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편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한국 선교
네스토리안 교회는 주후 431년 에베소에서 열린 제 3차 Ecumenical Council에서 당시의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불러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Cyril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고 이단으로 정죄하면서부터 생겨난 기독교의 한 분파이며 이들이 인도, 아라비아, 중국 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635년 당 태종 때 중국에 들어와 경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경교가 당나라에 의해서 신라에 전래됐을 가능성에 대해서 영국의 고고학자 E.A.Godon이 불국사의 나한상과 관음보살상에서 그 흔적을 주장하고 김양선 목사가 불국사 경내의 돌십자가와 마리아를 닮은 관음보살상과 대흥사의 동십자가를 근거로하여 주장하고 있으나 근거가 미약하다.
1253년 프란시스칸 수도사 루브룩이 '까울레'로 고려를 교황청에 보고한 사실로 카톨릭 전래의 가능성을 있으나 원이 명에게 멸망하면서(1368년) 중국선교가 끊기면서 고려의 전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풍신수길은 임진왜란(1592-1598)때 일본내에 있는 카톨릭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들을 조선으로 출병시키면서 스페인 출신 신부 세스페데스를 종군신부로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세스페데스는 조선에서는 선교를 하지 못하고 일본에 돌아가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에게 선교하였을 뿐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자금성에서 살면서 만난 독일 예수회 신부 '아담 샬'에 의해서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1644년). 그러나 그가 귀국 후 바로 죽음으로 천주교의 조선 선교를 물거품이 되었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들의 경세치용과 실사구시의 학문 태도는 서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권철신, 정약용 등의 유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접하고 받아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학문으로 받아드리게 된 천주교는 그 학자들이 관직에 등용되거나 축출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상황과 연결되어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게 되었다.
결국 한국 천주교회는 이승훈의 영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784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영세명도 함께 받았다. 이렇게 해서 한국 천주교는 외래 선교사에 의한 국내에 전도된 것 이 아니라 국외에 있는 외국인 신부를 스스로 찾아가서 구도한 특이한 선교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는 1884년에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된 개신교회보다 100년 앞선 교회의 출발이다.
이승훈에 의해서 이벽, 정약전, 약종, 약용 삼형제가 영세를 받았고 이벽이 신부의 역할을 하는 잘못된 신앙의 형태가 있기는 했지만 한국 내에서의 천주교는 자력으로 국내의 전도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은 보수전통지향적인 유교의 세력이 신생 천주교를 박해한 첫 사건이다. 김범우는 자신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가 형조에 적발되고 단양으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단양에서도 계속 전도를 하다가 다시 적발되어서 취조를 받은 후 그 후유증으로 1년 뒤에 사망하여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그가 살던 집 근처에 지금의 명동성당이 건축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이승훈과 이벽, 정약용 등은 박해와 고문과 굶주림으로 배교를 하게 되었고 이승훈은 1791년 '이승훈 구서사건'에 연루되어서 취조중에 배교를 하였고 1801년의 신유교난시에 배교를 회개하지 못하고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신해교난은 윤지충이 모친 상에서 절하지 않고 제사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이를 묵인하고자 하는 신서파의 홍봉한, 채재공과 공서파의 김귀주, 홍낙한과의 권력투쟁에서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배교를 거부하고 효수를 당하게 된다(1791년). 김범우가 고문을 당한지 1년만에 죽었기 때문에 이들이 실질적인 최초의 한국기독교의 순교자로 여겨지고 있다.
신유교난(1801년)은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입국(1795년)과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가 어리자 김귀주의 누이인 정순황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주교에 관련이 있는 시파를 벽파가 공격하여서 조정을 차지하고 권철신, 홍교만, 정약종, 등이 서문밖에서 순교를 당하게 된다. 이 때 6년동안 숨어서 포교할동을 하던 주문모 신부도 순교하였다. 또한 박해를 피해 숨어서 1만3천자나 되는 백서를 써서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다가 적발된 황사영도 순교(황사영 백서사건)하게 되었다. 그 내용중에서 전교의 방법 몇가지가 문제가 되어 선교는 물리적인 방법을 지양하고 복음적인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신유교난으로 순교한 교도들이 300여명이나 되었다.
신유교난 이후 은밀히 이어져온 천주교는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에 의하여 이끌어졌으며 그는 유진길과 함께 교황 레오 12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결국 1831년 청국 신부 유방제의 반대 공작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교구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초대 주교인 브르기에르는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에서 죽게 되며 1836년 최초의 외국인 신부로서 모방 신부가 입국하게 된다. 다음 해에는 2대 주교인 앙베르와 신부 샤스탕이 들어왔으며 이 때 교인은 9천명에 달하였다.
1805년 정순황후가 죽자 시파에 속하는 김조순이 권력을 잡게 되고 천주교는 숨을 돌릴 수 있었으나 헌종의 즉위로 풍양 조씨가 세력을 장악하자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는 1839년 사학토치령을 반포하고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기해교난의 시작이다. 이 때 김순성의 배교로 정하상, 유진길, 앙베르, 모방. 샤스탕 등이 그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정하상의 상재상서는 기독교역사에서 최초의 호교문으로서 황사영 백서가 외국의 힘을 빌어서 자국의 전교를 자유롭게 하기를 원했다면 정하상의 호교문은 자국 내에서의 전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실권자인 이지연 우의정에게 보낸 서신 형식의 글이다. 이 글은 최초의 신학적 저작으로 손색이 없다. 이 글은 홍콩에서 중국어로 번역되어서 중국선교와 신학교육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모방 신부는 김대건, 최영섭, 최 방지거 등 3명을 마카오로 데리고 가서 '조선신학교'를 세우고 신학교육을 시켰고 1845년 8월 17일 조선교회가 창설된지 60년 만에 조선인 최초로 김대건을 신부로 상해 외곽의 긴가함에서 서품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1846년 병오교난 때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를 한다.
헌종이 죽고 철종이 대를 이었으나 후사가 없자 고종이 등극하고 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된다. 신유교난 때 죽은 은언군의 아들인 철종 때는 다시 천주교가 세력을 크게 얻어 신도의 수가 2만여명에 이르게 된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조, 프, 영 3국 동맹으로 저지해 보려는 대원군의 계획은 주교 베르뉘의 미진한 태도로 실현을 못하게 되고 국내외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대원군은 천주교를 박해하기로 작정하고 1866년 베르뉘를 비롯한 프랑스 신부 9명을 죽이고 천주교인 8천여명이나 된다. 이 병인교난은 그 후로 7, 8년 계속되면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묘소 도굴 사건은 페롱 신부의 어처구니 없는 발상과 유대인 오페르트의 욕심이 빚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연군의 유골과 대원군의 천주교 전교 보장을 협상하겠다는 잘못된 생각이 또 다시 엄청난 박해를 초래했다. 결국 천주교 전교의 자유는 1880년 대에 들어와서 외국과의 조약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초기의 천주교는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교되었기 때문에 한문 서적이었고 일반 대중들은 교리서를 읽을 수가 없었다. 전교하는 동안 성경의 번역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한국어 문법이 체계화 되고 한글-라틴어, 프랑스어,중국어 등의 사전이 편찬되었다. 이것은 천주교의 문서 선교 뿐만이 아니라 한글의 보급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 2편 개신교의 전래와 수용
제 1장 선교사 이전의 개신교와 접촉
개신교 신자로 우리나라에 처음온 사람은 네델란드 사람 벨테브레(1627,인조 5년, 박연)이며 그는 후에 귀화하여 통역관의 일을 보며 살았다. 그 다음으로는 1653년(효종4년) 네델란드인 하멜(Hendrick Hamel)이 36명의 동료와 제주도에서 표착해 잡혀서 13년 동안 억류당해 있다가 1666년 9명의 동료와 탈출하여 '표류기'를 써서 전세계에 조선을 소개하였다. 그도 개신교인이었다. 중국선교를 위해 항해하던 맥스웰(Murray Maxwell)과 홀(Basil Hall)이 군산의 마량진에 정박하자 참사 조대복이 배에 올라가서 문정을 하고 성경책과 서적 지구의 등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선교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독일인 칼 귀츨라프(Karl G.F.A.Gutzlaff)이다. 중국선교를 위해서 동인도회사의 배를 타고 중국 동해안을 항해하다가 1832년 충청도 고대도 안항에 예인되었다. 여기서 한문성경이 전해졌으며 주기도문을 한문성경에 토를 다는 식으로 한글로 번역했고 감자씨를 주고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외에 알렉산더 윌리암스와 존 로스 등이 한국선교에 관심을 두고 만주 지방에서 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나오게 된다. 그가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이다. 그는 1865년 9월에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에 도착하여 약 두달 반동안 성경을 나누어 주고 한국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1866년 7월에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를 타고 대동강 깊숙히 올라오다가 조선군과 전투가 벌어져서 배는 불타고 모든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이 때 토마스 목사도 박춘권의 칼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성경을 전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성경을 보고 예수를 영접하였고 토마스 목사는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다.
