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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1.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운동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성스런 작업이다. 이 세상의 온갖 사건과 사고에 대하여 발언해야 하더라도, 여기에 응답하는 음성은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조금은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기 전에 잠시 음악을 들었다. 졸탄 슈피란델리 감독이 만든 <신과 함께 가라 Vaya Con Dios>라는 영화의 O.S.T인 ‘Brother in arms'란 곡이다. 본래 그레고리안 성가였다는 이 곡은 의식을 천상으로 이끌어 줄 것 같은 섬세한 장엄함이 깃들어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는 이 대지를 제단으로 삼고 자신의 영혼을 성반과 성작으로 삼아 하느님께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봉헌하였다는데, 글을 쓰는 자에게는 때때로 책상 앞에서 기운을 정리하는 것이 곧 제단을 정결히 하는 사제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피터 모린과 더불어 가톨릭일꾼운동을 개시하였던 도로시 데이 역시 본래 글을 쓰는 사람이었고, 글을 통하여 이 세상의 어둠과 빛을 두루 보고자 하였다. 세상의 불의를 고발할뿐더러 신비롭고 놀라운 사랑의 깊이를 돌이켜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녀는 여섯권의 책과 1천 5백편에 이르는 기사, 수필, 비평 등을 썼는데, 글과 행동을 구분짓지 않았다. “글과 행동, 둘 다 실천입니다. 둘 다 세상에 대한 윤리적 반응에서 나온 인간의 응답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헨리 나웬이나 스콧 니어링 같은 이들처럼 도로시 데이 역시 자신의 발랄한 삶 만큼이나 실천적으로 의미 있는 글을 써온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삶과 글을 통하여 갈망한 것은 정작 무엇이었을까?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았던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1) 편집자는 도로시 데이의 생애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려면 ‘성인(聖人)’이란 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인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2)에서 엘스버그는 우리는 보통 성인들이 결점이 없는 사람들이며 오래 전에 기적을 행했고 교회 안에서 생을 보냈으며, 고통받는 기회를 열심히 찾고 일찍 세상을 뜬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런 이미지를 가진 성인들을 계속 그리고 있는 한 그들의 지혜는 우리가 닿을 수 없고 당혹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의 삶은 단지 성인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바다라는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양상은 다를지라도 일상 속에서 늘 경험하는 일이다. 성인은 그들의 고행과 환시와 행적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선함에 대한 탁월한 역량을 지닌 분들이다.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실상 성인들은 균형과 유머, 연민과 관대함, 장애물과 역경 앞에서 가진 평화와 자유의 정신,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성인들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하느님을 상기시켜 주는 사람들, 그들의 사랑과 용기, 그리고 내적인 조화가 보통의 인간성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사람이 취해야 할 바를 알려주는 기준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하며, 아마도 그들의 내적인 빛남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할 것이다.”(3)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이란 정확하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에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면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 때에는 거룩한 역설에 따라 한 가지 필요한 것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지복(至福)을 누린 성인들이 발견한 그 한 가지는 항상 같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는 것,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대답하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학교이며 노동캠프이다. 그곳에는 마음이 넓고 사회 의식이 있는 젊은이들이 와서 성소를 찾는다. 수개월 혹은 수년을 지낸 후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삶을 원하는지 확실하게 깨닫는다. 어떤 이들은 의료, 간호, 법, 교사, 농사, 저술, 출판계로 간다. 그들은 연민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뿐만 아니라, 폭력을 재촉하는 위험한 감정,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운다.” 엘스버그는 도로시 데이의 생애 마지막 5년을 가톨릭일꾼공동체에서 함께 살았는데, 거기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뿐 아니라 찾던 것을 모두 찾았다고 고백한다. 그가 느낀 가톨릭의 매력은 교의나 교회와 거의 상관이 없었고 성인들의 지혜와 모범, 그리고 영적 고전서가 지닌 힘이라고 말한다. 그는 도로시 데이로부터 성인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단지 그리스도교의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라 친구와 동료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도로시 데이는 거룩함과 기쁨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기도에 깊이 잠기지만, 옆에 있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현존했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깨어 있지만, 그와 똑같이 아름다움의 징표에 민감하며, 그가 ‘기쁨의 의무’라고 부르던 것에 늘 깨어 있었다.(4)
부르심
도로시 데이는 1897년 미국 부르클린에서 한 스포츠 자유기고가의 딸로 태어났다. 집에선 하느님의 이름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나 어린 나이부터 그는 성인의 삶에 매료되었다. 그는 병자들, 절름거리는 사람들,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성인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내 마음 속에 있었다. ‘왜 악을 처음부터 피하지 않고, 그것을 치료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가?’ 사회질서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노예들을 보살피기만 하지 말고,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성인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고심한 끝에 그는 종교에 문을 닫고, 당대의 진보적인 정치에 희망을 두게 된다. 그의 친구들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로 그들과 함께 다양한 좌익간행물이나, 반제국주의 연맹 같은 조직에서 일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흥분된 참여에도 불구하고 도로시의 초년 삶은 외로움과 도덕적 영적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여전히 품고 있던 초월성에 대한 열망이 그를 가톨릭교회로 가게 하였다. 그가 회심한 것은 슬픔 때문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이라는 자연적 행복의 경험으로 찾아왔다. 그는 즐거움과 감사의 충동을 너무나 크게 느꼈기 때문에 하느님께로 향할 수밖에 없엇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그의 회심은 친구들과 ‘관습에 의한’ 남편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불가지론자이며 무정부주의자였던 남편은 가톨릭주의를 경멸했고, 그가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관계가 끝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도로시는 “하느님인가 사랑인가를 택해야 하는 질문에 봉착했다”고 썼다. 더군다나 가톨릭교회를 향한 그의 결정은 노동계층을 배신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런데 응답은 피터 모린이라는 강한 불어 억양으로 말하는 한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으로 왔다. 1932년 어느날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주머니는 팜플릿과 자료 따위로 불룩해 있었다. 때는 경제공황 시기였고, 도로시 데이는 워싱턴에서 열린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실업자행진을 취재하러 갔다가 워싱턴의 성모무염시태 성당에 가서 “내가 가진 모든 탈렌트를 동료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열리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피터 모린은 55세의 농부 출신으로서 지난 20년 동안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행동으로 옮길 고유한 비전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가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들 적임자라고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복음서의 철저한 사회적 메시지를 수행하는 운동을 구상했다. 단순히 불의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질서, 노동의 철학과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에 기초한 새 질서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피터 모린은 말했다. 그들은 정부와 교회가 그러한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기다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의 비전에 따라 지금-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할 것이며, “사람들이 더 선해지기 수월한” 사회를 창조하는 일을 할 것이다. 1933년 5월 1일 성요셉 축일에 ‘가톨릭일꾼’ 신문이 유니온 광장에서 배포된 이래, 이 신문은 미국 전역에 있는 ‘환대의 집’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운동의 도구가 되었다. 가톨릭일꾼공동체는 전통적인 애덕활동뿐 아니라 사회 정의와 평화운동에 결합되어 있다.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과 만난 뒤 50년 동안 몸담게 된 이 운동에서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였다. (5)
