점에서 세계교회사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10여 년 동안에 세계정세의 변화에 따라 가속도가 붙었다. 1989년에 유럽에서 사회주의체제 국가들이 붕괴되자 동서의 이념대립과 군사대립이 물러가고 냉전시대도 종식되었다. 세계정세는 미소중심의 양극체제에서 벗어나 한동안 각 대륙에서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다(多)중심축의 세계질서(eine polyzentrische Weltordnung)로 잡혀갔다. 또한, 빠른 속도로 진전되어 온 정보화시대는 여러 대륙을 마치 하나의 마을처럼 좁혀 놓기도 하고 또 전 세계인들을 마치 그물 망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히게도 해 놓았다. 이에 세계의 수많은 종교들도 여러 종교 안에 있는 다양한 원리를 서로 인정하는 가운데서 다원주의(Pluralism)와 상대주의(Relativism)로 나아가는 경향이 뚜렸해졌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맞물려서 교회사서술도 기독교의 세계보편성과 지역적 특성을 동시에 담아내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본격적으로 찾아 나가고 있다.8) 최근까지는 교회사서술의 중심 축이 유럽과 북미대륙에 고정되어 왔으나 이제는 각 대륙마다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중심 축을 가진 이른바 다(多)중심축의 교회사서술(eine polyzentrische Darstellung der Kirchengeschichte)을 구상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변증법적인 교회사서술, 즉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가치체계를 이제 더 이상 받아들이지는 않으나 자신의 정체성마저 허물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자유방임적 상대주의를 경계하고 또 가치체계의 다양한 원리를 인정하되 혼합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킬 것은 지키면서 대화를 지향하는 교회사서술방법론을 찾아야 했다.
에큐메니칼 교회사서술, 곧 다중심축의 세계교회사서술을 모색하는 가운데서 이원영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서 우리 나라의 전통문화가 새롭게 인식되고 또 이것과 대화하면서 한국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구상이 설정되었다. 이렇게 기독교진리의 ‘보편성과 상황성’을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려는 구상아래 이원영연구가 시작되었다.9)
3. 자료소개10)
ㄱ. 이원영목사 자필 유고(遺稿)
이원영은 자필 서책(書冊) 24권을 중심으로 많은 유고(遺稿)를 남겼다. 이 유고들은 거의 대부분 그가 은퇴할 때까지 원장으로 지냈던 경안성서학원 도서관에서 40년 이상 보존되어 왔다.
그의 생애 전기(轉機)에 따라 유고의 내용을 분류해 보면, 맨 먼저 그가 한문사숙기간에 지었음이 분명한 붓글씨 한문서책 <杜律(두율)>이 있다. 그리고 그가 세례받기(1921년 1월) 직전에 사경회에 참석해서 배운 내용을 받아 적은 서책<예수행적공부>를 비롯하여, 그 이후에 계속해서 여러 (교사)강습회에 참석해서 강의들은 것을 받아 적은 서책들이 있다. 또한, 그가 섬촌교회를 설립한 과정을 돌아보며 붓글씨로 기록한 <安東 剡村敎會堂 設立日記 (안동 섬촌교회당 설립일기)(1921)>와 섬촌교회의 교인명부 <生命錄(생명록)(1921)>이 있다. 1925년에 그가 성경통신과에 등록해서 성경을 배우며 붓글씨로 작성한 <구약통신과답안>이 있다. 그가 1926년부터 만 4년 동안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재학하면서 배운 내용들은 강의록(예, <이사야공부긔>) 여백에 기록하였는데, 이 강의록은 읽을 책이 턱없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 여러 교수들이 교재를 직접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이었다. 또한, 그가 신학교 재학시절에 조사로 일하면서 1929년경에 기록한 서책 <목회단상(154개)>이 있다. 1930년 3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된 이래로 그는 <설교목록>과 <설교원고>를 비롯하여 <사경회 강의록>, 인노절기념성경학교에서 가르친 <성경 강해록>, 경안고등/보통성경학교에서 강의한 <강의록>등을 거의 대부분 남겨 놓았다. 목회자로서 또 신학교 선생으로서 이원영은 신구약 성경을 골고루 강해하였다.
