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 묵상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2. 말씀 묵상과 말씀의 능력
3. 말씀 묵상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4. 말씀 묵상과 영혼의 양식
5. 말씀 묵상과 삶의 변화
6. 말씀 묵상과 깨달음의 축복
7. 말씀 묵상과 지혜자의 삶
8. 말씀 묵상과 마음 가꾸기
9. 말씀 묵상과 성경 암송
10. 말씀 묵상과 언어의 능력
12. 말씀 묵상과 영적 전쟁
13. 말씀 묵상과 창조적인 삶
14. 말씀 묵상과 침묵 기도
15. 말씀 묵상을 지속할 수 있는 원리
서문
저는 예수님의 묵상 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묵상을 갈망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처럼 묵상 학교가 결코 쉬운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때로 외롭고 힘들고 혼돈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독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처럼 저도 고독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흑암 속에서 보화를 발견하듯이 묵상 학교에서 놀라운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묵상 학교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어 쓴 첫 번 재 책이 “묵상과 영적 성숙”이었습니다. 작은 책 속에서 담긴 담백하고 소박한 글을 많은 분들이 아껴 주셨습니다. 설익은 사과처럼 쓴 글이지만 그 속에 담긴 가능성을 보시고 아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묵상의 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갈수록 초심자라는 생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기본에 거듭 충실한 자세가 묵상하는 자세임을 배웠습니다. 말씀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깊습니다. 말씀은 모든 것의 시작이면서 모든 것의 마지막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십니다.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깨달을 수 있도록 단순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진리는 아무리 탁월한 영성가라고 할지라도 다 깨달을 수 없을 만큼 깊고 오묘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늘 겸허한 자세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번에 출판하게 된 “말씀 묵상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은 묵상의 기본을 거듭 다루고 있습니다. 초시므로 돌아가는 길만이 가장 깊은 묵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임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떡은 담백합니다. 그 맛이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떡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 떡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너무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너무 새로운 것, 너무 다양한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단순한 삶으로 들어가십시오. 늘 먹는 밥을 즐겨 먹듯이, 늘 읽는 말씀을 즐겨 묵상하십시오. 그때 당신의 영혼은 건강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한 권 한 권의 책을 기도와 성실로 출판해 주시는 두란노 서원 출판부 직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늘 겸손히 섬겨주시는 유종성 본부장님과 이번 책이 출판되도록 정성을 다해 주신 송미영 팀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부족한 사람을 묵상의 학교로 입학시켜 주시고 훈련시켜 주신 우리 주님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강준민
1. 말씀 묵상과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말씀 묵상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을 얻는 것보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하는 사람은 그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말씀 묵상을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목표가 없으면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그 목표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할 때 깊이 숙고해야 할 말씀은 요한복음 1:14절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모습입니다. 말씀이 있기 전에 생각이 있었습니다.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생각이 있었고, 그 생각이 말씀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으로 스며들어, 육신으로 드러난 진리의 본체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말씀으로 가득 찼고, 진리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격이 진리였고, 예수님의 언어가 진리였고, 예수님의 삶이 진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입을 벌리면 진리를 말씀하셨고,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진리로 충만하셨기 때문에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만들어 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진리가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 가운데 스며드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우리 핏속에 말씀이 흐르고, 우리 언어 속에 말씀이 나타나고, 우리 성품 속에 말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게 읽혀지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투명하게 서서 말씀이 우리를 책망하고 바르게 하도록 내어놓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만들어 나가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계속 묵상하다 보면 그 말씀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존재가 되어서 우리의 언어가 되고 우리의 삶이 됩니다. 우리의 눈빛이 됩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발하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통해서 우리 몸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은 자신 몸 안에 예수님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몸에서 존귀하게 드러나도록 말씀 묵상을 하십시오.
예수님의 인격이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을 목표로 말씀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급히 읽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으십시오. 말씀 속에 나와 있는 진리를 자신의 인격 속에 담는 것처럼 말씀을 읽으십시오. 말씀을 통해서 나의 성품을 예수님의 성품으로 개조시키는 작업이 말씀 묵상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영적 독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방법으로 “적절한 속도로 읽으면서 그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 진리로 우리의 인격이 형성될 때까지 중간 중간 쉬어 가며 그 구절들을 읽고 음미하고 또 체험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소화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당신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게 하십시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십시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도록 감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진리를 거듭 깨달아야 합니다.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소화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책을 진리 가운데 넣고 발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배추만 있다고 김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배추가 소금에 절여지고 고춧가루와 젓갈과 마늘 등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함께 발효될 때 김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스며들어서 발효되면 새로운 맛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격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을 얻는 것보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말씀 묵상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존재 안에 스며들도록 말씀을 깊이 새기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각에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우리 전 존재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 말씀 묵상입니다. 깊이 있는 말씀 묵상을 통해서 존귀하신 예수님을 닮아 가십시오.
2. 말씀 묵상과 말씀의 능력
말씀은 전능합니다.
우리 인생은 이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믿는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말씀을 버리면 축복을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의 능력은 말씀의 능력과 같습니다. 말씀 묵상의 능력을 알고 경험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능력을 잘 알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의 원천이고 저수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려면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믿는 자는 말씀을 받은 사람입니다. 믿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요 1:12)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요 1:1-3. 1:14) 그런 까닭에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곧 말씀을 영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자 속에는 말씀이 살아 역사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살아 역사합니다. 믿는 자는 성경을 통해 자신이 받은 말씀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능력이 삶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첫째, 말씀은 전능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역시 전능합니다. 누가복음 1:37절은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합니다. 교회도 여러 모습으로 변해 왔습니다. 성경 공부, 제자 훈련 등에도 여러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말씀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한계, 자연의 모든 법칙을 초월한 성령과 믿음의 법칙입니다. 히브리서 11:3절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은 창조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미래가 열렸고 미래의 새로운 것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조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고, 우리 자녀들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강단에서 무슨 말씀이 선포되느냐에 따라 그 교회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사랑을 말하면 사랑이 움직이고, 능력을 말하면 능력이 움직이고, 감사를 말하면 감사가 움직이게 됩니다. 꿈을 말하면 꿈이 생기고, 사랑을 말하면 사랑이 생기고, 믿음을 말하면 믿음이 생기고, 기도를 말하면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재료요, 미래의 삶의 재료가 됩니다.
또한 전능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만물을 붙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모든 만물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이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말에 붙잡히게 되면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영혼 구원입니다. 영혼이 구원을 얻으려면 죄를 깨닫고 거듭나야 합니다. 사도행전 2:37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찔러 회개의 역사,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증거하고 그 안에 담긴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운동력이 있다는 것은 역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안한 자 속에 들어가면 불안을 내쫓는 역사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에게 들어가면 귀신이 나가는 역사가 일어나고, 절망과 좌절한 사람들에게 들어가면 소망을 불러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령을 따라, 기도를 따라, 눈물의 간구를 따라 역사합니다.
살아 역사하는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이 거듭난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지면 그 말씀이 움직이면서 성장하고 우리 안에서 큰 힘과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가 진정한 성도이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셋째, 말씀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치료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구원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회복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시편 107:20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고치시기도 하고, 위경과 죽음에서 건져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병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3) 주님의 말씀은 권위자, 권세자의 말이기 때문에 “네 문둥병이 나았다”고 하시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지 않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권세를 믿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삶입니다.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백부장은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집에 가실 필요 없이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하인이 낫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했다”(마 8:1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알고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하면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말씀의 권세를 보여 주십니다.
