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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의 아버지 사마천
<잉어와 사마천>
아무래도 민물고기의 황제는 잉어다. 잉어는 몸에서 발산하는 은은한 황금빛, 그리고 중후하게 생겼으면서도 기지와 패기가 넘쳐 흐르는 기상이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신비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잉어를 지혜와 슬기의 상징으로 중히 여겼다.공자도 외아들의 이름을 "잉어"란 뜻의 "리" (鯉)라고 지었을 정도로 잉어를 좋아했다.
중국 황허의 싼시성 시안의 동북쪽으로 약 250km, 함곡관에서 항허를 따라 서북쪽으로 100여 km 거슬러 올라가는 협곡에는 "롱먼(龍門)"이란 곳이 있다. 이 롱먼의 협곡은 물흐름이 거센 높은 폭포로 되어있다. 롱먼 폭포수로 흐르는 항허에는 거센 물기둥을 거슬러 올라 가고 싶어 하는 많은 잉어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 해마다 복사꽃이 물위를 흐르는 봄철이 되면, 롱먼 에는 뭇 잉어들이 모여 들어 급류를 다투어 뛰어 오른다.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이겨내고 기어이 폭포를 뛰어 오른 잉어는 용으로 화신하여 등천한다. 즉 어변성룡(魚變成龍)하는 전설이 어린 롱먼은 "등용문(登龍門)"이란 말을 낳았다.
그 롱먼이 바로 중국사의 아버지 또는 사성(史聖)이라 일컬어지는 사마천(司馬遷)을 나은 곳이다. 그의 사기는 중국고대사를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탁월한 역사서일 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등용문을 향해 솓구치는 잉어처럼 생생한 충격을 느끼게 하는 불후의 대작이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지금의 싼시성 한청(韓城)시의 롱먼(龍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이라는 관직을 갖고 있었는데 조상 대대로 집안이 사관(史官)을 맡았다.
<여행가 사마천>
사마천은 여행가였다. 그는 열살 때부터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여 청년시절을 거의 하루도 쉬는 일이 없이 여행을 하였다. 말 마(馬), 옮길 천(遷) 성명 그대로 젊은 시절의 사마천은 여행광이었다. 사마천의 문장은 글 자체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학자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글만 가지고 문장을 구하면 종신토록 애써도 새로운 진실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가까이는 황허와 화이허가 펼치는 중원지역, 멀리는 양쯔강의 상류 파촉지방(지금의 쓰촨성)까지 닥치는 대로 주유하였다. 그의 여행은 경치를 구경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지방의 풍속과 전설을 수집하려는 것은 물론 천하를 조감하고 자신의 안목을 넓히려는데 있었다.
그리고 여행은 사마천에게 관용과 겸허함을 주는대신 아집과 편견을 버리게 해 주었다. 여행은 그에게 삶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고 타인을 용서하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무엇보다 값진 것은 여행은 중국 전제군주시대 사람인 그에게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었다. 방랑의 즐거움, 해질녘 붉게 타는 노을을 바로보며 느끼는 외로움, 고독. 그의 사유는 경험한 만큼 넓고 깊어 지게 되었다. 이러한 체험과 사색을 자기 글로 승화시켰다. 사기(史記)가 바로 그것이다
사마천은 오랫동안 한무제의 낭중(오늘날 대통령 수행비서격)이 되었다. 기원전 110년, 사마천이 36세 때 아버지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며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부탁하였다. 부친이 죽고 난 3년 후,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사마담이 모아놓은 엄청난 역사 기록과 황실 도서관의 책들을 미친 듯 연구하기 시작했다. 사기의 집필 경위와 사마천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는 "태사 공자서" 부분에서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소자 비록 모자라오나 아버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고 예전부터 듣고 본 것을 남김없이 서술하여, 조금도 빠진 부분이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사마천은 더 많은 역사 공부를 하고, 더 많은 여행을 해서 견문을 넓혔다.
<사형수, 사마천>
그러나 기원전 99년, 사마천에게 비극적인 일이 생겼다. 장군 이 광리(李廣利)의 부하로서 흉노 정벌에 나섰던 장수 이릉(李陵)이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이 릉은 뛰어난 장수였지만 5천명의 보병 부대를 지휘하여 출정했다가 8만명이나 되는 흉노의 기마 부대에 포위되어 어쩔 수 없었다. 이릉은 심한 부상을 당하고 쓰러졌고, 결국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릉이 사로잡혔다는 사실 때문에 그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했다. 결국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 사형수의 신세가 되고만다.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첫째, 금전속죄. 황금 3만 8천근을 바치고 서인으로 떨어지는 것. 둘째는 궁형이다. 궁형이란 사내의 고환을 썩히는 형벌이다. 즉 거세를 의미하는데, 당시로서는 궁형을 받고 구걸하듯 목슴을 부지한 자는 사람축에 끼지를 못했다. 상장군의 아들 진평이 사기꾼 패거리에 걸려 보증을 잘못 섰다가 죄인으로 몰린일이 있었다. 진평은 스스로 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사형을 거절하고 궁형을 자청했다. 그뒤로 어디를 가거나 진평에게는 놀림의 웃음소리가 따라 다녔다. 반면에 궁형을 거절하고 몸이 찢겨죽은 살인범이 있었는데, 그는 오히려 죽어서 때깔을 빛내고 있었다.