설교와 관련된 유고들을 골라내어 좀 자세히 소개하자면. 이원영은 1930년 6월에 영주 중앙교회와 용상교회를 동시에 맡아 강도사로서 첫 설교를 할 때부터 1955년 12월에 안동 서부교회의 담임목회자로서 마지막 설교를 할 때까지 <설교목록>을 꼬박꼬박 기록하였다. 이 목록에는 설교연번․설교본문․설교제목, 그리고 설교한 때와 장소도 기록되었다. 설교연번의 수를 합쳐 보면, 모두 약 3,200개가 조금 더 된다. 아마도 그가 25년 동안에 설교한 횟수는 이 보다도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짐작하면서, 아무튼 이 설교목록은 그의 목회방침과 설교의 줄거리를 어느 정도 파악케 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설교작성과 관련해서 이원영은 그가 정성을 다해 숙독하던 <관주 신약성경(1930년 발행)> 앞 뒤 여백에 <대지설교 503편>을 기록하였다. 이 설교들은 그의 교역시절 내내 필요한 대로 몇 개씩 기록해서 세월 따라 모아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설교원고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서책 <18편의 설교>가 있는데 이것은 그의 첫 목회지인 중앙교회와 용상교회에서 설교한 원고다. 이 서책은 약 80여 쪽의 분량인데 그의 설교원고가 완벽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 서책을 통해서 그의 초창기 목회와 관련된 교회상황에서부터 설교내용 및 설교문체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받아 적은 설교의 분량도 적지 않다. 그가 경안고등성경학교 경건회시간에 설교한 것을 제자들이(배흥직․장옥시․남수복․김중호) 받아 적었는데, 지금까지 <89편의 설교요약>이 전해 온다. 이 밖에도 교회주보 사이에서 쪽지에 적힌 설교 여러 편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다 <대지설교>이다.
인노절기념성경학교에서 가르치신 과목들을 이원영은 <일람표>로 작성해 두었다. 또한 1946년에 그가 경안고등성경학교를 설립하던 무렵에 <교과과정표(2년 과정, 3년 과정)>를 작성하였다. 교과목 일람표는 그가 가르친 과목들에 관하여 파악케 해 줄 뿐만이 아니라 성경학교의 전체교과과정에 관해서도 파악케 해 주는 자료이다. 이 기록은, 1978년 2월에 경안성서학원 건물의 일부가 화재로 소실되면서 학적부를 비롯한 모든 서류가 고스란히 불에 타 버려서 이 학교 30년의 역사(1948-1977)가 담긴 사료가 몽땅 타버렸는데, 이원영이 기록한 이 교과과정표는 경안성서학원 초창기의 교과과정에 관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ㄴ. 이원영목사 유품장서와 증서
이원영이 생전에 소장하였던 장서 약 삼 백여 권이 잘 보존되어 왔다.11) 이 유품장서는 아마도 그가 남겨 놓은 전(全) 재산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이 유품장서는 그가 읽고 연구하였던 책이 무엇이었던가를 파악케 해 주므로 일차자료와 맞먹는 귀중한 자료라고 파악된다. 이 장서는 대체로 구한말시대(19세기말)에서 1950년대 사이에 출판되었다. 그래서 이 책들은 그 시대의 신학사조와 교회상황 그리고 사회상황을 파악하는데 사료(史料)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신학서적이 유품장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신학서적은 성경 및 주석류와 함께 성서․역사․조직․실천(설교․목회․선교)신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골고루 있다. 또한, 만국 주일공과(1921이래로)를 비롯한 주일학교 관련도서의 분량이 많은데, 이것은 이원영의 교역이 주일학교교육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목회였음을 한 눈에 알아보게 한다. 그리고, 신학잡지들이(게자씨․불기둥․신앙생활․종교교육․농민생활․파수꾼․성서한국․주일학교잡지․십자군․복음과 감사․한글․신학지남․부흥․부활운동․성화․양노․학등․탁마) 종류별로 비교적 골고루 들어 있는데, 그가 자기시대의 교회동향과 신학사상의 흐름을 따라 잡으면서 교역에 열중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원영은 경안노회 농촌운동(1929-1937)의 지도자로 일했는데, 이와 관련된 장서의 분량도 제법 많다. 이 밖에도, 각종 회의록(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경안노회․조선예수교(기독교)연합공의회)과 보고서(산동성 선교보고 등)는 그의 교역활동의 범위에 관해 알게 해준다.
