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자유장교단의 혁명으로 공화제로 이행한 이집트 혁명정부는 점차 정치적 안정기를 찾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아스완 댐 건설사업을 결정하고 미국과 서유럽의 재정지원을 약속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서유럽으로부터 군대증설을 위하여 도움을 구했으나, 1950년의 협정(영-프-미의 무기제한협정)에 의하여 군대증설은 무산되었다.
나기브 초대 대통령은 혁명의 주체세력인 나세르에 의하여 1954년 추방되었으며, 나세르는 1954년 10월 영국군의 수에즈 운하로부터의 철수에 대한 협정을 성립시킨다. 식민지 세력의 추출은 아랍민족주의의 고조화에도 기여했다. 이는 나세르의 지도력의 상승을 의미하게 된다.
1955년에 나세르는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군대 강화에 역점을 두게 되고, 이집트군의 강화를 위해서 소련과 무기구입협정을 체결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무기를 도입하였다. 1955년 비동맹회의가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될 때 나세르는 동서 양 진영의 틈 속에서 제 3세계의 갈 길을 제시함으로써 비동맹운동을 선도하였다. 1956년 6월 22일 나세르는 이집트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강경책을 썼으나, 서방측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취하지는 않았다. 또 나세르는 이집트군의 강화를 위해서 소련에 접근했으나, 친사회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소련이 이스라엘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나세르의 대서구적 입장에 강경노선을 취하게 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는데, 미국은 이집트의 중립노선을 비판하고 있었으며, 특히 소련에 접근하고 있는 국가들을 적대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국제통화기금의 이집트 아스완 댐 건설을 위한 2억불 차관을 취소케 하였다.
특히 미국은 이집트가 계속 체코제 무기를 구입하는 것에 대하여 대 이집트 제재조치를 강구하게 되었고, 1956년 7월 아스완 댐 공사에 대한 차관 취소는 나세르의 혁명사업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게 되었다. 차관 취소는 이집트에 커다란 타격을 주어 나세르의 감정을 자극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56년 7월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게 되었다. 즉 수에즈 운하에서 나오는 수입을 아스완 댐 건설 자금으로 사용한다는 계획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선박에 대하여 국제수로인 수에즈 운하와 홍해에서 이스라엘의 최남단 도시 에일라트에 이르는 아카바 만의 티란 해협의 통과권을 금지하였다.
2. 수에즈운하의 중요성
수에즈운하는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국제수로로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을 잇는 세계 최대의 해양 운하이다. 이 운하는 아랍만의 석유를 유럽에 수송하는 에너지 수송로이며, 아시아 및 태평양을 유럽과 연결시키면서 이어지는 국제경제로인 비단길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것은 또 유럽 안보문제와 강대국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각축장이 되어 왔다.
한편으로는 리비아,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에티오피아, 예멘, 소말리아와 지리적으로 연결돼 있으므로 정치적 환경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랍과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분쟁은 아랍의 운명을 지키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분쟁 양식으로 나타났다. 수에즈운하의 경우 정치적 의미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전략지대이기 때문에 항상 아랍과 이스라엘의 마지노선이 되었다. 국제수로이자 경제적 무역로로서 수에즈운하를 이용하는 전 세계 국가들은 수에즈운하 안보를 유럽안보 또는 국제안보로서 해석하고 있다.
즉 걸프의 석유와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는 국제정치 및 세계경제 환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다. 제 4차 중동전쟁 후 수에즈운하는 자유항해권을 보장받으면서 국제적으로 안정적 수로로 정착되었다.
3. 전쟁 요약.