1874년 의주 청년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는 존 로스를 통하여 매킨타이어를 만나고 그와 그의 병원장의 어학선생이 되어 3년을 같이 살면서 예수를 믿고 한국개신교의 최초의 세례자가 되었다. 서상륜이 영구에 와서 열병에 걸리게 되고 이를 로스가 선교부병원에서 치료하여 살리자 서상륜도 1879년에 세례를 받게 된다. 로스는 만주에서 의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신약성경을 번역하여 1882년 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 젼셔"를 책으로 역었다. 이것이 우리 글로된 최초의 성경이다. 그 해 5월에 요한복음이, 1884년에 마태와 마가복음이, 1887년 신약전체가 번역이 완료되었다. 아직 선교사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외지에서 성경이 번역되어 출판된 일은 일찍이 세계 선교 역사에 별로 없는 기록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성하, 백홍준, 서상륜은 권서인, 매서인으로 활약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서 한국에 성경을 반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압수되어서 압록강에 버려지고 불태워지곤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로스는 "성경이 던져진 물은 한국인들에게 생명의 물이 될 것이고 성경이 탄 재는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할 밑거름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1885년 백홍준은 18명의 신자를 모으로 개신교 최초의 예배처인 교회를 세우게 된다. 서상륜도 황해도 솔내에서 예배당을 마련하게 된다. 후에 서상륜은 서울에서 전도하게 되고 그 교인들이 새문안교회가 세워지자 그 교회의 신자가 된다.
일본에서 입교한 이수정은 미국교회에 한국선교를 요청하였고 성경의 번역을 시도하였다. 1884년에 마가복음을 완성하여 출판하였고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 마가복음을 들고 이 땅에 들어오게 된다.
제 2장 선교사들의 내한
운양호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중국의 중개로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맺게 된다. 1882년 제물포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인하여 미국에 의한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미국 사절단으로 간 민영익이 감리교의 가우처를 만나고 매클레이가 고종에게 의료, 교육사업의 윤허를 받았고 미국 북장로교의 데이빗 맥윌리엄스의 선교비 5천 달러의 헌금으로 시작하여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헤론 등이 입국하게 된다.
1884년 9월에 알렌(Horace N. Allen. M.D.) 이 의사로 입국하여 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하고 인정을 받아서 광혜원을 세우게 된다. 고종의 시의로 인명을 받아서 선교의 교두보를 만들었다. 이 광혜원이 제중원으로 바뀌고 나중에 세브란스 병원이 된다.
미 북장로교의 목사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가 최초의 선교사로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동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임신중인 아내의 건강문제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언더우드만 입국하게 된다. 5월에는 의사이며 감리교 목사인 스크랜톤이 입국하고 6월에 다시 아펜젤러 부부와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 헤론이 입국하게 된다. 이들 모두는 알렌의 제중원을 선교기지로 일을 하게된다.
제 3장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선교사들의 의료선교활동은 광혜원 (1885년)으로 시작하여, 제중원, 세브란스병원으로 시작하였다. 스크랜톤의 시병원,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여관과 평양에 기홀병원, 등과 의학교육과 간호학교육으로 1908년 7명의 의사를 배출하였고 같은 해 간호사도 5명을 배출하였다.
언더우드의 고아원을 시작으로 한 교육사업은 포괄적이고 직접적인 전도의 계기가 되었다. 경신학교, 숭실대학교,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세워지게 된다. 감리교 스크랜톤은 "병원은 쟁기로 땅을 갈고 교육은 씨를 뿌리기 위해 써레로 땅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에서의 초기의 선교는 의료와 교육의 선교를 시작으로 서서히 복음선교로 나아가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한국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 도사하고 불리던 노춘경이었다. 그는 알렌의 서재에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훔쳐 그것을 보고 진리를 깨닫고 1886년 7월 18일 언더우드의 집례로 헤론의 집에서 세례를 받아 국내에서 개신교인으로 최초의 세례인이 되었다. 다음해에 황해도 솔내에서 와 최서상륜의 동생 서경조명오, 정공빈이 "하나님게서 우리를 구원새 주셨으니 임금님이 우리를 처형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라는 각오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1887년 언더우드는 솔내에 가서 7명에게 세례를 주어서 모두 10명의 수세자가 탄생했다. 평북의주에는 100명의 신도들이 만주에서 만든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기다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페젤러는 배재학당의 학생이던 박종상에게 감리교인으로 최초의 세례를 주었다.
언더우드는 만주의 존 로스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서 1887년 9월 27일에 14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2명의 장로를 선출한 후에 정동교회를 조직하였고 후에(1895년) 새문안교회로 바뀌게 된다. 당시 첫예배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서울에는 3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언더우드가 오기 전에 이미 권서인과 매서인에 의해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들이며 따라서 새문안교회는 한국 사람에 의한 자생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9일에 정동에 벧엘 예배당을 건립하게 된다.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성경번역이다. 이일도 언더우드가 제일 먼저 시작하였다. 그는 아펜젤러와 함께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을 선임하고 위원장은 언더우드가 맡았다. 1900년에 신약성경을 번역했고, 1910년 구약의 번역을 완성했다. 이듬해 1911년에 성경이 출판되었고 1937년에 개정하여 개역성경이라고 부르고 처음것은 구역성경이라고 불렀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사경회가 생겨서 1890년 한국 최초로 언더우드의 집에서 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 일년에 두차례 6주씩 공부를 하였고 이것이 나중에 신학교로 발전했다. 이 사경회를 통해서 매서인, 권서인, 조사, 전도부인, 목사까지 배출되었다.
1780년 영국의 레익스에 의해서 시작된 주일학교는 우리나라에서 1905년에 북음주의 선교협의회가 조직될 때 주일학교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907년 부터 소아회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주일학교가 시작을 하게 되었다. 하기 아동성경학교는 1922년에 교사 5명, 학생 100명으로 시작하여 1932년 주일학교가 1071교회, 교사가 4천명, 학생들이 7만명이나 되었다.
찬송가를 펀찬한 사람은 감리교 선교사 존스와 로드와일러이다. 감리교회가 1892년 처음으로 찬미가를 사용하였고 윤치호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찬미가를 편찬했다. 그리고 그는 애국가의 가사를 지었다.1908년 장.감 연합 '찬숑가'를 발행하였으며 1928년 신정찬송가를 출판했으나 그 속에 이은상과 이광수의 작사곡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장로교에서 1934년에 신편찬송가를 다시 제작하여 따로 사용하였다. 결국 1983년 통일찬송가가 나올 때까지 50년 동안 통일되지 못한 찬송가를 사용하게 되고 말았다.
그외의 문서활동으로는 아펜젤러의 [죠선 그리스도인 회보]와 언더우드의 [그리스도 신문]의 발행이 있었다. 고종과 관리들은 이 [그리스도 신문]을 500부나 구독했다. 잡지로는 1892년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가 발행한 [코리안 리포지토리]라는 영문잡지가 최초의 잡지이다. 한글로된 최초의 잡지는 1900년 감리교 선교사 존스가 인천에서 발행한 [신학월보]이다. 한국인에 의한 단행본으로는 1895년 홍정후의 [칠득]과 1897년에 노병선의 [파혹진선론], 1904년 길선주의 [해타론], 1909년 최병헌의 [예수텬쥬량교변론]등이 있으나 아직은 수준이 낮았다. 그외에 한글 사전, 영한사전 등의 사전류들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문서선교가 활발할 수 있었던 것은 1889년 감리교의 선교사 올링거가 삼문출판사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 삼문출판사는 후에 성서공회, 기독교서회가 설립되면서 없어지게 된다.
미국북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 다음으로 호주의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데이비스와 그의 여동생 메리를 한국 선교사로 보낸다.데이비스는 6개월후 한국 최초의 선교활동중에 천연두에 희생되어 최초에 순교자가 된다. 그후 4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경남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된다.
성공회는 1890년 9월 29일 찰스 코르프주교가 7명의 사제와 2명의 의사와 함께 내한하여 강화도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1926년에 영국공사관 근처에 성 마리아 니콜라스성당을 봉헌하여 성공회 선교의 기초를 확립했다.
미국 남장로교회는 언더우드선교사의 매코믹신학교에서의 한국선교보고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시작되었다. 1892년 7명의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도착함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전라도 지방을 선교하게된다.
미국 남감리교회는 윤치호의 공으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1896년 리이드 박사를 선교사로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경기도 고양을 중심으로 선교가 시작되어 광희문교회를 세우게된다.
캐나다 장로교회는 1893년 황해도 솔내에서 단신으로 선교를 하기위하여 들어와 살던 매켄지의 순교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1898년 푸트, 맥레, 그리어스 등의 부부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함경도를 중심으로 선교를 하기 시작했다.
침례교회의 선교는 말콤 펜윅의 솔내에서의 선교실태의 보고와 엘라 당 기념선교회의 도움으로 1895년 폴링목사 부부와 그드라인양의 부산도착으로 시작되었으며 충청도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부동항의 확보라는 정치적인 목적과 더불어서 한국과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1898년 알렉세예프가 한국에 옴으로 시작되어 고종의 아관파천의 답례로 새문고개에 성당건축을 허락하여 1903년 축성식을 가지게 된다. 정길당 사건으로 한국과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가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가 철수하자 정교회는 사제가 없이 존재하다가 6.25 때 들어온 희랍군인들에 의해서 다시 회복되고 한국 정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개별적으로 온 선교사는 게일과 펜윅이 있다. 게일은 1889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YMCA가 파송했으나 그곳을 탈퇴하고 독자적인 선교활동을 하여 성격번역과 연동교회의 목사로 일했다. 펜윅은 1889년 혼자 솔내에 들어와서 한국인으로 살면서 선교를 해야 하며 한국민족의 문화를 인정하고 선교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다.
제 4장 선교부의 선교정책과 한국 교회의 성장
1890년 네비어스는 선교정책을 마련하고 2주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강론했다. 네비어스의 선교정책의 핵심은 ①순회선교전도②성경중심적 선교 ③자립전도 ④자립정치 ⑤자립모금 ⑥성경공부 ⑦엄중한 훈련과 치리 ⑧협력선교 ⑨교인들의 법적소송문제 불간섭 ⑩경제적인 면에는 서로 협조이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삼자정책(자치(Self Government), 자립(Self Support), 자전(Self Propagation))이다. 이에 따라 북장로교회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상북도를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캐나다는 함경도 지역을 선교하기로 합의했다.