성소란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을 나누도록 그분으로부터 초대받는 것이다. 이는 토마스 머튼이 말하듯이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응답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특정한 생활방식이나 일과 같이 미리 맞춰진 옷을 입는 것과는 다르다. 많은 성인들의 투쟁은 당대에 가능한 선택을 넘어 거룩함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안토니오는 사막에서, 베네딕트는 수도원에서, 프란치스꼬와 글라라는 철저한 가난이라는 그들만의 길을 찾았다. 그들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따르도록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은 기존의 방법들을 먼저 거부하는 것에서 싹텄다. 무엇인가가 그들로 하여금 다른 길을 찾도록 만든 것이다. 성서에서 부르심은 항상 하느님께서 이름을 부르시고, “여기 제가 있습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단순히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이 말할 수 없이 중대한 순간임을 알아채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와 목표에 대한 삼지가 응답 속에 녹아들어 초월적인 도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부르심에 대하여 전적으로 응답할 의지가 있느냐, 하는 문제다.(6)
도로시 데이는 피터 모린의 첫 방문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으며, 그의 구상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성소를 알아차렸다. 그럼으로써, 사회질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성인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 답변은 도로시 데이 ‘자신의 삶’을 통해 그러한 성인을 실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소를 발견하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일생에 걸친 도전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는 ‘부르심 안의 부르심’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끝까지 충실하기 위한 지속적인 식별이 요청되는 것이다.
한편 일단 회심이 일어나면, 수많은 무질서로부터 즐거움이 가득찬 해결책이 그에게 주어진다. 삶이 평범한 짐으로 무거웠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타오르는 불길로 밝게 빛난다. 생기와 에너지를 갖게 되어 ‘천국으로 가는 나의 길’이 열린다.(7)
피터 모린의 푸른혁명(Green Revolution)
도로시 데이에게 영감을 주었던, 피터 모린은 1877년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23남매의 장남이었고, 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형제회;에서 교육을 받고 당시에 혼란에 빠져 있던 프랑스에서 가톨릭 인민주의를 주장했다. 1909년 아메리카로 건너와 캐나다에서 농장경영에 실패한 뒤에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뉴욕주로 왔다. 그후 20년 동안 미국 동부와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유랑생활을 하며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피터는 그러한 힘겨운 노동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믿고 그러한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성프란치스꼬처럼 ’거룩한 가난‘을 신부로 받아들여 빈민가 싸구려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어디서든 잠을 잤다. 그렇게 하여 번 돈으로 책을 사보거나 자기보다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가톨릭 급진주의자였던 피터 모린은 성경과 성인들의 삶, 그리고 교황회칙 등을 근거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한 종합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다. 피터 모린은 자본주의를 경멸하면서도 역사법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지배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신념, 이른바 산업주의와 진보에 대한 견해를 불신했다. 오히려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란 폐지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이 기계부속처럼 일하고 모두 공장 굴뚝만 바라보는 산업사회 역시 전부 해체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대신에 그 자리에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분산화된 경제체제가 들어서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견해는 중세시대의 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데, 경신(敬神: Cult), 경문(敬文: Culture), 경작(耕作: Cultivation)의 종합을 이상으로 삼았다.
피터 모린은 강제가 없는 협동하는 사회, 공예가와 장인들이 스스로 조그만 공장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꿈꾸었다. 농경공동체에서 학자와 노동자가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생각하는 ‘노동자-학자의 융합’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불평만 하고 고발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낡은 사회의 껍질 안쪽’에 만들 수 있는 행동을 하도록 부추겼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은 ‘객관적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계명이 우리 앞에 있으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 살을 붙이고 복음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뭇 사람들을 끌어당기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터 모린이 제안한 3단계 프로그램은 ① 사고의 정화를 위한 원탁 토론 ② 애덕 실천을 위한 환대의 집 운영 ③ 노동자가 학자도 될 수 있고 학자도 노동자가 될 수 있는 농경공동체의 건립이다.(8)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을 선전하는 급진적인 가톨릭 신문을 만들자고 하였다.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 ‘가톨릭일꾼’ 신문
피터가 처음에 제안한 신문의 이름은 <가톨릭 급진주의자>였다. 겉치레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고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뿌리까지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편집자의 태도를 나타내기보다 독자를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톨릭일꾼(Workers 노동자)>이라는 이름을 택했다.(9) 두 사람은 모두 신앙을 당시의 사회문제와 결부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유사한 성향의 공동협조자로 보기엔 힘들다. 피터와 도로시는 전혀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사람이었다. 피터의 뿌리는 땅에 있었고, 그의 사상은 개인적이고 지역적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피터는 중세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서 모델을 찾았다. 그러나 그보다 스무살이나 어렸던 도로시는 도시 출신으로 노동조합, 대단위 정치운동, 계급투쟁의 세례를 받은 세대였다. 그러한 두 사람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느님의 섭리가 오묘하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도로시의 부엌을 편집실 삼아 시작하였다. 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할 때, 피터 모린은 이렇게 말했다. “성인이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 주십니다. 인쇄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성인들의 일생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이 말은 신문뿐 아니라 가톨릭일꾼운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톨릭일꾼운동은 규정도 없고 재단도 이사회도 없다. 불안전함 가운데, 취약함 가운데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탁)을 가능케 한다. <가톨릭일꾼>은 누구나 사 볼 수 있도록 1페니에 팔고 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1페니에 팔린다. 이 신문은 1933년 5월 1일에 2천 5백부가 유니언 광장에서 공산주의 집회 때에 뿌려졌다. 그런데 2년도 안 되어 발행부수가 15만부로 껑충 뛰었다. 가톨릭신앙의 눈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신문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불어났다. 그 지역의 신학교와 교회에서도 수십 부를 주문했다. 열성 청년들이 길거리로 나가 신문을 팔았다. 독자들은 다른 종교, 정치 계통의 신문에서 볼 수 없는, 특별히 가깝고 가정적인 느낌의 <가톨릭일꾼> 신문만이 갖고 있는 목소리를 발견하였다. 원칙이 있고 뉴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구끼리 편지라도 교환하듯이 쓴 글이었다. 전국적인 규모의 신문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특정한 동네 그리고 지역의 냄새와 소리와 작은 사건들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는 1952년 4월 <가톨릭일꾼>신문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비참함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만드는 세계 고통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특별히 리지외 소화 데레사 성인의 ‘작은 길의 영성’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데레사의 가르침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작은 행동이 지닌 의미! 우리가 실행하지 못한 작은 것들의 의미! 우리가 하지 못한 항의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기준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작은 행동의 의미에 대하여 숙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생명을 선호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형제애를 위하여 일하고자 한다. 소수인들,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불의에 저항하여 외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고통에 대항하여 굶주리고 집 없는 이들, 일이 없는 이들, 죽어가는 이들을 대신하여 외칠 수 있다고 믿는 ‘고집 센’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면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대신하여 “말해야 하고 써야 한다.”고 천명한다.