수에즈운하회사의 국유화는 영국-프랑스 양국에 의한 수에즈운하 점령을 행동하도록 하는 사태가 되었다. 또한 프랑스는 이스라엘에게 대 이집트 실력 행사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스라엘은 이 당시 가자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이집트의 특수부대와 빈번한 충돌이 있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국가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또한 티란 해협의 봉쇄는 이스라엘측에 이집트 공격의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1955년 2월 이스라엘은 그들의 국내 안전을 구실로 가자지역에 대한 대공세를 감행한 일이 있으며, 그것은 나세르로 하여금 이집트군의 무기 근대화, 아랍연맹의 강화 등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내심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참전 요청에 의한 가자지역의 이집트 군대의 분쇄에 대한 사안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집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선언되고 있던 티란해협의 봉쇄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조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들의 국가 이익에서 볼 때 무력동원도 불사할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그들의 군대를 신속하게 시나이 반도로 투하시켜 시나이 반도의 요충지를 점령하였다. 영-프 양국은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하여 이집트 공군을 지상에서 거의 파괴하였으며 공수부대의 기민한 작전으로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였다.
1956년 11월 4일 영국과 프랑스의 공수부대가 이집트의 부르 사이드에 투하되기에 이르렀다. 이집트 군대는 체코 무기의 도입으로 우수한 무기를 보유했음에도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의 우수성으로 패배를 거듭한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에서의 세력 신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프의 군사행동을 비난하게 되고 엄정중립을 선언하였다.
소련도 영-프 양국의 군사개입에 강력한 비난 성명을 냄과 동시에 평화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고 경고하면서, 이들에 대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공격 등을 시사하면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침략행위를 위협하였다. 소련은 미국과 공동 개입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절하고 영-프에 대하여 소련이 중동에 군사 파견시 미국이 영-프를 돕지 않을 것이라고 시사하였다. 이러한 미소의 압력은 영-프-이로 하여금 휴전에 서명토록 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원상태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1956년 11월 23일 정전이 이루어졌으며, 24일에 UN총회에서 영-프-이 3개 점령군의 즉각 철수가 결의된다. 1956년 12월 5-22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집트에서 철수하고 이스라엘은 다음해 3월에야 시나이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4. 전쟁 현황.
(1) 전쟁 발발.
1956년 10월 29일 오후 3시 30분, 16대의 C-47 다코다 수송기가 텔아비브 공항을 날아 올랐다. 유명한 애꾸눈 장군 모세 다얀 참모장의 야심 찬 작품 - 카레쉬작전의 서곡이며 다얀 자신에 의해 구상되고 훈련되어진 "자활의 꽃"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공수부대의 화려한 데뷔전이 있었던 것이다. 여성 조종사까지 끼어있는 이 수송기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시나이 반도의 요충 "미틀라" 언덕에 공수병들을 강하시킨다.
줄곧 요르단을 공격할 것처럼 허위정보를 흘리면서 예비군 동원령을 개전 이틀 전에야 내릴만큼 기밀유지에 신경을 썼던 이스라엘의 기습은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고 당장이라도 쳐들어 갈 것처럼 기세를 올리던 이집트는 뒤통수를 맞았다. 이런 작전을 성동격서라고 했던가. . . ! 이들은 성동격남의 작전을 썼다.
이렇게 전쟁의 시작은 정말 예상 밖의 결과로 시작이 되었다. 쿤딜라, 타마드, 나키브등 이집트의 주요 방어거점들이 제대로 된 저항 한번없이 허무하게 주저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욱 어이없는 것은 이 당시 이스라엘군의 작전계획이란 것이 철저하게 이집트 군을 요절낸다는 의도에 따라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불 연합군이 전투를 떠맡기로 약속이 되어있어 이스라엘은 전쟁을 벌여만 놓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일선 지휘관들과 병사들이 지나치게 잘 싸워 버린 것이다.
상부의 엄격한 제한조치에도 불구하고 202공수여단은 정찰의 대상인 미틀라 주봉을 점령해 버렸고 벤 아리 중령이 이끄는 제 7기갑 여단은 이스라엘 영내의 집결지에 있어야 할 시간에 이미 시나이 사막으로 25마일이나 달려가 상당수의 T34전차를 두들겨 깨 버린 이후였다.