언더우드는 네비어스 정책을 자신의 책 [한국의 부름]에서 네가지로 압축하고 있다. ①자활과 자전②한국교회의 자체감당 한도안에서 발전해야 한다. ③교회는 최선의 자질자를 세워서 정식 사역자로 삼아야 한다. ④예배당은 토착적인 모양으로 지어져야 한다.
네비어스 정책이 한국에 미친 영향 -한국사회를 근대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으며 절대왕정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 즉 민주주의 국가 체제로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개교회주의를 가져와서 교회의 연합을 깨는 근원이 되기도 했다. 이것은 네비어스정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를 잘 시행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핵심은 '사경회와 재정자립'이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은 사경회의 강화와 재정의 자립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 한국교회의 급성장 원인 - ①국교가 없다 ②당시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③국왕이 기독교에 호의를 가졌다 ④서구에 대한 반감이 없었다 ⑤한국인의 전도열 ⑥자국어 성경이 일찍 발행됐다 ⑦신앙과 생활의 변화가 같이 이루어졌다. ⑧교인들의 기도운동이 강했다 ⑨교회가 애국애족과 사회변화에 앞장을 섰다 ⑩권징과 치리가 철저했다.
초기 선교사 순교자들-데이비스, 헤론, 윌리엄 매킨지, 기포드, 조지 렉, 헨리 아펜젤러, 윌터존슨부부, 안나 밀러 부인, 빈턴부인, 윌리엄 헌트 부인, 피터스 부인, 사무엘 무어, 전킨,게일부인
제 5장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수난
1.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리는 형태 - 한국 개신교 선교는 '근대선교의 또 다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주교회는 '위에서 아래로'의 전도 형태를 취했다면, 개신교는 '아래에서 위로'의 형식을 취하였다.
서민층의 입교는 확실한 진리를 깨닫고 믿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익 때문에 믿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질, 국난, 역질, 흉년, 탐관오리의 수탈 등에서 보호받기 위해서 믿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북장로교회 선교사 무어는 백정들의 신분향상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에 의해서 박성춘이 입교 후 평민이 되었고 그 아들 박서양은 세브란스의대 1회 졸업생이 된다. 국가가 일제에 넘어가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기독교 입문은 생명과 재산의 안전과 안정을 구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식층의 입교는 ①유학자들은 학문으로서의 호기심으로 입교했다. ②기독교를 통하여 국가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③민도의 제고, 부국강병, 민주적 입헌국가로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루어졌다.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의 독립협회와 이를 통한 이승만, 이상재, 신홍우, 김정식, 이원긍, 유성준, 안국선 등의 감리교 입교가 이루어졌다. 초기 신자들의 입신 도익가 순수한 기독교 신앙에의 입문이라기보다는 일반 대중들을 이기적 동기로 , 양반 지식층은 애국적,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2. 초기 기독교가 당한 수난들 - 문화의 충돌일 수도 있으나 전통과 수구의 기득권자들의 반격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을 사학이라고 하여 박멸하였고 호적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구타를 당하고 머리털을 뽑히는 일을 당하였다. 1888년에는 선교사가 아이들을 잡아다가 눈을 빼서 약을 만들고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버린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1894년 평양감사 민병석이 혹세무민방지의 명분으로 장로교회의 한석진과 감리교회의 김창식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천주교의 박해도 엄청났었다. 1891년 재령교회의 구타사건, 1902년 황해도 신황포에서 성당건축비를 안내는 개신교인을 구타한 사건, 등은 카톨릭 신부의 방자함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처음에는 서학을 반대하여 자신의 학문을 동학이라 할 정도로 척왜척양의 정신으로 기독교를 방해했지만 기독교도들의 반일을 보면서 오히려 동지의식을 느끼게 된다. 교회가 동학의 피해를 본 것은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제 6장 1907년 대부흥운동과 교회연합운동
일제의 강점에도 교세는 날로 성장하여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 장로교 총회가 창립되었고 일제 36년의 폭압을 교회가 이길 수 있는 힘을 기른 것은 1907년의 대부흥운동의 힘이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전기가 되었다. 이기적 동기나 애국적 동기로 믿었던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에 접하게 되어 참 그리스도인들로 거듭나는 체험을 하게되며 한국교회의 토착화에도 큰 기여를 한다. 부흥의 원인은 1903년 원산에서 감리교목사들의 기도회에 강원도에서 선교하던 하디 선교사가 통회자복의 기도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다. 원산지방의 부흥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이 1906년에 하디를 강사로 모시고 기도회를 열게된다. 존슨 목사가 장대현교회에서 "조선에서 누가 성령충만을 받고자 하는냐"하자 길선주 장로가 감동되어 헌신을 하였고 장대현교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907년 정월 장대현교회의 평안남도 남자도 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짐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불길은 길선주 장로가 시작한 새벽기도로 확산되게 되었고, 사경회의 말씀공부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길선주 목사는 1869년 평안북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관성교에 빠지고 선도에 빠지기도 했으나 마펫을 잘아는 김종삼의 권유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고 [천로역정]을 보고 기독교를 결정적으로 믿게 되었다. 처음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에서 영수직을 맡게되었고 마포삼열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1903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제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정월에 평양에 떨어진 성령의 불길이 학교가 개학하면서 학교로 퍼졌고 3월에는 장로교의 부인사경회와 장로회 신학교 학생들의 사경회로 번져나갔다. 이 때 길선주와 하디, 져다인 등이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게 된다.
대부흥운동의 결과는 ①진정한 기독교의 교리를 깨닫고 믿음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②교회의 급성장을 가져왔다. ③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을 확립하게 됐다.(새벽기도와 통성기도, 철야기도) ④에큐메니칼 정신의 구현(장, 감의 강단교환) 등을 들 수 있다. 이 부흥운동이 한국교회로 하여금 비정치적이고 몰역사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선교사들이 을사늑약을 인정하고 한국인의 폭도화되는 것을 막기위하여 오직 신앙생활을 영적인 측면만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교회의 본질을 잘모르고 한 말이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섭리하고 역사하신 성령운동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1910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교회는 낙심되고 좌절하는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일깨우며 교회의 부흥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을 말한다. 세계적인 부흥강사인 챕맨과 알렉산더가 내한하여 선교사를 상대로 전도집회를 가졌고 일행 중에 데이비스가 남아서 전국을 돌면서 부흥운동에 불을 당겼다.1910년 장로회 제 4차 독노회에서 이일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 때 유명한 '날연보'라는 말이 생기게 된다.
교회일치의 노력은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올 때부터 행한 위대한 꿈중에 하나였다. 특히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하려고 계획했던 일들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한국에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였다. 그러나 이 교회의 일치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①선교사들의 모국 교회의 비우호적인 태도 ②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연합에 대한 열의 부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선교사역에서의 연합활동은 많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회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부간의 협력으로 선교지의 분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개신교복음주의선교협의회는 남북미국장로회, 호주장로회, 캐나다 장로회,남북 감리교가 연합을 한 것이다. 선교부들이 맺은 예양협정에 의해서 1905년 선교지를 분할하고 교인들을 교환했다. 북장로교는 서울, 경북, 황해, 평안도, 남장로교는 전라도, 캐나다 장로교는 함경도. 호주 정로교회는 경남. 북감리교는 강원도 원주지방, 충청도, 황해도일부, 평양지방, 남감리교는 강원도를 맡았다. 이러한 연합정신은 세계의 어떤 선교지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위대한 신앙 표현이다. 7년후 장로교 총회가 설립되면서 그 의미가 퇴색하게 되었다.
성교서회의 설립의 일에서는 제7일 안식교만 제외하고 모든 교단이 참여하여 '죠선성교서회'를 창설하였다. 모든 문서를 관장하였다.1919년 기독교서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성서번역에 연합활동을 하였고 숭실전문의 연합활동과 연희전문과 피어선기념성경학교의 연합활동과 세브란스의과대학 및 병원에서도 많은 교파가 서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서 초기 선교사들의 에큐메니즘 정신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제 7장 교회의 애국과 사회개혁활동
1. 을미사변과 선교사들
1895년 10월 8일 삼포오류 주한 일본영사가 자객 60여명과 함께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이 사건을 목도한 미국인 군사고문인 다이장군과 러시아인 전기 기술자 사바틴에 의해서 외부로 알려지고 일본정부는 삼포와 자객 47명을 체포했으나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했다. 이 일로 고종의 둘째 아들 의화군이 다음날 언더우드에게 피신을 하였고 독살의 염려 때문에 음식을 먹지 못하는 고종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일로 일반인들 사이에 "선교사들이 왕의 생명을 구했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나갔다. 선교사들은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였고 선교 본부에 보고하여 이 일을 외부에 알리는 데 전력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국왕에 대한 헌식적인 노력은 국왕과 내각의 대신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선교사들이 곤경에 처한 국왕을 최선을 다해 보호하고 도와 주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기독교를 애국충군의 종교로 이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을미사변 후에 교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는 현상을 보였다.
2.춘생문 사건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에 친일파에 의해서 연금상태에 있는 고종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왕의 측근들과 일부 서양사람을에 의해 모의된 사건으로 거사를 위해서 궁궐의 동북문인 춘생문을 통해 고종을 출궐하려던 사건이었으나 밀고자가 있어서 좌절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서 선교사들(알렌, 언더우드)이 고종을 보호하려고 하다가 주모자로 오해를 받은 사건이다. 일본은 이 일을 확대하여 을미사변의 일을 반전하려고 미국에 압력을 넣었고 미국은 그들의 외교정책상 아시아에서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정교분리를 선교사들에게 지시하게 된다. 일반 백성들은 이 일에서도 선교사들이 고종을 도우려했다는 것을 알고 더욱 애국충저의 사람으로 선교사들을 보게 되었다. 그 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격게 되며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면서 자주독립국임을 선포하게 된다.
