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호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휴대용 머리빗. 아내가 떠맡기다시피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준 물건이다. 대개 늘 그랬듯이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네가 무엇이냐?"
"너는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휴대용 머리빗이다."
"그건 나의 겉모습일 뿐이다."
"너의 속모습은 그렇다면 무엇이냐?"
"인간의 마음이다."
".....?"
"누군가 어떤 이유로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들겠다는 그 마음이 이런 모양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굳이 정의한다면, 빗의 모양을 한 인간의 마음이다. 어찌 나만이 그렇겠는가? 사람이 만든 모든 물건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 그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침내 사랑이다. 그러므로 나는 빗의 모양을 한 사랑인 것이다."
"....."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너는 사랑의 주체이기 전에 사랑의 결실이다. 네 부모의 사랑으로 네가 태어난 것이다. 네 부모 또한 그 부모의 사랑의 결실이다. 모든 인간이 사랑에서 나온 사랑의 자식들이다. 이 땅에 생명이 있든 없든 존재하는 것은 모두 사랑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길밖에는 걸어야 할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있다."
"아니, 그런 사람은 없다. 하나도 없다."
"히틀러를 보라. 그는 수많은 유대인을 죽이지 않았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랑의 표현이었다."
"뭐라고?"
"그가 얼마나 게르만 민족을 사랑했는지 모른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건 잘못된 사랑이었다."
"잘못된 사랑도 사랑이지."
"그렇다면 세상에 사랑의 표현 아닌 것이 없잖은가?"
"그렇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과연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너 자신을 사랑이신 그분게 맡겨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사랑이신 그분께 맡기는 것인가?"
"나처럼 하면 된다. 나는 내 몸을 몽땅 너에게 맡겼다. 나는 온전히 네 것이다. 너는 나를 부러뜨릴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잘 간직하여 머리빗을 때마다 사용할 수도 있다. 네가 나를 어떻게 하든 나는 상관치 않는다. 그것이 내가 사랑의 결실답게 너를 사랑하는 길이다. 너는 누구의 것인가?"
"나는 내 것이다."
"너를 가진 너는 어디 있는가?"
"....."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물에서 그를 보지 못한다면 너는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너는 너를 업신여기고 때리고 욕하고 마침내 죽이기까지 하는 자들에게 흔쾌히 너를 몽땅 내어줄 수 있겠는가? 저 옛날 나사렛의 한 젊은 목수가 그랬듯이."
"....."
"네가 사랑이신 그분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지 않는한 결코 그렇게 못할 것이다."
*物과 나눈 이야기(이레출판사)중에서
나그네로 가득 찬 주인(빈 의자)
성공회대학교 외래강사 휴게실에는 나무 의자 다섯 개가 있다.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쓸쓸하다.
"빈 의자야. 너를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이 자꾸만 쓸쓸해지는구나. 너는 그 모양으로 시방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거냐?"
"....."
역시 아무 말이 없다. 사람만 빼놓고 모든 사물이 말을 아낀다. 아니다. 그들이 아끼는 것은 말이 아니라 고요함이다. 그래서 늘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따라서 말없이 빈 의자를 바라본다. 세상이 문득 사라지고 나 혼자 여기있는듯한, 그런 느낌이다."....."
"....."
"....."
"....."
"쯧쯧....."
의자가, 아니 의자에서 누군가 혀를 차는 것 같다.
".....?"
"쓸쓸한 것은 자네 감정일 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자네는 나를 빈 의자라고 부르네만 나는 비어 있는 존재가 아닐세."
의자가 말을 계속하지 않아도 그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의자는 그의 말대로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가득 차 있다. 의자에는 빈틈이 없다. 의자의 부품을 열거하자면 여러 십개쯤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부품들은 '의자'가 아니다. 등받이도 다리도 방석도 의자가 아니다.
의자는 의자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의자 아닌 것들이 모여 의자가 되었다. 부품뿐만 아니라 재료도 의자가 아니다. 나무도 쇠도 가죽도 의자가 아니다. 그러니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의자는 의자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물도 있고 공기도 있고불도 있고 흙(금속)도 있는데 그것들은 의자가 아니다. 의자에는 의자 아닌 것들이 모두 들어 있다. 시간도 있고 공간도 있다. 오직 의자만 없다.
