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 성찰과 관조
-배기현의 시와 인간성
이 상 개
<1>
사람 사는 것이 저 언덕에 서있는 나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저 나무도 씨앗이 터서 자랐고 커서는 꽃피우고 열매 맺고 그러다 수명이 다하면 사라지고…사람 역시 태어나서 자라고 일하다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속에 흐르는 무수한 시간도 사람도 나무도 다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기현 형.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건 잔잔한 미소를 띤 ‘큰 바위 얼굴’ 아니면 ‘돌부처’였다.
과묵한 성품으로 자기를 가꾸고 다스렸으며 자기의 자기 스타일대로 시를 쓰면서 삶을 살고 있다고 믿게 되는 그다. 시를 쓰기 위해 말수를 줄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다. 그러나 오해 말라. 음흉하다는 것과는 아예 거리가 먼 사람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진해였다. 60년대 중반 정확히 66년 봄이라 기억된다.
그때 진해에서의 나날들. 아슴아슴 떠오르는 기억들이 새롭기만 하다.
해군에 복무하고 있던 배기현, 박재동(작고), 강종칠, 김상렬 등이 있었고 진해 토박이 방창갑(작고), 선배시인 황선하, 여류시인 강계순, 화가이신 류택렬, 채정권 선생이 계셨고 나중에 목사가 된 시인 고 지일규, 화가 허청륭 후배인 고영조 시인 등등이 있었다. 육군대학에 사병으로 근무하던 이수익 시인도 가끔 어울렸다. 시조를 쓰시던 이민기 교장도 떠오른다.
60년대.
그 암울하고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절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시기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그야말로 숨 가쁘게 살아야 했다.
“오만 원짜리 사글셋방/와서 누우면/ 끝없이 흘러가는 것은/모란인가 장미인가” <‘천장’에서>
“스물아홉 그 건방진 사내는/철모도 없이 죽어가고 있다/ … /존 메이스필드/당신의 이끼 낀 묘비명은 깨어지고/연탄 냄새 매운 대폿집/술 취한 색시의 유혹이 거북한//스물아홉 그 건방진 사내는/ 죽어가고 있다 철모도 없이.” <‘진해, 60년대’에서>
‘천장’과 ‘진해, 60년대’는 그의 시집 ‘낮은 울타리’에 실린 시다. ‘천장’은 “잉여촌”4집(1966.11)에 다른 작품 3편과 함께 실려 있는데 제목이 ‘천정(天井)’으로, ‘오만 원짜리’는 ‘오백 원짜리’로 돼 있다. 그때의 시세는 분명 오백 원이지만 시집이 나온 시점에서 본다면 오만원이라야 맞을 것이다. 요즘의 물가와 그 당시 물가와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신혼초의 그를 생각해본다. 박봉의 군 생활과 영외에 거주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은 무겁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달프고 어려워도 비록 사글세방이지만 신부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면 일시에 피로가 풀리는 달콤한 보금자리가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랴. 모란꽃 밭인지 장미꽃 밭인지 붕 떴을 것이다.
시집에 실려 있는 ‘진해, 60년대’는 그 당시의 암울함과 절망감이 나타나 있다.
어찌 보면 그는 영국의 존 메이스필드 같은 해양시인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마 동경의 대상이었던 같다. 그러나 직업군인인 그로서는 현실적으로 쉽게 다가설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위의 두 시를 인용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상과 상황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시대에 만난 문학청년들이었다. 씨앗이 싹 터 자란 어린 나무로 아직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나무는 아니었다. 튼실한 나무로 자라야만 했다.
나보다 5살이 더 많은 배 형은 진해에서 그 당시 ‘현창’이란 동인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마 배기현, 박재동, 방창갑, 강종칠 등으로 기억된다. 방창갑은 이들보다 먼저 알고 지내던 터였다. 창갑을 제외한 이들은 해군 현역들이었다. 내가 66년 초부터 해군군속으로 공작창에 근무하게 되자 한층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당시 나는 1965년 “시문학” 9월호에 시가 2회 추천되어 있었다. 그런 판에 내가 진해로 출근하게 되자 옳다구나 하고 창갑은 나를 끌어들였다. 우리는 쉽게 어울려 술도 마시고 울분도 풀었다. 흑백다방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우리는 ‘시문학연구회’를 만들어 매월 한 번씩 작품을 갖고 모여 발표도 하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황선하 선생을 좌장으로 모였던 이때가 아마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때인 것 같다. 한편으로 진해문인협회를 결성도 했다.