학업과정에 관련된 유품장서도 전해 내려온다. 한문사숙기간에 배운 교재로 추정되는 <퇴계문집>들이 있다. 봉성측량강습소와 보문의숙에서 배운 교재가 약 30권 가량 남아 있다. 성경통신과의 교재도 한 권 전해내려 오며,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서 배운 교재들도 약 20권에 조금 못미치는 분량으로 남아 있다.
졸업증서와 참회증서 그리고 재학중에 받은 상장(우등상)들도 유품 속에 들어있는데 봉성측량강습소졸업증서․보문의숙졸업증서․제 1회 조선주일학교대회 참회증서․성경통신과졸업증서․인노절기념성경학교졸업증서․(평양)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졸업증서 등이다. 이 가운데서 보성측량강습소와 보문의숙 졸업장은 구한말 안동지역 사립학교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최근까지 이 학교들의 교재는 물론이고 졸업장조차 좀처럼 발견되지 않아서 이 분야의 연구가 좀 막막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떠올리면, 그의 졸업장과 상장들은 사료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더욱이, 봉성측량강습소는 여태까지 이 학교의 소재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 졸업장을 통해 학교의 교사진을 비롯해서 개설학과와 설립연도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이원영은 측량강습소를 졸업했기 때문인지 여러 종류의 지도를(서울안내도․금강산안내도 등) 잘 모아 두었다.
ㄷ. 2차 문헌자료와 증언자료
이원영의 교역에 관해 파악할 수 있는 2차 자료는 먼저 <안기교회일지(1935-1939)>, <서부교회 제직회록 (1947.6.23.-1953.12.9.)>, <서부교회 당회록 (1950년 11월 - 1965년 12월)> 등을 들 수 있다. 이 당회록은 6.25 전쟁으로 말미암아 소실되어서 제 44회 당회록(1950.11.)부터 남아 있다. 서부교회의 <교회주보(195312), 1957)>가 유품 속에 남아 있어서 이원영의 목회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경안노회록(1921년이래)>은 그의 교역활동 전반에 관해서 파악할 수 있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 이 노회록은 현재 두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13) 안동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안동교회가 발간한 <<안동교회 80년사>>와 그 후속편으로 발간한 <<안동교회 90년사 : 1989-1999>>도 역시 중요한 문헌자료에 속한다. 이원영은 목회 초창기부터 여러 교회들을 함께 돌보는 임시당회장으로 일했다. 따라서 이러한 교회들의 당회록도 그의 교역활동을 파악하게 하는 자료인데, 예를들어 예안교회․빙하교회․녹전교회․옹천교회 등의 당회록이 있다. 그리고, <장로교회 총회록> 일부도 그의 교역활동을 파악하게 하는 기초 자료인데, 가령 제 39회 총회록(1954)은 그가 교단의 총회장으로 선출되고 일했던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안동 선교부가 본국의 총회(미 북장로교회)에 보낸 <연례선교보고서(Annual Report of Andong Station : 1921-1941, 1948-1949)>도 이원영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문헌자료이다. 선교사들도 각각 개별적으로 해마다 본국의 총회에 선교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선교사의 이름과 선교보고서의 연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권찬영(John Y. Crothers, 1912, 1920-1935, 1937-1941, 1949, 1951), 조운선(Olga C. Johnson, 1956-1957, 1959), 안두조(George J. Adams, 1934, 1937, 1939-1940), 부화일(Harold T. Baugh, 1932, 1935, 1939-1941), 옥호열(Harold Voekel, 1930-1940, 1955, 1957-1958), 매건시(Rainer J. Mckenzie, 1932-1933, 1935-1939), 반피득(P. Van Lierop, 1952-1954, 1956, 1958-1959), 마포삼락(Samuel H. Moffett, 1956-1959), 우열성(S.R. Wilson, 1952-1953, 1955-1959) 등이다. 이 선교보고서들은 안동지역 장로교회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이다.14)
1954년 무렵의 장로교회분규와 관련하여 경상북도 영주에 있는 중앙교회에 큰 어려움이 닥쳤다. 이 당시에 이원영은 경안노회의 노회장과 장로교회의 총회장으로서 이 일을 처리하느라 동분서주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의 분쟁과정에 관련된 여러 문서자료가 이번에 발견되어서 당시의 정황을 소상하게 파악하게 되었다.15)
문헌자료 이외에 증언자료도 이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원영의 생애에 관해서 아직도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는 자녀들, 제자들, 그리고 친지들의 증언(인터뷰, 추모의 글 등)을 자료로 채택했다. 그런데, 증언은 자칫 객관성이 결여될 수 있고 또 기억의 한계와 주관성도 고려해야 하므로 두 사람 이상이 동석한 자리에서 인터뷰를 실시하여 일치되는 내용만을 채택하였다. 이 경우에도 동일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예, 경안고등성경학교 동기생들) 한 자리에 모여 공동으로 증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증언자료를 통해 이원영의 생애를 파악할 수 있는 시기의 범위는 일제시대말기(1930년대 후반)부터 그의 후반기 교역활동시기(1945-1958)까지이다.