넷째, 말씀은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믿는 자 속에서”가 아주 중요합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아, 또 이 말씀이네...” 하고 반응하면 절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고 붙잡고 기도해야 그 말씀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믿는 자 속에 역사하므로, 똑같은 말씀이라도 받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다르게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받는 이의 믿음에 따라 말씀이 다르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2절은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치 아니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을 때마다 믿음으로 화합하여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믿는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붙잡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 따라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던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던 베드로처럼, 엘리사가 대언한 하나님 말씀을 의지해서 요단강에 일곱 번 내려가 몸을 씻어 병 고침 받았던 나아만 장군처럼, 말씀에 의지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반대로, 말씀을 버리면 축복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입니다. (삼상 15:23)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우리 인생을 축복하시고 놀라운 역사를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실천하십시오. 성도의 힘은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인생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암송하고, 또 깊이 묵상하고, 그대로 될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러면 말씀이 당신의 삶에 살아 역사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3. 말씀 묵상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는 만남에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생은 만남과 선택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만남이 축복이요, 기회입니다. 만남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만남 가운데 가장 소중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사람은 변화됩니다. 변화와 성숙은 하나님을 믿는 단계에서 하나님을 아는 단계로 올라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다윗은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호세아 6: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하게 됩니다. 호세아 4:6절이 이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성장 비결은 예수님을 아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라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과 초점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크기와 우리 인생의 크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경험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도 자기 자녀를 사랑합니다. 볼 수는 없으나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려면 예수님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매일 알아가는 것이 말씀 묵상입니다. 그냥 알아 가는 것이 말씀을 통해서 알아 가는 것입니다. 영성 훈련에는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말씀 묵상을 통한 영선 훈련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읽은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오늘 내가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마다 거룩한 상상력을 통해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에스더처럼, 비록 묵상하는 본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 속 인물이 이사야와 베드로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자신 안에 감추어진 가능성도 발견했습니다. 그 가능성을 개발하면서 성장하고 성숙했습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호세아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3)
4. 말씀 묵상과 영혼의 양식
새의 두 날개 성령님과 말씀은 영혼을 소성케 하기 위해 함께 역사합니다.
우리 영혼을 강건케 하고 소성시키는 길은
매일 말씀을 먹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처음부터 너무 어렵게 접근해서는 안됩니다. 말씀 묵상은 단순하게 말씀을 먹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의 열쇠는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묵상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요청되는 것은 깊이 있는 깨달음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단순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말씀 묵상을 시작하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말씀을 양식으로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으로 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을 다 이해하고 먹지 않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먹습니다. 몸을 지탱하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 먹습니다. 음식을 만들거나, 음식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은 음식의 재료나 만들어진 배경이나 영양분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섭취된 음식은 우리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힘을 줍니다.
말씀 묵상도 같은 원리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육체가 음식을 먹고 살듯이, 영혼은 말씀을 먹고 삽니다. 말씀은 신령한 젖입니다.(벧전 2:2) 우리 영혼의 식물입니다.(히 5:14)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은 말씀을 먹지 않으면 시들거나 병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나약해질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 이성으로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도 영혼을 위해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그때 말씀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 영혼에 역사합니다.
말씀은 병든 영혼에게 힘을 주고, 병든 영혼을 치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말씀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영혼의 병든 부분을 수술합니다. 잘못된 영혼을 바로 잡는 것은 말씀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영혼을 수술할 뿐 아니라 소성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체험했던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시 19:7)라고 말씀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영혼을 소성케 하시고 위해서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은 영혼을 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증거합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통해서 영혼을 살리십니까? 성령님과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것은 성령의 역사요, 말씀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증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말씀이 함께 역사합니다. 성령님을 떠나서 말씀이 존재할 수 없고, 말씀을 떠난 성령님의 역사는 없습니다. 새의 두 날개처럼 성령님과 말씀은 영혼을 소성케 하기 위해 함께 역사합니다.
우리 영혼을 강건케 하기 위한 길은 매일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은 세 가지입니다. 기록된 말씀, 말씀이신 예수님, 예수님의 몸과 피입니다. 말씀과 함께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을 일컬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을 먹고 마십니다. 영혼의 진정한 음료는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입니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4-55)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7)고 말씀하십니다.
침체된 영혼이 소성하는 길은 성령님 안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먹고,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또한 그 먹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이 영혼에 침투해 들어갑니다. 마치 병든 몸을 위해 약을 먹을 때 약 기운이 온 몸에 퍼져 육체를 치료하듯이, 말씀을 묵상할 때 시든 영혼에 말씀이 스며들어 영혼을 치료하고 소성케 합니다.
말씀 묵상은 영혼을 치료하고 강하게 하십니다. 영혼의 영식인 말씀을 매일 먹고 묵상하십시오. 체계적으로 말씀을 먹도록 하십시오. 모든 말씀을 골고루 먹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으십시오.
우리는 영적인 일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체계적입니다. 육신을 위해 식사하는 것을 보십시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식사합니다. 체계적이고, 습관적입니다. 또한 한 끼만 안 먹어도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양식인 말씀을 먹는 데는 비체계적입니다. 우리 영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너무나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말씀 묵상을 시작할 때는 깊은 깨달음을 얻으려 하기 전에 먼저 말씀을 매일 먼저 먹는 일에 힘쓰십시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으십시오. 영혼을 위해 말씀을 읽으십시오. 영혼을 겨냥하고 말씀을 섭취하십시오. 비록 이성으로 모든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혼은 힘을 얻게 됩니다.
말씀 묵상을 하면 내적인 혁명이 일어나고, 내면의 세계가 정돈되고, 내면에서 놀라운 능력이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비록 처음에는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도 말씀 묵상을 계속하다보면 점점 깨달음이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 묵상이 어렵다고 쉽게 중단하지 마십시오. 영혼의 양식으로 읽으십시오. 머지 않는 날,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5. 말씀 묵상과 삶의 변화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하듯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자신을 가꾸고 변화시킵니다.
말씀은 우리를 더욱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말씀 묵상의 목표는 지식을 실천할 때 일어납니다. 실천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실천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외식하게 만듭니다. 지식인들의 약점은 알기는 알지만 실천할 용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지식은 사람을 비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말씀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말씀에 의해 정복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말씀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변화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삶의 스타일을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변화는 버리고, 떠나고, 비우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고,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떠나고, 진리를 채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모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내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말씀 묵상을 처음 시작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감격과 변화에 대한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말음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 자신 안에 편안함이 깨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말씀 앞에 서면서 제 내면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운 모습, 추한 모습, 더러운 모습, 감추인 이기심, 경쟁심,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는 마음, 부정한 동기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엑스레이가 되어 제 자신의 내면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말씀 묵상을 깊이 하기 전에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제 자신의 변화보다는 성도들의 변화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말씀을 읽으면 성도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말씀을 설교의 재료와 성경 연구의 재료로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을 변화시키고, 성도들의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자신이 말씀 앞에 직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은 인간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정작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 묵상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씀은 성도들을 위한 성경 공부 재료가 아니라 제 삶의 변화를 위해 주어진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적용하는 가운데 내면의 편안함이 깨어졌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저를 책망하셨습니다. 수술하셨습니다. 수술은 아팠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힘들었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저를 교훈하시고 책망하시고 바르게 하셨습니다.(딤후 3:16)
그런 과정을 통과하면서 마음의 편안함은 깨어졌지만, 제 마음에 주님의 평강이 찾아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회개 후에 찾아오는 유쾌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변화를 통해서 맛보는 삶의 환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저는 변화의 대상이 성도들이 아니라 제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사랑의 대상이지 제가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성도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영적 안내자는 다만 성도를 사랑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서도록 이끌어주고,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주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변화의 길을 안내해주는 영적 안내자요. 코치이지 변화를 명령하는 왕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변화를 경험하려면 묵상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매일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회개할 죄가 무엇이며, 순종해야 할 명령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야 할 모범과 피해야 할 모범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간구해야 할 명령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추상적인 깨달음과 생각의 변화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체적인 행동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마음의 소원만 가지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선택하고 결단하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킬 때 놀라운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 기록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할 때 우리는 변화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됩니다. 말씀 묵상을 함에 있어서 기록은 아주 중요합니다. 기록하면 변화를 계획하게 되고, 변화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고, 변화를 점검할 수 있게 됩니다.
