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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의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을 읽는 것은 고통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펼치는 하드고어적 상상력에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나마 충격적인 장면이라도 찾으려고 했던 필자의 기대가 따분함으로 계속 바뀌어갔기 때문이다. 그럼, 그녀의 소설은 재미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름대로 읽을 만한데, 그것은 우리가 익히 읽고 보아왔던 영화(좀비가 등장하는 호러영화들)나 만화(일본의 호러만화들)와 비슷한 장면을 찾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의 이야기다. 왜냐면, 그런 ‘같은 그림 찾기’를 빼고 나면, 거기에 텅 빈 공백만 남아 따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오이가든>>은 하위문화 이미지를 짜깁기한 소설로, 이에 충격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정식극장에서만 상영하는 순박하고 정제된 영화(할리우드영화나 한국영화)만 보는 이들이거나, 아니면 진짜 공포와 만나기 싫어하는 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뭔가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것이 액체와 거울이라는 이미지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일상적 소재를 짜깁기 할 경우, 보통 그것들은 딱딱한 현실 앞에서 자신이 가진 초라함을 쉽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현실 자체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경우, 현실이란 짜깁기한 이미지 중 하나로 녹아들게 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깨진 거울처럼 서로 비추면서 출구와 입구를 막아버린다. 그러나 거울방의 이미지가 아무리 미끄럽고 무한하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이미지들을 복제에 불과하고 거기서 뭔가 창조적인 것이 나올리는 만무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갇힌 이미지들에 취해서 자신이 나올 출구도 잊어버린 채, 그런 이미지들이 딱딱한 현실에 대한 대항적 표상들을 산출한다고 '고체적인' 주장한다면(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그 말에 과연 설득력이 있을 수 있을까? 또 모든 것에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다면, 거기서 정치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일까?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논리들이 버젓이 펼쳐지곤 한다. 예컨대, <<아오이가든>>의 해설의 쓴 이광호의 글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 랜드 - 편혜영 소설과 모더니티의 연기전>이 그렇다. 우선 이광호는 <<아오이가든>>의 많은 소설들이 시체의 등장으로 시작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소설의 서두를 읽으면서 아마 독자들은 스릴러 영화의 첫 장면이나, 탐정소설의 서두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기를 기대하는가? 이제 우리의 주인공이 등장하여 여러 혼돈과 곡절 끝에 끔찍한 범죄와 사고의 진상을 밝혀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도 될까?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스릴을 맛보고 나면 결국 사건의 전모가 내 손안에 주어질까? 미안하지만, 편혜영의 소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246쪽)
사실 이런 식의 논법은 지금 평하고 있는 소설의 새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비평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사인데, 문제는 너무나 많이 사용한 나머지 때로는 짜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존형식을 배반하는 것 자체가 ‘새로움’일 수 없다. 왜냐면, 첫째 기존형식은 결코 ‘독자들이 기대하는 스릴러 영화나 탐정소설’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만큼 고정되어있지 않으며, 둘째 스릴러영화나 탐정소설은 이광호와 같은 어설픈 트릭보다 훨씬 복잡한 트릭을 구사하며 어떤 의미에서 모든 새로움을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기서 이광호가 사용한 트릭은 <<아오이가든>>과 비교가능한 기존형식이 하드고어 소설이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그것들과 비교하지 않고 그와는 장르가 다른 애꿎은 탐정소설(영화)을 들어 <<아오이가든>>의 하드고어성의 가진 새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편혜영 소설이 가진 기괴성을 하나하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나열, 정리하고 있다. 이점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정리는 비교적 정확하여, 이미 하드고어 문화에 익숙한 독자라면 굳이 작품을 읽지 않고 그의 요약만으로도 편혜영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 떠올릴 수가 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든다면, 한편 정도 시험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가끔 정리 이상의 해석 비슷한 것을 덧붙이기도 한다. 