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 자궁들이 말할 수 있다면
- 낸시 사보카와 쉐어의 <더 월>
글·정혁현
자궁은 여성에게만 허락되었다. 여성은 이 자궁으로 생명을 품고 양육한다. 하나의 몸 안에서 또 하나의 몸이 성장하는 임신은 두 개의 생명이 공존하는 것을 체험하는, 고되지만 신비스러운 과정이다. 물론 이러한 신비가 출산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은 극단적으로 단축되는 경향이 있지만, 젖먹이는 과정 역시 생명의 연기(緣起)를 몸으로 겪는 숭고한 체험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젖무덤이 충분히 부풀어 올라 어린 생명의 영혼과 육체를 거의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젖먹이기’를 행한다. 한 인간이 타자에게 이처럼 전적으로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존재일 때가 또 언제일 것인가. 종교화의 대부분이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형상을 재현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토록 숭고한 ‘임신과 수유’는 종교적으로 이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 속에서 수행된다. 사람들이 만드는 특수한 공간인 ‘현실’은 잉태와 젖먹이기가 갖는 지고한 의미를 결코 고스란히 허용하지 않는다. 낙태, 다시 말해 생명을 ‘지우는’ 행위야말로 그 극단적인 실례가 아닐까. 더욱 심각한 부조리는 낙태가 극단적인 결정이면서도 매우 흔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더 월>은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에서 진행되는 임신과 출산의 문제를 여성의 입장에서 조리 있게 대답하는 드문 영화 중의 하나이다. 할리우드의 여성영화인들이 공동 제작한 이 텔레비전 영화는 세 편의 단편을 결합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1,2편은 낸시 사보카가 감독했으며 3편은 유명한 배우인 쉐어가 감독과 주연을 같이 맡았다. 세 편의 영화는 각각 1950년대, 1970년대, 그리고 1990년대를 배경으로 낙태 문제에 맞닥뜨린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이 문제가 각 시대를 구성하는 사회전반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952년 간호사로 일하는 클레어 도널리(데미 무어)는 2차대전에서 남편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로하던 시동생과 관계를 맺고 임신하고 만다. 낙태가 불법이던 시절, 보수적 가족관계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임신으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불법시술을 받기로 결정한다. 낙태가 합법화 된 나라에서 시술 받는 수도 있으나 여성 노동자로서 감당할 수 없는 거액의 비용이 든다. 무면허 의사에게 수술 받은 그녀는 후유증으로 하혈을 하며 비참하게 죽어간다.
1974년 바바라 바로우(시시 스페이색)는 중년의 주부로 외동딸이 대학에 갈만큼 성장하자 자기 개발을 위해 대학에 진학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 남편 역시 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조기 은퇴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임신을 하게 된다. 모든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게 된 것이다. 딸과 남편은 모두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녀의 중절을 요구한다. 깊이 고민하던 그녀는 자기 개발을 포기 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다.
1996년 여대생 크리스틴(앤 해처)은 존경하는 교수와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한다. 교수는 유부남이다. 가장 친한 친구는 낙태반대자로 그녀가 낙태를 고려하자 냉정하게 대한다. 그녀는 결국 홀로 낙태전문병원을 찾는다. 병원 앞에는 가톨릭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낙태반대자들이 진을 치고 중절 수술을 받으러 오는 여성들에게 회유와 협박을 한다. 고민하던 그녀는 수술을 포기하고 돌아가지만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어 더욱 절망한다. 냉정하던 친구도 그녀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다음날 병원에 동행한다. 그날 병원 앞은 마침 낙태반대자들의 격렬한 시위로 거의 아수라장이다. 병원 원장(쉐어)은 여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라며 꿋꿋하게 수술을 집도한다. 그러나 수술이 거의 끝날 무렵, 환자 남편을 가장하고 들어온 낙태반대자의 총탄에 무참하게 쓰러진다.
이 영화 보려면 낙태를 미국 현대사의 세 시기를 동시에 바라보는 폭넓은 사고가 필요하다. 영화가 제시하는 세 시기를 거칠게 요약한다면, 소비주의의 50년대와 진보와 개혁의 정신이 살아있던 70년대, 그리고 신보수주의로 되돌아가는 90년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시대의 차이 속에서 임신과 낙태에 대한 관점도 또 그에 대응하는 여성의 태도도 확연하게 구별된다. 50년대의 여성은 도덕이 용인하지 않는 임신 때문에 철저하게 희생되는 반면, 70년대의 여성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고려하면서도 태속의 생명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90년대 여성은 보수주의로 되돌아가는 흐름 속에서 거의 50년대 여성과 가까운 위험과 고통을 무릅써야 한다.
이 영화는 각 시대의 중요한 장면들과 낙태를 둘러싼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와 함께 시작된다. 유명한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만일 남성이 임신할 수 있었다면 낙태를 찬양했을 것’이라 외치고, 한 반대론자는 ‘임신과 출산에서 여성의 결정권은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이 반대론자 주장에 어떤 진실이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논리적으로 결정권은 3분의 1밖에 가지지 못한 여성이 현실에선 임신과 출산의 거의 모든 부담을 지고 있지만 사실 여성의 권리는 이보다 더 작다. 오늘날 급속한 고령화에 직면한 한국사회의 위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임신과 출산은 사회적 재생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자궁’이라는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기반하여, 낙태를 ‘오직 여성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임신과 출산에 대한 주요 결정권은 여성에게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보다 정당한 시각은 권리는 갖지 못하면서 모든 부담을 져야하는 존재, 즉 사회적 소수자로 여성을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결정권은 태아는 물론 남성과 사회 전체가 방기하는 책임을 부당하게 짊어지는 존재로서, 이 부당한 관계가 해결될 때까지 여성이 잠정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