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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단법인 대한요가협회장 김광백입니다.
본 협회의 본부교육원 인터넷 홈페이지 <요가라이프>를 통해 요가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좀 더 깊은 인사를 드리고자 이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저의 요가 40년사를 몇 가지 요약해 보겠습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는 제가 요가와 접하며 살아온 세월이 2003년을 기준으로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수 백만명과 크고 작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는데, 몇 가지 사실들을 글과 사진으로 담아 당신과의 대화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1959년 여수에서 상경하여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고려대학교 상대를 수석으로 입학했으나, 한 개의 방에서 9명이 생활했던 고교 시절 때문에 좌측으로 앉는 자세의 편중이 심화되어 심장장애, 불면증, 소화장애 등등 불건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현대의학으로는 해결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던 중 같은 이유로 성대를 휴학하고 요양 중이던 황영석씨와 하숙을 하면서 요가에 입문 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부산시 지부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부산 요가 협회장인 장종수 선생님의 숙부께서 신명원을 운영했는데, 그곳에서 건강관리를 하고 있던 황영석(현재 부천의성교회목사)씨가 인도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인도의 한 기관으로부터 요가 통신 교육을 받고 있을 때, 그 교제들을 제가 번역하면서 요가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건강 때문에 휴학 중이던 저는 1968년 황영석씨와 함께 인도의 요가 선생 모티발라(Motivala : 지금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요가 스승)여사를 초청하여 종로3가 단성사극장 뒤에서 요가 수련실을 시작했으며 1970년 6월 23일 저는 사무국장직으로 사단법인 한국요가협회의 창설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사진설명>1970 사단법인 한국요가협회 창립요원들. 서있는 사람 중 상단 우측에 보이는 사람이 저이고 그 옆이 초대 회장 황영석씨이며, 하단 우측이 서울 문리대 체육 주임 교수였던 문영현이사, 서울 사대 체육 주임 교수였던 이병위이사, 서울시 교육감을 역임했던 최복현총제, 국회의원을 지낸 이항림이사.
1970년 가을에는 한국일보사 장기영(당시IOC한국위원)씨의 배려로 한국일보사 6층(100여평)에서 요가 보급이 더욱 활성화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인에게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동국대학교 인도철학 교수였던 정태혁씨가 1964년 일본의 사오다 박사와 함께 요가를 연구하여 책을 펴낸 것도 요가 보급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태혁 교수님은 제가 협회장에 재직하던 기간 중에 8년간 이사를 지내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정교수님은 그 후 한국요가학회장을 다년간 맡으셨습니다. 한국요가학회의 이태영 요가 박사는 1980년대 초에 저에게 입문하여 요가지도자 교육을 받았으며, 총무로 일하면서 정태혁 당시 이사에게 요가를 사사 받기 위해 동국대학교 인도철학 대학원을 거쳐 최초로 요가 박사가 된 분이며, 한국요가의 이론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1969년 가을 미8군 '모이여써비스 클럽'과 유엔 빌리지 미군 가족들에게 제가 요가를 지도 할 때 통역관으로 일했던 김현수 선생께서는 사회단체 한국요가회를 한국일보 전 사장이었던 장강재씨가 창설한 후 승계 받아 요가 보급에 기여해 오고 있으며, 저 김광백은 1978년 사단법인 한국요가협회장을 맡아서 2002년 1월까지 약 25년간 회장직을 수행한 후 습관적 또는 직업적 자세의 쏠림을 찾고 균형을 회복하는 생활체육의 개척을 설립목적으로 하여 2004년 1월 사단법인 대한요가협회를 창설하여 다시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1980년 봄에 일본에서 제6차 국제 요가 지도자 총회(I.Y.T.A)가 개최되었을 때 15일간 일본 요가의 대가 오끼 마사히로, 인도의 요가대가 사치다난다와 아이엥가 등과 함께 요가 연수를 하면서 습관과 직업적 활동 때문에 생기는 자세의 편중이 성인들의 불건강이고, 청소년들의 발육에 불균형이 형성되는 원인이므로 그 자세의 불균형을 수정하는 요가균형운동을 개발하는 것이 현대인을 위한 요가 발전 방향 이라는 연구 발표를 한바가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한일요가회담을 동경, 미시마, 오사까에서 연속회의로 개최 한바가 있었는데, 오끼선생이 한국요가를 오끼道로 해 준다면 막대한 자금을 기부할 수 있다고 제안했으나, 그것을 저는 정중히 사양하였습니다. 재정이 빈곤한 저희들 형편으로는 파격적 제안이었으나, 민족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한국의 요가는 세계적인 여러 요가 대가들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현대에 맞도록 창조적 발전을 도모하여 인류에게 보급하는 것이 저희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1년 1월에 20여명의 한국요가지도자들이 인도 델리에 있는 국제 요가 협회장 쿠말팔 선생의 초청으로 인도연수를 2주 동안 갔다 왔습니다. 그 후에도 4회를 더 연수 했습니다. 인도의 리시케시에 있는 시바난다 아쉬람과 리케탄 아쉬람, 노나바라에 있는 카이발리아다마 요가대학, 푸나의 아이엥가 학원과 라즈니쉬 아쉬람, 봄베이의 요겐드라 아쉬람 등을 연수 했습니다.