40대 중반 사마천은 치욕의 극치인 궁형을 택했다.
궁형에 처해지고 나서도 사마천은 전혀 죽을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동정하고 있던 사람들도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 살아 수모를 당하는 겁쟁이놈, 목숨을 아끼는 비겁한 놈"
꼼짝않고 틀어박혀 있는 사마천의 집으로 어느날, 북방경비를 맡고 부임해 온 친구 임안 장군이 찾아왔다.
"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네. 나는 의에 두처운 자네를 뒤따르는 자가 있다고 믿고 있네. 자네가 한일은 옳은 것일세. 그러나 황제 앞에서 국가를 위해 직언했을 때, 상당한 각오를 했을 것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해서 오늘날까지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인가. 그 이유를 듣고 싶네."
" 목숨이 아깝네. 단 그뿐일세."
"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받고서도 말인가?"
"그렇네"
장군은 자세를 고치고
"실은 두 개의 선물을 가지고 왔네. 하나는 단검, 이것으로 자결하게, 하지만 자네는 나와 달리 문관일세. 칼보다 독약쪽이 나을지도 모르지. 이 가죽 주머니속에 독약이 들어있네. 어느 쪽이든 하나를 고르게. 내가 최후를 지켜보겠네."
사마천은 조용히 머리를 저었다.
" 그 아무것도 소용없네"
"자네답지 않군. 살아 생전 수모를 당하고 언제까지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생각인가."
"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네. 하지만 아무래도 살고 싶은 것일세."
" 사마천이여, 남자답게 죽어주게"
" 나는 일만번 형벌을 받는다 해도 끝내 살아갈 작정일세"
" 어째서인가? 왜 비겁자의 오명을 듣고 오래 살고 싶어하는 건가?"
사마천은 끝까지 침묵으로 버텼다. 장군 임안은 드디어 화를 내어
" 더 이상 묻지 않겠네. 목숨을 아끼는 말따윈 듣고 싶지 않네. 그런 수치를 모르는 비겁자와는 오늘로 절교일세!"
그는 거칠게 자리를 걷어차고 떠났다.
<유협의 비조, 사마천>
역사에는 과연 정의가 있는가? 세상에는 진실이 있는가? 왜 정의와 진실은 패배하곤 하는가? 사마천은 역사의 기록 앞에서 이러한 안타까움과 의문을 품고 분노를 곰삭이며 사기를 완성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마천은 정의와 진실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는 않는다. 진실은 비극을 각오해야 한다. 진실의 극치는 비극이니까 그런 비극을 사기 저술로 승화시킨 정신은 그 이후 암울한 시대의 많은 인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현실의 부정부패를 과감히 비판하고 정의와 의리를 찬송하는 내용은 사마천 이후의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사기는 인간학의 보물창고다. 고대중국의 각박한 역사 현실 속에서 갖가지 인물 군상들이 빚어내는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이다. 사기 중에서도 명문으로 첫번째 손꼽히는 문장은 예양 섭정 전제 형가 곽해 등이 줄지어 등장하는 "자객열전"과 "유협열전"이다. 사마천 말고 어떤 누가 조직폭력배나 테러리스트로 매도당할 수 있었던 협객들의 삶과 죽음을 "자객열전"과 "유협열전" 등으로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사마천이 없었으면 자객이나 유협은 없었다. 즉 자객이나 유협은 사마천으로 인하여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자객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필살의 유협론을 폈던 것이다. 사마천이야 말로 협객 중의 협객, 천하 제1대협이다. 그러나 열전을 읽는 사람들이 정작 읽어야 할 것은 마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핍진한 생생한 필치에 대한 경탄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마천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사기에는 후세의 중국의 관선사서(官選史書)에서는 볼 수 없는 일종의 개인적인 감개와 비판 정신이 흐르고 있다.
사마천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을 필요가 있었다. 자기의 눈으로 보고, 자기의 분노로서 역사를 쓰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목숨을 건 비원이었던 것이다. 살아서 수모를 겪고 끝내 살아가는 고통도 그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정의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분노로 굴욕을 견디어내며 대업 사기를 완성했다. 절대적 권력의 황제에게 정의감에 불타 직언을 하다 궁형에 처해진 사마천은 자신의 울분을 사기저술로 승화시킨다.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되뇌이며 인류의 보편적 과제인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탐구했다. 따라서 우리는 사기를 읽으며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 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게 된다. 사기는 세계 최초의 문화사, 사회사를 겸한 일대사서로서 후세에 남겼다.
관광명소보다 잊혀진 곳이나 남들이 잘 안가는 곳을 즐겨하는 북경원인에게는 롱먼 답사는 잉어가 등용문을 거슬러 올라가는 만큼이나 몹씨 힘들었다. 시안에서 지프를 잡아타고 시안 북쪽의 웨이허(渭河)를 건넌다. 거기서 항허본류를 향해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지도에도 없는 팍팍한 황톳길이 가도 가도 끝없이 계속된다. 해거름 무렵에야 가까스로 롱먼에서 약5KM 남쪽에 있는 외진 소도시 한청(韓城)시에 도착한다.시내 최고급이라지만 우리나라의 장급 여관보다 훨씬 못한 롱먼빈관에서 1박한다. 다음날 아침 눈이 뜨기가 무섭게 황허 서편 강 절벽 저 높은 곳에 우뚝 서있는 사마천의 사당을 향해 떠난다. 사당은 사마천의 의관을 모셔놓은 곳으로 그의 석상과 함께 그를 기리는 61개나 되는 비석이 놓여있다. 사당 뒷뜰에 대리석으로 잘 다듬어 놓은 전망대에서는 아래로 흐르는 황허를 굽어살펴 본다. 거기서 2km가량 북쪽 상류가 이른바 롱먼, 등용문. 도도히 흐르는 황허는 거기께 이르러 무슨 격정에 겨운듯 심하게 몸부림을 치고 있다.
