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금만경평야의 젖줄인 모악산은 과연 어떤 산인가. 일설에 따르면 모악산의 원래 이름은 금산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금산사란
절이름에 근원을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금산(金山)이란 무슨 뜻인가. '큰산'을 한자음으로 표기했다는 설과 금산사 입구 금평호에서 사금이 나오기 때문에'금(金)'자가 들어갔다는 설로 갈리기도 한다. 또 모악산은 그 정상에 마치 어미가 어린애를 안고 있는 형태로 보이는 바위가 있어 이로부터 생겨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금산사지」에 의하면 모악산은 우리나라 고어로 '엄뫼'라는 말이지만 '큰 뫼'라는 말은 모두 아주높은 태산을 의미한 것으로 한자가
들어오면서 '엄뫼'는 어머니의 뫼라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의역해서 모악(母岳)이라 했고 '큰 뫼'는 큼을 음역하고 뫼는 의역해서
금산(金山)이라고 칭하였다고 적고 있다.
모악산은 마치 어머니의 아늑한 품 속 같은 정겨운 산으로 수많은 등산객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며 행정구역으로 완주군을 비롯하여
전주시 및 김제시에 걸쳐져 있고 우리군에서는 모악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쾌적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모악산관광단지를 조성하여 도립미술관을
비롯한 문화공간과 넓은 주차장 및 다양한 상가들을 갖추고 있으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구이저수지의 경치는 그야말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산수를 자랑하고 있다. | ||||||||||||
| ||||||||||||
| ||||||||||||
동으로 구이저수지, 서로 금평저수지, 남으로 안덕저수지, 북으로 또 불선제, 중인제, 갈마제를 채우고 호남평야를 온통 적셔주는 젖꼭지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산이다. 정상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동으로 전주가 발아래 있고, 남으로는 내장산, 서쪽으로는 변산반도가 멀리
보인다. 오른쪽 가지는 동남방으로 굽이쳐 흘러가 12절(마디)아래서 구성산을 이루었고, 그 너머로는 호남평야의 중심지인 징게맹경의 평야가 있다. 모악산은 정유재란과 동학농민봉기, 그리고 6·25등 숱한 재난을 거치는 동안 여러차례 벌채되어 큰 나무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특기 할 만한 동식물은 없다. 그러나 모악산을 훼손되지 않은 산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여러 길로 나뉘어진 수많은 등산코스는 제각기 독특한 산경(山景)과 민속적 신앙을 담은 암자가 하나씩 어우러진 신비감마저 불러 일으킨다. 특히 봄철 금산사의 산벚꽃 향기는 호남제일로 불리고 있다. 호남사경(湖南四景)중 금산사 춘경이 제일로 꼽힌다. 두 번째가 변산반도의 하경(夏景)이요, 세 번째는 내장사의 단풍이다. 네 번째로는
백양사의 설경(雪景)으로 손꼽는다. 두 군과 두 면에 속해있는 모악산은 풍치, 경관이 원시적이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으며
인문경관은 어느 관광지역보다 웅대하고 맑기 때문에 사적 연구관광지로서 개발 또한 무궁무진한 곳이기도 하다. 원평에서 유명한 배나무 단지를 따라 동쪽 모악산을 향해 둑으로 올라서면 먼저 산자수려한 호반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호반은 금평저수지로써
농업용수로 사용하고있는 못으로 발원유수(發源流水)가 호적한 금산면 쌍용리 회평 계곡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 ||||||||||||
| ||||||||||||
| ||||||||||||
| ||||||||||||
대원사 | ||||||||||||
모악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대원사는 고구려 말 보덕화상의 제자인 일승,심정,대원 등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고려때에는 원명국사가 건립하였고 조선조에는 정유재란으로 불탄 후 한때 진묵대사가 재건하여 머물렀으며 조선말에는 종교사상가인 강증산이 도를 깨우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 ||||||||||||
| ||||||||||||
| ||||||||||||
| ||||||||||
무려 14년이나 걸려 완공 전주부 송광사 개창지비(1636년 건립)에 따르면 송광사는 1622년(광해군 14년) 승려 응호승명, 운쟁, 덕림, 득정, 홍신 등이 보조국사의 뜻에 의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고려시대의 도승으로 우리나라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역시 종남산을 지나다가 영천수를 발견하고 이 곳이 절터임을 표시한 후 전남 순천으로 내려가 자신은 그 곳에 송광사를 짓고 제자들에게 종남산에 절을 세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즉시 절을 세우지 못하고 그가 죽은 후인 1622년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무려 14년이 걸린 1636년(인조 14년)에야 완성을 보았다. 당시 무주 안국사 주지인 벽암대사를 개창조로 삼았으며 절터는 승려 승명의 증조부인 이극용이 희사했다고 한다. 종남산 송광사라는 현판이 걸린 원기둥 2개와보조기둥 2개를 사용하여 세운 건물로 다포식 맞배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 ||||||||||