변화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마치 나무를 옮겨 심을 때와 같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원래 있던 땅에서 옮겨 심긴 나무는 생존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그 시기를 지탱할 수 있는 에너지와 버팀목입니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기 까지는 많은 에너지와 일정한 기간이 필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는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능력을 받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영적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변화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아주 큰 힘은 꿈입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자기 성장을 위해 변화를 추구합니다.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 자신을 단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십시오. 신부가 신랑을 위해, 신랑이 신부를 위해 자신을 단장하고 가꾸듯이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당신의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십시오.
6. 말씀 묵상과 깨달음의 축복
우리 인생은 우리가 하나님을 깨닫는 만큼 달라집니다.
우리 인생의 크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깨닫고 신뢰하는 크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최상의 축복은 깨닫는 축복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망합니다. 호세아 4:14절을 보면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49:20절도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것도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사 44:18)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깨닫는 자가 결실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바울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골 1:6)라고 말합니다. 영적인 깨달음, 영적인 각성이 있을 때 우리의 속사람은 성장합니다. 풍성한 열매를 자라게 됩니다.
예수님은 깨달음의 축복을 복 중의 복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복 있는 사람이라 말씀하실 때 그것은 깨달음의 복을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주님 자신을 알아 봤을 때 가장 기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리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죄인된 모습도,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과 아름다움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강하여 용맹을 발할 수 있습니다.(단 11:32)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달라집니다. 우리 인생의 크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것의 크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깨달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깨달음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예비하신 은혜의 수단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비밀을 알았던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고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도 예레미야서를 읽는 중에 더 깊이 깨닫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단 9:3) 영적 공격을 받으면서 21일 동안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개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들으신 바 되었음으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단 10:12) 하나님은 말씀을 깨닫기 위해 간구하는 기도를 기뻐 들으셨던 것입니다.
둘째, 영적 안내자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안내자들을 통해서 우리로 깨닫게 하십니다. 영적 안내자들은 말씀을 깨우치는 분들입니다.
빌립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나아갔을 때, 그 내시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물었습니다. 내시가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행 8:31)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빌립이 그 말씀을 풀어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안내자였던 빌립을 통해 내시에게 깨달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풀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두 제자들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눅 24:30-32)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돌아가면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됩니다. 구약 성경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에게 갈 때, 우리 영의 눈을 가리운 수건이 벗어지게 됩니다.(고후 3:15-16)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쓰여졌습니다.(요 5:39) 예수님은 성경을 여는 열쇠요, 깨달음의 본체이십니다.
셋째,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를 가르치는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씀하십니다. 부디 성령님과 함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말씀 묵상의 깊은 세계로 초청받은 사람들은 기도와 영적 안내자와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이 말씀 묵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예비해 주신 은혜의 수단을 통해 말씀을 깊이 깨닫는 풍성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7. 말씀 묵상과 지혜자의 삶
예수님은 가장 탁월한 지혜자이다.
우리가 지혜롭게 되는 길은 지혜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누리는 축복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새벽 기도 후에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그 말씀을 하루 종일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지혜의 원천입니다. 저는 새벽마다 지혜의 샘에서 묵상의 두레박으로 지혜의 말씀들을 끌어들이는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의 말씀을 품고 잠자리에 들 때면 새벽이 기다려집니다. 그 까닭은 새벽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찾아온 성들에게 지혜의 말씀을 나눌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기 때문입니다. 새벽 예배에 나온 성도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혜의 말씀을 받아먹는 것을 보면 말씀 묵상을 하는 목사로서 최상의 보람을 누리게 됩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 속에 모든 축복이 담겨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지혜는 삶의 원리입니다. 삶의 기술입니다. 지혜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문제의 핵심을 보고, 문제 속에서 해결책의 씨앗을 보는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 축복을 보는 것입니다.
지혜는 결국 문제 속에서 비전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위기를 맞이할 때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순발력입니다.
지혜는 환경을 초월해서 승리할 수 있는 형통의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승리 비결도 지혜에 있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했을 때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했습니다.(신 34:9) 다윗의 승리도 지혜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8:30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며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고 말씀합니다.
지식 그 자체는 힘이 아닙니다. 지식을 활용할 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란 지식을 적절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지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이 지혜입니다.
지혜의 핵심은 분별력에 있습니다. 지혜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사람을 분별하고, 때를 분별하고, 기회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선택할 것을 분별하고, 결단할 때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형통의 원리입니다. 지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소유하고 있는 지혜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연장을 다듬듯이 지혜를 거듭 배워야 합니다. 전도서 10:10절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우리는 지혜를 배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지혜 얻는 법을 터득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지혜는 기도함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 지혜를 주십니다. (약 1:5)
지혜는 말씀 묵상을 통해서도 얻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니라”(시 119:991-100)
말씀 묵상은 지혜를 끌어 놀리는 두레박입니다. 묵상 중에 침묵의 세계가 열립니다. 묵상 중에 깊은 영감의 샘이 터지고, 지혜의 생수가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묵상 중에 영감이 춤을 추고, 지혜가 깊은 바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묵상하는 사람은 깊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깊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감추인 지혜를 끌어올릴 수 있는 명철한 사람입니다. 잠언 20:5절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루 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침묵 중에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깊이 있는 지혜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서 배우는 ‘지혜를 얻는 비결’중 한 가지는 지혜로운 자와 동행할 때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 13:20절은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가까이서 동행할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특별히 가까이에서 교제할 사람을 지혜자로 선택해야 합니다. 향기는 가까이 있을 때 맡을 수 있는 것처럼, 지혜자와 가까이서 동행할 때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동행하고 계시는 예수님은 가장 탁월한 지혜자이십니다.(골 2:3) 지혜의 본체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늘 가까이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사역의 목표를 예수님을 전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쳐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데 두었습니다.(골 1:28) 모든 지혜를 배우십시오. 각종 지혜를 전수하십시오. 지혜자로 성장하십시오. 어린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지혜를 가르치십시오.(잠 22:6)
지혜서 중의 지혜서는 잠언입니다. 잠언은 31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매일 날짜에 맞추어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한 달에 한 번씩 잠언을 읽게 됩니다. 잠언은 긴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지혜를 짧고 함축된 언어로 담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매일 잠언을 가까이하십시오. 잠언을 묵상하십시오.
성령님 안에서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성령님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십니다.(사 11:2) 지혜의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십시오. 성령님과 함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지혜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에 유익하고, 참된 자유를 누르게 되고, 관계에 탁월하도록 도와주는 지혜를 말씀 묵상을 통해서 얻길 바랍니다.
