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 중이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현역 축구 선수 중에 최고를 꼽으라면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을 꼽는 것에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선수가 세계 최고 수준 클럽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산소 탱크라고 부를 만한 지치지 않는 체력을 바탕으로 한 엄청난 활동량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기 그 생명이 다 해가는 것 같음에도 꺼질 것 같지 않는 산소 탱크가 있다. 바로 파벨 네드베드(유벤투스)다. 지난 06/07시즌 팀이 세리에 B로 추락하며 그를 볼 수 없었지만 이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네드베드의 시작, 그리고 성장
네드베드는 1972년 8월 30일 체코슬로바키아(현 체코 공화국)의 수도 프라하와 가까운 체브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아버지인 바클라프는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키웠고 아들은 부단한 노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 했다. 어려서부터 지역 축구 클럽에서 축구 기술을 연마한 네드베드는 1986년 스코다 플레첸이라는 클럽에서 청소년기를 보낸다. 이후 1991년에 프라하의 작은 클럽인 두클라 프라하에서 본격적인 성인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었고 91/92 시즌에 19경기에 나와 3골을 기록하며 서서히 체코 축구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체코 축구의 산실인 스파르타 프라하는 이 선수를 놓치지 않았고 1992년 여름, 네드베드를 자신들의 선수로 만든다. 현재는 미드필더로서 뛰고 있지만 네드베드의 선수 생활 초반부는 지금보다 스트라이커와 가까운 위치에서 활약을 했다. 그 때문에 스파르타에서 있던 4년 동안 98경기에 나와 23골을 기록할 수 있었고, 왕성한 활동량과 특히 양발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그의 재주는 1994년 그를 국가대표팀의 일원이 되게 했다.
네드베드가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뼈를 깎는 노력이 뒷받침 되었다. 이와 더불어 매사에 프로로서 진지한 자세로 임했던 것이 성공의 원동력이라고 본인은 말한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강했으며 그렇기에 강한 책임감을 갖고 경기에 임한다고 한다. 또 자신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데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고 한다. 주변인들은 이렇게 강한 정신력을 갖춘 네드베드는 다른 일을 했어도 성공했을 것이라고 그를 칭찬한다.
인생의 전환점, 유로 96 그리고 라치오
1996년 잉글랜드에서 열린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이하 유로)에서 체코가 결승까지 가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조별리그 C조에 편성된 체코는 한 조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있었던 데다가 나머지 한 팀도 난적 러시아였기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의 예상은 체코가 조별 리그 첫 경기인 독일 전에서 0-2로 지자 크게 틀리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두 번째 경기에서 체코는 이탈리아를 2-1로 격파하면서 분위기를 전환했고 네드베드는 귀중한 선취골을 뽑아내며 이탈리아 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긴다. 러시아와 세 번째 경기에서 체코는 난타전 끝에 3-3으로 비겨서 승점 4점을 기록했으나 같은 승점 4점인 이탈리아에게 거둔 승리로 8강에 진출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기세를 탄 체코는 8강에서 포르투갈을 4강에서는 차기 월드컵 개최국인 프랑스를 승부차기 끝에 꺾으며 결승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결승에서 다시 만난 독일에 설욕을 다짐했던 체코는 그러나 올리버 비어호프에게 두 골을 얻어맞으며 연장전 혈투 끝에 1-2로 패배, 결국 우승컵을 눈앞에서 놓치고 만다.