롱먼에로의 여행은 일거양득이다. 등룡문과 사마천을 동시에 만날 수 있어서다. 잉어가 등룡문을 통과하여 용이 된 전설의 현장 뿐 만 아니라 치욕과 절망을 극복한 위대한 영혼, 사마천 그를 느낄 수 있어서이다. 롱먼의 추억은 좀처럼 누렇게 뜬 황톳빛으로 변색되지 않는다. 그것은 열두발 상모로 흐르는 가슴속 강물에 퍼런 물고기 비늘로 싱싱하게 살아있다.
● 시대별 중국사략
중국 고대사회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까지의 중국의 역사. 중국 역사를 기록할 때 지리적 범위는 역사적인 견지에서 설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대체로 청(淸)나라의 영역과 일치하며, 본부(本部) 18성(省)과 속령으로 이루어진다. 속령은 현재 둥베이[東北]라 불리는 만주(滿洲)를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내몽골·외몽골, 그 남서쪽의 신장[新疆], 남쪽의 칭하이[靑海]를 포함하는 티베트로서, 합쳐서 만(滿)·몽(蒙)·회(回)·장(藏)이라 불리던 지방이다.
1. 선사시대
(1) 구석기시대
베이징[北京] 남서쪽에 있는 저우커우뎬[周口店]의 제 2 간빙기(第二間氷期) 지층에서 자바원인(피테칸트로푸스)에 이어 오래된 사람뼈가 발견되어 베이징원인[北京原人;Homo erectus Pekinensis]이라고 명명하였다. 베이징원인은 골격으로 보아 직립(直立)하였고, 출토물로 보아 불과 석기를 사용하였으며 수렵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의 석기를 초기구석기라 한다. 제 3 간빙기 때에는 석기의 형태가 진화되고 지방색을 띠어 자연환경에 따라 생활수단도 분화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무렵의 중기구석기시대 유물에는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데 사용한 작고 예리한 잔석기[細石器]와 짐승의 뼈로 만든 골각기(骨角器) 등이 있다. 제 4 빙하기에 현재의 중국인과 거의 골격이 같은 현세인류가 나타났으며, 이 때의 석기를 후기구석기라 한다. 저우커우뎬 상부지층의 산정동(山頂洞)유물이 여기에 속한다. 한편 베이징원인보다 더 오래된 원인의 뼈로 윈난성[雲南省] 위안머우현[元謀縣]에서 발견된 위안머우원인[元謀原人]과 산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에서 발견된 남전원인 등이 있다. 베이징원인의 연대는 23만∼46만년 전으로 짐작되며, 새로 발견된 두 원인은 60만∼70만년 전의 것으로 보인다.
(2)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로 들어서면서 주목할만한 현상은 가장 오래된 채색토기문화(彩色土器文化)가 서아시아방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사실이다. 채색토기는 채도(彩陶)라고도 하며, 표면을 연마(硏磨)한 주발과 단지에 흑(黑)·백(白)·홍(紅)으로 무늬를 나타낸 토기로 화베이[華北] 일대에 널리 분포한다. 1921년 스웨덴 학자 J.G. 안데르손이 조사한 허난성[河南省] ?x츠현 양사오유적[仰韶遺蹟]에서 처음 출토되어 이 계통의 문화를 양사오문화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동쪽에 있는 반포유적[半坡遺蹟]은 지름 200∼300m 정도의 둥근 연못으로 둘러싸인 주거지(住居址)로서, 300여 군데나 되는 구덩식주거[竪穴式住居]를 포함, 채도와 많은 양의 조(粟), 개·돼지뼈가 출토되었다. 그보다 더 동쪽에 있는 장자이유적[姜寨遺蹟]은 둥근 연못 안쪽에 다시 목책을 둘렀고, 약 100호의 구덩식 주거가 다섯 무리로 나뉘어 있어 씨족끼리 모여서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후세 도시국가의 원형(原形)을 이루는 것으로, 그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채도문화는 산시성[陝西省]·허난성뿐만 아니라, 널리 산시성[山西省]·허베이성[河北省]으로부터 산둥성[山東省]에 걸쳐 분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조사로 밝혀졌다. 또한 신석기문화 유적이 양쯔강[揚子江] 유역에도 분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저장성[浙江省] 위야오현[餘姚縣]의 허무두유적[河姆渡遺蹟]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목조가옥·토기와 함께 벼·농기구 등이 발견되어 이미 수도(水稻) 재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사오문화보다 뒤늦은 BC 2000년 무렵에 채도와 계통을 달리하는 검은간토기[黑陶]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가 나타났는데, 그 최초의 발견지인 산둥성 리청현[歷城縣] 룽산진[龍山鎭;城子崖]의 명칭을 따서 룽산문화라 한다. 검은간토기는 얇은 것이 많고, 환원염(還元炎)으로 구울 때에 검댕이가 스며들어서 검청색이 되었는데, 그 표면을 갈아서 광택을 낸 것도 있다. 