8. 말씀 묵상과 마음 가꾸기
말씀 묵상은 우리의 마음 정원에 말씀의 등불을 담아줌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잘 살피고 가꾸게 해 줍니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잠언 4:23절을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활동 무대입니다. 마음 속에 지혜의 샘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잠언 20:5절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마음 속에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사람의 마음은 가장 부패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잔해를 잉태하고 죄악을 생산합니다.(사 59:4) 한 인간의 마음 속에 천국과 지옥이 함께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중요성을 역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은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무엇을 쌓느냐에 따라 우리의 언어가 결정되고, 우리의 인격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영성 생활이란 마음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이해하고, 마음을 관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은 정원과 같습니다. 가꿀수록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그러나 가꾸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황폐한 사막처럼 되고 맙니다.
마음을 잘 관리하면서 먼저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은 무엇을 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는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되어야 합니다. 정원사는 좋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좋은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씨앗을 가꾸는 것이 말씀 묵상입니다. 말씀 묵상을 하는 사람은 정원사와 같습니다. 정원사가 없는 정원은 없습니다. 정원사는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부지런히 가꾸어야 합니다.
정원사에게 방심은 금물입니다. 정원은 하루만 돌보지 않아도 잡초가 돋아납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의 정원에 가라지를 뿌리고 쓴 뿌리를 내리게 합니다. 이 잡초와 쓴 뿌리들은 우리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정원사는 좋은 시앗을 심을 뿐만 아니라 잡초를 부지런히 뽑아야 합니다.
그렌벨 클라이저는 마음의 정원을 잘 가꾸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려면 땅을 고르고 잡초를 뽑아내야 한다. 그 다음엔 마음의 정원에다 사랑과 명상, 친절과 선, 그리고 지혜의 씨앗을 심고 잘 가꾸어야 한다. 이런 일을 꾸준히 실천한다면 당신의 영혼은 차츰 향기로워질 것이고, 당신의 삶 역시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인생은 우리가 얼마나 큰 땅을 소유했느냐보다 그 당에 어떤 씨앗을 심고, 얼마나 잘 가꾸느냐로 결정됩니다.
정원사에게 필요한 것은 성실함입니다. 나태와 방심은 금물입니다. 조급함도 금물입니다. 좋은 씨앗을 뿌린 다음에는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원사는 인내를 취미로 삼아야 합니다. 인내를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인내는 모든 사람의 정원에서 자라는 꽃이 아닙니다. 정원사가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하는 성품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과 암송하는 것은 마음의 정원에 씨앗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 묵상은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말씀은 등불과 같아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줍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자라고 있는 잡초를 보게 됩니다. 회개란 바로 잡초를 뽑아내는 것입니다.
잡초는 보는 즉시 뽑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마음의 정원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잡초를 자라게 하는 쓴 뿌리는 우리 안에 있는 거짓, 원한, 미움, 분노, 투기,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 잡초들은 좋은 씨앗마저도 건강히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교만하게 만듭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쓴 뿌리를 제거하는 길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고 회개하는 것입니다.(빌 2:5, 마 11:29) 상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통회하는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마음의 정원을 잘 가꾸기 위해서는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성찰해야 합니다. 정직함이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정직한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회개는 정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함에 이르는 고통을 통해 우리는 평강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향기로운 정원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매일 말씀의 씨앗을 마음의 정원에 심으십시오. 말씀 묵상을 통해 마음의 정원을 가꾸십시오. 매순간 예수님에게 당신의 마음을 드려, 그분이 당신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영성생활의 기초이며, 마음을 관리하는 것은 성도의 가장 고귀한 본분입니다.
당신의 마음의 정원을 잘 가꿀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정원 가꾸는 일을 도와주십시오. 다른 사람의 마음의 정원을 가꾸어 주는 섬김을 통해 우리는 더욱 탁월한 정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나는 평생토록 엉겅퀴를 뽑아내고 꽃을 심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 꽃이 생각과 마음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될 때 이 세상은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말씀 묵상에서 열매를 거두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의 자리에 직접 현존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근심 걱정을 버리고 마음의 모든 정서적 힘과 사랑의 관심과 지속적 기쁨으로 그리해야 합니다.-섹스니의 루돌프
9. 말씀 묵상과 성경 암송
말씀을 생각에 심고 마음에 심으십시오.
얼마나 많은 말씀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하나님의 사람의
영적 부요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깊이 있는 말씀 묵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암송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려면 우리 내면에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내면에 말씀을 담고 심는 것이 성경암송입니다. 말씀을 생각에 심고, 마음에 심으려면 성경을 읽고 암송해야 합니다.
묵상이란 말은 ‘반추’하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소가 음식을 먹은 다음에 음식을 꺼내어 다시 씹어 먹는 것을 반추라고 합니다.
깊이 있는 말씀을 묵상하려면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우리 내면에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꺼내어서 반추하는 과정이 묵상의 과정입니다. 음식 자체가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이 소화될 때 우리 안에서 능력이 됩니다. 에너지가 됩니다. 기운이 됩니다. 생명이 됩니다. 소화된 음식이 피를 만들어내고, 피가 곧 생명을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먹는 말씀을 소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부요함은 말슴의 부요함에 있습니다. 그 내면에 얼마나 많은 말씀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하나님의 사람의 영적 부요를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목자의 풍성함은 소유한 말씀의 풍성함에 있습니다. 양의 행복은 풍성한 말씀을 소유한 목자 곁에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양을 먹일 수 있으며, 양들이 얼마나 건강하게 양육될 수 있느냐는 목자가 얼마나 풍성한 말씀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는 무엇보다도 말씀으로 충만해야 하고, 말씀에 통달해야 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셨습니다.(요 1:14) 말씀에 통달하셨습니다. 입을 여시면 진리가 나왔습니다.
말씀 충만을 경험하려면 말씀을 많이 읽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많이 암송해야 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엡 6:17) 많은 말씀을 암송한 사람은 좋은 검을 많이 가진 장수와 같습니다. 많은 말씀을 암송한 사람은 많은 화살을 가진 궁수와도 같습니다. 화살을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위험합니다. 많이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윗도 골리앗과 싸울 때 물맷돌 다섯 개나 준비했습니다. 하나에 실패하면 또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에게 다양한 무기와 다양한 전법이 필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들도 다양한 말씀과 다양한 영적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성령의 검인 말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암송해야 합니다. 주제별로 암송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통해서 공격하는 사탄의 공격을 적합한 말씀으로 막아내야 합니다.
성경을 암송하려면 말씀에 대한 영적 지식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세상 책들과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은 세상의 책들과 다릅니다. 세상의 책들도 지식과 지혜와 정보와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구원의 진리는 없지만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어느 정도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들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더 홈즈의 말처럼, 사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창조하셨고 현인들에게 어느 정도 지혜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뱀처럼 지혜로운 세상 사람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지혜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참된 진리입니다. 참된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말씀이 참된 진리가 되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삶의 우너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벧전 1:23-25) 말씀을 암송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생명의 씨에 비유하셨습니다. 말씀은 작은 씨처럼 역사합니다. 그 씨를 품고 가꿀 때 자라게 됩니다. 서서히 성장하게 됩니다. 말씀을 암송한다는 것은 말씀의 씨를 품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많은 말씀을 심으면 많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말씀을 많이 암송해야 하는 이유는 기근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적 기근이 찾아올 때 말씀을 많이 암송해 온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을 많이 암송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영적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많이 암송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먹이는 일을 맡기실 때 그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암송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씀을 좋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말씀을 잘 암송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감동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감동한 것을 오래 기억합니다. 말씀을 잘 암송하려면 뜻을 생각하면서 암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긴 말슴을 짧게 나누어서 암송하면 더욱더 잘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암송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을 주야로 암송하는 것입니다. 반복이 성경 암송의 열쇠입니다. 주야로 묵상하기 전에 우리는 주야로 암송하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또한 암송한 말씀을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기도할 때, 전도할 때, 신앙상담을 할 때,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자녀를 양육할 때, 양육편지를 쓸 때 사용해 보십시오.