그러나 유로 96에서 보인 체코의 돌풍으로 팀 공격을 주도했던 블라디미르 스미체르, 파트릭 베르거, 카렐 포보르스키 그리고 네드베드의 주가는 폭등했고 당시 딕 아드보카트 전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이 재직하고 있던 PSV 아인트호벤과 SS 라치오가 네드베드 영입 경쟁에 뛰어들었다. 결국 1992년에 부임한 세르지오 크라뇨티 구단주의 의욕적인 투자를 통해 팀의 크기를 불려나간 라치오가 이 경쟁의 승자가 되었고, 네드베드는 이탈리에서 자신의 전성시대를 활짝 열었다. 데뷔 시즌부터 11골을 터뜨리며 빠르게 세리에 A에 적응한 네드베드는 1997년 부임한 스벤 고란 에릭손(현 멕시코 국가대표 감독)과 함께 트로피와 인연도 맺을 수 있었다. 라치오는 97-98시즌 팀은 7위에 머물렀지만 코파 이탈리아를 재패하며 24년 만에 메이저 대회 우승이라는 기쁨을 맛봤다. 에릭슨 감독은 크리스티안 비에리(아탈란타, 1998년 라치오 입단)와 에르난 크레스포(인터, 2000년 라치오 입단)같이 세계최고 이적료 기록을 경신는 통큰 투자를 단행한 크라뇨티 구단주의 과감한 지원 속에 팀을 만들어나갔다. 이 속에서 네드베드는 항상 중심적인 몫을 수행했다. 결국 네드베드는 잉글랜드 버밍엄에서 열린 98-99시즌 유럽 컵 위너스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에게 컵 위너스컵 트로피를 안기는 데 성공한다. 컵 위너스 컵이 그 대회를 끝으로 폐지되었기에 이 우승의 의미는 컸다. 네드베드는 그 시즌 부상과 사고가 이어져 경기력이 좋지 않았지만 결국은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했다. 그러나 그 시즌 팀은 줄곧 선두를 유지하다 AC 밀란에게 극적인 역전 우승을 헌납했기에 라치오와 네드베드는 컵대회 우승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전 시즌의 실패를 교훈 삼은 라치오는 심기일전해 99-00시즌, 유벤투스를 누르고 26년 만에 스쿠데토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네드베드의 가족 그리고 팀에 대한 애정
네드베드의 가족사랑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네드베드는 15세 때부터 그 보다 두 살 어린 이바나와 만나기 시작했다. 이바나는 그의 할머니가 있는 체브에 자주 찾아갔는데 그 때 네드베드와 만난 것이다. 이 둘은 일찌감치 결혼을 약속했고 네드베드가 21세가 되던 해 그 약속을 지켰다. 네드베드 부부는 두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아들은 파벨, 딸은 이바나다. 부부가 자신들이 죽어서도 남매끼리 변치 않는 사랑을 하길 바라는 의미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는 훈련을 마치면 항상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가족에 대한 끔찍한 사랑을 보이고 있다.
네드베드는 라치오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비롯한 탑 클럽에서 거액의 돈 보따리를 들고 숱한 이적 제의를 받아왔지만 그 때마다 거절했다. 이는 라치오에서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싶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물론 가족들에게 큰 환경 변화를 주기 싫다는 점도 작용했다. 네드베드는 2000년 말 에릭손이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떠난 데다 구단과 마찰까지 생기며 2001년 결국 팀을 떠나고 말았지만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당시 2시즌 연속 준우승으로 자존심이 구겨진데다 지네딘 지단이 레알 마드리드로 입단하면서 공격의 리더가 필요했던 유벤투스의 적극적인 노력을 받아들여 비안코네리의 일원이 되었다.
네드베드가 입단할 당시 유벤투스는 카를로 안첼로티(현 AC 밀란 감독)를 해임하고 1990년대 중반 팀을 맡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끈 것을 비롯 세리에 A 3회 우승을 이룬 마르첼로 리피 감독을 다시 한 번 불러들였다. 리피 감독은 네드베드를 팀 공격 전술의 중심에 세웠고 팀의 역동성을 끌어올렸고 팀의 공격루트를 다양화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혹자는 지단이 존재했던 유벤투스보다 나았다고 했을 정도니 네드베드의 활약은 대단했다. 결국 01-02시즌에 유벤투스는 네드베드의 옛 팀 라치오가 마지막 경기에서 인터 밀란을 4-2로 꺾으면서 짜릿한 역전 우승을 이룩한다. 당시 지안루이지 부폰, 릴리앙 튀랑(FC 바르셀로나)과 함께 새롭게 팀에 가세한 네드베드는 자신에 대한 기대에 부담을 느꼈을 법했지만 그러지 않았고 시즌 내내 맹활약, 다시 한 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유벤투스의 마지막 세리에 A 우승은 기록상 02-03 시즌이다. 네드베드는 그 이후 두 번의 우승컵을 더 들어올렸지만 칼치오 폴리 사건 때문에 그 두 번의 우승컵은 모두 무효가 되었고 유벤투스는 06-07 시즌을 세리에 B에서 맞이하게 된다. 전성기가 지났다고 하나 정점에서 그렇게 많이 내려오지 않았기에 충분히 다른 팀에서 뛸 수 있었던 네드베드는 타 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유벤투스에 남았다. 팀을 떠나는 옛 동료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너그러움까지 보이면서 말이다. 결국 팀에 남은 네드베드는 시즌 중반 퇴장으로 5경기 출장정지를 당하는 난관을 겪었지만 팀을 다시 세리에 A 무대에 올려놓았고 유벤투스와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선수생활 마지막 시즌에 돌입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네드베드의 가족에 대한 애정은 그가 2부 리그에서 뛰게 됨에도 토리노를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토리노에는 축구가 있고 토리노 생활을 즐기는 가족이 있다고 말하며 그것 이외 무엇이 필요하겠느냐며 토리노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그는 라치오 시절에는 로마 외곽에서 살아서 도시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유벤투스의 팬들이 이런 선수를 어찌 싫어할 수 있을까?