1964년 시동인지 ‘잉여촌’을 결성한 직후라 ‘현창’ 동인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배 형도 같이 ‘잉여촌’에 합류했다. 그러나 군에서의 막중한 책임과 과중한 부담 때문이었는지 4집 발표 후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동기와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을 내리기엔 젊음이 방관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극복해 나갔고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것은 그의 신념이 확고한 때문이었으리라 본다.
진해에 있는 ‘잉여촌’ 동인으로는 방창갑, 배기현, 박재동이 있었으나 그 중에 활달하고 재주꾼이던 박재동이 일찍 요절해버렸다. 배 형의 첫째가 태어나고 두 이레도 지나기 전에 예의 문협 노총각들이 배형 집을 습격했다. 왈가닥인 박재동이 강보에 쌓인 갓난쟁이를 살며시 들여다보고는 ‘이놈 두상이 왜 이리 커, 두대 로군’ 이라고 한 것이 이 아이가 진해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예총 식구들은 본명보다 두대라는 별명을‘더 많이 불렀다. 예총 식구들이 “두대, 학교 갔다 오나?”하고 아는 체를 하면 “예, 안녕하십니까”하고 별명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였다. 그 두대는 이미 배 형에게 손자를 안겨 주고 있는 효자가 되었다. 간혹 우리들은 신혼집을 기습했다. 원래 말수가 적은 배 형은 말이 없고 새댁은 웃으면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지겹지도 않으셨을까?
1967년 겨울, 내가 부산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처음엔 자주 연락하고 만났으나 차츰 소원해지다가 소식이 뚝 끊기고 말았다.
나중에 들으니 제대를 하고 진해를 떠났다고 했다. 진주에 살면서 조그만 사업을 한다고 들었다. 한번 통화를 한 기억이 나는데 그 때가 아마 제일 바쁘고 힘들었을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아이들의 학비다 생활비다 정신없을 시기였다고 여겨진다. 뜸한 사이였으나 그가 작품을 얼마나 썼는지 아니면 부자가 되었는지 몰랐다.
그러자 마산의 오하룡 형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배 형이 창원으로 이사해 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로 오랜만의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사이 자식들은 장성하여 딸은 출가하고 아들은 결혼하여 외지에 살림을 하고 있어 두 분 양주가 오붓하게 서로 등 긁어주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때늦게 등단도 하고 시집과 산문집을 냈다.
<2>
배 형은 1936년생으로 가야의 수도인 김해가 고향이다. 낙동강변의 천년고도 김해와 광활한 김해평야는 그의 인격형성이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본다.
<낙동강>을 보면 그가 겪고 본 낙동강의 어제와 오늘이 확연히 드러난다.
“…재럽에 묶은 낚시에/참새우가 몰려오고/땔나무 가득 실은 배들이 매여 있는/나루터…
물지게꾼 한떼가 지나고 난 모래사장에는/가창오리 청둥오리 떼가 새까맣게 내려앉곤 했다.… …나룻배 대신 바지 걷고 강을 건너고/청둥오리 사라진지는 오래다/강물은 생판 낯선 3급수/등이 휜 잉어가 잡히고/악머구리같이 생긴 붕어가 올라와…”
2연으로 된 시인데, 1연에서는 어제의 낙동강 정경이 펼쳐지지만 2연에서는 오늘의 낙동강 아닌 낙똥강의 실태를 고발하고 질타하고 있다.
한편 그는 진주에 살고 있으면서 지리산에 자주 가게 되었고 지리산이 망가지는 걸 지켜보게 된다.
“해발 1,915미터/정상에서 도시락을 열면/난데없는 파리가 먼저 달려든다/인간이 버린 냄새를 따라 차츰차츰 올라와/정상까지 정복한 파리” <지리산1>
남한 제1봉이라는 지리산. 시를 읽노라면 영산이 정말 무참하게 느껴진다. 인간이 훼손시키는 자연은 인간이 복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파리 떼같이 몰려드는 인간들은 파리 떼나 다름없다. 지리산은 시의 결구대로 ‘무지한 인간의 발 밑에서 신음하는/한 마리 말 못하는 짐승이다.’
그의 시집 ‘낮은 울타리’를 다시 꺼내 읽어 본다.