암송한 말씀 위에 또 다른 말씀을 암송해 나가십시오. 그때 우리는 영적으로 풍성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무장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성경을 많이 암송하십시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것입니다.
10. 말씀 묵상과 언어의 능력
말은 인생의 방향을 바꿀 정도로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기에 말씀으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 묵상은 형통의 원리입니다. 미래를 창조하는 원리입니다. 미래를 창조하는 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생각은 씨앗입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미래를 창조합니다. 생각과 함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말입니다. 생각이 씨앗이라면, 생각을 뿌리는 것이 말입니다. 생각이 모든 것의 열쇠가 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기 전에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말씀이 되는 순간, 우주는 그 생각을 형체화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천지를 창조한 것입니다.(히 11:3)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을 따라 우주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다 우리가 마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형체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중요하고, 언어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입술로 고백되는 순간, 그 말이 우주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말씀이 나올 때 그 말씀을 따라 모든 우주는 형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에게도 언어를 통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아담에게 모든 만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도록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창 2:19-20)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권세를 주심으로써 아담이 각 생물들에게 준 이름, 즉 그 말이 그들 각각의 미래를 창조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먼저 이름을 바꾸시는 것을 성경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한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말하고 듣는 우리의 이름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고, 그 생각이 우리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고, 그 언어가 우리의 미래를 창조해 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이를 갖지 못하고, 생산할 능력을 이미 상실한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으로 바꾸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래’는 ‘사라’로 바꾸도록 명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사라는 ‘열국의 어미’라는 뜻입니다.
아직 자식이 없지만 그들이 스스로를 혹은 서로를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라고 부르는 가운데 그들의 생각이 변화되고, 그들의 언어가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죽은 몸과 같은 그들의 몸에서 이삭이 출생했고, 그들은 결국은 열국의 아비와 어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혀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온 몸을 다스리는 것도 우리의 혀임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3:2-3절은 혀의 힘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주의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인생을 매고 푸는 것도 우리 혀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는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혀를 잘 사용하면 인생을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믿는 대로 됩니다. 사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과거에 갖고 있었던 믿음의 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따라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에 걸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온 백부장에게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셔도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백부장의 언어는 그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믿음과 비례합니다. 우리 믿음의 크기는 우리 생각의 크기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과 생각의 크기가 우리의 언어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의 크기만큼, 우리의 미래는 커집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색깔처럼, 우리 인생의 색깔이 만들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크게 가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롬 10:17) 믿음은 말씀을 듣고 묵상할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묵상을 해야 하고,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묵상하면 그것이 우리의 언어가 되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귀에 들린 우리의 말대로 시행하십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라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7-28)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긍정적인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언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라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니라”(막 11:23)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은 우리 인생의 장애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장애물을 말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매듭을 풀고, 길을 평탄하게 하고,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에는 창조 능력이 있습니다.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사람과 환경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를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와 같다고 했습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 3:4-5) 배의 키는 비록 작지만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처럼 우리의 혀는 작지만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언어 문제는 사실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언어를 관리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좋은 언어를 당신의 마음에 가득 채우십시오. 말씀 묵상을 통해 언어의 능력을 체험하십시오. 능력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언어를 생활 속에서 사용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의 언어를 버리십시오. 감사하는 말을 사용하십시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십시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믿음을 따라 말하십시오.(롬 14:7)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아름다운 미래를 바라보며, 입술로 고백하십시오. 그때 축복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11. 말씀 묵상과 영적 전쟁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면 사탄의 공격을 무서워하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탄은 말씀 앞에서 무장해제 당합니다.
탁월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분별력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를 알고, 영의 움직임을 압니다.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영적 통찰력입니다.
우리가 소유해야 할 영적 지식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영적 전재 d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뿌리를 영적인 안목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악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안에 성령님이 들어오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영의 세계에는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악한 영들과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고 말씀합니다.
사탄은 유혹자입니다. 진리를 왜곡시키는 자입니다. 사탄은 분리자입니다. 파괴자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해서 사망을 가져오게 한 원흉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탄입니다. 이 사탄을 물리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대적 마귀는 믿는 자들을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고 말합니다.
어떻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셨을 때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거듭 “기록되었으되” 하시며 말씀으로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들을 데리고 왔을 때에도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8:16절을 보십시오. “저물매 사라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니”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암송하고 계셨습니다. 말씀을 주제별로 암송하셨습니다. 말씀을 사용하실 줄 아셨습니다. 다양한 주제로 예수님을 유혹하는 사탄을 적절한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은 주로 생각을 따라 역사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요 13: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하며, 생각으로 역사하는 사탄을 말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주로 사용하는 화살은 의심, 두려움, 혼돈, 좌절, 죄책감, 열등의식, 무능력, 그리고 염려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화전을 이기는 길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엡 6:16)
사탄을 이기는 공격 무기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들어 보십시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1, 17)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악한 자를 이긴 청년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청년들아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4)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임을 절실하게 깨닫고 말씀을 암송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어린 시절부터 말씀을 암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을 암송하되 주제별로 암송하십시오. 주제별로 공격하는 사탄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주제별로 성경을 암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의심으로 공격하면 히브리서 11:6절로 막아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염려로 공격하면 빌립보서 4:6-7절로 막아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두려움으로 공격하면 이사야 41:10절로 막아내야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열등의식으로 공격하면 에베소서 2:10절로 막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탐욕으로 공격하면 야고보서 1:15절로 막아내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교만으로 공격하면 베드로전서 5:5절로 막아내야 합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소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주제별로 되어 있는 성경 암송 카드를 구입해서 암송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경 암송의 열쇠는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관심이 있고, 관심이 있는 것은 암송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반복해서 암송하십시오. 반복은 성경 암송에 대가가 되게 합니다.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해 줍니다. 암송한 말씀이 가슴에 깊이 머물도록 묵상하십시오. 암송한 말씀을 묵상하면 그 말씀의 주제가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말씀을 주제별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암송한 말씀을 자주 사용할수록 가슴에 오래 남게 됩니다. 암송한 말씀을 영적 전쟁에 사용하고, 기도할 때, 상담할 때, 교제할 때, 전도할 때 사용하십시오.
말씀을 암송해서 가슴에 가득 차게 되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약한 믿음이 강해집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 10:17)
믿음은 곧 담력입니다. 내적인 확신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면 사탄의 공격을 무서워하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십시오. 쓰여진 말씀을 마음에 품으십시오. 말씀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사용하십시오. 말씀 묵상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십시오.
12. 말씀 묵상과 형통하는 삶
말씀 묵상이 형통의 비결이 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말씀 속에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으로 형통하는 비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묵상은 하나님의 사람을 형통케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형통하는 비결은 말씀 묵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으로 형통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 묵상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고 말씀하셨습니다.