3. 고종의 탄신 기념일 행사
1896년 9월 2일 고종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기념예배를 드릴 계획을 세우고 전도지를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국왕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왕과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기독교가 애국충군의 종교라는 일반 대중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도중에 황해도 은률에서 온 한 양반이 전도지를 보고 감동하여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교회를 세우고 언더우드를 불러서 세례를 받았다. 이 은률교회는 신자가 3-400명이나 되었으며 지교회 3곳을 두고 예배당도 14간이다 되는 큰 교회로 성장했다.
4. 교회의 사회활동
선교사들은 복음이 전파와 함께 사회개화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기독청년회(YMCA)는 1844년 영국의 기독교 사업가 조지 윌리암스가 기독교 신앙의 바탕위에서 지, 덕, 체 세가지의 덕목을 청소년들에게 함양하기 위하여 시작한 초교파적 기독교운동이다. 우리나라는 1900년경에 소개되어 발족하려하다가 고종이 정치적인 성격이 있다고 하여 보류되었다가 1903년 10월 정동 유니온클럽에서 게일을 회장으로 윤치호를 부회장으로 하여 발족하게 되었다. 사교와 친목, 기술교육, 직업훈련, 체육교육 등을 통해서 국민의 보건과 운동경기력의 향상, 청소년들의 사교장, 사회계몽 등 많은 사회적 공헌을 하였다. 기관지 [청년]을 발간하였다. YWCA는 1922년 발족하였다. 회장 유각경, 1923년 협상여자 성경학교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 운동은 3.1만세운동후 민족 자존의 정신으로 민중의 계몽을 사명으로 하기위하여 순수한 한국여성들로 이루어졌다. 사업은 종교적, 교육적 출판사업과 음주해독에 관한 교육과 금주운동, 공창반대운동 등을 주로 했다. 그외에 감리교에서는 엡윗청년회, 장로교에서는 면려청년회가 발족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은 초기부터 여성인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로교 공의회는 여성인권에 대한 5개항의 결의를 채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일처를 강력히 시행하여 첩을 정리하지 않으면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 특히 여성의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신분제도의 철폐에도 앞장을 서게 되었고 특히 백정들의 신분회복과 그들의 개종은 참으로 초대교회사에 큰 일을 이룩한 것이다. 곤당골교회는 백정들 중심으로 세워졌으며 후에 승동교회로 바뀌게 된다. 유교사회의 폐단이었던 노동의 천시를 개혁하고 노동을 중요시하고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직업학교와 실업교육에 치중하는 교단도 있었다.그리고 조상의 제사철폐를 주장하였으며 한글전용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는 전도와 성경공부와 찬송가를 보게 하려는 것과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한 선교정책이었다. 한글전용정책은 선교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복음을 위해 준비해 두신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이었다. 한국초기 의료선교는 결핵과 나병퇴치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였다. 로제타 홀여사의 맹학교는 시각장애자들의 복음의 역할을 다하였다.
제 8장 교회의 항일 활동
1. 교회와 항일 문제
항일운동의 방향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과의 사이에 기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비기독교인은 항일 무장의병의 활동으로 방향을 정하였고 기독교인들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나갔다. 그래서 의병들에 의한 핍박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평양지방에서는 길선주 목사의 권유로 무장 의병활동이 많이 자제되었다. 많은 희생을 내야하는 무장의병활동은 죄없는 일반대중들만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교육사업을 통하여 힘을 기르고 앞날을 내다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2.신앙운동을 통한 항일
나라를 위한 기도회 - 초기의 교회들은 애국의 상징으로 태극기를 예배시 계양하는 전통을 세웠다. 그리고 을사늑약, 정미조약 때에 교회는 구국기도회를 가지게 되었다. 일본은 이 때부터 기독교인을 항일분자로 낙인을 찍어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3. 시위와 무장투쟁을 통한 항일
1905년 을사늑약이 선포되자 김구를 비롯한 엡윗청년회소 속의 청년들이 대한문에서 상소를 올리려하다가 일제에 강제해산되었고 이 때 민영환 이상설이 자결하였다. 장인환과 전명운이 스티븐슨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저격했다. 1909년 12월 23일에는 이재명이 이완용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그외 강우규, 이동휘등이 항일 테러를 감행하였다.
4. 경제적 항일
조세저항운동과 일제 상품불매운동이 동시에 일어났으며 선교사들이 징세에 반대하게 했다고 일본은 기록하고 있다. 1904년 평북 용천에서 일어난 조세저항운동은 나중에 방화와 일인의 살해까지 나가게 된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도로신설, 보수를 위하여 고용한 사람들의 인건비를 지불하기 위해서 조선의 조정에 차관을 제공하였다. 당시 선각자들은 이 빚을 갚아야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대구의 출판사 광문회의 김광제, 서상돈 등이 중심이 되어 금주 금연운동을 시작으로 온국민이 3개월동안 금주하고 금연하여 1300만원에 달하는 외채를 갚고자 하였으며 이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서울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 부인회, 선천 의성회, 안악 국채보상탈환회(여성들의 반지를 빼서 나라 빚을 갚자는 운동). 제주도 삼리부인회등이 동참하게 되었다. 이 운동은 고종도 합세를 하여 담배를 끊고 보상금을 하사 하였다. 또 여성들은 감선회를 조직하여 식사 때 반찬을 반으로 줄이는 운동을 했다. 교회내에서 시작된 운동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은 교회의 경제적 항일 운동으로 1920년 7월 평양에서 조만식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동원 김상업, 김휘성 등의 기독청년 사업가 들과 여성으로 김보원, 이겸양, 이진실, 채광덕 등 50여 명으로 평양에서 발기되었다. 목적은 협동정신, 상부상조, 생활개선, 등의 다양한 목적으로 출발하게 된다. 교회의 항일투쟁은 1930년대말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우상 앞에 무릎을 꿇게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제 9장 한국 교회의 조직과 수난
1. 한국교회의 조직
1)장로회 신학교와 독노회의 창립-1901년 마펫(S.A.Moffett)이 평양의 자기집 사랑방에서 평양 장대현 교회 장로 김종섭, 방기창과 북장로교 선교사 G. Lee와 함께 신학교를 세웠다. 언더우드, 전킨, 푸트, 베어드, 스왈론, 등과 1920년대 후반에는 남궁혁, 박형용 등이 가르쳤다. 1915년에는 이미 학생수가 25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학생수가 많은 장로회신학교가 되었다. 1907년 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한석진, 이기풍, 영전백, 서경조 등 7명이 최초로 졸업했다. 노회는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교회 989개, 세례교인 19000명, 교인 70000명으로 독노회가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체의 신앙고백을 갖지 못하고 인도 자유교회의 신앙고백을 채택하게 된다. 신앙고백의 교리가 폐쇄적이라 다른 신학이 들어오면 분쟁의 소지를 안고 출발했다.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사 파송, 외국선교사들은 한국노회에 소속되지 않고 치외법권을 가지게 된다. 이는 비판받아야 할 일이다.
2). 1912년 한국장로교 총회를 창립했다(선교사 44인, 조선목사 52인, 장로 125인, 총 221인의 발기인).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은 한국의 정체성을 갖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산동성을 선교하여 30년 동안 교회35개소 교인 1716명의 기록을 남겼다.
3). 교인들의 훈련은 엄격했다. 권징과 치리가 엄격했다. 선교사들은 여전히 치외 법권이었다. 이는 한국교회지도자들의 잘못이다.
4).감리교는 1908년 한국연회가 창립되었다. 선교사들은 모두 한국교회의 소속이 되었다. 남감리회와 갈라져있다가 1930년대에 통합하게 된다.
5). 성결교는 동양선교관으로 자체 출발하여 1921년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총회를 창립한다. 1936년에는 대한 기독교 하나님의 성회로 갈라지게 된다.
6).구세군 1865년 영국의 윌리엄 부드가 창립. 1908년 한국에 호가드정령이 구세군병영을 설치했다.
7). 침례교는 1900년에 엘라 딩 선교회를 인수한 팬윅이 한국순회 전도단과 합병하면서 1901년에 모습을 갖추게 된다. 대한기독교회라는 명칭에서 동아기독교회로 바꾸고 나중에는 동아기독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8). 예수재림 제 7일 안식일교회는 미국의 윌리엄 밀러가 1843년 예수가 재림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무리를 모았으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거기서 갈라져 나온 무리들이 세운 교단으로 우리나라에는 1904년 손홍조에 의해 도입되었다. 안식일을 지키야한다는 교리 때문에 정통교단에서 이단으로 여겨지게 된다.
2. 교회의 수난
1). 일제의 기독교 정책-처음에는 기도교에 우호적이었다. 안중근의 이토오 저격사건 후 반기도교적 태도로 변함.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을 항일운동으로 지목하고 박해를 시적했다.
2). 해서 교육총회사건(안악사건) - 김구, 최광옥, 도인권 등이 세운 해서 교육총회를 항일 단체로 규정하고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을 내란죄로 기소하고 해서교육총회 회원들 모두를 체포한 사건이다.