예컨대, <맨홀> 같은 작품에서 등장하는 과학관이 근대적 과학의 진리를 전시하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그것들이 맨홀의 원시적(동물적) 공간과 배치된다고 말할 때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것은 공포영화나 일본만화에서 무수히 사용되는 아이콘으로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구더기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여자의 자궁에서 파충류 괴물 또는 동물이 나오고, 고양이의 내장이 쏟아지고 하는 것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런 아이콘에 파악하는데 머물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놓인 맥락일 것이다. 당연 이광호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편혜영의 소설들은 하드고어적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엽기적 괴담의 세계이다. 그럼 다시 묻자. 괴담이란 무엇인가? 괴담이란 전통적인 서사 안에서 자연숭배나 외포심(畏怖心), 초월적인 신비감을 낳는 기이한 이야기의 영역이다. 그러나 이런 공포를 야기하는 비현실적인 서사는 낭만주의 이후 현대문학의 주류적인 문법 안에 자리 잡지 못한다. 리얼리즘 소설 미학의 인과적 규율로 설명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세계는 퇴행적이며 중세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 편혜영 소설은 현대문학 제도 안에서 추방된 괴담의 상상력을 호출한다. 이것은 현대문학이 역사적 리얼리즘 혹은 일상적 리얼리티의 이름으로 배제한 세계에 대한 미학적 재발견을 의미한다.(259쪽)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그는 편혜영 소설을 그동안 근대문학의 주류(리얼리즘 문학/일상적 리얼리티)에 의해 억압된 장르의 재래로 본다. 그리고 그 재래를 ‘새로운 미학적 모더니티를 탐색하는 기획’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해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발언이다. 왜냐면, 일상적 리얼리티와 괴담적(비일상적) 리얼리티는 명확히 구분된다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이며, 그것은 따라서 거기서 ‘새로운 미학적 모더니티’를 발견할 만한 전복 같은 것 역시 존재할리 없다. 다시 말해, 만약 여기서 전복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시켜 그것을 비일상적 리얼리티에 도달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비일상적 리얼리티를 극대화시켜 그것을 일상적 리얼리티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근대문학의 주류문법이 가한 억압이나 폭력을 문제 삼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비일상적 리얼리티에 대한 억압’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일상/비일상이라는 구분에 대한 전제’ 자체를 당연시하는 사고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성없이 ‘편혜영적인 것’ 즉 ‘하드고어적인 것’을 문제삼는 것으로 슬쩍 넘어간다.
하드고어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영화 등의 대중적인 매체에서 절단된 사지나 내장 등을 노출하는 것을 일컫는 이 용어는, 이미 대중문화 미학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잡고 있다. 하드고어적 묘사는 모든 대상의 세부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편혜영의 묘사적 밀도는 시체의 세부적인 부분이나, 훼손되고 기형적인 인간과 동물의 몸 등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서술자는 가장 추하고 불편한 대상에 대해 집중적인 묘사를 감행한다. 구더기가 득실거리며 썩어가는 몸에 대한 집요한 묘사는 그 구체적인 사례에 속할 것이다. (260쪽)
이광호는 편혜영의 묘사방식이 이미 대중매체에서 대중화된 것이라고 언급하면서도, 편혜영만의 ‘하드고어 묘사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하드고어는 세부에 집중하지 않는 반면에, 편혜영는 세부를 집중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별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가 말하는 하드고어는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상영되는 헐리우드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소프트-하드고어(대중화된 하드고어)를 의미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편혜영 소설에 새삼 놀라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진짜 하드고어를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광호는 이어서 이와 같은 편혜영의 세부묘사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그녀의 세부묘사는 ‘시각적 쾌락효과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세계’로 그것은 단순히 세부성 사실성을 드러내기 위함이기보다는, 자본주의 문명에 의해 세워진 일상적 현실의 공간에서 은폐된 어떤 지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녀는 문명의 자연스러움(휴먼스토리)에 충격을 주어 ‘법과 언어의 상징적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가능하게 하는 틈’을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편혜영의 소설에서 어떤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논리는 궁극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광호는 그것을 비교적 명확히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사실 이런 질문은 이광호 스스로가 던지고 있다.