자비의 실천, 환대의 집
피터 모린은 5세기의 교회 공의회가 주교들로 하여금 교구마다 ‘환대의 집’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기뻐했다. ‘환대의 집’은 가난한 이, 병든 이, 고아, 노인, 여행자, 순례자 그밖의 여러 종류의 곤궁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 집은 “내가 낯선 사람이었을 때 네가 받아들였다”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피터가 보기에 ‘환대의 집’은 따뜻한 안식처 노릇을 할 수 있으며, 독서실과 직업훈련을 제공할 수 있고 기도와 토론과 공부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교구에서 그런 집을 후원해야 하고 교구생활에 필수적인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친구만을 환영하고, 낯선 이를 돌보는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반대하였다. 사랑과 자비의 일은 모두가 해야 할 일이며 생활의 한 부분으로 여겨야 한다. 어느 집이나 하느님의 대사를 받아들일 ‘그리스도의 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낯선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10)
‘환대의 집’을 요청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집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와 신문에 실린 집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도로시는 즉시 아파트를 빌렸고 얼마 안 가 아파트가 더 필요하게 되자 찰스가에 건물을 갖게 되었다. 급식행렬도 마찬가지여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시작되었다. 환대의 집에는 항상 따뜻한 커피와 수프와 빵이 준비되어 있어 누구든지 들어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 소문이 퍼져, 1936년엔 수백 명의 사람이 도로시의 집 앞에 줄을 섰다. 가톨릭교회에서 세운 다른 많은 단체들과 달리 ‘가톨릭일꾼의 집’에선 아무도 설교를 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의아해 하였다. 다만 벽에 걸린 십자고상만이 유일한 직원들의 신앙의 표시였다. 자원 봉사자인 직원들은 숙식과 가끔 용돈 정도만 제공받고 월급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점차 다른 지역에도 이런 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10년만에 30채 이상으로 불어났는데, 각각의 집들은 뉴욕 본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신문을 통해 함께 준수해야할 원칙을 천명하면서, 환경과 필요에 따라서 나름의 조직과 방식을 채택하여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일꾼의 집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담배 피는 조, 이탈리아 사람 마이크, 미친 폴 등이다. 그 사람들은 일꾼의 집을 제 집으로 생각하여 잡일을 돕기도 하고 항상 똑같은 의자나 구석에 앉기도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다. 일꾼의 집은 무정부적 경향이 있어서 단속과 제한, 규칙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온갖 배경을 갖고 있는 개인들에 대한 너그러운 특징을 가진다. 이 공동체에선 구성원의 개인적, 이념적 대립을 세심하게 감싸안으며 그들에게 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한 식구로 맞아들였다. 언젠가 사회사업가 한 사람이 도로시 데이에게 밑바닥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이 집에 머물 수 있는지 물었다. “영원히요. 우리와 살고 우리와 죽고, 우리는 가톨릭식 장례를 지내줍니다. 죽은 후에 필요한 비용도 대줍니다. 일단 들어오면 가족의 일원이 되지요. 아니면 과거에 가족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되고요.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11)
학자-노동자 융합, 농경공동체
피터 모린이 제안했던 다른 중요한 프로그램은 시골에 농경공동체-농경대학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훨씬 도시적이었으나 농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피터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뉴욕 가톨릭일꾼운동은 1936년 펜실바니아주의 이스톤에 22에이커의 땅을 샀다. 이 농장에 사는 사람들은 학자들, 노동자, 집 없는 사람, 대학생, 엄마와 아이들이었는데, 작물을 키우고, 주말엔 원탁토론을 하였으며, 여러 가지 주제를 공부하기 위해 여름학교를 열기도 하였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역시 머무는 동안 농장일을 도울 것이었다. 이 때는 공황의 시기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와 도시화가 사회에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들에 해답을 찾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다. 피터 모린은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이었으며 땅에 되돌아가는 것을 그 해답으로 보았다.(12)
피터 모린의 생각에 의하면, 농경공동체는 공황시기에 머물 곳과 음식을 마련해 주어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에 응답할 수 있으며, 산업경제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생각한 순환적인 실업의 문제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보다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농경공동체는 농작법과 수공제조법을 도시거주자들에게 훈련시킬 것이며, 이러한 훈련과 양성은 또한 점차적으로 땅과 마을공동체 생활방식에로 되돌아갈 길을 마련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농작과 손노동으로 이윤보다는 실용적 필요에 따라 생산하도록 이끌고, 나아가 협동의 가치관과 영적 차원을 다시 발견하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피터 모린이 보기에, 농촌과 도시에서의 사람들의 태도가 다른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땅에서 사는 것은 협력과 필요한 정도만큼의 경제를 장려한다. 도시의 인위적인 세계보다 땅에서 살적에 인생철학은 기계적이기보다 유기적이 되며, 개인적이기보다 가족 중심적이 된다. 아이들이 환영받으며 노인네들은 존경을 받는다. 이렇게 농작과 수공업 문명속에서 책임감이 회복되고 노동의 전체성(통합성)이 살아나면 자기존중의 의식과 존엄성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배움’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 구성원들사이의 인격적 상호의존성 때문에, 그리고 각자가 공동체에 중요한 봉사를 하겠다는 책임감을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 초기에, 이 농경공동체들은 미국 전역에서 싹을 틔웠다. 