그의 시에는 첫째 군더더기가 없다. 둘째는 잔잔하면서 구수하다. 연륜이 터득한 성찰과 관조가 엮어낸 시편이라 한다면 너무 과찬일까. 그러나 나는 안다. 그가 오랫동안 잿더미 속의 불씨처럼 가꾸어온 그의 시심을. 그래서 그가 잉걸불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오랫동안 움츠려 있던 시심이 화산처럼 폭발한 것이 아닐까 하고. 서문 대신 짧은 문구로 대신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그의 소탈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인연을 맺은 모든 분께
그리고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몇 년 전의 일이다. 내가 중앙동에서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김해 고향에 들렀던 그가 무슨 볼일로 해서 부산까지 오게 되었던 모양이었다. 배 형이 찾아왔다. 반갑게 만난 우리는 술로서 회포를 풀었다. 선물을 한 꾸러미 주었는데 열어보니 쇠고기였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몇 끼를 포식하며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은 또 다른 기억과 연결된다.
60년대 그의 신혼이던 시절. 부인이 첫아이를 가졌을 때 일이다. 산월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배 형의 집 문을 두드리기에 나가보니 창갑이었다. 그가 내미는 것을 보니, 자루 아닌 스타킹 속에는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펄떡거리고 있었다. 그가 안겨주면서 하는 말은 ‘산모는 뭐니 뭐니 해도 몸보신이 최고라더라. 그래야 아이 낳을 때 고생 않는다니 형수 끓여 주이소’였다. 이미 고인이 된 창갑이지만 지금도 배 형은 그때를 못 잊어 한다.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낸다.
창갑의 집 근처에 양어장이 있어 잉어는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잉어 한 마리의 영양가보다 그 끈끈하고도 훈훈한 정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것이 새삼 떠오른다.
<3>
내 고향 창원 봉림(현 봉곡동) 가까운 곳 명서동에 현재 배기현 부부가 살고 있다. 진주에서 이사 온 후로 살고 있는 집이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이라는 것은 시집 제목으로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낮은 울타리는 동양인들에겐 분명 낯선 풍경이었다. 서구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발 붙이게 되었다. 창원에 신도시 건설할 때였다. 단독주택지역 뿐 아니라 모든 구역에는 담장을 낮추게 했다. 한두 집이 아니고 일률적으로 적용되고 보니 차츰 거부감도 사라지고 어느 정도 친근감도 갖게 되어가더니 이제는 당연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높이 담을 쳐서
감출 것이
내겐 없다
감출 것 없는 것이
무슨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라도
없는 것은 없는 것이지
어쩔 수 없다.
낮은 울타리
안에서도
무언가를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남이 갖지 않은
무언가를,
늦었지만
별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찾아보고 싶다.
<‘낮은 울타리’ 전문>
우리는 폐쇄된 공간에서 자기만의 안락을 추구해왔다. 또 가진 자일 권위주의자일수록 철저히 타인과 차단했다. 그러나 낮은 울타리는 이런 것을 타파하고 열린 세계를 지향한다. “낮은 울타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나마 뚜렷한 의미를 찾고 싶다는 시인의 강열한 바람이 서려 있다. 무언의 항의 같은 이 시편에서 그의 서민적인 면모와 품성을 엿볼 수 있다.
자기 성찰과 관조로 엮어낸 10편의 대표작들을 읽으면서 공통적인 느낌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다를 바 없다.
“…동구 밖 늙은 미루나무 위 보금자리는 돌보는 이 없는 농촌 빈집처럼 삭정이로 무너져 내리고 벌레 쪼던 들판은 질펀한 하우스의 바다로 변해 수몰민인 듯…(중략)…사라져야할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사라져서는 안 될 것들은 자꾸 구석자리로 내몰리고 있다.” <빈 까치집>
“정 붙이면 고향이라던가
이제는 국적도 바꿔야지
이 땅의 들풀, 들꽃들과 어깨 비비대며
밭둔덕, 산자락 한켠을
한사코 지키고 있다
사면복권의 날을 기다리며.”
<개망초>
“저마다 자리 뽐내는 꽃집과 꼴들도 많건만
아직 누구 불러준 사람도 없었는지
꽃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서 있구나
참나리
내 첫사랑.”
<참나리>
<빈 까치집>엔 민초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빈 까치집을 보는 그의 눈엔 수몰민들의 아픔이 전개된다. 또 정작 사라져야 할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활개를 치고…
<개망초>를 보자. 비록 이국종 개망초지만 이제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흔한 종으로 마치 영주권을 얻은 듯 활개치고 있다. 그러나 국산으로 둔갑한 것은 아니지만 사면복권 되기를 갈구하고 있다.