저는 1982년 사회단체 한국요가회와 사단법인 한국요가협회를 통합하고, 통합회장을 맡았으며 김현수 선생이 부회장을 맡았습니다. 저는 1983년부터 2년간은 매일 오전10시경 5분씩 KBS-TV에서 5분 체조를 600회 지도 했으며 지금까지 MBC-TV이은하 요가 코너 등 총 700여회 TV출연 요가지도를 했습니다. 1984년에는 인도 마드라스의 요가 선생으로 국제 연합 총회에서 요가를 강의한 바 있는 베타티리 마하리쉬(당시74세)를 한국에 초빙하여 한국일보사 강당에서 무료 공개 강연을 실시하고 2주 동안 국내지도자들을 교육한 바 있었습니다.
1990년에는 인도 뉴델리에 있는 오르빈도 요가아쉬람의 쿨카리니 선생을 한국에 초빙하여 요가 연수를 했고 한주훈선생, 송방호선생, 안지용선생, 유혜민선생, 배정희선생, 김제창선생 외 70여명의 요가지도자들이 인도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1987년에는 일본청년으로 조선통치에 반대하다가 미국에 추방된 후 요가대가(요가의 혁명저자)가 되었던 이지마간지스를 초청하여 요가강습을 실시하고 감사의 뜻을 전한 바 있습니다.
2000년 6월에는 봄베이 옆의 노나발라시에 있는 카이발리아다마 요가대학의 재단 이사장을 아오마 요가 명상센타 원장 김제창씨가 초청하였으므로, 본 협회에서 150여명의 지도자들이 연수를 하였습니다. 그때 스와미의 제안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지도자 교육을 시킨 사람에게 자기들의 선생을 한국에 보내어 보충교육 시킬 경우 자격을 공동으로 줄 수 있다고 했으며,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약속한 바 있었습니다. 저는 인도의 요가를 현대 마인드에 맞게 정리하여 세계적 보급이 쉽도록 할 것을 제안하면서, 인도와 몇개국이 공동으로 요가 경전을 만들자고 했습니다. 스와미께서는 귀국해서 교수들과 협의하겠다고 했으나 2년이 되어도 소식이 없어 2002년 가을 저는 독자적으로 <온살이 요가경>을 저술했습니다.
1968~지금까지 현대, 삼성, LG, 대우, 기타 기업체와 중앙공무원교육원, 소방, 세무, 환경, 경찰 교육 등등 공무원의 연수원에 초빙되어 요가강습을 1300회 정도 했으며, 1990년경에는 국가 공무원 사무관 200명을 총무처가 주최하여 종합청사에서 요가지도자 교육을 제가 실시했습니다.