공동체들은 다양한 크기였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가까운 도시의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과 연결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이스톤에 있는 농장에는 1938년에 5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오트밀, 옥수수, 감자, 복숭아와 사과나무, 그리고 각종 과일나무들을 키웠다. 그들은 마당에 빵 굽는 오븐을 걸어두려고 했고 신발을 수선하고 옷을 깁고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경당도 세울 계획이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 운영 과정에서 특별한 것은 이른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농부와 목수, 전기 기술자들, 하수도 기술자 등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도움이다. 이 전문가들은 공동체 구성원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사람들, 혹은 도시의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친구들이기도 하였다. 함께 일을 하면서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서로에게서 배우며,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생활방식을 자신들의 삶에서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1949년 피터가 세상을 떠날 무렵부터 도로시 데이는 이 농경공동체를 ‘땅에 있는 환대의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골에 마련했던 농장들이 정통성 시비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자,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가 교회를 가운데 두고 여러 가족들이 평화롭게 모이는 모범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장애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도로시는 배가 고파서 줄을 섰다가 가톨릭일꾼운동을 알게 되어 거처를 시골로 옮겨 오게 된 사람들을 위한 ‘환대의 집’으로 농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피터의 구상이 너무 높은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동시에 농장은 집단이나 개인이 피정의 장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가톨릭 평화주의
한편 도로시 데이는 여러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톨릭일꾼의 집을 방문하고, 대공황으로 일어난 노동자들의 대규모 시위를 기록하고, 집회에서 강연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일으킨 연좌농성에서 캘리포니아의 떠돌이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도로시는 노동문제가 발생하거나 부당한 조건에 항거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들을 도울 방도를 찾았다. 이러한 가톨릭일꾼운동의 활동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전통적인 본당 차원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제 세상만사가 가톨릭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인간체험의 중심에 있는 정의와 자유와 양심, 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혀야 했다.
그러나 가톨릭일꾼의 역사에서 가장 크게 불거진 문제는 ‘평화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가 제일 먼저 행한 기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행한 기적이었으며, 배고픈 군중들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마지막으로 행한 기적은, 예수를 체포하려는 사람들에게 맞서서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입힌 상처를 치유하신 것이다. 예수는 날카롭게 명령하셨다. “칼을 치워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그 말씀이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으로 알아듣는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나는 이 세상의 군인이 되지 않겠소. 나는 그리스도의 군인이기 때문이오.”라고 말하며 순교하였다. 그러나 교회가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제국과 합세하면서 달라졌고, 교황은 군대를 지휘하며 성전(聖戰)을 선포하곤 했다. 복음 앞에서 ‘거룩한’ 전쟁이란 없다. 그리고 전쟁은 애국심과 교묘하게 결합되어 신앙을 위한 것으로 선전되고 왜곡되었다.
1936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도로시 데이의 평화주의는 시험을 받았다. 거의 모든 미국 주교들과 가톨릭계 언론이 반공적이고 친가톨릭적이라고 하여 프랑코를 지지했다. 도로시 데이는 신문에서 사설을 통해 말했다. “우리 모두는 스페인에서 무서운 종교탄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래도) 우리는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방법에는 반대한다.” 교회의 순교자가 된 신부, 수녀가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쓰기를 거부했던 무기를 그 사람들의 이름으로 잡음으로써 그 사람들을 명예롭게 할 것인가? 묻는다. 그것은 순교를 허사로 돌리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 묻는다. “오늘날 전 세계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이다. 우리 모두는 그 와중에 살고 있다. 솔직하게 우리는 성인을 찾고 있다.” 도로시는 우리 하나하나도 스페인의 신부, 수녀처럼 무장을 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의 무장해제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악을 이겨낼 힘이 생긴다.(13)
도로시 데이의 철저한 평화주의 때문에, <가톨릭일꾼> 신문은 많은 독자를 잃었다. 몇몇 교구에선 주교들이 교구 안에 있는 모든 교회와 교구학교에서 신문구독을 금지시켰다. 결국 스페인 전쟁은 1939년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고, 9월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2년 후 참전하였다.