<참나리>에서 보다시피 외래종, 변종에 밀려 참나리는 보기도 어렵다. 그 참나리는 어릴 적 흔히 보아왔고 가까이 있는 꽃이었다. 어쩌다 만난 참나리에다 ‘첫사랑’이란 이미지는 제 자리에 맞춰 놓았다 여겨진다.
나무가 자라면 꽃 피우고 열매 맺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고목이 되기 마련이지만.
‘잉여촌’ 동인들이 환갑을 전후하여 자주 연락하게 되었다. ‘잉여촌’은 18집을 낸 후 휴간 상태에 있었다. 복간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복간문제는 옛날 청록파 시인들이 환갑 때 백록집은 내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먼저 작고한 분이 생겨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뜻을 우리가 이뤄보자고 나섰다. 여기저기 연락해보니 다들 찬성이었다. 20대의 열정이 60대에 와서 태풍처럼 몰아쳤다. 우리는 젊은 날의 혈기 방장하던 나이와 패기만만하던 열정을 다시 맛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다시 모여 2004년 복간호(19호)를 내게 되었다. 금년엔 22집이 나왔다. 현재 동인들은 전국에 흩어져 살지만 그 중에서 배 형이 제일 연장자이다.
<토기>를 읽고 있으면 절로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내 할매/따숩던 등허리…”라든가 “여전히 선연한/얼레빗 살자국.”
토기는 석기시대부터 사용한 생활도구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가장 가까이 다루는 도구로 어쩌면 ‘질긴 삼베적삼처럼’친근하다. 백자나 청자였다면 낯이 설었을 것이다. 그러나 토기는 할머니의 ‘얼레빗 살자국’ 아주 선연하게 살아 있다.
<마늘 밭><꽈리>를 읽어본다.
이 시들은 근작시이다.
아들의 소나타 자가용 지붕 넓이만한 마늘밭을 가꾸는 할머니. 할머니는 소일거리로 여기지만 사실은 너도 나도 주위에서 거들어주는 주위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는 것이 소일거리다. 그리곤 수확 때가 오면 막걸리와 돼지 다리를 장만하여 그 사람들과 잔치를 연다. 농사짓다 도시로 온 할머니의 생일날이 된다. <마늘 밭>
꽈리가 자라면서 누님의 기다림은 시작되고 꽃이 피었을 때도 열매를 맺었을 때도 여전히 누님의 기다림은 계속된다.
하마 끝날 것 같던 기다림은 이승을 떠난 누님의 ‘상청(喪廳)을 밝히는 등불이/잘 익은 꽈리처럼 환’할 때 끝이 난다. <꽈리>
우리의 현실 속에는 부조리한 일들이 너무 많다. 기가 막힌 일, 요절복통할 일 등등…
척결되지 않는 우리 사회는 병들게 마련이고 동거의 형태를 유지한다. 그것을 꼬집어내는 그의 시선은 날카로움을 피하고 대체로 은근슬쩍 풍자적이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불편한 동거’가 많다.
<바닐라 향>에서는 그의 속내를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입 속에 번지는 달콤한 향기/하지만/어쩐지 불편한/동거,” <바닐라 향>
“…법당 축대는 한자 남짓 높이 인데요/그 흔한 시멘트 한 자락 깔리지 않은 흙 바닥 이어서요/부처님 뵙기 전에 벌써/ 마음이 따뜻해져요…” <실상사>
시멘트화 돼버린 세상이다. 어디를 가도 시멘트는 깔려 있다. 어느 깊은 계곡 산봉우리에도 물밑 바다 밑에도 시멘트는 깔려 있다. 시멘트는 거부감을 주지만 쉽게 떨쳐버릴 수 없다. 아이러니다. 이런 세상에 신라 때의 고찰 실상사에 가본 그는 흙바닥을 만나면서 마음이 따뜻해져 옴을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건강하게 살면서 좋은 시를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구나 같을 터. 그라고 작품에 대한 욕심이 없으랴만 그는 요즘 전만큼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뒷동산도 오르내리고 독서도 하고 때로는 이 메일도 띄우면서 지낸다.
그는 컴맹도 아니다. 일흔이라는 나이도 무색하게 가끔 나에게 메일을 보내온다.
뒷동산 산보가 사색하기에 적당할 것이다. 부부가 곱게 늙어가는 사이 그의 시는 더욱 무르익을 것이고 미소 띤 돌부처의 따스함을 잃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