공격부대의 허리가 너무 길게 노출되어 협공의 위험에 당황한 다얀 참모가 황급히 정지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시나이 반도를 종단하여 병사들은 수에즈 운하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이전차를 주축으로한 쾌속돌파 전술을 이시기에 완성되어 이후로도 성공적으로 반복된다.
한편 10월 31일로 예정되었던 영불 연합군의 공격이 연기되었다는 통보는 더욱 일을 꼬이게 만든다. 그들을 믿고 일을 저질러 놓은 이스라엘은 내친김에 더욱 강하게 밀어 붙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육상전투는 그렇다 치고 한가지 이상한 점은 이당시 이집트 공군은 이스라엘과 비교할 때 훨씬 우세한 장비와 기종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전과가 없다는 점이다.
개전 전 이스라엘측이 가장 경계하던 것도 이 이집트의 공군인데 정작 이들은 한 번도 제대로 싸운 적이 없다. 이 원인을 다얀 장군은 한마디로 말하는데 "비행기는 저절로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다. "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과 이집트 조종사들의 엄청난 수준차이를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개전 당일 이집트군의 전화선을 절단하라는 임무를 띠고 출격한 두 대의 P51 무스탕기는 기체에 매단 갈고리를 전화선에 걸려고 시도하다가 갈고리가 떨어져 나가 버렸다. 당황한 그들은 수 차례의 저공 곡예비행 끝에 날개로 전화선을 절단해내고야 만다. 프로펠러가 전선에 감기거나 지면에 충돌하는 위험을 무릎쓴 이들의 높은 책임감과 절묘한 조종술에 비해 이집트의 공군은 이스라엘의 기지를 폭격하라는 임무를 받고 날아간 IL-28 일류신 폭격기는 이스라엘군의 대공화기가 기다리는 기지근처에도 오지도 않고 텅빈 황무지 야산에 폭탄을 쏟아내고 돌아가 버렸다. (아마 그들은 지휘부에 성공적인 임무 완수를 보고 했을 것이다. )
(2) 라파 전투 전황.
2차 중동전을 통틀어 양측모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가자지구의 전략적 요충지인 라파이다. 이 무렵 전황은 이미 초 읽기에 들어가 있었다. 영불의 개입과 국제적인 여론에 떠밀려 휴전의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그 전에 이 곳을 점령해야 시나이 반도의 노른자위 가자지구를 차단하고 이집트 내륙을 향한 공격로가 열린다.
또 휴전 협정이 조인 되더라도 협상 테이블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이 곳을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다급해진 이스라엘 총 참모부는 1보병여단과 제 27기갑 여단을 급파하지만 이 전투가 마치 무인지대를 질주하는 것 같았던 다른 전투와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되었다.
이집트의 방어군은 이 곳에 6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연대, 셔먼 전차 1개 중대를 비롯하여 아쳐 대전차 자주포 15문을 배치해두고 튼튼히 구축된 영구진지와 무수한 지뢰밭, 폭넓은 철조망 지대로 보강된 철저한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이런 곳에는 이스라엘군의 주특기인 기습공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단단히 구축된 요새지에 대한 정면 공격은 자살행위라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워낙 좁은 지역에 양측의 병력이 밀집해 있었으므로 오폭의 위험성으로 인하여 공군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11월 1일, 새벽 3시 정각 이스라엘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 보병부대는 어둠을 틈타 소리없이 이집트군의 전초진지를 향해 기어 갔다. 이집트군의 기관총좌가 불을 뿜기 시작했지만 항상 훈련이 덜된 군대가 가장 취약한 것이 바로 야간 전투이다. 지뢰를 하나하나 캐 던지며 포복으로 철조망을 밀어 붙이는 보병들에게 이 총탄은 그리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마침내 진지 앞에 도달한 이스라엘군은 참호속으로 뛰어들어 폭약과 수류탄, 기관총을 난사하며 거점 하나하나를 분쇄해 나가기 시작한다. 야딘 장군이 인간 불도져라 표현했던 보병의 이런 근접 전투방식은 또한 아랍군이 가장 서툰 것 중 하나이다.