1996년경에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사회단체 설립이 자유화가 되었고 요가 단체가 여러개 생기게 되었습니다. 부산요가협회, 한국요가회, 국제총합요가협회 등등입니다. 그러나 2001년부터 사회단체법이 없어지고, 행정 간소화가 되면서 민간이 자유롭게 단체를 만들 수 있도록 국가가 규제를 완화했습니다. 따라서 운동종류별로 한개씩의 사단법인체를 두어왔던 국가 방침은 변경되고, 한 종목에 복수 사단법인 허가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권도 협회는 현재 8개의 복수 사단법인이 허가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종목에 하나의 법인이 전국 조직을 총괄하여 통솔하는 시대가 20세기 말에 막을 내린 것입니다. 더구나 자유로운 민간단체까지 인정되고 보니, 이제는 어떤 종류의 단체이든지 그 종목의 연구와 사회적 보급의 진실한 성과에 따라 그 순위가 결정되는 무한 경쟁 시대가 되었습니다. 누가 더 많이 연구하여 좋은 기술을 개발하고 저렴하게 사회에 봉사와 기여를 하느냐에 운명이 좌우 된다고 사료되어 가능한 많은 것을 무료로 보급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아들 김한이와 함께 2001년 봄에 만들어 요가 연구와 보급에 힘쓰고 있습니다.
한편, 저는 사단법인 한국요가협회의 1998년 총회와 이사회의에서 차기에는 후배에게 회장직을 물려주겠다고 약속한데로 2002년 2월 3일부로 25년간의 협회장직과 임원직을 후배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현재 사단법인 한국요가협회 이정훈 회장은 25년여 동안 저와 함께 요가전임강사, 사무국장, 부회장직을 맡아오면서 다소의 기여를 한 바도 있으나, 저의 기대와는 달리 2003년 2월과 3월 총회를 통해 과반수이상의 공로가 큰 원로 임원(주남천이사, 나경주이사, 안지용이사, 김사륜이사, 김한 감사)들을 임기 중에 해임시키는 결과를 도모했습니다. 오랜 세월 요가를 위해 뛰어온 그들의 허탈해함을 본 저로서는 그분들과 뜻을 같이 하고자 새로운 요가 단체 '사단법인 대한요가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지난해까지 기여해 왔던 안지용이사는 한국요가연구회를 창설하게 되었고, 제가 2년간 요가지도자 교육을 시켜 배출한 양의사와 한의사 30여명이 2003년 5월 한국임상요가학회(이규진 회장)를 창립하여 사단법인 대한요가협회와 협력단체가 되었으며, 저는 그 학회의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요가적 삶을 통해 얻은 지혜를 무형의 재산으로 변형시켜 나누어 드리고 있습니다.
요가라이프 사이트가 사단법인 한국요가협회의 본부교육원(압구정 지부)의 홈페이지 기능을 해오다가 2003년 4월부터 대한요가협회의 본부교육원으로 개칭된데 대한 궁금증을 풀어드리고자 좀 자세히 장문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사단법인 대한요가협회는 2004년 1월 말에 사단법인 허가를 서울 시장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 1년 동안의 활동으로 70여개의 지부를 개설하여 크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욱 더 노력 할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요가를 사랑하고 요가인을 존중합니다. 어려웠던 지난 세월 속에 저에 대하여 다소 섭섭한 생각을 지니셨던 분들이 계신다면 많은 이해와 용서 있기를 기원합니다. 되살이 차원에서 상생의 길을 열어, 보다 질 높은 만남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저는 독자 여러분과 바른 대화를 위해 한국요가의 지난 세월을 제가 체험한 사실대로 일부 기술 했습니다. 저를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비추어졌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항상 부족하고 미숙함 속에서 성장의 길을 닦고 있을 뿐입니다.
요가란 자기의 잠재력을 현생에서 다 이루기 위한 접근이므로, 생을 다 할 때까지 반복적 수련과 새로운 창조적 성장의 지혜를 깨치는 공부를 하고, 실천하기입니다. 따라서 꾸준히 장기간 스스로 수련하는 자세가 요구 됩니다. 지금까지 읽어 주신 당신에게 스스로 복을 짓는 길(요가의 길)이 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단법인 대한요가협회장 김광백 올림.
첫댓글 김광백 그는 누구인가? 한국 요가를 이해하기위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저술했다는 온살이 요가경... 참 대단한 경전이다. 경정을 만들어낸 살아있는 분이시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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