이 계통의 문화는 허난성·랴오둥반도[遼東半島]로부터 쓰촨성[四川省]·간쑤성·타이완[臺灣]에 이르는데, 주변으로 퍼지면서 두께가 두꺼워졌다. 중국의 채도가 서아시아의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채도와 검은간토기의 기원에 대해서 정설은 없고, 다만 최근에 채도로부터 진보한 것이 검은간토기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검은간토기는 서아시아에도 있으나 중국 검은간토기와의 관계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구석기시대는 뗀석기[打製石器]뿐인 데 비하여 신석기시대에는 간석기[磨製石器]가 나타났다. 채도와 검은간토기 유적에서는 간석기도 출토되지만 금속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2. 고대
(1) 전설시대
중국의 옛 전설에 따르면 상고(上古)에 삼황(三皇;伏羲·神農 외에 燧人이거나 또는 祝融), 오제(五帝)가 통치하던 황금시대를 거쳐 삼대(三代;夏·殷·周)의 왕조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중에 삼황오제는 후세에 덧붙여진 전설이고, 삼대 이후가 역사성을 지니는 것으로 인정된다. 다만 하왕조의 존재는 공자시대부터 믿어 왔지만 고고학적으로 실증되지 않았다.
(2) 하(夏)·은(殷)
고고학자들이 중국문화의 유구성을 입증하기 위해 하(夏)나라의 유적을 탐색한 결과, 허난성 옌스현[偃師縣]의 유적이 가장 유력하였다. 이 부근은 청동기를 포함한 고대유적이 많고, 특히 현(縣) 내의 얼리터우[二里頭]에는 오랫동안 사용한 주거지가 있으며, 크고 훌륭한 궁전의 기초가 2군데나 있어서 한때 하나라 때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였지만, 이를 포함하는 지층이 비교적 새로운 것이어서 은(殷)나라 때의 것임이 밝혀졌다. 또한 현재의 현성(縣城) 근처에서 웅대한 옛 성터가 발견되었고, 몇 군데에는 성문도 있으며 대궐로 여겨지는 기단(基壇)도 흩어져 있다. 이것을 문헌과 대조해 보면 이 성곽은 은왕조 초대 왕인 탕왕(湯王)의 도읍지 박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삼대 가운데 은대 이후의 존재는 거의 확실하고, 그 무렵부터 중국인은 성곽을 쌓고 청동기를 사용하였다. 은왕조는 자주 그 도읍을 옮겼다고 전한다. 은대의 존재가 처음으로 인정된 것은 20세기 초 허난성 안양현(安陽縣)에서 발견된 갑골문자가 은대의 기록이라는 사실이 연구되어, 이 부근을 은허(殷墟) 즉 은왕조 도읍의 폐허라고 추정하였다. 은나라 사람이 사용한 청동기의 기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그 준비 시기로 보여지는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서아시아 방면에서 발달한 상태로 금속문화를 수입한 것으로 짐작된다. 은나라는 서쪽 산시성[陝西省] 내의 웨이수이[渭水] 분지에서 일어난 후진민족인 주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이것이 전설에서는 포악한 은나라 주왕(紂王)에 대한 덕이 있는 주나라 무왕(武王)의 혁명으로 전해진다. 다만 전설상으로는 BC 1120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는 그 실제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이견이 많다.
(3) 주(周)
은주혁명(殷周革命) 후 역사적 사실에 오랜 공백기가 있었는데, 이를 서주시대(西周時代)라 한다. 전설에 따르면 주나라 12대 유왕(幽王)이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살해되었고, 그 아들 평왕(平王)은 도읍인 산시성[陝西省]의 호경(鎬京;西安市 長安縣 南西)을 버리고 BC 770년 허난성의 낙읍(洛邑;洛陽市)으로 천도하였는데 그 후를 동주(東周)라 하고, BC 722년 이후 240여 년간은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하는 연대기 《춘추(春秋)》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춘추시대라 한다.
(4) 춘추:도시국가시대
중국의 고대사회는 그리스처럼 도시국가가 할거했던 상태였고, 후세와 같은 통일국가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여러 국가는 느슨한 동맹관계를 맺고 은나라나 주나라를 맹주로 하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의 도시국가의 형상은 처음에는 대체로 작았으며, 3000호를 넘는 것이 드물었다고 한다. 성곽의 내부는 도로에 의해서 구획된 이(里;마을)라는 단위로 나뉘었고, 이 주위에 장벽(牆壁)이 설치되어 여(閭)라는 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경작지가 성곽 밖에 있어서 백성들은 매일 성문 밖으로 나가 농지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성 안의 이로 돌아왔다. 성 안에는 시장이 있어 이를 중심으로 교역이 차츰 활발해졌다.