문제는 이한밤중의 육탄전에서 하나같이 비슷하게 위장된 진지 중에서 각 중대가 명확한 자신의 공격 목표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1보병여단 1대대 A중대장 요나단 대위는 악전고투 끝에 점령목표인 25진지에 돌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인접한 진지를 할당받은 나할 중대원들이 이집트군의 즐비한 시체사이에서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마침 운좋게도 26진지와 이어진 좁다란 교통호를 발견한 그들은 이것을 따라 숨돌림 틈도 없이 쇄도해 들어갔다. 대혼란 속에 빠져있기는 적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옆 진지가 함락된 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교통호를 통해 달려오는 병사들이 적군이라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앞 쪽의 캄캄한 어둠 속을 향해 무턱대고 총탄을 퍼붓고 있었다. 26진지는 간단히 함락되었다. 27, 29진지를 할당받은 대대도 마찬가지었다. 캄캄하나 어둠속에 끝도 없이 펼쳐진 철조망저편 어디에 29진지가 있단 말인가?
대대장은 지원포대에 29진지에 포사격을 집중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그의 이 묘안도 소용이 없었다. 포병대는 낮에 목표를 조준하여 좌표를 고정해두고 있었지만 눈 앞에 널려진 적의 진지 어디에도 이미 무수한 포탄이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그 중 어느 것이 자신이 요청한 포탄인지를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이제 날이 밝을 것이고 다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불꽃놀이처럼 날아오는 이집트군의 포탄, 총탄을 향해 무작정 몸을 던졌다. 공격부대의 주공을 맡은 전차들은 좀더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었다. 야간의 전차기동에서 널리 깔린 대 전차지뢰들로 두어대의 전차와 반 트랙 장갑차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밝게 타오르는 불꽃은 공격군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어 더 좋은 조준 목표가 된다. 정확한 대 전차포의 조준사격을 받은 전차들이 연이어 나뒹굴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 4시를 넘기고 있었고 곧 날이 밝아 공격군의 위치가 노출되면 그들은 전멸을 면치 못할 위기에 빠질 것이다. 선두의 지휘관들은 전차를 안전지대로 철수 시키고 참호를 파서 장기전에 대비하자고 건의하였으나,단호히 거부당했다. 평소 최일선 지휘관들의 폭 넓은 재량권을 보장해주기로 유명한 이스라엘 지휘부지만 이번 만큼은 완강했다. 전투 공병대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총탄속에 손곡괭이로만 지뢰밭에 뛰어들어 결국은 공격로를 열고 그 뒤를 이어 전차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일방적인 살육이 되었다. 보병들은 우지 기관총으로 휘둘러대고, 전차는 캐터필더로 인간의 몸을 짓 밟았다. 떠오르는 태양이 이 살육의 현장을 비추었을때 눈 앞에 전개된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전사자의 시체에서 흘러내린 피는 모래바닥을 적시고 불타 버린 전차들은 아직도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난공불락의 라파 방어선은 마침내 이스라엘군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급히 달려온 다얀 총참모장은 그 외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절반쯤 넋이 나가 버린 제 1보병여단장을 힘껏 끌어 안았다.