편혜영 소설이 한국소설의 가장 극단적인 상상력의 하나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저 범람하는 엽기의 대중문화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이다. 도착과 엽기의 이미지들은 하드코어적인 포르노그래피의 이미지와 함께 자본을 등에 업는 대중문화의 복음의 일부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엽기적인 장면의 제시, 그 자체가 이 시대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산출한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하드고어적 괴담의 미학은 어떻게 탈주의 예술이 될 수 있을까?(262쪽, 강조는 인용자)
사실, 이 부분야말로 이광호의 해설 중에서 가장 읽을 만한 한 부분이다. 그는 오늘날의 비평가가 자주 처하게 되는 ‘딜레마’(어떻게 설득력있는 가치판단이 가능한가)와 맞닥뜨린 셈이다. 그럼, 그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론가들의 용어를 빌려 엽기적인 것들의 세부를 전시하고 대상화하는 하위 대중문화의 영역을 ‘억압적 탈승화’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 편혜영의 소설 미학이 향하는 지점은 그것과는 조금 비껴 서 있다. 그것은 엽기적 대중문화의 시각적 쾌락 효과 혹은 도착의 기호학 너머의 세계이다. 편혜영은 시체를 시각적으로 대상화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인간 존재 자체를 ‘시체 되기’의 국명으로 끌고 나간다. 이 ‘시체 되기’ ‘동물 되기’ ‘벌레 되기’의 상상력은, 인간 존재의 주체화 과정을 해체하고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시각적인 코드에서의 시체의 발견과 전시가 아니라, ‘시체 되기’를 통해 경험되는 ‘다른 삶’이다. 이런 맥락에서 편혜영의 소설 미학이 향하는 지점은 탈억압적인 미학적 탈승화의 지점이다.(262쪽)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억압적 탈승화’와 ‘탈억압적인 미학적 탈승화’라는 개념이다. 가장 예민한 지점에서 이광호는 이제까지의 친절했던 모습(줄거리 요약까지 해주던)과는 달리, 갑자기 몇 가지 이론적 용어(일반 독자들은 잘 모르는)를 제시하며 편혜영 소설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일반독자의 눈으로 위 인용문을 보면, 그가 낯선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고 싶은 바는 대충 하위대중문화의 하드고어는 시각적 쾌락과 도착의 기호학에 사로잡혀있는 반면, 편혜영의 소설은 그것을 넘어서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럼, 어떤 식으로 넘어서고 있는가? ‘시체 되기’ ‘동물 되기’로 통해서다. 그럼, ‘시체 되기’ ‘동물 되기’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이광호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뭐 이 정도면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느냐는 식이다(모두 들뢰즈 정도는 읽었지?).
최근 비평들을 보면, 결정적인 가치평가에 있어 이와 같이 몇 가지 이론적 용어를 통해 얼렁뚱땅 넘어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결코 비평에 있어 ‘이론적’ ‘철학적’ 성찰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 집단을 위한 ‘논문’과 달리 비평은 그런 용어가 꼭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일상의 용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평은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잃어버릴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렇지 않는 비평문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비평가의 박식함으로 보기보다는 그가 자신이 사용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는 명확히 비평의 패배이다(비평가들 자신은 그것을 ‘초월’로 여길지 모르지만).
비평의 패배는 비단 이론에 대한 무반성적 의존에만 있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작품에서 가져온 간접인용으로 글을 마치 작은따옴표의 누더기를 만드는 비평가도 있다. 물론, 작품에 대한 경의와 겸손은 높이 사줄만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낮추려면 그냥 일반 독자가 되는 것이 낫다. 혹자는 비평이 작품을 비판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문학비평이 갖는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해설을 하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작품)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비판하는 사람들은 현재보다 더 나은 것을 써주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작품을 진정으로 아끼는 사람들이다. 낡아빠진 용어를 사용하자면, 전자는 수동적이고 후자는 능동적이다. 그러나 가끔 이것이 거꾸로 이해되는 것은 ‘현실긍정’이라는 것이 어떤 대의가 요청될 때이다.
그건 그렇고, 그럼 이광호는 어떻게 글을 끝내고 있는가 살펴보자. 그는 방금 살펴본 것처럼 몇 가지 전문용어로 편혜영의 가치를 평가한 후, 그것을 ‘인간 진화의 역사가 건설한 문명 전체를 악몽으로 되돌리는 불길한 전복적 상상력의 눈부신 문학적 시작’이라고 말한 후, 그것은 ‘한국 소설의 특별한 또 다른 시작’(263쪽)이라고 결론짓는다. 사실, 이 마지막 부분만 놓고 본다면, 그의 평가는 별 다섯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껏 살펴본 것처럼, 그가 편혜영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만은 아니다. 긍정은 긍정이되 약간의 석연찮음을 보여주기도 했다(물론, 그는 그것을 간단히 지나쳤지만). 그러나 그는 그런 부분을 억압하고 “웰컴 투 하드고어 원더 랜드!”라고 외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럴지 모르지만, 많은 비평가들 역시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유가 어떤지 간에 특히 작품해설에서는 그런 느낌이 강하다. 그럼, 누가 이들에게 재갈을 물린 것일까? 누굴 탓할 것도 없이 그것은 비평가 자신이다. 그들은 텍스트에게 느낀 어떤 석연찮음을 언어로 번역하는 대신, 그것을 대충 긍정해버리는 쉬운 길을 택한다. 우리는 그 한 예로 지금까지 이광호의 글을 살펴보았다. 사실 그의 글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스스로도 잘 납득되지 않는 말들을 내뱉었다는 데 있다.