한이 될 챔피언스리그 그리고 국가대표
02-03 챔피언스리그는 네드베드를 위한 무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네드베드는 정점에 서질 못했다. 굳이 유벤투스의 팬이 아니더라도 네드베드가 이 대회 결승전에서 뛰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전 시즌 바이어 레버쿠젠과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게 밀려 16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유벤투스는 이탈리아 챔피언으로 나선 02-03 시즌 에서도 16강 조별리그에서 고전을 펼쳤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홈경기에서는 선수들이 대거 독감에 걸려 치욕적인 0-3패를 당한 것을 포함 여섯 경기 동안 세 번이나 졌다. 6경기를 치른 뒤 세 팀이 승점 7점에 몰려있었으나 골득실차로 간신히 8강에 오른 유벤투스는 홈에서 벌어진 FC 바르셀로나와 1차전에서 1-1로 비기면서 위기에 몰렸다.
누 캄프로 넘어간 2차전에서 유벤투스는 네드베드가 후반 5분 만에 선취골을 넣어 위기를 넘겼으나 샤비에게 동점골을 내주고 종료 10분을 남겨두고 에드가 다비즈(아약스)가 퇴장까지 당하며 수적 열세 속에 연장으로 들어갔다. 한 명이 모자란 유벤투스는 연장전에서 승부차기를 염두에 둔 듯 수비적으로 임했지만 네드베드에 의한 단 한 번의 역습으로 마르셀로 잘라예타가 결승골을 뽑아내며 4강행에 성공한다.
유벤투스와 레알 마드리드가 대결하게 된 4강전의 화두는 단연 지단과 네드베드의 대결이었다. 더구나 지단의 옛 팀이 유벤투스였고 그 자리를 메운 것이 네드베드였기 때문에 관심은 더욱 컸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1차전은 지단의 완승이었다. 지단은 현란한 개인기과 경기 조율능력을 선보이며 유벤투스를 거의 혼자서 압도, 2-1승리를 견인했다. 그러나 2차전은 달랐다. 네드베드는 1차전의 부진을 만회하려는 듯 종횡무진 뛰어다녔고 승부의 쐐기를 박는 세 번째 골을 작렬, 결승행 꿈에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결승행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후반 중반 네드베드는 스티브 맥마나만에게 필요 없는 백태클 반칙을 범하며 경고를 받는다. 토너먼트에서 두 번째 경고를 받아 경고 누적이 된 것이다. 2002년 월드컵 4강전에서 미하엘 발락(첼시)이 경고를 받아 결승전에서 나오지 못한 장면이 오버랩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발락의 경우는 ‘놔두면 실점’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네드베드의 경고는 ‘하지 않아도 될’ 장면이었다. 이 때문에 결승진출을 확정지은 델레 알피 경기장은 결승진출의 기쁨보다는 결승에서 네드베드가 뛸 수 없다는 사실 하나로 슬픔에 빠졌다. 자신의 실수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선수 본인도 피치 위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결국 결승에 오른 팀은 공격력의 약화를 감수한 체 AC 밀란에게 승부차기 끝에 졌고 네드베드가 빠진 아쉬움은 더욱 크게 남았다. 유벤투스가 리그 2연패를 달성하긴 했지만 네드베드에겐 그 시즌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가득한 한 시즌이 되고 말았다. 그에게 돌아간 발롱도르(유럽 골든볼)도 그의 아픔을 달랠 수 없었다.