(5) 전국:영토국가시대
주나라의 문화가 지방으로 전파됨에 따라 각지에서 강력한 도시국가가 생겨났다. 춘추시대에는 이를 12제후(諸侯)라 하였는데,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특히 강대하여 주나라를 대신하여 도시국가군(群)에게 호령하였고, 그 국왕은 패자(覇者)라 하여 제나라의 환공(桓公)과 진나라의 문공(文公) 등 다섯 사람이 <춘추오패(春秋五覇)>로 알려졌다. 그 동안에 되풀이된 동맹과 전쟁의 결과로 도시국가들은 7개의 강대한 영토국가, 즉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정리되었다. 중앙에는 진나라에서 파생된 한(韓)·위(魏)·조(趙) 3개국이 있었고, 북쪽에는 연(燕)나라, 동쪽에는 제나라, 남쪽에는 초(楚)나라, 서쪽에는 진(秦)나라가 있었다. 이 이후를 전국시대(戰國時代;BC 403∼BC 221)라 하고, 서로 이익을 위해 전쟁을 계속하였다. 전국이라는 이름이 보여 주듯 전쟁에 의한 소모를 반복하면서 중국사회는 발전해 갔는데, 이는 중국의 문화가 점점 이민족들 사이로 침투해 들어가고 중국상품의 결재수단으로 황금이 들어와 경제의 호황을 촉진하는 한편 노예가 수입되어 노동력의 부족을 메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철기(鐵器) 사용의 기원은 아직은 명확하지 않지만, 세계사적 전체 흐름을 통해서 본다면 옛 서아시아 방면에서 유행했던 것이 중국으로 수입되어 전국시대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량의 철제 무기와 북방으로부터 유입된 기마전술(騎馬戰術)이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로써 전국 분열의 형세를 바꾸어 통일로 향하게 하였다.
(6) 진(秦)·한(漢):고대제국(古代帝國)
7개국간의 전쟁에서 뜻밖에도 가장 후진국이었던 진나라가 승리하여 BC 221년 시황제(始皇帝) 때에 6개국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일이었고, 이로써 중국 본토의 영역이 거의 정해지게 되었다. 시황제는 이 새 영토의 보존을 위해서 북방의 국경에 만리장성을 쌓음으로써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최초의 통일군주라는 황제의 칭호에 걸맞는 크고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여 백성들에게 위엄을 보였고, 자신의 능묘(陵墓)를 크게 조영(造營)함으로써 그 지위를 자손만대에 전하려고 하였다. 최근에 발굴 조사된 그의 능묘에서는 사람 크기의 도용(陶俑)이 수천 개나 발굴되었다. 진나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당시 최신무기였던 철제 무기와 기마전술을 재빨리 이용한 데 있었다. 그러나 BC 207년 시황제가 죽은 뒤 지방에서 신구세력 합동의 반란이 일어나 도읍인 셴양[咸陽]이 함락되어 멸망하였다.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가장 유력했던 존재는 구세력을 대표하는 초나라의 귀족 항우(項羽)였으나, 신세력을 대표하는 서민출신 유방(劉邦)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결과적으로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왕조의 고조(高祖)가 되어 BC 202년 장안(長安)을 도읍으로 정했다. 한나라는 진나라의 많은 정책을 답습하였다. 주나라 때에는 왕 이하의 제후들이 영토와 백성들을 사유하였고 그 지위를 세습했지만, 진나라는 그와 같은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과 현을 두고 군수와 현령을 중앙에서 파견, 백성들을 지배하게 했는데, 한나라도 대부분 이 군현제와 황제제도 등을 따랐다. 고대사는 할거하던 도시국가가 합병되어 영토국가가 되었다가 다시 통일되는, 이른바 고대제국이 출현하는 과정이며, 한나라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나 유럽의 로마제국과 나란히 대표적인 고대제국이었다. 군주의 존엄화와 함께 백성에 대한 지도원리가 필요하게 되자, 한나라 제 7 대 무제(武帝)는 춘추 말기에 나타난 공자의 유교를 채용해서 국교와 같은 지위를 부여하였다. 무제는 북방의 신흥 유목국가 흉노(匈奴)를 토벌하였으며 중앙아시아를 통하여 서아시아와 무역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무역은 한나라의 황금이 서방으로 흘러나가는 결과를 초래하여 중국 경제는 차츰 불황에 빠졌다. 이와 더불어 사회의 저변에 있는 향(鄕)과 정(亭) 조직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도시국가는 한나라 때가 되자 단순한 자치조직으로서 잔존하여 다른 신흥취락과 함께 향 또는 정으로 불렸고 내부가 다시 약간의 이(里)로 갈라졌으며, 모든 지역에는 호족이 있어서 지방자치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경제불황으로 화폐를 손에 넣기가 어렵게 되자 자급자족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장원(莊園) 경영이 왕성해졌다. 즉 호족은 성 밖의 먼 곳의 땅을 백성으로 하여금 개간 경작하게 함으로써 차츰 토지와 백성을 사유하기 시작하였고, 왕실은 이러한 장원 소유주인 호족에게 권력을 빼앗겨 약화되어 간 것이다. 한나라 때의 문물은 종래에는 전해지는 물건이 적어, 문헌이나 화상석(畵像石) 또는 간쑤성 쥐옌[居延]유적에서 출토된 목간(木簡;居延漢簡), 한국의 평안남도·황해도 일대에서 출토된 낙랑(樂浪)의 유물 등에 의해 그 일부를 엿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수립 후로는 귀중한 문화재의 발굴이 계속되어, 당시의 진보된 생활상태를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市]의 마왕퇴[馬王堆], 대후묘에서 출토된 견백(絹帛)에 그린 그림, 허베이성 만청현[滿城縣]의 중산왕묘(中山王墓)에서 나온 황금실을 이어서 만든 옥의(玉衣) 등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나라 말기에 신하인 왕망(王莽)이 신(新)나라를 세우고 천자가 되어 정치와 경제의 정상화를 꾀했으나 실패하여 내란으로 무너졌다. 이때 한나라의 일족 가운데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나타나 한나라를 부흥시켰으나, 후한(25∼220) 때에 이르러서도 전한으로부터 시작된 혼란을 바로 잡지 못하여 후한왕조와 함께 고대제국(帝國) 자체가 몰락해 갔다.