형통은 좋은 것입니다. 좋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형통을 약속하셨습니다. 형통은 잘 되는 것이며, 번영하는 것이며, 앞서가는 것입니다.(시 1:2-3, 신 28:13) 형통이라는 말을 성공이라는 말로 쓰기도 합니다.
형통하면 제일 좋은 점은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하지 않은 것을 줄 수 없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깨우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주려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을 주려면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혜를 주려면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물질을 주려면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주는 것은 소유를 전제로 합니다. 형통은 바로 나눌 수 있는 축복입니다.
최상의 나눔은 우리의 풍성한 존재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은혜와 진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 존재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삶의 부요와 풍성함은 나눔에 있습니다. 나누기 위해 형통해야 합니다.
성경적인 형통은 과업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맡기신 과업을 성취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여호수아의 형통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형통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기근으로 죽을 운명에 놓인 열방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적인 형통은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형통하기를 원했던 것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형통을 소원하며 기도했습니다.(느 1:11) 느헤미야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면 안락한 수산궁을 떠나야 하고, 반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하고, 과업 송취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위해 나섰고, 그 일을 위해 형통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에서 예루살렘 성벽 건축가로, 건축가에서 예루살렘 총독으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성공을 섬김으로 연결시켰고, 하나님의 과업을 성취하는데 디딤돌로 사용했습니다.
말씀 묵상이 형통의 비결이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성품과 인격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한 형통은 한 번 형통하고 마는 일회용 형통이 아닙니다. 형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번 형통하는 것이 아니라 형통이 그 뒤를 따라다니는 형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인간의 존재가 형통한 자로 변화되는 비결이 말씀 묵상에 있습니다.
무엇을 성취하고 무엇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면, 무엇을 성취하고 무엇을 얻는 것이 부산물로 따라옵니다. 무엇이 되는 것은 존재의 문제입니다. 존재가 형통한 자로 변화되면, 그는 조건과 환경을 넘어서 형통한 자가 됩니다. 시대를 넘어서 형통한 자가 됩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의 모델입니다. 요셉은 장소와 환경과 시대를 초월해서 형통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그리고 애굽의 궁중에서도 형통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존재 자체가 형통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자 요셉은 그가 나서서 형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형통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 존재 자체가 형통 덩어리였습니다. 그는 형통했고, 형통을 만들었고, 형통을 나누었던 사람입니다.
말씀 묵상을 하면 묵상하는 사람의 존재에 말씀이 서서히 젖어 들어가서 그 존재가 말씀으로 변화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이 생각에 흐르고, 마음으로 내려가고, 피에 흐르고, 존재에 흘러 넘쳐서 그 사람 속에 진리가 구현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 묵상의 모델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셨습니다.(요 1:1)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셨습니다.(요 1:14) 예수님의 전 존재는 진리셨습니다.(요 14:6)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셨습니다.(요 1:14) 예수님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골 2:3)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형통한 분이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형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형통은 그 존재에 있었습니다. 그 성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시는 일마다 형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신 것마다 형통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형통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막 10:45) 예수님의 형통은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성취하는 것보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섬기고,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요 17:4)
예수님은 형통이라는 말 대신에 풍성한 삶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로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요 10:30) 예수님이 말씀하신 풍성한 삶은 섬김을 통해서 오는 보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는 기쁨을 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예수님처럼 말씀이 우리의 전 존재 속에 나타납니다. 말씀이 육신 속에서 흘러서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을 천천히 읽으십시오.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시오. 말씀이 당신의 생각에 스며들고, 당신의 마음에 젖어 들게 하십시오. 말씀의 바다에 빠지십시오. 말씀이 당신의 혈관에 흐르게 하십시오. 말씀을 단순히 소유한 자가 아니라 말씀에 젖어 있는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 묵상으로 형통한 자가 되십시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내가 형통하리라”(수 1:8)
13. 말씀 묵상과 창조적인 삶
좋은 생각을 넘어서 좋으신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좋으신 예수님의 성품과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의 영원한 미래가 밝아집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 충만의 은혜를 체험한 다음으로 누리게 된 최고의 축복이 있다면 말씀 묵상입니다. 말씀 묵상은 제인생과 미래를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말씀 묵상이 어떻게 제 생애를 변화시켜 주었을까요?
말씀 묵상은 제 생각을 바꾸어줌으로써 제 생애를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미래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법칙 가운데 ‘생각의 법칙’이 있습니다. 생각은 미래를 창조하는 씨앗입니다.
생각의 법칙은 농작의 법칙과 같습니다. 농작의 법칙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심는 씨앗의 종류에 다라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씨앗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한 씨앗을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씨앗 가운데 좋은 씨앗을 우리가 선택해서 시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씨앗을 선택해 주시지 않습니다. 씨앗을 선택하고, 씨앗을 심고, 또한 가꾸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씨앗을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이 정말 원하는 열매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따라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생각은 씨앗과 같아서 심는 대로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이 순간 생각의 씨앗을 선택할 때 곧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물론 스쳐가는 모든 생각이 우리의 삶 속에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치는 농부가 씨앗을 심었다고 해서 모든 씨앗이 다 열매 맺지는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농부가 씨앗을 심은 다음에, 싹이 난 이삭을 잘 가꿀 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가 심은 씨앗이 잘 자라도록 지속적으로 돌볼 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한 생각을 집중해서 생각하고, 반복해서 생각하면, 그 생각은 에너지가 됩니다. 주야로 생각하게 되면 그 생각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려가고, 거대한 에너지가 되어 파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생각이 점점 커질 때 우주가 그 생각의 파장을 알게 됩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그 생각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인도하십니다.
마음이 통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은 서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렬한 생각의 파장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끌리게 됩니다. 그 사람이 가진 소중한 과업을 성취하도록 돕게 됩니다. 결국 그 생각은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말씀 묵상은 우리가 좋은 생각을 분별하고, 좋은 생각을 심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좋은 생각을 집중해서 묵상하므로 그 생각이 거대한 에너지가 되도록 도와줍니다. 좋은 생각이 거대한 에너지가 될 때 그 생각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현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아름답게 창조하는 길은 아름다운 생각을 심고, 그 생각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심을 때 우리의 환경은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먼저우리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 생각 안에는 환경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새뮤얼 스마일스는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성품을 거두고, 성품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길의 첫출발은 좋은 생각을 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려면 생각의 중요성을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은 모든 것의 열쇠입니다. 생각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생각은 미래를 창조하는 재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은 우리가 미래에 성취하고 싶고, 되고 싶은 비전입니다. 그 꿈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 그 꿈은 바로 우리의 상상력입니다. 그 꿈은 바로 우리의 생각입니다.
생각은 우리의 행복과 불행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6:19절을 보면 하나님이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재앙은 그들의 생각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버림으로써 생각이 허망하여졌습니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습니다.
생각은 우리의 태도를 결정합니다. 태도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이나 환경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반응을 의미합니다. 태도는 우리 눈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의 눈의 초점을 따라 생각이 변화되고, 생각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변화됩니다.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창문 밖으로 하늘을 보고 시를 지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같은 창문 밖으로 진흙땅을 보며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한 사람은 시인이 되었고, 한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었습니다. 무제는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디를 보느냐’입니다. 이에 따라 그 미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어디를 보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를 보느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천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할 줄 알았습니다. 그 까닭은 그의 눈길을 환경에 두지 않고 예수님께 두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우리의 행복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 살면서도 타락했습니다. 행복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생각 속에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인간은 자신의 마음 먹는 정도에 따라 행복해진다”고 말했습니다.