(3) 셀롬 알 세이크 전투 전황
활짝 열린 라파의 관문을 통과해 이스라엘 기갑병력은 카타라, 엘아이리시를 거쳐 아카바 만으로 진격을 서두른다. 이미 시나이 전역의 이집트군에는 철수 명령이 내려졌고, 이들의 질서 정연하고 조직적인 철수대열은 점점 커가는 불안과 공포로 인해 차츰 걸음이 빨라지다가 급기야는 서로 먼저 도망치려는 무질서한 궤주로 변해 버렸다. 이스라엘 추격부대는 지나는 길 곳곳에서 처참한 이집트군의 패주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의사가 황급히 도망쳐 버린 수술대위에는 수술을 받던 환자가 그대로 죽어 있었고, 도로위에는 먼저 도망치려는 이집트의 전차가 깔아뭉갠 민간인 자동차들의 잔해가 즐비해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최종 목표는 아카바 만을 봉쇄하는 포대가 설치된 해안 도시 셀름 알 세이크였다. 이곳의 이집트 수비대는 자체발전소와 오락실까지 갖춘 거대한 요새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이들이 더욱 믿고 있었던 것은 이곳에 이르는 험난한 지형이었다. 전차의 궤도를 계속 헛돌게 하는 모래언덕, 곳곳에 도사린 넓고 깊은 와디계곡(빗물에 깊이 패인 사막의 강으로 평소에는 물이 말라 버리고 없다. )산양도 다니기 힘든 험준한 바위산을 뚫고 공격부대가 이곳에 도착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11월 2일 아침6시,이 불가능한 임무를 부여받은 이스라엘 제 9보병단은 출동을 개시한다. 수 만년 전 태초부터 과연 인간의 발이 닿은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이 지옥과 같은 바위산에 폭약을 터뜨려 통로를 만들고,발목까지 빠지는 모래언덕에서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필요없는 장비를 최대한 뜯어내 뼈다귀만 남은 장갑차를 사람 손으로 밀어 올리는 악전고투가 이어진다. 요소요소에 배치된 이집트군의 매복조는 더욱더 위협적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개척한 통로는 이들의 다이나마이트 하나면 간단히 봉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방어군의 이러한 활동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악마의 땅'이라 불리우는 이곳의 지형을 인간은 도저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제 9보병여단은 꼬박 사흘간의 악전 고투 끝에 결국 샐름 알 세이크에 도착한 것이다. 병사들은 완전히 탈진 상태였지만, 사기는 여전히 높아 항공지원을 요청할 틈도 없이 곧장 이 거대한 요새에 달려들었다.
공격은 압도적인 이집트군의 화력에 의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몇 차례나 격퇴되었지만 때 맞춰서 날아온 이스라엘 공군기들의 정확한 폭격에 힘입어 요새는 조금씩 침묵해가기 시작했다. 또한 최초의 점령지인 미틀라에서 급히 날아온 202공수여단이 합세하여 이 거대한 괴물의 마지막숨통을 죄기 시작했다.
이 격전의 현장을 격려하고자 다얀 총참모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어이 없는 것은 그가 두어명 병사만 거느리고 지프를 몰아오는 동안 길가에 중화기까지 소지한 이집트군의 소지한 이집트군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들 중에 이 지프 차에 공격을 걸어오는 병사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최전선을 단선으로 달리는 이 자동차에 적의 총사령관이 타고 있다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테니 말이다.
8시간 동안 치열한 혈투 끝에 마침내 셀름 알 세이크 요새에 백기가 올랐고, 점잖게 손을 들고 나온 수비대장의 6개나 되는 사물 크렁크에는 여자의 실크잠옷까지 들어 있어서 이 전쟁의 형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피해는 전사 100여명, 부상32명,이에 반해 이집트의 피해는 전사 100여명 이상, 부상자를 포함한 900여명의 수비대원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4) 영,불의 개입과 휴전.
11월 5일 새벽, 예정보다 6일이나 늦게 영불 연합군의 2개 공수대대가 수에즈 운하 주변도시 포오트 사이드에 강하하여 운하를 따라 남쪽을 진격을 개시한다. 그들은 그들대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첫째는 예상치 못했던 국제 여론의 비난 - 덩치 큰 놈들이 조그만 이권하나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이스라엘을 꼬드겨 침략의 선봉에 세웠다 는 여론 때문이었다.