반전평화운동
가톨릭일꾼운동의 평화주의는 중립노선을 달리지 않았다. 유태인를 탄압하는 히틀러에 반대하여 뉴욕의 가톨릭일꾼들은 1935년 부둣가로 달려가 독일의 정기여객선인 브레멘호 앞에 모인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자 한 명이 돛대를 타고 올라가 나치의 깃발을 떼어내려다가 배 위에 있던 경찰의 총에 다리를 맞는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 대사관 앞에서 시위하고, 호소문을 통하여 “미국의 환대를 원하는 유태인들에게는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나라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정책에 반영되지 않앗고, 특별히 운이 좋은 사람만 입국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은 유태인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인종차별과 나치운동이 사악함을 알고 있었으나 도로시 데이는 전쟁을 수단으로 하여 악과 싸운다는 생각에는 수긍할 수 없었다. “전쟁은 계속되는 수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변호하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14)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고 나서도 가톨릭일꾼운동은 전쟁에 줄기차게 반대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젊은이들은 전쟁 교도소나 시골의 노동단지에서 일을 했다. 어떤 사람은 무장을 하지 않는 위생병으로 군복무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톨릭일꾼> 신문은 성프란치스꼬가 길을 들인 늑대 옆에 서 있는 그림과 함께 “승리 없는 평화”라는 말을 곁들여 계속 실었다. <가톨릭 양심적 반대자>란 신문도 발간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애국적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처럼 느껴졌고, 많은 주교들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도로시는 전쟁중이라고 해서 우리의 적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는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로시는 거듭 말했다. “우리의 생활의 법칙은 자비의 일을 하는 것이다.”(15)
마침내 종전이 되었으나 도로시는 기뻐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죽었지만 군국주의는 살아 있었고, 파시즘도 숨어서 존재할 것이다. 전쟁 때문에 원자탄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생겨났다. 그리고 섬광과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는 파괴되었다. 도로시는 이번 전쟁에서 연합군이 이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승자는 전쟁과 죽음이며, 이제 죽음은 인류를 말살시킬 수 있는 무기로 무장을 하게 되었다. 원폭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트르만 대통령이 기쁨에 가득찼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썼다. 대통령 이름은 ‘진정한 인간’(true man)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정한 하느님이며 진정한 인간이라고 부른다. 트르만은 이 시대의 진정한 인간이다. 파괴를 보고 기뻐하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기뻐하였다니 그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현제도 아니고, 일본 사람들의 형제도 아니다.” 그리고 이 핵무기를 시험하기 전에 과학자들이 인근 성당에 기도를 했다는 기사를 보고 말했다. “그러나 하느님을 조롱할 수는 없다.”
베트남전쟁 때에도 가톨릭일꾼운동은 더욱 완강히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1965년 미국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전쟁이 확대되면서 3년 안에 미군의 숫자가 51만명으로 늘어났다. 이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였다. 방어능력이 없는 외딴 마을들이 전투기와 헬리콥터로 파괴되었다. 예수회 신부인 다니엘 베리간은 신문에 베트남을 ‘불타는 아이들의 땅’이라고 썼다. 유니온 광장에선 가톨릭일꾼 봉사자들이 시민불복종 행위로 징집 등록증을 불태웠고, 이 자리에서 도로시 데이는 전쟁의 부도덕성을 알리고 항거의 몸짓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전쟁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들을 ‘모스크바 메리!’라고 야유하며 “징집 등록증을 태우지 말고 너희들이나 분신하라!”고 외쳤는데, 몇 주뒤에 이 자리에 참여했던 가톨릭일꾼 봉사자였던 로저 르포트가 미국공관 앞에서 정말 분신하였다. 로저는 자신의 몸을 벽 삼아 미국 전체에 들릴 수 있게 ‘아니오’라는 메시지를 외쳤던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도로시 데이는 말했다. “로저 르포트를 보라. 그는 스스로 가난을 얼싸 안았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신나서 말하는 잘 되어 가는 경제에서 이익을 얻지 않기 위해서 ‘가톨릭일꾼’에 가입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난한 이와 비참한 이들에게 내주었다. 음식을 날라다 주고 아픈 사람을 돌보면서...... 그런데 지금은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이라고 모든 사람은 말할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가 조그만 나라와 국민들에게 가하는 고통을 스스로 맛보려 했다” 그는 절망 때문이나 인생을 혐오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멀이에 있는 베트남의 마을에서 불타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동정하여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다.(16)
그러나 미국 주교들은 초기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예 뉴욕대교구의 스펠만 추기경은 베트남전쟁을 문명을 위한 투쟁으로 규정하고 바오로 6세 교황의 평화협상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전면승리를 요청했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애덕활동은 평화운동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이 도로시 데이의 생각이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놀라운 애덕활동을 평화주의로 더럽히지 말라’는 비난이 쏟아져 들어오자 이렇게 응수하였다. “우리가 굶주리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데 반해 전쟁은 기아를 가져다주었고, 우리가 괴로워 우는 이들에게 위로를 가져다는데 반해 전쟁은 비참과 폐허를 가져왔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에게 해준 것은 무엇이든 -친절이든 폭력이든 - 그분께 직접 해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17)
공산주의와 가톨릭일꾼운동
1949년 소련이 원자탄을 성공적으로 폭발시켜 미국 국민을 놀라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비미국적인 행위에 대한 위원회’의 회원인 리처드 닉슨 하원의원은, 소련의 성취가 미국 내의 ‘간첩’때문이라고 처음 말했고, 1950년 2월 상원의원 요셉 매카티가 국무성 직원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고 그 명단도 갖고 있다고 발언함으로서 이른바 매카티 선풍이 불었다. 이에 미국 연방수사국의 에드거 후버는 “미국의 비밀을 크레믈린에 넘겨준” 간첩을 잡기 위한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해 여름 뉴욕에 살던 공산주의자 줄리어스와 에텔 로젠버그가 체포되고 소련에 원자탄의 비밀을 넘겨주었다고 고소되었다. 3년 후 두 사람은 무죄를 주장하며 전기 의자에서 죽었다.
당시 미국 정치권은 ‘내부의 적’이 주요한 관심사였다. 공산당은 불법화되고, 평화나 무장해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인종차별에 항의하거나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람은 색깔논쟁에 휘말렸다. 교사와 공무원은 ‘충성의 맹세’라는 데 서명을 해야 했고, 공산당에 동조하거나 그런 전력이 있는 사람은 생계가 곤란했다. “괜찮은 빨갱이는 죽은 빨갱이뿐이다”라는 표어가 전국을 휩쓸었다. 도로시 데이 역시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다. 체포된 공산주의자들을 보석으로 석방해야 한다고 도로시가 주장하자, 칼럼을 통해 도로시는 자신이 공산주의에 입은 빚을 강조하였다.(18)
도로시 데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빌려간 것이라며 양자의 공통점을 지적했다. 또한 그들처럼 국가는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폭력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의 말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른 정치적 방법이 실패하였다고 폭력과 전쟁을 지지하는 공화당원이나 민주당원, 또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생각에 반대하며, “착취당하는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열정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고백하였다.