3. 중세
(1) 삼국(三國)
고대 몰락의 실마리가 되고 중세를 특징지었던 것은 이민족(異民族)의 활동이었다. 후한왕조가 황건(黃巾)의 난으로 쇠약해졌을 때 왕실을 장악하고 적대하는 장수들과 싸워서 천하를 분열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동탁(董卓)이 이끄는 이민족 출신 기병집단이었고, 동탁이 죽은 뒤에는 여포(呂布)가 인솔하는 기병집단이 지방을 혼란에 빠뜨렸다. 마지막으로 군웅을 토벌, 평정하고 화베이[華北]를 통일한 조조(曹操)의 군대 내에도 이민족출신 군사가 많았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위왕조(魏王朝)를 세웠으나, 쓰촨성에는 한왕조의 일족인 유비(劉備)의 촉(蜀)나라, 양쯔강 중·하류에는 호족 손권(孫權)이 세운 오(吳)나라가 있어서 삼국이 분립하는 시대가 되었다. 삼국 가운데 촉나라가 먼저 위나라에게 합병되었고, 위나라를 빼앗은 진(晉)나라의 무제가 오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다시 통일하였으나(280), 조정에서는 왕족과 관료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아 군주권은 확립되지 못하였다.
(2) 귀족제사회
후한시대 이후로 관리의 지위가 세습화되는 경향이 생기고 대대로 높은 관리를 내는 귀족이 특권계급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삼국 중 위(魏)나라는 그 성립 초기부터 인재본위의 관리 등용을 실행하기 위하여 9품관인법(九品官人法)을 제정, 관리 지망자의 재능과 덕행을 심사하여 9등으로 나누고 그것에 맞는 벼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귀족정치의 융성기를 맞은 당시에는 제도의 취지와는 반대로 가문의 품격·높낮이에 따라 개인의 등급이 정해져 귀족제도를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晉)나라 초, 귀족간의 경쟁이 격심해지고 조정에서는 음모가 횡행하게 되었으며 병력을 장악한 왕실의 일족이 서로 무력충돌을 되풀이함으로써 이른바 8왕(八王)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후한시대 이후 중국에 귀순, 복속하여 내지(內地)로 옮겨와 살고 있었던 흉노 등 이민족이 봉기하여 독립정권을 세웠고 화베이에서는 진나라가 316년에 멸망함으로써 5호16국(五胡十六國)의 전란이 시작되었다. 이 상태는 로마제국 말기 이후의 게르만민족대이동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5호 가운데 선비족(鮮卑族)이 439년에 북위왕조를 세우고, 화베이를 통일했다. 앞서 화베이에서 멸망한 진나라는 강남으로 옮겨 지금의 난징[南京]을 도읍으로 삼아 양쯔강 유역 이남을 확보하고 동진(東晉)을 세워 북방의 5호와 대항했지만, 그 무렵 송(宋)나라에게 지위를 빼앗겨 남북조의 대립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조(420∼589)는 송나라·제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뒤를 이었고, 북조는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여 동위는 북제(北齊)에게 빼앗기고, 서위를 빼앗은 북주(北周)는 북제를 합병했으나 곧 수(隋)나라에게 멸망되었다(581).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남조의 진(陳)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는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려면 귀족의 기득권을 제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9품관인법을 폐지하였고, 관리는 오로지 개인의 재능을 객관적으로 시험하는 과거제도(科擧制度)에 의해서만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3) 당(唐)
수나라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는 대운하를 개통하여 중국의 남북을 연결했다. 그러나 고구려정벌 실패 등 지나친 대외정책으로 인해 내란이 일어나 수나라는 곧 멸망하였다. 이때 장성의 국경수비군을 이끌고 수나라의 도읍 장안(長安)을 점령, 군웅을 평정하여 당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사람은 이연(李淵)이었다. 2대 태종(太宗)·3대 고종(高宗) 사이에 북방의 유목국가 돌궐(突厥)을 평정하여 대영토를 건설하였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중국인의 왕조이지만, 북조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관리나 군인 중에 이민족 출신자가 많아 유럽의 카롤링왕조와 비교할 만하다. 또한 당나라의 세력이 서쪽으로 뻗어나가면서 페르시아·아라비아의 문화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대통일은 분열 경향이 강한 중세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영속되지 못했다. 내부에서는 고종의 황후 무씨(武氏;則天武后)에 의한 찬탈과 중종의 황후 위씨(韋氏;韋后)에 의한 내란이 일어났으며, 외부에서는 돌궐 대신 위구르가 몽골에서 강성해졌다. 위씨의 난을 평정한 현종(玄宗)의 재위(712∼756) 전반기에는 한때 부강을 되찾았으나, 말년에는 이민족 군대를 이끈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반란(安史의 亂)에 의해 천하는 또다시 분열로 치달았다. 반란이 평정된 뒤에도 그 결과로 파생된 군벌의 할거와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당나라가 실제로 지배하는 영토는 좁아졌다. 이런 곤경을 타개하고자 당나라 조정은 북조 이래의 균전법(均田法)을 고쳐서 양세법(兩稅法)을 채용했으며, 새로이 소금과 차(茶) 등의 전매(專賣)를 시행함으로써 세수(稅收)의 증대를 꾀하는 등 군사력보다는 경제를 중요시하는 재정국가(財政國家)로 변모하였다. 한나라 때의 향(鄕)·정(亭) 제도가 허물어진 뒤 중세에는 성곽도시와 농민촌락이 병립하였으며 도시는 정치·군사의 거점이 되었고 상업·공업이 성행하였으나, 농민은 성곽을 떠나 농촌에서 살게 되었다. 불교는 제왕·귀족의 보호를 받았고 농민을 보호하는 존재가 되어 도시·농촌에서 유행하였다. 당나라 조정의 신경제정책 실시와 함께 도시에서는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전, 새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었다.
