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360여 년 된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있다.
사적 제101호. 유리지붕 건조물 아래 높이 570cm, 너비 140cm의 이수(螭首)와 귀부를 갖춘 커다란 비이다.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우리에게 치사한 역사보다 더 가증스러울 만큼 부끄러운 인멸의 역사를 가르쳐 주는 상징물이다.
조선의 인조는 삼전도에서 오랑캐 청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해야했다.
청은 청의 왕이 전쟁 중에 조선에서 '선정을 베푼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울 것을 강요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당시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새겼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사방 7품의 해서로 씌어진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청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금수만도 못한 돼지'라고 무시한 오랑캐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치러야 했던 조선으로서는 그 보다 치욕적인 비문을 누가 짓느냐가 더 큰 문제였다.
사실 항복한 이상 비문 찬술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이런 외교 비문은 예문관 대제학이 짓는 법이었다.
마침 대제학이 궐위였다.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몇 명에게 비문 찬술을 명했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를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인조실록> 15년 11월25일)
이경석의 글이 채택된 내막은 좀더 복잡하다.
인조는 세 글 중 일부러 조잡하게 쓴 조희일은 배제하고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조선에 와 있던 청나라 사신 편에 심양으로 보냈다.
심양에는 명나라 학사였던 범문정(范文程)이 있었다.
그가 이경석의 글을 일부 개찬할 것을 조건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인조는 이때 이경석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向背)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해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월(越)나라 구천(句踐)은 회계산(會稽山)에서 오(吳)나라의 신첩(臣妾) 노릇을 했지만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루었다. 훗날 나라가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는데,
오늘 할 일은 다만 문자로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연려실기술> ‘현종조고사본말’)
이경석으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다.
자신이 쓰지 않으면 왕이 직접 비문을 써야할 판이었다.
비문의 일부를 개찬하고는 공부를 가르쳐준 형 이경직(李景稷)에게 편지를 보냈다.
“글 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
“수치스런 마음 등에 업고 백 길이나 되는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
이경석이 지은 시는 당시 그의 고통을 잘 말해준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그를 비문의 찬술자로 비판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했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이경석은 정종의 왕자 덕천군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충추부사를 지낸 이유간이다.
할아버지는 지붕유설의 저자로 유명한 지붕 이수광이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문인으로 19세에 진사가 되고 21살에 중광별시에 합격하였다.
인목대비 폐비상소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합격이 모두 취소되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형 이경직에게 글과 역사를 배웠다. 예학의 대가 김장생의 문하생이다.
이경석이 13세 때 부친의 임지인 개성에 따라 갔을 때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이 공부하는 이경석을 보고는
"후에 우리같은 사람은 따르지 못하게 출세할 것이고 인격이 출중하리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훗날 이경석은 영의정이 되고 김상헌은 좌의정이 되었다.
1617년 이경석은 문과에 합격하였다. 북인 주도하던 인목대비의 폐비론에 반대를 하다가 과거 급제가 취소된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알성문과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오른다.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갈 때 조정백관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인조를 호종하는 신하는 이경석과
승지 한효종 내시 2명 뿐이었다고 전한다. 그후 핵심관직을 두루 거치며 1632년 가선대부에 올라 재상대열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