생각에 따라 우리의 성숙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어떤 인물인가는 우리의 소유나 환경이나 직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첫째로, 좋은 생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고 말합니다. 좋은 생각을 분별하고, 좋은 생각을 선택하십시오.
둘째로, 좋은 생각을 묵상하십시오. 생각의 변화는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때 일어납니다. 그 지식을 깊이 묵상할 때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묵상이란 깨달음에 이르는 깊은 생각입니다. 깨달음이란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깨달음을 다른 말로 총명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이 더욱 깊어지면 지혜를 얻게 됩니다. 지식과 총명이 깊은 생각을 통과할 때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문제 해결 능력입니다. 인생을 형통하도록 만드는 삶의 기술입니다.
셋째로, 좋은 생각을 통해 사건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십시오. 묵상을 통해 지혜를 얻게 되면 생각을 변화시키는 능력까지도 얻게 됩니다. 지혜 중의 지혜는 사건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는 성장의 장애물이 되는 열등의식, 핍절 의식, 불가능의식을 형통 의식, 풍부 의식, 가능 의식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말씀 묵상을 하면 우리의 생각과 의식이 변화됩니다. 생각이 변화되면 변화된 생각을 따라 환경이 변화됩니다. 제임스 앨런은 “현재의 당신 모습은 당신의 과거 생각의 결과이며, 미래의 당신 모습은 당신의 현재 생각의 결과이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미래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좋은 말씀을 통해 좋은 생각을 묵상하십시오. 당신의 미래가 밝아질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넘어서 좋으신 예수님을 묵상하십시오. 좋으신 예수님의 성품과 말씀을 묵상라면 당신의 영원한 미래가 밝아질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축복된 미래를 창조하길 바랍니다.
14. 말씀 묵상과 침묵 기도
말씀과 기도는 영성의 가장 초보 단계이기도 하고
가장 깊은 단계이기도 합니다.
말씀 묵상은 우리를 깊은 기도,
즉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기도로 인도합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말씀 묵상을 위해 우리는 먼저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읽은 말씀을 마음에 두고 그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요 8:31) 그리고 묵상하는 말씀에 기도로 반응해야 합니다. 켄 가이어는 “말씀을 읽고 묵상이 없으면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에 앉아 음식을 쳐다만 보고 먹지 않는 것과 같다. 말씀을 묵상하되 기도로 반응하지 않으면 음식을 씹기만 하고 삼키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말씀 묵상 훈련을 통해 제 자신이 누린 은총은 침묵 기도의 은총입니다. 침묵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가꾸는 기도입니다. 침묵 기도는 우리의영혼의 뿌리를 돌보는 기도입니다. 침묵 기도는 우리의 영혼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기도입니다. 침묵 기도는 예수님과 친밀한 사랑 속에 들어가는 기도입니다.
말씀 묵상에 깊이 들어가면 말씀은 우리 내면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때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가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 존재 속에 들어오고, 우리의 존재가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은총의 사건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는 침묵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 마음 속에 담아둔 말씀을 꺼내어 묵상할 때 우리는 말씀에 몰입하게 됩니다. 말씀에 집중하게 됩니다. 말씀에 집중할 때 우리의 마음은 태풍의 눈처럼, 바퀴의 축처럼 엄청난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환경을 초월한 신비로운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상태가 영혼의 침묵의 상태입니다.
침묵은 외적 침묵과 내적 침묵이 있습니다. 외적 침묵은 우리의 혀를 금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대화를 잠시 멈추는 것입니다. 외적 침묵을 위해 우리는 한적한 곳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환경의 변화는 외적 침묵의 시간을 갖는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너무 분주한 나머지 침묵하는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조급함은 마귀 자체입니다. 조급함을 적으로 삼을 때 우리는 침묵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외적 침묵을 방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소음입니다. 우리의 주위는 때로 소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동차 소리, 전화소리, 음악 소리, 그리고 군중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 우리는 조용한 곳, 한적한 곳을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적한 곳을 찾아간다 할지라도 내적 침묵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장소가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 침묵이 우리의 혀를 금하는 것이라면, 내적 침묵은 우리의 내면의 혀를 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두 개의 혀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혀로 말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없이 마음으로 말한 것들을 결국 우리의 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혀를 금한다는 것은 내면의 요동치는 언어들, 불평들, 변명들, 자기 방어의 언어들을 금하는 것입니다. 외적 침묵보다 내적 침묵이 어려운 것은 내적 침묵은 많은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누구라도 실천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침묵의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적 침묵의 훈련을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면 우리는 침묵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침묵 속에 고요히 묵상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회개의 시간을 갖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 내면의 요동치는 언어들을 금하는 것만이 내적 침묵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보다 한 단계 들어가서 내면의 요동치는 언어들을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 그 뿌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드러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쓰레기와 같은 집착들을 버리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완벽하지 못해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투명해지는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쓰레기를 비우듯이 우리 마음의 악한 언어들, 탐욕의 언어들, 이기적인 언어들을 비우고 나면 우리는 더욱 깊은 침묵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말씀 묵상과 침묵을 통해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나면,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비우는 데서만 끝난다면 그리스도인의 묵상이 초월 명상과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비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채움을 입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 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지면 우리는 침묵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침묵을 넘어 침묵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말씀 묵상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영성 훈련의 두 날개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영성의 가장 초보 단계와 영성의 가장 깊은 단계는 하나입니다.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 역사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고, 성령님은 기도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말씀과 기도를 연결 시켜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말씀하십니다. 말씀과 기도가 하나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친밀해질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풍성한 열매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됩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입니다. 그런 까닭에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친밀한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요 15:10)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상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앙망하고, 사모하고, 열망하는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갖는 사귐의 기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기본은 무엇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본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필요를 따라 간절하게 기도드리는 강청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의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점점 더 깊어져야 합니다.
깊은 기도는 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기도입니다. 깊은 기도는 나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는 기도입니다. 깊은 기도는 예수님과 친밀한 사귐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기도입니다. 그 친밀한 기도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기도의 정상은 무엇을 구하는 것보다 우리의 존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중보기도 사역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이 되고, 예수님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고,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은 우리를 깊은 기도의 삶으로 초청합니다.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침묵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깊은 영성으로 들어가는 데 침묵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성경과 침묵과 영적인 인도자는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개인적인 길을 찾는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길잡이다”고 말했습니다.
침묵 기도를 위해서는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고독이 없이는 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우리로 하여금 때로 고독한 겨울나무처럼 살도록 권면합니다. 나무는 활동이라는 잎사귀가 떨어지는 계절에 고독한 겨울을 맞이합니다. 겨울나무를 통해 우리는 나무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나무에게 있어서 겨울은 자신을 발가벗는 시간입니다. 모든 활동을 중지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겨울은 나무를 보존하고 또 강화시킵니다.