(4) 오대(五代)·십국(十國)
군주권의 불안정은 정치혼란을 심화시켰고, 황소(黃巢)의 난 이후 거의 그 존재의미를 상실한 당나라는, 황소의 부하였던 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게 무너졌다(907). 이후 5대 10국이 흥망하였는데, 후량을 쓰러뜨린 후당(後唐)과 그 뒤에 이어지는 후진(後晉)·후한은 모두 이민족 출신이었다. 후주(後周)에서 명군(名君) 세종(世宗)이 나타나, 당나라 말기 이후 남방에 할거했던 여러 나라를 평정할 것이 기대되었으나 일찍 죽어 그 사업은 송(宋)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과 태종 조광의(趙匡義) 형제에게 이어졌다.
4.근세
(1) 송(宋)
오대의 여러 나라는 당나라의 재정국가적 성격을 이어받았다. 또한 중국의 산업은 당나라 말기부터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여,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석탄을 제철에 이용함으로써 철 생산이 수월해졌다. 화력의 지배는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완성시켰다. 명주와 차의 생산액도 증가했고, 대운하에 의한 편리한 교통은 지방의 산물을 전국적인 상품으로 만들거나 외국으로 수출하여 중국은 또다시 경제적 호황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추세를 배경으로 송나라는 통일을 이룩하였다. 국책의 기조가 재정 위에 놓여 있었으므로 당나라 초기와 같이 대외적으로 화려한 무공을 세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경제를 통제함으로써 공고한 중앙집권정치를 완성하였다. 송나라의 방침은 문인관료에 의해 재정을 중앙에서 장악하고 그 재정으로 중앙 직속의 군대를 양성하여, 이 군대를 지방에 파견함으로써 국방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군대를 직접 장악하고 있는 무관은 정치와 민정에 관여시키지 않았고, 또한 중앙의 군정을 관장하는 대신(大臣)은 물론 전시중의 사령관마저도 문관으로 임용하였다.
(2) 군주독재(君主獨裁)와 관료제도
이와 같은 강력한 문관은 과거(科擧) 출신 관료가 중심을 이루었다. 당나라 때의 과거는 관청에서 시행하는 자격시험에 불과했고 귀족제도를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으나, 송나라 때에는 과거의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군주가 직접 시험관이 되어 집행하는 전시(殿試)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합격한 신진사(新進士)는 군주의 문생(門生)으로서 일생동안 그 은혜를 잊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송나라 때에는 많은 충의열사(忠義烈士)가 배출되었다. 당나라 때까지는 귀족과 서민 사이에 계급적 차이가 컸던 반면, 천자와 대신·외척 사이의 문벌 차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것이 송나라 때에는 군주와 대신·외척 사이에 격차가 커졌고, 관료와 서민 사이에서는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차이는 빈부의 차이일 뿐 가문의 격차는 아니었다. 따라서 송나라 이후 군주의 지위가 안정되면서 군주는 정치상으로는 독재권력을 휘두를 수가 있었다. 이 독재라는 것은 모든 정부 기구를 군주가 장악하고, 모든 정책의 최종결정은 군주의 재가를 거치도록 되어 있어서, 만일 결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실시할 수 없는 제도를 뜻하는 것이었다. 한편 중세적인 특권귀족은 당나라 말기와 5대의 전란기에 대체로 쇠미해졌고, 송나라 때에는 과거제도를 통하여 새롭게 지배계층으로 등장한 서민층과 신흥지주계급 이른바 형세호(形勢戶)가 그 뒤를 이었다. 형세호는 향촌을 중심으로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다졌으며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실권까지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반드시 지주계급에게만 그 특전이 부여된 것은 아니나, 빈곤한 집안의 자제들과 경쟁하는 데 항상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이로써 사회는 빈부의 계급으로 양분되고 그것이 고정되어 갔다. 상층의 독서인 또는 사대부(士大夫)계급은 그 자제를 교육시켜서 대대로 관료로 내보내는 데 힘쓰는 한편, 재산을 상업에 투자하거나 토지를 매입하여 지주가 되었다. 토지는 전호(佃戶;소작인)에게 마름을 주고 소작료를 거두어들였는데,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중세의 장원주(莊園主)와 부곡(部曲;하인) 사이처럼 신분관계가 아니라 오로지 경제관계였다. 전호는 계약에 의하여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는 것이므로 부곡처럼 신분적으로 지주에게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돌려주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었다. 다만 왕실은 지주를 보호하는 정책을 취하여, 계약중에는 지주가 전호보다 법률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송나라 때는 평화의 영속과 지식계급의 지도로 인하여 문화가 발전하였다. 인쇄술이 보급되었고 활판이 발명되었으며, 나침반과 화약도 쓰이게 되었다.