ㄹ. 자료수집에 있어서 아쉬운 점
이원영의 초창기 생애(탄생에서 3.1독립운동참여까지)에 관해 파악할 수 있는 일차 문헌자료가 거의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더욱이 한문사숙기간에 그가 어느 문하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 있는 문헌자료가 없었다. 그의 초창기 생애에 관해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헌자료는 법정진술인데, 즉 그가 기미년 3월에 예안의 만세시위를 주동하고 체포되어서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법정진술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33세였다. 이 법정진술 외에 그의 초창기 생애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봉성측량강습소와 보문의숙의 졸업증서 그리고 재학기간에 받은 여러 개의 상장이 전부였다.
꼭 필요한 자료인데 아무리 뒤지고 찾아보아도 도무지 발견되지 아니한 자료들도 있다. 이를테면 이원영이 일제의 황민화정책을 거부해서 네 차례 경찰서에 구금된 사건들에 관해 자세히 밝혀주는 자료가 없어 매우 아쉬웠다. 이 자료가 발견될 경우에, 그가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기간동안에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당시의 경찰기록을 찾아 국가기록원정부기록보존소(대전)까지 방문했는데, 끝내 관련자료를 찾아내지 못했다.
1978년 2월에 발생한 경안성서학원의 화재로 말미암아 학교에 보관중인 문서와 서류가 몽땅 소실되어 버렸기에, 이에 이원영이 학원장으로 지냈던 이 학교 초창기 10년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 부분은 경안노회록과 이원영의 서책에 기록된 교과과정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추모의 글)을 토대로 서술하였다.
4. 서술방법론에 대한 구상
이원영은 생전에 자신의 교역활동에 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에 비해서 그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밝히는 자서전적인 글(예, 일기)은 남기지 않았다. 이 점은 그의 전기를 서술함에 있어서 첫 번째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여러 자료들을 검토한 끝에, 이 전기서술은 그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재구성하는데 목표를 두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서 그의 생애를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여섯 시기로 나누되, ‘탄생에서 교육과정의 시기’, ‘3.1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시기’, ‘기독교인이 되고 또 평신도지도자가 되던 시기’, ‘신학교재학과 전반기 교역활동’, ‘황민화정책거부로 말미암은 고난의 시기’, 그리고 ‘후반기 교역활동’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시기마다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나 사실들을 중심으로 ‘주제별’(예, 3.1민족독립운동․농촌운동․신사참배 등)로 서술하기로 하였다.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전기서술을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료에 의거해서 정밀한 자료분석을 토대로 서술해야 한다고 보았다. 자료가 말해주는 만큼 서술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자칫 연구자의 주관이나 섣부른 판단이 서술에 첨가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원영과 직접 ‘만나고 대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자료와 자료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점이 전혀 없는 경우엔, 부득불 역사적 상상력이 조심스럽게 개입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이원영의 초창기 생애를 파악할 수는 1차 문헌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징검다리’식 서술이 불가피 하였다. 즉, 법정진술을 통해 드러난 이원영의 소신과 사상을 분석해서 이것을 바탕으로 그의 애국심과 애족사상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역(逆)추적하였다. 그러면서 사립 보문의숙의 교육이념과 목표, 사립 봉성측량강습소의 설립과정, 안동지역 유림의 변화 등을 탐구하였다. 이런 식으로, 이원영의 초창기생애는 역(逆)시대순(時代順)으로 파악하였다.