교회권력과 순종의 문제
노동조합과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사람은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전후 분위기 속에서, 1949년 뉴욕대교구에 반대하여 무덤 파는 인부들이 파업을 하자 스펠만 추기경은 인부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받았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추기경은 인부들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신학생들을 시켜 파업이 사그라질 때까지 무덤을 파게 했다. 도로시는 항상 주교들에 대한 존경을 강조했으나, 이번에는 추기경이 파업을 무산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를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표명했다. 도로시는 메디슨가의 세인트 패트릭성당 뒤에 있는 추기경의 호화로운 사무실 앞에서 몇 명 안 되는 인부들의 시위대에 참가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전쟁이라는 끔찍한 전쟁의 희생자들’이라는 칼럼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결국 파업은 한 달만에 실패하고, 도로시는 공공연히 추기경을 비난한 사실과 주교관 앞에서 역사상 처음일 가톨릭평신도들의 시위에 참여한 일. 또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기를 거부한 사실 때문에 1951년 추기경의 호출을 받았다. <가톨릭일꾼> 신문의 발간을 중지하든지 제호를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자신은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공식적인 보호에 의존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순명 차원에서 폐간 대신에 이름을 바꾸려고 생각했지만, 편집에 관련된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신을 보냈다. 또한 독립적인 평신도 단체인 ‘가톨릭참전용사’라는 단체가 이름을 바꾸라는 압력을 받은 적이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가톨릭일꾼> 역시 교구의 공식적 견해가 아닌 의견을 자유롭게 밝힐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결국 <가톨릭일꾼> 신문은 추기경의 부당한 명령을 어느 것도 수용하지 않은 셈이다. 한편 로젠버그 부부의 처형을 반대해 달라고 추기경에게 청원했던 도로시는, 결국 이들의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인간을 말살하는 폭탄을 만드는데 사용될 쇠조각에 성수를 뿌리고, 폭격기에 ‘죄없는 성인’이나 ‘자비의 성모’ 등으로 이름을 붙이고, 1만 5천명을 죽이는 단추를 누르는 사람을 축복한다.”(19)
도로시는 자선의 형태뿐 아니라 가난과 전쟁의 황폐함을 가져오는 제도 권력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최선의 정치적 형태로 자기 신앙이 요구하는 의무에 응답했다.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든 감옥에 가든 그는 매일미사와 로사리오 기도, 최소한 하루 2시간의 성서 묵상을 거르지 않은 부단한 기도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그는 자신을 “충성스럽고 순종적인 교회의 딸”이라고 부르며, 지금이라도 추기경이 활동금지의 명령을 내리면 즉시 따르겠노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교의와 교회구조를 마음을 다하여 성심껏 받아들였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지 않았고, 다만 그 가르침을 교회가 살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했을 뿐이다. 그는 자주 순명을 강조했는데, 만일 추기경이 전쟁에 대한 가톨릭일꾼의 입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도로시는 이렇게 순명한다. “아니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추기경이 그렇게 명령한다면, 우리는 성서의 말씀, 성인들의 말씀, 교종들의 회칙에 나온 말들만 인용할 것입니다. 전혀 우리가 한 말이 아니죠.”(20)
그러면서도 도로시는 누구도 교회의 권위를 경멸하지 않기를 바랐다. 많은 이들이 도로시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 신비라고 여겼다. 확실히 도로시 데이는 더 작은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실상 도로시는 가난한 이들과 전쟁에 관한 교회의 입장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서전 <긴 외로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이신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교회는 나에게 스캔들이었습니다. ... 그러나 교회가 십자가이기 때문에, 그 위에서 그리스도가 못 박혔던 십자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떼어놓아서는 안됩니다.”
도로시 데이는 성아우구스띠노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뜻대로 행하라”는 말을 자신의 표어로 삼았다. “이 말씀에는 자유가 숨쉬고 있었고, 자유는 세속적인 불의에 순종하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찾아진, 일찍이 우리와 같은 이상을 품고 시작된 일들을 언제나 도중하차시켰던 세속적 불의의 와중에서도 변함없이 추구한 인류의 이상이었다. 성서와 성인들의 작품을 탐구하면서부터 나는 더 이상 다른 위대한 지성들의 뒷받침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21)
어느날 가톨릭일꾼운동과 친밀한 관게에 있던 캔자스의 오하라 주교가 방문하였다. 그는 피터 모린에게 “피터씨, 우리(주교)를 이끌어주면 우린 당신이 하는 대로 따라갈 테요.” 했다. 피터는 주교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평신도로서 선봉에 서달라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평신도가 되어달라는 것이었다. 도로시는 말한다. “우리는 가능한 방법을 다해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일치를 도모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등, 선의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려 했음은 물론 모든 이들을 신뢰하는 가운데 그러한 선의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단점과 남의 단점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려 노력했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제와 고위 성직자들이 할 수 없었던, 도 하지도 않으려 했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분야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실수를 저지르긴 했어도 큰 탈은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걸음들을 계속 돌이켜봄으로써 피터를 비롯한 노련한 급진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던, 낡은 옛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거듭 반복할 수 있었다.”
2. 가톨릭일꾼운동의 한국적 적용
<참사람되어> 운동
가톨릭일꾼운동은 1933년 미국에서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시작하여 벌써 70년이 넘는 이력을 지니고 있는 ‘가톨릭 급진주의자’들에 의한 대중적 영성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가톨릭일꾼>이란 신문을 발행하며, 도시와 시골에 환대의 집을 건립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전쟁과 인종차별, 여성문제와 노동문제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관하여 원탁토론을 통하여 식별하고, 복음적 실천을 감행하고 있다. 한편 가톨릭일꾼운동은 평신도들이 시작하고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세상에 봉사하는 운동이지만, 제도교회와 영향력을 다투지 않으며, 수많은 사제 및 수도자들이 이 운동에 정신적 영적 후원자로 지원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바다 안에서 교회가 간직해 온 ‘복음’이라는 영적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공동선에 입각한 ‘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사람들을 모우는 섬이다.