3). 105인 사건-1907년 안창호가 세운 신민회는 이동녕, 이동휘, 이승훈, 안태국, 양기탁, 신채호 등이 가세하여 그 회원이 수백명에 이르게 된다. 안창호의 대성학교, 이승훈의 오산학교, 평양숭실학교, 신성학교, 등의 학교를 세우고 배일사상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1910년 데라우찌 총독 살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목사 6명, 장로 50명, 집사 80명 등 서북지방의 교회지도자 500인을 체포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다. 그러나 항소에서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오 99명이 무죄석방되고 6명만이 6년 형을 받았으나1915년에 모두 석방되었다. 4).기독교학교의 탄압과 개정사립학교규칙-일제는 가장 효과적인 기독교 세력 억압정책으로 기독교사립학교를 탄압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1911년 '조선교육령'을 선포하고 일본학생과 한국학생을 차별하기 시작하였다. 전문학교와 대학의 설립을 금지시켰다. 이를 통하여 한국인은 3-4년의 보통교육만 시키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는 조선의 영구 식민지화의 일원이었다. 학생들의 강력한 요구와 선교부간의 이견으로 기독교학교는 큰시련을 격게된다. 개정법에 따르는 학교는 고등보통학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잡종학교가 되어서 전문학교나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개정법에 동조한 감리교 학교들은 고등보통학교가 되었지만 장로교 학교는 잡종학교가 되고 말았으며 학교에서 성경과 예배를 금지시켜버렸다. 그러나 삼일운동 후 문화정치가 표방되면서 성경공부와 예배가 허용되었다. 5). 일본교회의 조선교회정책-일본교회는 민족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기독교의 참담함을 보여주었다. 일본 조합교회는 1911년 한양교회, 평양의 기성교회와 전국에 16개 교회를 세우고 일본 총독부의 보조금으로 교세를 확장하려했다. 그러나 3.1운동 후 한국인의 독립의지와 일제의 저항을 확인하고 한국교회의 조합교회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철수하고 대신 자치를 내세우는 조선 회중교회를 창설한다. 유일선, 차학연이 이끌었다. 그러나 신도가 없자 사라진 교회가 되고 만다. 편협되 민족교회이 오도된 모습에서 하나님의 교회의 인류보편의 행복과 정의실현,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기독교진리의 수호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주었다.
6). 교회내의 분쟁-최중진의 자유교회와 자유교회운동-최초의 교회분열로 전북대회의 최중진목사가 장로교를 탈퇴하고 자유교회를 선언했다. 지역선교부가 없는 것과 선교사들의 월급과 한국목사의 월급의 차이 때문에 불만을 가지고 군산 광주 지역에서 독립교회를 세웠으나 사기죄로 2년 복역한 후 일본 회중교회와 합류하였고 결국 사라져버리고 만다. 김장호의 조선기독교-반선교사, 반교권, 자유주의신학을 주장하다가 친일로 돌아서서 조합교회와 교류로 생명이 끝나게 된다. 이런 분리의 원인은 선교사들의 오만과 교조주의적 문제해결 방법 등을 들 수 있다. 이만집의 자치사건은 개교회사건으로 끝났지만 한국교회의 선교사 중심과 민족적주체성의 상실 등의 원인에 의해서 교회를 분리시키고 결국에는 일본에게 협력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7) 춘원 이광수의 교회비판- 교회는 계급성. 교회지상주의, 교역자의 무식, 미신적이라고 비판했다. 교리해석 책이 없고 교회사에 관한 책이 하나도 없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에 교회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제 10장 한국교회와 3.1운동
1. 운동의 기원 : 일본의 대한 정책-1) 동화정책과 우민정책 2)경제적 수탈정책 3)퇴폐문화의 유입정책(공창제도, 아편재배허용, 술 담배를 전매, 화투의 보급) 4)교회의 억압정책(성직자의 총독부 자격증제, 종교집회의 허가제, 경찰의 예배감시와 설교의 검열, 학교에서의 성경공부와 예배의 금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고종의 독살설이 동기가된 자발적인 운동이다.
2. 진행과정 : 33인 중 기독교 17인, 천도교 16인, 불교 2인이었다. 당시 천도교의 교세는 기독교의 10배 이상이었다. 고종의 인산일이 3.3일이었고 2일은 주일이라 기독교의 주장으로 1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비폭력으로 진행되었고 기독교학교를 중심으로 지방의 만세운동이 진행되었다.
3. 교회의 피해 : 평남 강서 학살사건, 정주 학살 방화사건, 서울 십자가사건, 의주예배당사건, 천안 병천사건, 제암리 감리교회사건. 1919. 3월부터 1920. 3월까지의 통계는 사망 7645명, 부상자 45562명, 체포자 49818명, 교회소각 59개소, 학교소각 3개소, 민가소각 724채였다. 기독교인구가 전체의 1% 정도밖에 안되었지만 체포자수는 17.6%를 차지했다.
4. 선교사들의 관여문제 : 선교 현지에서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선교정책에 의하여 사전에는 관여가 없었으나 사건이 진행되면서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선교부 단체로도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일에 힘을 모았다.
5. 결과 : 1) 민족단합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 3)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변화-총독부의 '포교규칙'의 개정으로 교회설립의 신고제, 포교의 자유허용, 기독교학교의 성서교육과 예배의 허용. 4) 기독교의 민족종교이미지의 부각.
제 11장 1920-30년대의 교회 상황
3.1독립운동 후 약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이 때 신앙부흥을 위한 사경회와 부흥회를 이끌 지도자로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 김익두 목사,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 등이 활약했으며 분파운동과 이단 사이비들이 출몰하게 된다.
1. 길선주 목사의 사경회 : 2년간의 옥고를 치로고 출옥한 길선주 목사는 매국노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이것은 일제의 술책에 불과했다. 옥중에서 요한계시록을 외우고 [말세학]이라는 요한계시록 강해집을 내었다. 종말과 재림을 통하여 암울한 시대에 희망을 주었다. 이는 내세지향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말세에 이 땅에 지상낙원이 이루어진다는 신앙을 설파했다. 사회주의에 물든 청년들에 의해서 강제로 배척을 당한 길선주목사는 전국을 다니며 사경회를 인도했다.
2. 김익두 목사의 이적집회 : 김익두목사는 황해도 안악 출신이다. 스왈른 선교사의 '영생'이라는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게 된다. 세례를 받기 전에 신약을 백번 읽었다. 1906년 장신대에 입학 1910년 3회 졸업생이 된다. 신유의 은사는 1919년 12월 경북 달성 현풍교회 사경회 때였다. 이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다. 부흥집회 수가 776회, 설교횟수가 28000회, 교회신축 150처, 감화된 목사200명, 치유받은자 1만명이나 된다. 해방 후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고 초대회장이 된다. 1950년 10월 14일 인민군에 의해서 사살된다. 공산당 어용단체에 협력하고도 공산당에게 학살을 당한다.
3.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 : 개인의 영적인 체험에 근거한 신비주의에 기초를 해서 결국에 이단 정죄를 당한 예이다. 그의 기도와 구제는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여신도와의 접촉이나 접신녀들과의 교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33살에 폐병으로 죽었다.
4. 사이비 접신자들 : 1927년 원산 감리교회의 여신도 유명화의 입신 체험과 이에 부응한 이용도와 백남주, 한준명, 이호빈 등이 가담하였다. 이들은 스웨덴보그와 선다싱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평양장신대 후문 앞에 중앙선교회관을 짓고 '예수교회'를 창립한다. 이들은 성경부인, 삼위일체부인, 재림과 부활부인, 천계의 이설, 예수 가형설, 원죄의 속죄 공로부인 등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
5. 황국주의 혼음교리 : 목가름, 피가름을 주장하면서 혼음을 한 이단. 삼각산에 기도원을 차리고 영체교환이라고 하면서 혼음을 하였다. 1933년 이단으로 정죄를 당하였다.
6.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 일본의 무교회주의자인 내촌삼감의 제자이다. 1927년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 등과 함께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발간한다. 그는 성서사랑과 나라사랑에 몰두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무교회주의로 나갈 때 이단으로 정죄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7. 최태용의 복음교회 : 김교신과 같이 무교회주의자이다. 그의 이단적인 요소는 영지주의적 요소이다. 또 선교사를 반대하고 '조선자신의 교회'를 주장하였다.
8. 적극 신앙단 : 신흥우를 중심으로한 초교파 신앙운동 단체로 강한 민족주의 색채를 나타냈다. 그들은 '반선교사' '반서북' '반보수'의 세가지 요소를 주장했다. 토착화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비밀집회를 가졌다. 흥사단 계통의 재경기독교유지회가 1935년 감리교와 장로교총회에 건의함으로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신흥우가 박인덕과 염문을 퍼뜨리자 YMCA 총무에서 해임되면서 적극 신앙단은 해체된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의 지역편중성, 신앙의 페쇄성, 선교사의 보호 등의 고질적인 한국교회의 문제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흥사단에 제동을 걸 목적이 있었고 서북의 장로교세력을 꺽으려는 기호지방의 감리교의 세력이 신흥우를 이용했다고 볼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친일을 주장했던 '혁신교단' 인사들이며 후에 기독교장로회를 분열할 때 핵심인사들이 이 적극신앙단 출신의 자유주의자들이 많았다. 정치적인 색체를 띤 기독교 운동은 그 뜻을 관철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 12장 사회적 변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
1. 공산주의 사상의 대두 : 1917년 공산당 혁명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에 애국지사와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복음으로 들렸다.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친미 독립운동이 소극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를 들고 일반대중과 하류층을 파고드는 기독교의 적대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동휘를 중심으로한 연해주의 1918년의 '한인사회당'은 1920년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결성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한다. 1919년에 '이르츠크파 고려 공산당'은 여운영, 박헌영, 조봉암 등이 결성했으며, 1925년에는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었다. 이동휘와 여운영은 전도사들이었다. 새문안교회 장로였던 김규식과 여운영은 '기독교도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참여했다.