이 전기서술은 이원영을 ‘시대의 자녀’로 그리고자 하였다. 즉, 그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그의 삶을 둘러싸고 있던 여러 정황들도 함께 서술하였다. 이를테면, 그가 1920년경 옥중에서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당시 안동지역의 장로교회상황 및 사회상황을 함께 서술하였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원영의 생애파악을 중심으로 그려져야 했다. 그러면서, 이 서술기법은 최근에 차츰 활기를 띄고 있는 ‘미시사적’ 연구방법론을 염두에 두었다. 즉, 개인 이원영을 통해서 안동지역과 한국교회의 역사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원영의 초창기 생애는 기독교와 관련이 없었으므로 이 시기의 서술은 대체로 일반사 연구와 종종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기독교인이 되고 또 목회자가 된 이후에도 그의 생애와 관련되는 일반사의 주제들을(일제하 농촌운동과 황민화정책, 8.15 광복전후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 등) 함께 살펴보았다. 이와 더불어서 이원영생애에 관한 ‘사회사적’ 연구가 병행되었다.
이 전기서술에 한 여성의 삶도 지극히 단편적이고 피상적이나마 서술하였다. 이원영의 아내 목사사모 김기출의 생애가운데 한 토막을 서술하되 ‘산 순교자’ 이원영의 생애동반자로 그려보았다. 바라기는, 이러한 교회여성들의 생애가 다음 기회에는 독자적인 전기로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의 봉경 이원영연구는 전기서술에 목표를 두면서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연구를 상정하였다. 즉, 생애연구는 대체로 신학사상연구를 위한 기초작업이므로,16) 이 전기서술이 마쳐지게 되면 이원영의 신학사상연구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5. 정리와 제언
ㄱ. 봉경 이원영에 관한 전기를 서술하면서 시대상황에 따라 ‘선비’, ‘독립운동가’, ‘목회자’, ‘산 순교자’, ‘교육자’의 모습을 부각시켜서 그려보았다. 이와 함께 안동지역의 초창기 장로교회사도 이번 기회에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고 본다. 이것을 계기로 앞으로 ‘지역교회사연구’에 대한 관심도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ㄴ. 이 연구를 통해 밝혀진 점 몇 가지를 정리하고 또 앞으로의 연구를 위해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자 한다.
1) 안동지역 장로교회의 역사는 유생들의 ‘기독교수용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신앙인이 된 동기는 다양하였다. 홍재삼의 예처럼 기독교 서적을 정독하는 가운데서 기독교인이 되었거나, 구한말 이래로 망국현실과 전통가치체계의 붕괴 앞에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중에 기독교인이 되었거나, 민족독립을 위해 3.1만세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되어 옥중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기독교인이 되었거나, 여러 가지 다양한 동기로 유생들이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그런데, 기독교를 수용한 유생들의 사상은 대체로 혁신유림에 속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혁신유생 이원영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그의 기독교수용은 서서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를테면 그가 20대 중반에 사립학교(봉성측량강습소, 보문의숙)에서 배운 서양의 역사와 사회를 통해 기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했는데, 이런 식으로 기독교에 대한 전(前)이해가 그에게 조금씩 쌓여 오다가 3.1독립운동참여를 계기로,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2) 1922년에 섬촌교회를 설립하면서 문중과 빚은 갈등을 통해 이원영은 이제 척사유림의 위정척사전통(봉건체제와 질서를 유지, 복고적 보수주의)과 결별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혁신유림의 이념(예, 실력양성론)은 그 이후에도 그에게 한결같이 머물러 있었다. 가령 경안노회의 농촌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한 그의 입장은 당시에 민족주의 계열이 주장하던 경제적 실력양성론과 대체로 부합되었다. 그런데 또 한편, 그는 척사유림과 혁신유림사이의 공통분모인 민족독립의지를 항상 품고 있었다. 일제의 황민화정책을 거부한(특히, 창씨개명거부) 그의 입장 속에는 척사유림전통이 엿보인다. 이렇게, 이원영과 유림전통의 관계는 단절과 연속이 수시로 교차되는 가운데서 다양한 형태로 머물러 있었다.