1980년에 죽기까지 50년가량 가톨릭일꾼운동을 창립하고 이끌어 왔던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운동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대략 1980년대부터였다. 당시 인성회(현 한국가톨릭사회복지전국협의회)에서 발간하던 <하나되어>라는 비공식간행물을 통해서였는데, 인성회가 없어진 뒤에는 <하나되어>의 편집을 맡고 있던 한현 선생이 1990년대에 <참사람되어>로 제호를 바꾸어 개인적 차원에서 계속 발간해오고 있다. <하나되어>는 ‘천주교민족자주생활공체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발간하였다는 표명에서 알수 있듯이, 당시 활성화되어 있는 천주교 기층운동(도시빈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생활공동체운동 등)을 신학적, 사목적, 영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성격이 강했으나, <참사람되어>는 좀더 영성적 측면으로 초점을 이동하였다. 특별히 <참사람되어>는 잡지에서 단행본 형식으로 바뀌면서 가톨릭일꾼운동과 상관있는 필자들의 저서들을 완역, 편역의 형태로 소개해 왔다. 헨리나웬, 장 바니에, 토마스 머튼, 프란치스 카바나, 비르거 셀린, 제임스 맥기니스, 머레이 보도, 로버트 에이 죠나스, 케리 월터스, 로버트 엘스버그, 도로시 데이를 비롯해서 주로 영성-신비가들의 저서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가톨릭일꾼> 신문에 게재되었던 가톨릭일꾼운동의 활동과 경험을 소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저서들은 교계 출판물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일부 영성가의 서적을 빼고는 대부분 비공식간행물이라는 성격상 교회 안에서 광범위하게 대중적으로 읽히지는 못하였다. 그만큼 한국교회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저서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들어서 도로시 데이에 대한 관심이 교계 안에서 늘어나고 있는 것은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보인다. 도로시 데이는 1991년에 분도출판사에서 <잣대는 사랑>이라는 평전을 발간하면서 일반 신자들에게 선을 보였고, 그후 1995년에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가 발간되었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하였다. 다만 최근에 <도로시와 함께 하는 기도>라는 책이 번역되고, 교계 잡지에서 현대의 신비가로 다루기 시작하는 것은 고무적 현상이라고 본다.
이처럼 그동안 도로시 데이의 영성과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한 소개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한국에서 가톨릭일꾼운동이나 그와 유사한 형태의 운동이 실천된 적은 아직 없다. 주로 <참사람되어>를 통하여 일꾼운동을 알게 된 이들은 자기 삶의 현장에서 그러한 영성으로 살려고 개별적인 노력을 하거나 한시적인 소모임 형태를 유지하다가 해소되는 경우는 적지 않게 발견되지만, 전국적 단위에서 이들이 한꺼번에 모인 적도 없거니와, 어느 누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움직이는 지 파악하는 조차 쉽지 않다. 한때 한현 선생이 잡지 형식의 <참사람되어>를 그만 두면서, 구독자들을 중심으로 지역별 모임을 갖게 하고, 그 모임에서 소식지 형태의 간행물을 내도록 독려한 적이 있으나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현재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들이 이런 영적 자산에 감화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이들이 느슨한 공동체의 형태로라도 만나고, 더불어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기대한다.
한국 가톨릭운동에 대한 반성과 과제
1970-1980년대의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천주교사회운동은 시대의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과제 중심의 당파적 이익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민주화를 위한 대열에서 참여자의 신앙적 진정성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결과 운동초기에는 “외피론이냐 세력화론이냐”라는 해묵은 논쟁과정을 겪어야 했고, 가톨릭운동을 참여하는 이가 명시적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실상 가톨릭신자라 해도 모두가 운명을 더불어 나누어 가질만한 교형자매가 아니었듯이, 신자가 아니라 해도 얼마든지 실천적으로 복음적 신실함을 증거할 수 있었다. 민주화와 인권신장이라는 대의에 동의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민중의 당파적 이익을 대변하기 위하여 교회 밖에서 교회 안에서 결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 중심의 당파적 이익집단은 당면한 과제가 해소되는 순간, 동시에 조직의 위기를 맞이한다. 왜냐하면 집단 구성원을 결속시킬만한 공동의 과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집단은 일시성 또는 한시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를 두고 편의상 ‘단체’란 개념을 사용할 수 있겠다. 이러한 단체는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강령과 규약에 의존한다. 조직의 힘을 믿는 것이다. 조직의 힘은 숫자에 의존하고, 숫자는 곧 권력이다. 천주교사회운동은 다른 부문 사회단체보다 대체로 생명력이 긴 편이나, 마찬가지로 과제 중심이어서 과제의 재편을 통하여 생명을 연장하는데, 이에 실패하면 그 단체는 와해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계속 새로운 과제를 내놓고 있기 때문에 이에 조응하여 새로운 단체가 생기거나 기존 단체가 성격변화나 과제재편을 통하여 새로운 과제를 중심으로 모이게 된다. 이는 사회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기는 하나 충분하지는 않다.