2. 공산당에 의한 교회의 피해-이데올로기 비극의 서막 : 사회주의 청년단체는 '조선노동공제회'를 시작으로 '남조선노동초연맹'을 거쳐서 1923년 '조선노동총연맹'이 발족했다. 교회에 대한 적대세력으로는 '한양청년연맹'이다. 이들은 1925년 제2회'전조선 주일학교대회'를 방해했다. 1925년 동아기독회에서 파송된 길림성 선교사 윤학영, 김이주가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했다. 감리교는 김영학목사가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중에 얼음이 깨져서 죽었다. 장로교에서는 한경희목사가 우수리강변에서 공비에 의해서 사살된다.
3. 교회의 농촌문제 대처 : 농촌은 동양척식회사에 의해서 농지는 모두 일제에 빼앗기고 소작으로 전락하고 만다. 언더우드는 그리스도 신문에 '농리편설'을 싣고 농사법을 알렸다. YMCA에서는 총무인 모트를 통해서 많은 일을했다. 그는 문맹퇴치, 농사개량, 협동정신 등 세가지를 목표로 삼았다.1929년 교파연합의 '농촌사업협동위원회'를 결성해서 농촌 사업의 연합전선을 폈다. 그러나 일제는 농촌운동을 애국, 민족, 항일운동으로 낙인찍어서 탄압을 계속했다.
4. 사회계몽운동-절제운동 : 일본은 국민들에게 퇴폐문화를 유입시키기 위해서 술, 담배, 아편, 공창을 만연하게 하는 방법을 강화했다. 이에 대항하여 1924년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연합회'가 결성되고 1930년에는 [절제]잡지도 발행하였다. 금주운동과 금년운동, 금아편운동을 펴나갔다. 길선주목사의 금연설교는 유명하다. 특히 공창폐지운동은 기독교가 축첩과 잡기를 금지와 함께 교회에서 강력히 실시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물산장려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회활동에서 중요한 운동에는 또 성경구락부가 있다. 1938년에는 학생수가 5천에 이르자 일제는 이를 폐쇄했다. 수영동우회는 흥사단이 국내에 결성한 수양목적의 단체이다. 일제는 이를 탄압하여 주동인물을 체포하여 재판을 했으나 모두 무죄석방되는 사건이 있었다.
5. 신학적 갈등-교회 분열의 조짐들 : 보수주의자인 박형룡과 자유주의 김재준의 대결은 남궁혁의 중재로 일단락이 되었다.또 김영주목사가 창세기 모세저작을 부인하자 총회는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고 교회안에서의 여권문제도 등장하게 된다. 아빙돈 단권 주석을 발행할 때 장로교 목사가 가담했다는 이유와 너무 자유주의 입장이라고 결정하면서 장로교는 아빙돈 주석을 금서로 지정했고 교단 주석을 발행하기로 했으나 이루지는 못했다. 신학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극 보수정통에만 매달려 결국 교단이 분열하는 비극을 맛보게 된다.
6. 북방선교의 시작 : 1910년 장로회 독노회 평북 대리회에서 서간도 선교를 청원하면서 시작된다. 많은 선교사들이 순교한다. 방지일목사는 산동성에, 최혁주목사는 만주에 파송을 받는다. 후에1921년부터 남만노회, 간도노회, 북만노회의 세 노회가 설립된다. 1942년에는 '만주조선기독교회'로 통합되었다가 해방 후 공산화로 소멸되어 버린다. 이 시절 봉천에는 신학교가 세워지고 정상인목사가 교장이되고 박형룡, 박윤선 등이 교수로 있게된다. 몽고선교는 1925년 감리교 최성모목사에 의해서 시작된다. 침례교의 이현태목사는 몽고선교의 순교자이다. 시베리아 선교는 동아기독교회에서 파송한 최성범 목사로 시작이 되며 박노기 목사가 시베리아로 가던 중에 풍랑으로 순교했다. 각교단이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으나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 정교가 강하여 선교활동이 자유롭지를 못했다 특히 공산화 이후에는 공산당들에 의해서 시베리아선교는 지속되지 못했다. 만주와 몽고 시베리아의 선교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또 이주해간 동포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현지인들까지 선교하는 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제 13장 일본 군국주의 통치하의 교회의 시련
일제는 한국교회를 조선 통치에 있어서 가장 거침돌이 되는 단체로 생각하고 이의 제압을 실시하게 된다 그 방법이 신사참배이다.
1. 황국신민화 정책-아시아를 제패하기 위하여 한국민을 완전히 일본과 동화시키는 정책으로 신사참배를 착안하였다.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하고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의 제창. 창씨개명, 일본어 상용 등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말살 정책을 시행하게된다. 그외 지원병제와 보국대를 실시했다. 이러한 일들은 통제가 쉬운 학교로 부터 시작되었고 규모가 작은 군소 교단부터 피해를 입게된다.
2. 기독교 탄압정책-신사참배를 통해서 기독교학교를 굴복시키고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 사이를 이간할려는 목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제사에는 참여하지말고 국민의례에만 참여하라고 타협을 했다. 장로회 총회에서 질의가 들어오자 총회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학교의 재량에 맞기는 쭉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총회와 충돌을 피했다. 그러나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이를 반대하였고 결국 학교는 1937년 페교가 되고 만다. 남장로교 선교부, 호주선교부는 스스로 학교를 폐쇄하였다. 그러나 감리교와 캐나다선교회는 신사참배를 받아드렸다.
3. 교회지도자들의 굴복-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일만일체, 선만일체, 내선일체의 표어를 주창하면서 각지에 신사를 짓게 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하고 1면1신사의 정책을 강행하였다. 신책과 신궁대마를 각학교와 가정에까지 설치를 의무화하였고 매일 아침에 참배하게 하였다. 제일 먼저 신사참배를 결정한 교회는 로마카톨릭이다. 일본이 독일과 이태리와 동맹을 맺게되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애국적 행사이므로 이를 허용해야 한다."고 신사참배의 길을열었다. 1936년 안식교를 선두로 구세군, 성공회, 성결교회, 감리교 등이 모두 굴복을하고 장로교회만 남아있었다.
4. 굴절된 교회의 모습, 장로교회의 굴복-1938년 평북노회는 김일선목사의 주장으로 신사참배를 통과시켰고 이어서 27차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에 의해서 신사참배가 공포되었다. 이때 기독교내선친목회 회원 심익현목사는 신사참배를 빨리 실시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총회에 항의서를 보낼 것을 결의하게되다.
5. 신사참배거부운동-1940년이 되면서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되고 감옥에서 순교한 교인이 50여명, 폐쇄된 교회가 200여 곳에 이르게 된다. 1938년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이 일로 학교는 무기 휴업하고 만다. 그런가운데서도 연희전문교장이었던 원한경은 신사참배를 환영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개신교 역사에서 빛나는 순교자가 되었다.그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서 중생을 체험하고 1921년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뒤에는 기도하는 오정모 사모의 뒷받침이 있었다. 길선주 목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 주기철 목사는 산정현교회에 부임하게 되고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설교를 하고 일본에 설교권 박탈과 목사사임의 압력을 당하게 된다. 이에 불복하자 총회는 주목사를 제명처분하게 되고 산정현교회는 폐쇄되고 만다. 투옥당한 주목사는 1944년 4월 21일에 순교한다. 최권능 목사, 감리교의 이영한 목사, 성결교의 박봉진 목사, 안식교의 최태현 목사 등이 순교를 하였다.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은 일본 제국의회에서 '여호와는 유일한 진신이시다'라는 유인물을 살포하다가 투옥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기본방안으로는 신사참배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않는다. 현실교회를 해체시킨다. 가정예배를 중심으로 교회를 신설한다. 이 운동의 배후에서 해밀톤, 메스베리 선교사가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만주에 있던 헌트선교사도 이들을 도와 주었다.
제 14장 교회의 마지막 변절
1. 교회의 친일행각-일제는 1938년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여 교회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교회의 친일 행각은 더욱 심해졌다. '일본적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서 민족주의 요소를 제거하고 교회의 헌법과 교리, 의식 등을 개정했다. 특히 감리교의 친일경향은 신흥우의 친일적인 작태로 잘 알 수 있다. 1942년은 교회 수가 전년에 비해서 교회는 750개가 줄었고 교인도 7-8만명이 줄어들었다. 1943년부터는 교회의 종까지 헌물로 받쳐져야 했다. 교회는 시국강연장이 되고 군수품 창고가 되었다. 찬송가금지, 사도신경의 고백금지, 구약성경의 창조주, 심판주, 만왕의 왕 등의 용어를 금지시켰다. 이런 가운데서 일제는 기독교 말살공작을 실시하여 성결교회는 재림사상의 강조 이유로 자진 해산하게 만들고 만다. 이후 군소교단은 모두 해체되고 만다. 군소교단을 해산한 근거는 그리스도 주권사상, 재림설, 반전론과 평화사상, 국제적 제휴 등의 이유이다.
2. 혁신교단-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일본의 지시로 교회 합동을 위하여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여기서 새교단 창단을 가결했다. 이 혁신교단의 주요 내용은 구약성경을 없애고 일본 개국신을 둔 가미다나를 예배당 안에 설치를 해서 장,감이 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하나로 통합하라는 것이다. 사실상 감리교단이 주도한 새로운 교단의 탄생은 감리교측이 혁신교단 설립을 위한 12개 항 혁신안을 제출하였으나 그 수정하자는 안이 통과되자 감리교단이 불복하고 탈퇴하자 무산되고 만다.
3. 교회의 병합과 통합-일본은 1942년에 자국 내에 있는 30여개의 교파를 하나로 통합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 지역의 여러 교회를 하나로 병합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병합된 교회의 재산은 모두 국방헌금으로 전환되었다.