겨울에는 나무의 힘이 바깥 표면에서 소모되기보다는 그 나문의 수액이 나무의 안쪽 깊은 곳까지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는 점점 힘을 얻게 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내면은 더욱 충실해집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고요한 침묵 중에 들어갈 때,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난 속에서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의 모습은 벌거벗은 겨울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나 고독과 침묵과 영혼의 깊은 밤을 통해 우리의 영혼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집니다. 이전보다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말씀 묵상에 기도로 반응하십시오. 내면의 침묵 중에 깊은 내면의 성소에 들어가십시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를 드리십시오. 내면의 성소에서 예수님을 만나보십시오. 말씀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깊은 사랑에 빠져 드십시오. 사역의 최고봉인 중보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고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 사역자가 되십시오. 그때 우리 개인의 말씀 묵상과 침묵 기도가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중보기도 사역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15. 말씀 묵상을 지속할 수 있는 원리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생애가 가장 행복한 생애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말씀 묵상을 열망하는 사람의 한결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지속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작심삼일이란 말은 말씀 묵상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말씀 묵상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말씀 묵상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있는 것만 보아도 당신은 말씀 묵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말씀 묵상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고민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저의 경험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날마다 말씀 묵상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묵상을 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어떤 때는 말씀 묵상을 하지 못했으면서도 말씀 묵상을 하는 체했던 때가 있습니다.
말씀 묵상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말씀 묵상을 매일 실천하지 못하는 것ㄹ은 영적 의지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의자가 따라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말씀 묵상의 초기에는 약한 의지력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고민을 거듭하면서 영적 의지력을 강화하는 원리를 하나 둘씩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배운 원리들을 제 삶 속에 적용하면서 점점 영적 의지력이 강화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말씀 묵상을 위해 영적 의지력을 강화했는데 그 결과는 제 삶 전반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운동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고, 학습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인간관계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사람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말씀 묵상을 위한 영적 의지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단순히 ‘의지력’이란 말을 쓰는 대신에 ‘영적 의지력’이란 말을 쓰고 있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은 육신적인 의지만으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말씀 묵상을 제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마음에 있는 말씀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마 13:1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말씀 묵상을 싫어하는 이유는, 말씀 묵상을 통해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암송하고, 암송한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 말씀을 깨닫는 순간, 말씀은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사탄이 와서 빼앗아갈 수 없도록 말씀은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탄은 우리가 말씀 묵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말씀 묵상하는 사람을 방해합니다. 이런 영적인 세계를 아는 사람은 말씀 묵상을 위해 먼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 묵상은 오직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실 때 지속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말씀 묵상을 지속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약 1:5) 지혜는 우리의 영적 의지력을 강화하는데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지혜는 우리의 약점을 보완해 주고, 우리의 장점을 강화해 줍니다.
영적 의지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말씀 묵상의 비결임을 거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 주야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것을 가까이에 둡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늘 곁에 두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투자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말씀을 종일 묵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말씀 묵상을 위한 영적 의지력이 자연스럽게 강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적 의지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뜻을 정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한 인생을 살았습니다.(단 1:8) 말씀 묵상은 원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목표를 설정한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한 방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한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다른 방향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뜻을 정하기까지는 힘이 듭니다. 결정하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은 나누이게 됩니다. 마음이 나누이게 될 때 무력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뜻을 정하고 한 마음을 품으면 집중력이 생깁니다. 우리 안에 놀라운 에너지가 솟구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 묵상을 하기로 뜻을 정했다면 예외를 두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거룩한 습관이 될 때까지 매일 실천에 옮기도록 하십시오.
영적 의지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의 유익을 거듭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의 중요성을 거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도기가 부여될 때 가장 잘 움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심리를 잘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느 때 가장 잘 움직여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탁월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기 전에 자신을 잘 움직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전에 자기에게 동기를 잘 부여할 줄 압니다. 새로운 생각은 우리 생각을 자극합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사고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은 동기를 부여받을 때입니다. 동기는 우리 스스로가 유익하다고 생각할 때 가장 잘 움직여집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씀 묵상을 하게 되면 정말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형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지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학습에 탁월해집니다. 지혜를 얻게 됩니다. 자기를 개발할 수 있는 원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삶의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영적 분별력이 생깁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상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존재가 변화됩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인격이, 우리의 습관이, 우리의 운명이 변화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 묵상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의 유익을 거듭 기억하십시오. 말씀 묵상의 축복을 직접 경험하십시오. 말씀 묵상의 맛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말씀 묵상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영적 의지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의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그 중요성을 안다고 해도, 말씀 묵상의 방법을 모르면 힘이 듭니다. 이유를 안다고 해도 방법을 모를 때 우리는 좌절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영적 안내자들을 통해 말씀 묵상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원리와 이치를 터득하고, 구체적인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보다 조금이라도 말씀 묵상에 앞서간 분들을 만나면 겸허하게 배우십시오. 거듭 기본으로 돌아가서 기본기를 다지도록 하십시오. 말씀 묵상의 대가는 없습니다. 다만 초심자만 있을 뿐입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암송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기본적인 일보다 더 중요한 기술은 없습니다. 말씀 묵상의 깊이를 더하기 원한다면 다양한 영적 훈련을 겸하십시오. 말씀 묵상이 입체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 의지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영적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위한 영적 안내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말씀 묵상의 원리를 터득하게 됩니다. 말씀 묵상을 위한 영적 안내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예수님이 묵상의 세계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위한 영적 안내자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기름 부으심을 통해 말씀 묵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요일 2:27)
말씀 묵상을 위한 영적 안내자는 훌륭한 영적 스승들입니다. 그분들이 쓴 좋은 책들입니다. 영적 안내자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스승이나 안내자의 도움을 원하지 않는 고독한 영혼은 주인이나 관리인 없이 들판에 버려진 한 그릇의 과일 나무와도 같다. 열매를 맺는다 해도 쓸데없으니 익기 전에 나그네가 따버리기에 헛일이다”고 말했습니다.
말씀 묵상을 잘 안내해 주는 분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 묵상을 자극할 수 있는 책들을 가까이에 두십시오. 책상 위에, 침실 곁에, 차 안에 두십시오. 눈에 항상 띄는데 두십시오. 우리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을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동반자로 두어야 합니다. 큐티 나눔 모임에 소속되는 것은 정말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영적 의지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 묵상을 가르치십시오. 도스 트로트맨은 “진리는 우리의 혀끝과 펜끝을 통과할 때 명료해진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씀 묵상을 가르치다 보면 우리는 말씀 묵상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연구하게 됩니다. 기술을 익힐 때도 구체적으로 익히게 됩니다. 자신에게 배우고 있는 사람보다 모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말씀 묵상을 매일 실천하게 됩니다. 말씀 묵상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음성과 깨달은 것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에 기록하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묵상을 다른 사라에게 가르치는 중에 더욱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더욱 성장하게 되고,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더욱 원숙한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영적 의지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실패할 때마다 거듭 일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잠언 24:1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실패를 딛고 전진하십시오. 오뚝이처럼 거듭 다시 일어나십시오. 얼마나 많이 실패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거듭 다시일어서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지속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었던 저의 경험을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말씀 묵상에 도움이 되는 성경 말씀을 선택해서 아침저녁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주기도문을 암송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1:8절, 시편 1:2-3절, 디모데후서 3:16절, 요한복음 15:7절 등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어서 주제별 성경 암송을 반복해서 묵상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영향을 받는 것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 묵상을 열망하는 사람은 말씀 묵상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성경 말씀과 책, 그리고 사람들의 영향력 속에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버린 사람을 버리셨습니다.(삼상 15:23, 26) 하나님은 말씀을 붙잡은 사람을 붙잡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십시오. 말씀에 붙잡힌 생애가 되십시오. 무엇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생애가 되길 빕니다.
이 책을 쓴 저의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다시 한번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조국 교회와 이민 교회 위에 말씀을 사랑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암송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을 실천하는 말씀 운동이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방에 전파하는 부흥이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한번 우리 민족에게 성령님 안에서 말씀의 부흥을 보내 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