현재 천주사회운동의 연합적 조직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 겪고 있는 조직적 위기는 각 소속단체들이 더불어 숙의하고 협력해야 할 공동의 과제를 찾기 힘들고, 이 단체들이 참으로 공동의 지향과 영성을 소유하고 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정의구현’이라는 총체적 수립과제가 너무 협소하고 무거워서 가톨릭교회의 관심과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실상 천주교사회운동은 소수의 의식있는 활동가들과 소수의 협력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폐쇄적 집단’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 운동에 선의를 가진 신자대중들이 선뜻 참여할 수 여지가 별로 없으며, 결과적으로 활동가들의 양성에도 어려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연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면서 복음적 견지에서 광범한 신자대중과 만날 수 있는 운동의 형식과 내용은 없을까? 도로시 데이의 영성과 가톨릭일꾼운동은 이점에서 몇가지 우리가 배울만한 요소를 담고 있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시사점
도로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유토피아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 경제가 성공한다 해도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무정부주의적 방식의 정책이 설사 성공한다 해도 가난한 이들은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 역사와 함께 추락의 역사는 늘상 일어날 것이다.”(22)
여기서 가난함이란 취약함이다. 물질적 영적으로 누군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불안전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취약함 안에 머무는 이들은, 그 벗지 못할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하게 열려 있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취약함 안에서 하느님의 무상적 은총과 절대적 사랑을 상기하고, 그 안에 머문다. 그 하느님은 육화를 통하여 취약한 인간조건 안으로 오신 분이고, 우리는 취약함 안에서 그분과 일치한다. 그분과 일치한다는 것은 그분처럼 사는 것이다. 그분처럼 산다는 것은 아래로 내려가는 삶이고,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처럼 사랑 때문에 사랑 안에서 죽는 것이다.(23) 그 사람이 곧 성인(聖人)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역사 속에 등장한 성인들과 일치하여 살고자 열망한다. 예전엔 사막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수도원에서 수행을 하였지만, 실상 수도원은 어디에나 있다. 오죽하면 도로시 데이가 젊은이들에게 감옥에 갈만한 일을 하라고 당부하였겠는가? 그만한 피정 장소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는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인의 ‘작은 길’을 따라 가도록 권한다. 우리 일상의 자잘한 사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경험하고, 모든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몸소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취약함과 소심함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은 우리들로 하여금 성인으로 가는 길을 준비시키고 경험하고 배우게 한다. 원탁토론을 통하여 경청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의 지성을 단련하며, 하느님의 뜻을 공동으로 식별할 수 있다. 환대의 집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몸으로 실행하고 낯선 이들을 가족으로 맞이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서 나의 취약함을 발견하고, 내 취약함 안에 더불어 계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한다. 농경공동체를 통하여 건강하고 창조적인 노동의 가치를 깨닫고 자연친화적이고 우주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하느님과 모든 생명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 이처럼 공부하고, 베풀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정립된 이야기를 표현하고, 세상에 나아가 그러한 영성에 바탕을 둔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불의와 부당함에 대하여 저항하고, 낡은 껍질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의 과제는 좀더 궁극적인 것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개인에게 주목하는 것이다. 그 개인의 영적 성장에 최종적 관심이 있으며, 결과에 사로잡히지 않고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적 여정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누구든지 원탁에서 이야기에 참여할 수 있으며, 환대의 집에서 누구나 언제든지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제 가진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으며, 이들의 생각이 담긴 신문을 친구나 이웃에게라도 전달해 줄 수 있고, 농장에서 원하는 만큼 일을 하며 쉴 수 있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세세한 규칙이나 정해진 계획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갈망과 영성을 서로 나누고 격려하고 공유할 뿐이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일상과 교회와 사회와 우주에 걸쳐 얼마든지 주제를 확장해 간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 안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샬롬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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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도로시 데이, 바오로 딸, 1995
(2)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로버트 엘스버그, 참사람되어, 2005
(3) 엘스버그, 같은 책 5쪽
(4) 엘스버그, 같은 책 8쪽
(5) 엘스버그, 같은 책, 48-51쪽 참조
(6) 엘스버그, 같은 책, 45-48쪽 참조
(7) 마더 데레사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보고 어느 언론인이 물었다. “나라면 백만 달러를 준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더 데데사가 말했다. “저도 그래요.” 같은 일이더라도 부르심에 대한 깨달음 뒤에는 전혀 다른 현실이 된다.(엘스버그, 같은 책, 52쪽 참조)
(8)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28쪽 참조
(9) <잣대는 사랑>, 짐 포리스트, 분도출판사, 93쪽 참조
(10) <잣대는 사랑>, 101-102쪽 참조
(11) <잣대는 사랑>, 105쪽
(12) 농장을 운영하면서 도로시 데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보다 먹으려는 사람이 많았고, 들일을 하려는 사람보다 신학이나 정치토론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계란 하나를 두고도 몸싸움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후 피터 모린은 여름내 계란과 우유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를 두고 논쟁이 붙었다. 도로시는 “정의가 먼저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 것을 챙기는 데 열심이었고, 극기를 실천하는 데는 꼴찌였다”고 술회한다.(<잣대는 사랑> 107쪽 참조)
(13) <잣대는 사랑> 114쪽
(14)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전쟁을 선포했을 때, <가톨릭일꾼> 신문은 헤드라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평화주의를 고수한다’는 사설을 실었다. “우리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라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찍어낼 것이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시오.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 주고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며......’ 우리는 아직도 평화주의자다. 우리의 선언서는 산상설교인데, 그 뜻은 우리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양심적인 반대자를 대신하여 말하거니와, 우리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고 화약을 만드는 데 참가하지도 않을 것이며, 전쟁 수행을 위한 정부의 공채도 사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권유하지도 않을 것이다.”(<잣대는 사랑> 117쪽 참조)
(15) <잣대는 사랑>, 119-120쪽 참조, 이 시기에 15개의 환대의 집이 문을 닫았다.
(16) 이 사건을 두고 도로시 데이는 말했다. “로저 르포트를 보라. 그는 스스로 가난을 얼싸 안았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신나서 말하는 잘 되어 가는 경제에서 이익을 얻지 않기 위해서 ‘가톨릭일꾼’에 가입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난한 이와 비참한 이들에게 내주었다. 음식을 날라다 주고 아픈 사람을 돌보면서...... 그런데 지금은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이라고 모든 사람은 말할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가 조그만 나라와 국민들에게 가하는 고통을 스스로 맛보려 했다” 그는 절망 때문이나 인생을 혐오하여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멀이에 있는 베트남의 마을에서 불타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동정하여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다.(<잣대는 사랑>, 179-180쪽 참조)
(17)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37쪽 참조
(18) “나는 같이 일하던 공산주의자들을 사랑했고 그 사람들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사람들은 내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그분의 가난한 자, 그분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나와 함께 일하던 과격주의자들은 가난한 사람이 많지 않은 사회질서를 위해 앞장서서 싸운 사람들이다.”(<잣대는 사랑>, 147쪽)
(19) <잣대는 사랑> 148-152쪽 참조
(20)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참사람되어, 2004, 84쪽
(21) <오늘, 유성처럼 살아도>, 255-256쪽 참조. “신앙이란 우리가 순종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를 찧고 있을 그때에 요구되는 것이다. 곧 우리를 창조하신 한분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말한다. 우리가 순종의 자유와 불순종의 자유를 부여받았다면 우리가 순종을 드려야 할 대상은 오로지 한분 하느님뿐이라는 바로 그 신앙이다.”
(22) 1952년 4월, <가톨릭일꾼> 컬럼.(<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5쪽)
(23) <야곱, 상처를 대면하다- 불안한 시대에 하느님을 찾아서>, 케리 월터스, 참사람되어, 200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