4.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일제는 1943년 장로교회를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만들었다. 성결교단은 이미 폐쇄를 하고 1945년 8월에는 장, 감 두교단을 하나로 묶어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만들고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이를 공포하고만다. 이 때 교인들은 많이 지하로 숨었고 교인의 수는 절반이하로 줄어들게 된다.
5. 기독교 지도자들의 친일행각-1937년 일제는 시국강연회를 하면서 기독교계의 인사들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어용기관인 조선기독교연합회에 참여하였다. 33인중의 한사람인 박희도도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다. 백낙준, 신흥우, 진필순, 이용설, 정춘수, 정인과, 양주삼, 박인덕 등과 복음교회 최태용, YMCA 유각경, 박마리아. 감활란도 친일을 하였다. 이들의 친일은 어떤 이유로든지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6. (후)평양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설립-1938년 무기휴교를 한 장로회신학대학을 대신하여 친일적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학교 재건안이 28차 총회에서 인준을 받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평양장로회신학교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1940년 평양장로회신학교가 인가를 받게 되자 조선신학교설립을 주장하던 채필근 목사가 장로회신학교교장으로 가자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그러나 이들은 강습소로 인가를 내어서 김재준 목사를 교수로 해서 자유주의 경향의 신학교를 세우게 된다. 이것은 한국교단이 보수와 자유로 나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나 이 신학교의 설립 목적은 황국의 기독교역자를 양성하는 것으로 친일을 지향하고있었다. 감리교신학교도 '황도정신교사연성소'로 바뀌었다. 일제는 45년 8월17일에 모든 기독교지도자들을 한꺼번에 검거하여 모두 처단할 계획을 새웠으나 해방으로 무산되고만다.
제 3편 해방 후의 한국교회
제 1장 해방 후의 북한교회
조만식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건국준비를 할 때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서 평양에 입성한다. 감옥에서 출옥한 성도들과 숨어있던 교인들이 모여서 산정현교회에서 교회재건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여 발표하였다. 그러나 친일 목사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이기선목사는 혼자 30여 교회를 개척하면서 '재건파'를 세우면서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까지 말을 했다. 북한은 교회를 박멸하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핍박을 했으며 조선기독교연맹을 창설하고 강양욱이 대표가 된다. 그는 김익두목사와 박상순목사 김응순목사를 회유해서 이에 참여하게 했다. 장로회신학교와 감리교 성화신학교는 통합하여 '기독신학교'로 되었으며 6.25가 나자 모든 교회와 함께 완전히 와해되고 만다
제 2장 남한에서의 교회재건
미군이 진주한 남한에서는 미군이 치안과 행정의 공백을 없애기 위해서 친일적 인사를 등용하는 정책을 펴서 항일순교투사들의 입지를 좁게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 남부대회의 와해-북한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출옥성도와 친일 성도간의 갈등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통리였던 김관식목사를 주축으로 남한교회의 재건이 준비되었다. 이왕에 통합한 것을 분리하지 말고 밀고 나가자는 장로교의 주장을 감리교에서 받아드리지 않아서 결국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46년 장, 감, 구, 성 등의 교단이 모여서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창설했다. 이것이 KNCC의 모체가 되었다.
2.장로교의 재건-제일 먼저 경남노회가 시작했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와 최상림전도사, 손양원 주남선 한상동목사 등의 출옥성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곧 이어서 전국적으로 남한의 모든 노회가 회복되었다. 1946년 6월 12일에 남한 교회들만의 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많은 북한의 목사들이 남하하였고 또 통일될 때까지 총회결성을 미룰 수가 없어서 제2회 남부대회를 총회로 개회하게 된다.
3. 여러교파의 재건-감리교회는 재건파와 친일파 사이의 알력이 평신도들의 중재로 일단 하나의 교회로 출발할 수 있었다. 성결교회는 1943년 일제에 의해서 완전히 해산되었기 때문에 교인들은 타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해방 후 다시 재건하고 경성신학교를 '서울신학교'로 개칭하고 세력을 확보해 나갔다. 침례교는 미국의 남침례교회와의 공식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교회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4. 고려신학교의 설립-친일 인사를 중심으로 설립된 '조선신학교'만 있는 교계는 평양신학교와 같은 보수, 정통의 신학교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1946년에 박윤선목사를 중심으로 주남선, 손양원 목사등이 기성회를 설립하고 '고려신학교'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개교를 하게된다. 경남노회 임시노회에서 고려신학교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경남노회 정기노회에서 총회의 인준이 없이는 신학교를 할 수 없다고 선언하자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를 튼튼히 하는 길은 만주에 있는 박형용 박사를 모시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초청을 받은 박형용 박사는 교장에 취임했다. 그러자 고려신학교에 다니는 학생 51명이 신학은 보수, 정통이어야 하며 교권을 확립하여 평양장신대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고 성명을 내고 고려신학교로 전학을 했다. 이렇게 되자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1948년 34회 총회는 출옥성도 중심의 배타적이고 총회의 인준을 받지못한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무관한 신학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5. 경남노회와 고려파의 분립-한상동목사와 최덕지 전도사는 신사참배를 한 교회를 부수고 교회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으나 신사참배를 한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이 되자 노회는 고려신학교 인준을 취소하게 되었다. 결국 50년 4월에 열린 노회가 둘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교회는 분열하고 '고려파 장로교회'라는 새교단이 생긴 것이다.1952년 고신교단이 출발할 때의 교회는 568개, 교인은 15350명, 목사는 111명이었다. 원인은 신사참배교인과 출옥성도와의 갈등과 미국에서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갈라져나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며서 ICCC를 세우자 진보적 신학경향을 나타낸 교회들이 WCC를 이루자 이를 용공으로 규정하고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신측은 교세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사참배와는 관계없이 교회를 포섭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고려파의 분열은 독선과 신앙의 교만이 법통이라는 미명으로 분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6. 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설립-고려파가 분열해 나가자 총회는 총회직영 보수신학교 설립이 필요했다. 고신에 있는 박형용박사를 불러서 앞세우고 남산에 신학교를 세우자 조선신학교에서 보수를 원하는 학생들과 고려신학교에서 많은 학생들과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재학하던 학생들이 오게되고 1948년 6월에 개교하게 되고 이듬해에 총회직영이 되었다. 한 총회 내에 보수주의 학교와 자유주의 학교의 양립을 우려하여 둘의 통합이 추진되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다른 총회직영 신학교를 세울 것을 결의하여 1951년 9월 대구에서 총회신학교가 시작이 된다.
7. 조선신학교와 기독교장로회의 분립-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는 장로회신학교와의 통합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걷자 총회는 1953년 4월 38차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처벌하게 된다. 그러자 조선신학교는 1954년 6월에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분립하게 된다. 이들의 신학노선은 복음의 자유, 양심의 자유, 노예적 의존사상의 배격, 에큐메니칼 운동을 내세웠다. 카나다선교부가 동참했다.
제 3장 한국전쟁과 교회의 수난
남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소련이 먼저 철수를 하고 곧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도 에치슨 미국무 장관의 미국방위선의 일본열도 선언과 중국의 공산정권 수립으로 북한은 남한침공을 이행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하였고 강제 납북을 당하였다. 전북 원당교회 73명 살해, 황해 계동교회 175명이 교회와 함께 소사했다. 손양원목사는 주기철목사의 제자로 신사참배의 수난을 당하고 옥고를 치루었다. 나병환자 요양소 교회인 애양원교회를 섬겼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에서 공산당에게 두아들이 총살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아들을 죽인 학생을 양아들로 삼고 그를 공부시켜서 목사가 되게 한다. 6.25 때 공산군에 의해서 순교를 한다. 6.25가 발발하자 교회는 선무, 구호, 방송사업에 참여하였다.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설립하여 미국 대통령과 유엔사무총장과 유엔사령부에 호소문을 보내고 피난민 구호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남침례회, 나사렛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순복음교회, 여호와의 증인 등의 소종파가 들어오게 된다. 특히 1953년 부터 '복음주의연합선교회'가 국내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특히 방송선교에 앞장섰다. 선명회가 들어오고 '콤패션'이라는 단체가 들어와서 고아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홀트양자회'가 1955년에 입양기관을 발족하여 전쟁고아들과 일반 아이들의 입양을 시작하였다. 군목제도는 미군정청이 조직한 '미국군사고문단'에 의해서 실시되었다. 장로교의 최재화목사와 캠벨목사를 훈련병들에게 파송하여 신앙을 지도하게 한데서 출발을 하였다. 1954년 정식으로 군목을 장교로 입명하였다. 이는 세계선교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1961년에 군목제도가 법적으로 확립이 되었다.