| ||||||||||
| ||||||||||
균형잡힌 조선중기의 건축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으로 균형이 잘 이뤄져 깨끗하고 단정한 맛을 풍긴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곧바로 눈을 부릅뜨고 사바세계의 악귀를 내쫓는 사천왕문이 절을 지킨다. 송광사 중앙에 세워진 대웅전은 1857년(철종 8년) 제봉선사에 의해 세워져 지방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건물의 형태는 조선후기 건축의 기본적인 양식을 본뜬 정면 5칸, 측명 3칸에 다포팔작 지붕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의 벽과 천장에는 춤을 추는 여인을 그린, 19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보이는 민화 20여 폭이 그려져 있다. 또한 목조삼존불좌상(지방문화재 제41호) 뒤에는 십왕불탱화가 있다. 대웅전 쪽에 있는 십자각은 범종각이라고도 하는데 12개의 기둥을 사용한 2층 누각형태로 지방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안에는 1716년에 만들고 1796년에 보수한 동종이 걸려 있다. 한편 송광사 입구에서 동쪽으로 냇가를 따라 1백m쯤 올라가면 돌로 쌓아 울타리를 만든 부도군이 있는데 여기에 송광사에서 수도하다 열반한 20여 스님이 묻혀 있다. | ||||||||||
| ||||||||||
석간수(石間水)는 약수중의 약수
송광사의 뒤편으로 기암괴석과 울창한 잡목숲을 헤치고 오르면 해발 617m의 종남산 정상에 다다르고 이곳에서 서쪽을 향해 소양면 일임마을로
내려서면 중간 지점에는 전주제지 임산관리소가 있는데 이곳 석간수는 약수중의 약수로 정평이 나있다. | ||||||||||
| ||||||||||
| ||||||||||
|
| ||||||||||
위봉산성은 태조영정 피난처 송광사에 동북쪽으로 3Km쯤 가면 원래 외성이라 했다는 오성마을이 나오고 여기서 추줄산을 돌고 돌아 1.5Km쯤 오르면 폐허상태에서 흔적만 남아 있는 위봉산성의 서문에 다다른다. 다행인 것은 문위에 있었다는 3칸의 문주는 자취를 감췄지만 높이 3m 폭 3m의 홍예석문이 지방 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점이다. 이 산성은 1675년 7년의 세월동안 인근 7개 군민을 동원하여 쌓은 것으로 국토방위라는 목적보다는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었지만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영정을 피난시키기 위해 만들어 졌다. 결국 동학통민혁명때 태종 영정을 이곳으로 피난, 산성축조의 목적을 달성한 바 있다. | ||||||||||
| ||||||||||
개 군민을 동원 산성축조 당초의 성 규모는 길이 16Km 높이 4∼5m 폭 3m 의 석축이었고 3개소의 성문과 8개의 암문이 이었다 한다. 지금은 극히 일부의 성벽과 동서북문중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무지개문을 빠져나와 위봉마을을 지나면 옛날 52개의 말사를 거느린 호남의 모사(母寺) 위봉사가 있다. 전주 동북방 26Km지점인 이곳 추줄산에 위치한 위봉사는 604년(백제 무왕 5년)서암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며 1359년(고려 공민왕 8년) 나옹화상이 중창했다.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시대 건물이며 조서조 세조때 포호대사가 쓴 보과영전현판기를 보면 당시 규모가 전각 28동에 암자가 10동에 달한다고 되어있는데 지금은 보물 제608호인 보광명전과 지방 문화재 제698호인 요사와 삼성각만이 남아있고 백의관음보살 벽화가 자랑거리이다. 현재는 조계종 비구니의 수련장으로 확대, 중창되고 있다. | ||||||||||
| ||||||||||
높이60m 2단의 위봉폭포 높이 60m에 2단으로 휘어져 쏟아져 내리는 장관은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는데 그만이다. 이 물은 북쪽으로 흘러 관광명소인 동상을 거쳐 대아저수지에 흐른다. 겨울에 보는 위봉폭포는 꽁꽁얼어 하얀 천이 산자락을 가로지른 듯 보여 절경을 이루기도 한다. 이밖에도 완주군내에는 낚시터로 잘 알려진 구이, 경천, 양야, 어두 저수지가 있고 전쟁때 전주 방어의 요새였던 곰치와 이치, 그리고 산자 수려한 만덕산 등 천혜의 명소가 많다 | ||||||||||
| ||||||||||
| ||||||||||
| ||||||||||
| |||||||||||||||||||||||||||||||||||||||||||||||||||||||||||||||||||||||||||||||||||||||||||||||||||||||
대아저수지의 맑은 물과 시정이 넘치는 주변의 승경을 끼고 굽이굽이 거슬러 오르면 운장산 자락이 동상면에 이른다. 전국 8대 오지로 알려진 이 곳은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태고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비경으로서 한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 하다. 해발 1,259m의 운장산이지만 교통이 편리하여 등산코스로도 큰부담이 없으며, 토종꿀, 토종닭, 흑염소 등으로 구미를 돋울수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