가치판단에 있어 정확성을 상실한 비평이나, 그런 가치판단의 정확성이 요구되는 장면에서 이론적 개념을 발판삼아 갑작스러운 비약을 하는 비평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과한 평가를 내리는 비평이나, 작품요약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는 비평은 모두 비평이라기보다는 가치판단이라는 지옥에서 자유로운 ‘해설’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중에 혹 이런 글들까지 자신의 비평집에 수록한다면, 그것은 비평의 패배를 스스로 자인하는 것 이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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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9. 9
첫댓글 이토 준지 정도는 되나요?
비꼬름합니다. 예컨대, <이토 준지 + 레지던트이블 + 큐브> 정도라고 할까요...
요즘 시쪽에서 제일 인기있는 해설(?)가는 이장욱이고, 소설 쪽은 우찬제 같더군요(이광호는 잘 모르겠고). 근데 우찬제처럼 쓸데없이 들뢰즈의 용어를 남발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뭐 다 비스무리하긴 하지만....저도 수사적인 발언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을 섞어볼 순 있겠다 싶네요... <비평은 분석도 해설도 아니다. 비평은 해석학이 되어야 한다>...
제가 생각하기에 비평은 해석학이 되기보다는 문학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비평에 대한 소조님의 혐오는 '비문학적인 비평'에 국한되는 건가요?..
문학인 비평이란 일종의 이상이지요. 그러나 혐오하는 비평은 명백합니다. 예컨대, 분석대상이 되는 작품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비평들이 그렇습니다. 전 기본적으로 비평은 텍스트에 대해 해석을 하고 설명을 하되, 그 텍스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집>이 팔리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실린 비평 대부분이 해당 작품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것들이 때문입니다. 적어도 비평집이라면, 그 자체로 어떤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해석학은,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얘기한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이집트 학자"정도 겠군요... 소조님의 비평에 대한 생각은 대체로 공감합니다..
또 들뢰즈군요. ^^;; 어째든 공감입니다.
읽은 바탕이 그것밖에 안되서 그렇습니다..또 들뢰즈..ㅜ.ㅜ 딱 올해까지만 읽으려고 합니다. 칸트하고 벤야민을 읽기 시작했으니, 이제 그쪽으로 기웃거려봐야죠..^^
제 짧은 코멘트를 어떤 감상(문)으로 읽어주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소조님은 매우 정확한 것을 당대의 비평가에게 집어내어 요구하고 있지만, 바로 그 요점을 처음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그것이 찌르기만 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요컨대 저 역시 비평가들의 글쓰는 습관(특히나, 인용 습관)에 문제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소조님은 제가 고진을 사상가로 보고 소조님이 비평가로 본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관점은 차이는 핵심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것인 한에서만 유효한 차이인 것 같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칸트를 이렇게 패러디할 수 있지요. "철학 없는 비평은 맹목적이고, 비평 없는 철학은 공허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게 비평가에 대한 요구라면, 진정한 비평을 하라는 요구로서 좀더 철학적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지요. 저의 진단은 현재의 비평가들이, 그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비평가들이 돌파의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찌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한탄도 해야 하지요. 자신에게로 돌아올지 모르는 깊은 한탄을 말입니다. 여하간 저는 예컨대 "주례사 비평"이나 "문단 권력" 같은 소규모의 도착증적 유행어들보다, 소조님의 "비평의 종언"이라는 탁월한 진단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런 진단을 해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예컨대 그가 라캉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철학없는 비평은 맹목적이고, 비평없는 철학은 공허하다"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비평가는 철학(정신분석)을 작품분석을 할 때 언젠가 '적당히 써먹을' 개념의 도구함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철학자들이 인용할 만한 개념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비평가든 철학가든 두 얼굴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번의 글이 '찌르기'에 머물고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 나름대로 이런 찌르기는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찌르기'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저 역시 제가 비판하는 사람과 같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