3) 이조시대 전통교육의 주체인 유생들의(이원영 포함) 기독교수용은 안동지역 초창기 장로교회의 성격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주자학경전을 숙독하던 그들의 관습이 이 지역의 장로교회에 ‘성경기독교’가 형성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선교사들의 교회지도노선이 영향력을 행사했겠으나, 유생출신의 신앙인들이 사경회․주일학교강습․성경보급 등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평신도 지도자가 되어 이 지역의 성경기독교형성에 공헌했다고 본다. 그런데, 성경기독교형성의 내용이 되는 성경관과 성경이해방식에 대해서 알아보는 일은 다음의 연구과제로 남겨두었다.
4) 안동지역 장로교회는 글을 읽지 못하는 교인들의 성경교육을 위해 사숙․강습회․야학 등의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성경교육과 한글교육을 동시에 실시하였다. 한글교육은 그 당시 문맹퇴치에 공헌하였다. 여기에 계몽의 성격이 강하게 내포되어있음을 파악하면, 구한말 혁신유림의 애국계몽운동이 교회의 한글교육 안에서 되살아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려는 이유가 두 가지인데. 첫 째 시기적으로, 이 당시엔 혁신유생들이 세운 사립학교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거나 공립학교로 전환되었으므로 교회가 대중계몽을 위한 대안교육의 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둘째 계몽이란 측면에서, 교회의 한글교육이 성경을 읽히자는 우선적인 목적이 있으면서도 사회의 문맹퇴치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고 이것이 수 년 뒤에(1928) 일어난 교회의 농촌운동과 연결되었는바, 문맹퇴치는 장로교회 농촌운동의 첫 단계였다. 이렇게 교회의 한글교육과 농촌운동은 줄곧 계몽에 그 초점이 있었다.
5) 1930년에 시작된 이원영의 목회에는 -그 당시 개신교회의 여러 교파 안에서 흔히 나타나던- 신비주의나 열광주의 경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목회는 ‘성경-설교’를 바탕으로 ‘지성적인 신앙이 생활 속에서 실천되는 신앙교육과 훈련’(치리도 포함)에 무게중심이 있었다. 이 목회방침의 신학적인 골격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가 성화에 이르도록 인도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이와 더불어서 자연스럽게 신앙인의 윤리와 삶의 규범이 강조되었다. 구약성경 율법서가 그의 설교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점이 이를 반증해 준다. 이리해서, 그의 목회에는 퓨리탄적 경건주의전통(예, 엄격한 성수주일), 칼뱅 개혁교회의 특징인 ‘성도의 견인’이 뚜렷하였다. 여기에 대한 깊은 연구는 그의 설교분석을 중심으로 그가 배운 신학교육(평양 장로회신학교) 및 안동지역 선교사들의 신학노선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안기교회목회 기간에 이원영은 평신도의 신앙훈련(사경회, 주일학교, 면려회 등)을 강화해서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으로 정착되어 가는 평신도신앙운동에 일조하였다. 활발한 평신도활동은 감독체제를 유지해 온 유럽의 국가교회(예, 독일 루터교회)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그의 목회에는 이웃교회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교회연합을 통해 해외선교․사회봉사 등을 펼친 점이 돋보인다.
6) 1929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서 1937년에 종식된 경안노회의 농촌운동은 농사일을 신앙경건훈련의 현장으로 인식하였고, 이 운동의 구체적인 목표는 농촌경제의 향상과 농촌교회의 위기(특히, 재정)를 헤쳐 나가려는데 있었으며, 이 운동의 범위는 생활개선(예, 화장실위생시설)과 관습개혁(예, 혼례식)에 까지 확대되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회는 농사개량과 농서발간 그리고 농촌지도자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경안노회의 농촌운동은 당시에 농촌경제의 피폐함 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교회를 흔들어 놓으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대처하였다.