의자는 의자의 비어 있음(공)이다. 아하,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로구나! 그러나 비어 있으면서 모든 것으로 가득차 있다. 보라, 저 의자 하나에 우주 만물이 들어 있지 않는가? 그래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의 쓸쓸한 감정이 내 속에 있는 나의 것이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네가 불러내지 않았느냐?"
"천만의 말씀! 나는 자네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네. 언제까지 남에게 탓을 돌리는 낡은 버릇에 묶여 있을 참인가?"
"....."
"쓸쓸한 자네 감정에 대하여 나는 책임도 없고 할말도 없네만,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는 해주고 싶군."
"쓸쓸한 감정을 축하한다고?"
"아니,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 그것을 축하한다는 말일세."
".....?"
"자네가 쓸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지금 자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라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보다 더 축하받을 일이 무엇인가? 자네가 옮긴 루미의 시에도 그런 노래가 있던데?"
기억난다. 이런 노래였지.
장인匠人 하나 갈대밭에서 갈대 한 줄기
끊어내어 구멍을 뚫고, 사람이라 이름붙였지.
그 뒤로 그것은 이별의 슬픔을 아프게
노래하고 있다네. 피리로 살게 한
장인의 솜씨는 까맣게 모르고서.
쓸쓸한 느낌은 그냥 거기 그렇게 두고, 나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나 아닌 것들의 총합이다. 나는 나의 비어 있음이요 나 아닌 것들의 차 있음이다. 이 쓸쓸한 감정도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면서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나그네로 가득한 주인이다. 세상은 얼마나 완벽한 조화인가? 가짜가 없으면 진짜도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그렇다.
"자네는 나보고 누구르르 기다리느냐고 물었네만, 이제 알겠나? 나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네."
"......"
"내가 누구를(무엇을)기다린다면 그것은 내 속에 채워져야할 빈틈이 있다는 말일세. 그러나 내가 나로서 이미 충만한데 새삼 누구를 기다린단 말인가?"
"....."
"자네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
"자네가 누구를(무엇을)기다린다면, 잘 보시게. 그 누구가 (무엇이) 자네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요즘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라지? 그러나 아기 예수는 이미 자네 속에 잉태되어 있는데, 어디에서오는 그를 기다린단 말인가? 자네가 누구를(무엇을)기.다.린.다.면,자네는 영원토록 그(것)를 만나지 못할 걸세. 없는 대상을 어찌 만날수 있겠나? 잘 보라구. 자네 눈에는 이 사람이 안 보이는가?"
그때 잠깐 시간의 커튼이 걷히고 나는 보았다. 의자에 앉아 얘기를 하고 책을 읽고 눈을 감은 사람의 모습을. 그렇다. 거기 의자 위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물과 나눈 이야기(이레출판사)중에서
끝이 뾰족한 송곳, 종이를 뚫거나 구멍을 팔 때 쓰는 물건이다. 송곳의 기능은 날카로운 끝에 있다. 그래서 '송곳'하면 날카로움이 먼저 떠오른다. 과연 송곳이란 곧 날카로움인가?
송곳은 날카로운 끝을 지니고 있지만 그러나 '날카로운 끝'은 송곳의 지극히 작은 부분일 뿐이고 나머지 부분은 조금도 날카롭지 않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모든 날카롭지 않은 부분들은 내 몸의 지극히 작은 부분인 '날카로운 끝'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내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이 날카로운 끝 한 점에 수렴될진대, 송곳이란 곧 날카로움이라고 해도 잘못은 아니겠지."
"아무렴, 끝이 뭉툭한 송곳은 더이상 송곳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자네의 '뾰족한 끝'은 무엇인가?"
".....?"
"그것 아니면 자네가 자네일 수 없는 그것은 무엇인가?"
"....."
"그것 아닌 자네의 모든 부분이 오직 그것으로 수렴되는 그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
"참고 삼아 말해 주지. 바울로라는 사람은 일찍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했다네."
송곳의 날카로운 끝에 가슴이 찔려 나는 지금 아무 말 못하겠다. 다만, 바라건대 나 또한 바울로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그리하여 송곳이란 곧 날카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듯이, 나 또한 곧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