유로 96이 네드베드가 대표팀의 일원으로 뛰고 있는 동안 체코가 가장 잘한 성적이다. 이후 체코는 98 프랑스 월드컵 본선진출에 실패했으며 유로 2000에서도 월드 챔피언 프랑스와 홈팀 네덜란드와 같은 조에 편성되는 불운 속에 1승 2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네드베드의 체코는 2002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비장한 각오로 나왔으나 플레이오프로 떨어졌고 만만하게 여겼던 벨기에에게 2연패, 또 한 번 쓴잔을 들이키고 만다. 클럽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네드베드에게 큰 아픔이었다. 포르투갈에서 열린 유로 2004를 대표팀 은퇴무대로 삼은 네드베드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어느새 그는 대표팀에서 최고참급이 되었고 팀의 중심도 서서히 토마스 로시츠키(아스날)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다했고 밀란 바로쉬(올림피크 리옹)의 골행진 속에서 팀은 4강까지 전승으로 달려 나갔다. 부상을 안고 그리스와 4강전에 나선 네드베드는 결국 후반 중반 상대의 태클로 더 뛰지 못하게 되었다. 팀의 구심점을 잃은 체코는 결국 연장전에서 트리아노스 델라스(AEK 아테네)에게 통한의 헤딩골을 허용 결승진출이 좌절되고 만다. 네드베드가 자신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팀이 결승에 올라가길 바랐지만 축구의 신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2001년 벨기에에게 당한 2연패로 월드컵 진출이 좌절된 체코는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다시 한 번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지역예선에서 네덜란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2위로 떨어져 한계를 절감한 체코는 4년 전에 겪은 실패를 반복할 수 없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한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저버릴 수 없었던 네드베드는 2005년 11월, 덴마크와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돌아온다. 백전노장이 돌아온 체코는 덴마크와 두 번의 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16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할 수 있었다. 체코가 본선에 오르자 많은 팬들은 8강은 거뜬하다며 체코의 전력을 높이 평가했다. 더구나 네드베드가 있기에 더 잘하리라 믿었다. 당시 체코의 FIFA랭킹은 2위였다.
미국과 E조 조별리그 첫 경기를 3-0으로 깨끗이 이기며 체코를 향한 팬들의 시선은 더욱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월드컵은 그리 호락호락한 무대가 아니었다. 가나와 벌인 두 번째 경기에서 전반 1분여 만에 아사모아 기안에게 기습 골을 얻어맞은 체코는 가나의 공세에 계속 휘청거리더니 토마스 위팔루시(피오렌티나)의 퇴장까지 겹치며 0-2로 충격의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벼랑 끝에 몰린 체코는 함부르크에서 벌인 이탈리아를 앞두고 유로 96의 재현을 꿈꿨다. 유벤투스 시절 네드베드를 끔찍히 아꼈던 리피 감독은 애제자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들도 지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결국 승부는 이탈리아의 승리로 끝났고 네드베드의 국가대표 생활도 거기까지였다. 네드베드는 2006년 8월 세르비아와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을 완전히 떠났다. 네드베드는 대표팀 선수로서 조국에 우승컵을 바친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대표팀을 떠났지만 그가 이끄는 체코 대표팀은 언제나 축구팬들에게 화려함과 시원함을 선사해주었다.
체코산 산소탱크가 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많은 팬들은 보기 만해도 믿음직한 선수인 네드베드를 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플레이는 영원히 팬들의 기억 속에서 남아있을 수 것이다.
파벨 네드베드 (Pavel Nedvěd)
생년월일 : 1972년 8월 30일
출생지 : 체브
키 : 177 cm
소속 클럽 : 유벤투스 (이탈리아)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중앙/왼쪽)
클럽 경력
1991-1992 두클라 프라하 19경기 3득점
1992-1996 스파르타 프라하 98경기 23득점
리그 우승(92/93, 93/94, 94/95) - * 92/93시즌은 체코슬라비카아 통합리그로 진행
첫댓글 두개의 심장을 가진 사나이...ㄷㄷ
박지성보다 모든 면에서 동급이거나 한 수위인 사나이..
10년 젊어지게 하는 약을 먹이고 싶은 ㅋㅋㅋ
이제 그의 플레이를 볼날이;;
아니 한수가 위라뇨 _-;; 몇수나 위죠 아 -_;; 네드베드 정말 충성심 강한 선수였는데 라치오 ㅅㅂ 망할 구단주 새킈가 개막장 멘디에타 산다고 유벤투스에 가따 팔고 라치오맨 네드베드를;; 아오 아쉬워
저.. 태클은 아닌데, 2006 월드컵 플레이오프는 노르웨이와 붙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닌가요;;
저 태클은 아닌데 이거 제가쓴기사 아닌데요^^ ㅎㅎ
최고에요 그분!!
사랑해요 네드베드...정말...
저는 정말로 네드베드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