7) 농촌운동 지도자로서 이미 ‘요시찰인물’로 감시를 받아오던 이원영은 일제의 황민화정책(조선교육령개정․신사참배․창씨개명)을 철두철미 거부하였다. 그의 신념체계는 -신앙양심에 위배되는 신사참배는 거부하였으나 창씨개명에는 순응했던- 교회지도자들과 뚜렷하게 구별이 되었다. 그의 신념 곧 1919년에 3.1독립운동참여를 통해 드러난 항일정신은 그 동안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다만 이제는 장로교회의 목회자로서 기독교신앙과 신학사상을 바탕으로 황민화정책을 거부하였다. 이와 관련한 그의 신학사상은 제 1계명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종말론이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8) 8.15 광복과 함께 ‘산 순교자’로 존경받은 이원영은 건준의 제의를 뿌리치고 오로지 무너진 교회를 복구하는데 전념하였다. 그런데 이 교회야말로 일제시대말기에 자신의 목사직까지 제명하였는데도, 그는 용서와 화해의 복음정신으로 이 교회를 포용하였고 이와 동시에 유대적 율법주의를 배격하는 복음정신으로 고려파로 합류하자는 권유를 단호히 뿌리쳤다. 그러나 그가 안기교회를 복구하면서 곧 바로 교회건축을 위해 서두른 점은 그의 포용이 ‘값싼 용서’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교회건축엔 일제의 신사참배로 더럽혀 져서 얼룩진 교회를 말끔히 털어 내고 청소하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9) 한국장로교회사에 길이 기록될만한 이원영의 공헌은 무엇보다도 제 39회 총회장(1954)으로 뽑혀서 ‘신사참배취소성명’을 주관하고 이 성명서를 발표한 점에 있다고 본다. 일제의 황민화정책을 끝까지 몸으로 거부한 그는 이제 총회장으로서 이 성명서를 통해 아직도 교회 안에 남아있는 그 잔재를 없앴다. 이 성명서에는 죄의 고백을 통해 지나온 과거를 청산함과 동시에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 제 39회 총회의 총대들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과오로 말미암아 광복이후에 교회분쟁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고 또 이 때까지 교단이 두 차례나 분열되었고(고신, 기장) 더 나아가서 교회의 반목질시와 분열이 민족상쟁인 6.25전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공감했고, 이번 총회에는 남북의 교회가 모두 한 자리에 모였으니 이 기회에 모든 죄를 뉘우치고 고백하면서 이제부터는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자는 취지를 담아 취소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점에서 이번의 성명서는 1946년 총회에서 남한지역 교회만이 모여서 발표하였던 신사참배취소성명과 구별되었다.
10) 8.15 광복 후에 경안고등성경학교(안동)의 설립에 이어서, 인재양성에 대한 이원영의 열정은 경안고등학교(안동)와 계명대학교(대구)의 설립이사로 활동하면서 계속 이어졌다. 그는 교회지도자양성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신앙의 가치관을 가진 사회지도자양성에도 큰 관심을 두었다.
11) 교역활동 내내 -엄밀하게 보아 세례받던 순간부터- 이원영은 미국 선교사들과 에큐메니칼 동역자로서 친밀하게 일하였다. 더욱이 그와 가족이 일제시대말기에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던 기간에 선교사들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그런데, 그 친밀함이 대화와 협력의 차원을 넘어서서 적어도 안동지역의 장로교회가 미국식 기독교로 편입되는데 이원영이 길잡이 노릇을 하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비판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그가 시무한 교회에서 치른 성탄절행사․추수감사절․성만찬예식 등은 미국식 교회문화를 그대로 옮겨다 심은 듯한 인상이 짙다. 이 점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주체적인 기독교수용을 좀 의아하게 할뿐만이 아니라, 지역의 한국전통문화를 기독교문화로 접목시키는 것이 ‘제 1세대 목회자’인 그에게는 너무 이른 요청이었는지 물어보고 싶다. 만일, 그가 혁신유림시절에 -신채호나 박은식처럼- 실학사상연구에 몰두했더라면 기독교수용에 있어서 좀 더 주체적이었을 것이고 또 선교사에 대한 인식과 자세도 달랐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또 한편, 구한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의 등뒤에는 서양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세력이 있었고 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도 크게 보아 미국과의 협조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요즘 신학자들의 주장(예, 박순경)에 이원영이 무어라 대답할 것인지 매우 궁금하다.
출처:한국교회사학회
가우리블로그정보센터(GBC)
출처 : http://cafe.naver.com/gaury.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8096
첫댓글 경안의 뿌리이자, 안동지역의 선구자, 선각자이시네. 친구야! 좋은 자료 잘 읽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