둘째는 이스라엘이 예상보다 너무 빠른 속도로 이집트 군을 부수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천천히 나서서 만신창이가 된 이집트군을 몇대 쥐어박아 주고 이스라엘을 점잖게 타일러 돌려 보낸다면 자기들은 피 한방울도 안흘리고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용맹무쌍한 영국의 붉은 악마공수부대와 프랑스의 프로 전쟁꾼 외인부대 공수대대가 투입되었지만 이미 이스라엘군이 한 바탕 쓸어 버린 뒤라서 그들의 행진은 변변한 전투 조차 없는 무력시위에 불과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격렬한 반발이 소련에서 터져나왔다. 소련은 영불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난하고 즉각 철수하지 않으면 소련군을 보내 이집트를 지원하겠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국제질서의 수호자를 자칭하는 미국도 어쩔 수 없이 영국편을 들수가 없었다.
이렇게 잔뜩 욕만 뒤집어 쓴 영불의 연합군은 11월 6일 이스라엘과 함께 유엔이 중재한 휴전에 동의하고 엉거주춤 철수를 한다. 이스라엘은 영불의 이러한 배신행위에 울분을 삼키며, 피흘려 점령한 도시들을 도로 비워주고 본국으로 철수하여야만 했다. 결국 이 전쟁은 아무 것도 남김 것 없이 고스란히 전쟁전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위협적인 이집트의 군사력을 모두 두들겨 부숨으로써 이스라엘은 당분간 안심할 수 있게 되었고 아카바 만의 봉쇄를 막는데 성공했다. 이집트 쪽은 금쪽같은 전차부대가 완전히 궤멸된 대신에 수에즈 운하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체면을 세웠다. 소련은 이집트에게 공급해 주었던 무기가 몽땅 헛일이 되어 버렸지만 중동에다 확실한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가장 손해를 본 것은 영국과 프랑스로 욕만 잔뜩 먹고, 수에즈 운하마저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식민지인 이집트를 독립시켜 준 후에도 그 이권은 계속 챙기겠다는 지나친 욕심 때문이었으니 그다지 손해랄 것도 없겠다.
5. 전쟁의 결과와 영향
제 2차 중동전쟁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영-프-이의 수에즈운하 점령과 시나이 반도 진주는 점령군의 일방적인 승리였으나, 이들 3국은 국제 정치적으로는 패배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나세르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결과가 되어 이집트의 국익을 확보하게 되었다.
나세르는 미국, 소련 양국의 입장 표명으로 인하여 정치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아랍민족주의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보수적인 아랍국가의 왕들에게 경종이 되었다. 즉 친영적인 이락 왕국의 파이살 2세는 아랍민족주의의 고조화로 인한 1958년 7월 14일 까심장군의 쿠데타로 쫓겨나고, 이라크 왕국은 붕괴되고 공화국이 된다.
나세르 대통령은 정치적 승리를 바탕으로 아랍민족주의의 고조화와 그 승화를 바탕으로 1958년 이집트-시리아와의 국가통합을 이룬다. 그러나 이는 3년 뒤인 1961년 붕괴하게 되는데 이는 아랍민족주의의 본질적 한계를 의미하게 된다.
또한 나세르는 통합 실패 후 제 1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추방되어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요르단, 레바논 등지에 흩어져 있던 약 9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민족단위로 취급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각성시키고 이스라엘을 타도하여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선동에 자극되어 한때는 약 30개의 팔레스타인 해방조직이 난무하기도 하였다.
나세르는 수에즈운하 국유화 이후 아랍 민족주의의 구심화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눈을 뜨게 되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후견인이 되고자 하였다. 나세르의 주선에 의해 1964년 1월 제1차 아랍정상회의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결성된 것과 이 조직이 상당한 기간 나세르에 충성하고 추종하는 기관으로 발전한 것은 이와 같은 나세르의 정책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 2차 중동전은 미국과 소련에 있어 대중동진출의 경쟁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철수함에 따라 새로운 힘의 공백상태가 초래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의 진출이 치열해진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아랍의 보수세력, 그리고 산유국과의 접근을 통해 중동지역에 진출하고자 했으며, 소련은 주로 공화국인 아랍의 혁신세력에 손을 뻗치게 된다. 미국의 현대무기가 서독을 통해 이스라엘에 공급되었으며, 소련의 대규모 군사, 경제적 원조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등에 제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