제 4장 1950년대 이단운동의 발흥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은 용문산에서 애향숙이라는 사설학원을 세우고 계몽활동을 하다가 입신 방언 등의 성령체험으로 시작됐다. 나운몽은 기도전도, 부흥전도, 문서전도를 전개했다. 그러나 애향숙의 수련방법이 비성서적이고, 성경을 주역으로 해석했고, 유,불교를 통해서도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때문에 기성교회로부터 이단시 되었다. 박태선전도관(천부교) 그의 주된 교리는 피가름의 교리이다. 자신만이 주의 보혈을 받아서 자신의 몸에서 그 피가 이루어졌고 자신을 통해서만이 남에게 분배해줄 수 있다는 교리이며 이것은 혼음교리이다. 덕소와 소사에 신앙촌을 형성하여 신도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부를 쌓게 된다. 문선명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회)는 '원리강론'에서 교리가 나타난다. 타락론에서 루시퍼가 뱀으로 변하여 하와와 성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피가름이 있어야 하며 주역과 현대과학의 이론을 접목시켜서 교리를 만들고 십자가는 미완성됐기 때문에 자신이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제 5장 장로교회의 통합과 합동측의 분열
신학교 부지 매입을 위한 교제비 3000만환 사기사건과 박형용 교장의 1만 달러 암시장 교환사건으로 교단안에 불신이 생겼다. 분열의 결정적인 사건은 경기노회 총대부정사건이다. 박형용 교장의 책임을 묻는 에쿠메니칼운동 측과 비호하는 복음주의협회 측이 자파 세력을 확보하려고 하는 사이에서 부정의 시비가 일어나게 된다. 부정으로 총대가 선출되자 경기노회는 임시노회를 소집해서 다시 총대를 선출하자 복음주의 측에서 이를 무시하였고 총대 명단을 총회에 제출하였으나 총회의 투표로 에큐메니칼 측의 총대를 인정하게 되자 이를 거부하고 총회를 따로 구성한다. 이에 따라서 신학교도 장신과 총신으로 갈리게 되고 장신은 광나루에 총신은 사당동에 신학교를 개교한다. 에큐메니칼 측과 갈라진 NAE측은 고려파와 합동했으나 2년만에 다시 갈라지고 그후 합동보수가 갈라지고 계속되는 분열하여 130여개의 총회로 나뉘게 된다.
제 6장 1960, 70년대의 교회와 신학의 변화
1. 토착화 논쟁-토착화(indigenization)란 기독교의 복음이 어떻게 비 기독교원 문화속에서 뿌리내리고 그 문화 속에서 정착, 성장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토착화 이론은 미국의 선교 이론가 루프스 앤더슨이었다. 60년 대 초반에 한신대의 전경연 교수는 "그리스도신앙은 토착화할 수 없지만 그 문화는 토차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반대해서 감리교의 유동식 교수는 "복음도 문화라는 그릇에 담기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였고 감신대의 윤성범 교수는 단군신화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접목시켜서 단군신화 토착화 이론을 내세워서 교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2. 민중신학 논쟁-70년 대 투옥된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한국적인 신학이다. 남미의 해방신학의 영향과 몰트만의 정치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가난한자의 개념을 억압받는 민중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논리로 출발을 하게된다. 그러나 아직 민중의 개념도 정립이 안되있는 상황이라 앞으로 많은 신학자의 노력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3. 도시산업선교-사회가 산업화 도시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자 이들에 대한 선교가 많은 관심을 끌게 된다. 노등자들의 여악한 작업 환경과 잔업 수당의 지급, 미성년자들의 노동문제,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 등의 문제를 통괄적으로 다루는 산업선교가 본격화된다. 한국교회가 산업선교를 구체화한 것은 1957년 산업 선교의 실무자인 어커트가 내한하여 산업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연세대 안에 '도시문제연구소'가 개설되어 노정선 교수가 이를 맡고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이를 탄압하면서 "도산이 들어가는 데는 도산한다"는 말을 유포하면서 방해를 하였다. 정부는 도산이 근로자들을 선동하여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을 하려한다고 매도하였다. 그러나 산업현장에서의 선교는 노동자 뿐만이 아니라 사용자도 선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4. 1967년 신앙고백과 신학논쟁-1967년에 미국연합장로회가 발표한 신앙고백이 한국에 들어오자 이 신조가 지나치게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겨서 초월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비판과 함께 자유주의적인 신앙고백을 절대로 받아드릴 수 없다는 합동측의 성명에서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다른 나라의 신앙고백이 우리나라의 신학과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신앙의 성숙도가 낮아서 일어나는 일이다. 신앙고백이 그시대의 교회의 상황과 일치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근본을 그르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고정이었다.
5. 일본교회의 한국 교회에 대한 사과 - 1965년 일본교회는 각파 대표자대회를 동경에서 열고 일본의 한국교회 탄압에 대한 사과를 공식적으로 정부와 국회와 한국기독교연합회에 보내왔다. 그리고 1969년에 일제 때 불타버린 제암리교회를 복구했다. 그들이 참회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본을 사랑해야 한다.
6. 복음화운동(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과 6.25 때 '1천만 구령운동'의 열매로 1965년(토마스목사 순교 100주년, 선교 80주년)부터 전국적인 복음화 운동이 일어났다. 김활란, 한경직, 강원용 목사를 중심으로 강사가 400여명, 100만명의 군중이 모이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처음은 개신교만이 시작했으나 로마가톨릭이 참가해서 교계가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신학에는 찬반이 있을 수 있으나 복음화운동에는 찬 반이 있을 수 없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7. 일치를 찾아가는 교회들-장로교는 1972년 9월 16일 고신, 합동, 통합, 기장의 총회장과 총무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비록 큰성과는 없었다. 1995년 총회 창립 80주년과 광복 50년을 맞이하면서 4교단과 개혁, 합정, 호헌, 대신 등 4교단이 더 가입하여 모두 8개 교단이 참가해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었다. 감리교는 1978년에 정동제일교회에 모여서 하나의 교회로 출발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인권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는 미국대통령 카터의 발언으로 각 교계는 연합으로 이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위기감에 1977년 새문안교회에서 NCC 주체로 시국기도회가 열렸다. 이러한 노력에 미국의 연합장로교도 같이 동참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1962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신교를 '갈라져 나간 형제들'이라고 개신교를 형제교회로 받아들인 이 후 1968년에는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명동성당에서 신,구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기도회를 가졌다. 그 후에 1974년 긴급조치로 구속된 구속자와 사회정의실현을 위하여 명동성당 안의 가톨릭 문화회관에서 신구교 12개 단체가 모여서 기도회를 가졌다. 1977년에는 성경을 공동번역, 출판하는 일을 이루었다. 이것은 에큐메니칼의 좋은 선례를 남겼다. 1983년에는 개신교 찬송가를 하나로 통일하는 통일찬송가를 만들었다.
8. 교회의 급속한 성장-1970년 초부터 시작된 '전군신자화운동'은 군의 전투력 증강을 위한 방편으로 시작이 되었으나 이는 군의 복음화에 절호의 기회였다. 74년까지 군의 신자가 10만명이 늘어나는 엄청난 역사를 이루었다. 신앙고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세례를 받아서 문제가 되긴해도 군선교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1970년 대의 급속한 교회성장을 가져온 것은 교파를 초월한 대형집회의 결과라고 해도 좋다. 73년도의 빌리그래함 목사 초청 부흥성회가 첫 대회였다. 이 때 여의도광장에는 120만명이 모였다. 1974년 CCC가 주최한 엑스폴로 74는 '예수혁명-성령의 제3 폭발'이라는 제목으로 세계 대학생 선교회 총재 빌 브라이트 박사를 주 강사로 하여 모인 전도집회였다. 1977년의 '민족복음화 대성회'가 한국인의 자주적인 힘으로 개최되었다. 이 날은 1907년의 영적 부흥운동의 70주년 기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70년대 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교회의 강력한 사회참여와 복음주의적 성령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적 성장에 따르는 질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점은 여전히 남는다.
9. 유신정권에 대한 저항-1975년 321명으로 구성된 '기독교 정의구현 전국성직자단'이 연동교회에서 발대식을 가졌다. 78년에는 구속인사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연동교회에서 가졌다. NCC에서는 선교자유 수호를 위한 결의를 하고 정부에 요구하였다.
10. 한국 교회의 여성운동-1972년 동일방직 노동조합장이 조화순 목사가 양육한 여성사원들을 중심으로 선출되었다. 1979년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YH노둥조합사건은 유신독재를 청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렇게 1970년대에 불어온 여성신학의 발전 한국여성신학자 협의회를 결성하게 되고 남, 녀가 동반자적인 입장에서 선교와 봉사에 임하게 된다. 이러한 여성운동은 결국에는 여성안수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된다. 타교단들은 모두 여성안수를 실시하고 있었으나 장로교는 통합측에서 1994년에 총회에서 여성안수를 통과시켰다. 1996년에는 첫 여성장로와 목사가 탄생하게 된다.
11. 선교 제 1세기의 결산-1984년을 선교 100주년으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수행하게 된다. 국내의 개신교 20개 교단과 25개 기독교 기관이 공식적으로 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일부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으나 개신교단이 합력하여서 행사를 치르었다는 데서 강한 긍정적 평가를 받을 만했다. 특히 언더우드 선교 100주년 기념예배에서는 원일한 장로를 비롯한 언더우드 후손 50명 가운데 30명이 참석했다. 선교 100주년을 돌아보면서 선교 2세기의 방향설정이 시급한 때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1984년은 가톨릭으로서는 선교 200주년을 맞이하는 귀한 해로 처음으로 교황이 방문하는 해였다.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문제점도 있었지만 가톨릭이 개신교를 동반자로 인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2.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대회(JPIC)-WCC가 주관하는 이 대회는 1990년 3월에 열렸다. 여기서는 현재 인류가 안고 있는 위기상황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대처하며 신앙적으로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방도를 토의했다.
제 7장 새로운 세기를 향하여 통일을 위한 전진
1974년 북한은 '조선기독교도연맹'을 통해서 성명을 발표하고 NCC에서는 이에 진위를 확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85년에는 개신교 12개 교단이 연합하여 '한국교회남북문제협의회'를 구성하고 교회의 남북대화를 한 창구로 일원화하였다. 드디어 1986년에 스위스 글리온에서 '제1차 남북기독자회의'가 열렸다. 대표 11명이 모여 예배드리고 성만찬을 가질 수 있었다. 그 후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렇다할 진전이 없는 것은 이 문제가 북에서는 고도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그 후 봉수대 교회를 건축하였고 장충동교회, 칠골교회를 건축하였다. 1988년에는 글리온에서 비공개로 남북이 모여서 95년 희년사업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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