(3) 요(遼)·금(金)·원(元)
중국문화의 발달은 북방 유목민족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몽골에서는 진보된 서아시아에 접하고 있던 터키민족이 강성해져 동쪽을 향해서 공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말부터 중국과 접해 있던 동부의 몽골계 거란[契丹]이 강력해져 몽골과 만주로부터 중국령의 일부를 포함하는 대제국 요나라를 세운 뒤 번영을 누렸다. 여기에는 중국으로부터 전해온 제철법 이용의 힘이 컸다. 12세기로 들어서자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女眞族)의 금나라가 성장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송나라의 도읍 카이펑[開封]을 함락하고 화베이를 빼앗았으며, 송나라는 강남으로 옮겨 1127년 항저우[杭州]를 임시수도로 삼고 남송(南宋)이 되었다. 새로운 문화의 자극에 의하여 동북방민족의 약동이 계속됨으로써 몽골민족에 의한 전에 없던 대정복왕조인 원나라(1271∼1368)가 출현하였다. 이들은 동쪽에서는 금나라와 남송을 멸망시키고 서쪽에서는 서아시아 일대를 평정하여 유럽의 중심지 가까이까지 군사를 진출시켰다. 이는 중국의 철과 몽골의 말이 결합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4) 명(明)
무력으로 중국의 정복자가 된 몽골족의 원나라도 인구수와 문화의 열세로 한족(漢族)인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몽골로 쫓겨가게 되었다. 명나라의 정책은 왕조의 이익을 위해서 운영되었으며 극단적인 감찰정치와 공포 수단에 의하여 국내의 반항을 억누르려고 하였다. 백성의 외국무역은 정치상의 편리를 위해서 희생되었고, 쇄국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가혹한 통제를 가했다. 이에 대한 백성들의 반항과 외국의 항의가 결국 명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5) 청(淸)
대외적으로는 만주의 여진족이 청나라를 성립시켰고, 국내적으로는 재정 곤란과 환관의 발호, 법강(法綱)과 풍기의 문란과 같은 난제가 산적한 명나라가 내란으로 멸망하자 청나라의 순치제(順治帝)는 베이징으로 들어가 새로운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청나라는 강희제(康熙帝)·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 3대에 걸쳐서 자신들의 무력과 중국의 경제력을 결합하여 대정복을 감행했고, 그 위세는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서쪽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송나라 때 성립한 우수한 새 문화는 몽골의 대정복에 의해 서아시아로 전해졌다. 그 뒤 서양문화는 급격한 발전을 하였고, 이른바 지리상의 대발견시대가 되어 명나라 말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 새로운 문명을 가지고 건너와 중국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르네상스단계의 문화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별로 중국을 위협하지 않았고, 북방으로부터 러시아가 만주로 남하하였어도 청나라의 강희제는 군대를 출동시켜 대결, 저지하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유럽이 산업혁명을 거쳐 신예(新銳)의 문화를 가지고 청나라로 육박하자 중국은 여기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5. 근대
(1) 서유럽 세력의 침입
청나라는 일찍이 전통문화의 성숙으로 인해 근대화를 향한 자체변화의 가능성이 엿보였으나 근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타의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청나라의 전반기는 경제의 호황과 더불어 평화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동안에 빈부의 격차가 늘어났으며, 부자의 사치가 심하고 관료의 기강이 해이해졌으며, 특히 관료에 의한 착취는 광둥[廣東]의 외국상인들까지 괴롭혔다. 산업혁명을 끝내고 의기충천한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왕조에 타격을 줌으로써 양국의 관계도 일변하여 영국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중국의 국익은 영국을 선두로 하는 유럽 여러 나라에 의해서 침식당하였다. 아편전쟁의 결과인 난징조약[南京條約;1842]과 그 이후의 여러 조약에 의해 중국은 특혜로 허가하고 있던 외국무역을, 반대로 의무로서 부과받게 되었다. 그 세율은 수출입 모두 종가(從價) 5%의 저율로 억제되었기 때문에 보호관세에 의하여 자국의 산업을 육성할 수가 없었으며, 태평천국의 난을 계기로 관세자주권을 잃어버렸고, 외국인 세관원에 의하여 징수된 관세는 우선 외채 지불에 충당되었다. 영국에게는 홍콩을, 러시아에게는 만주 북방을 할양했을 뿐만 아니라 안남(安南) 등 조공국(朝貢國)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였고, 국내에는 청왕조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외국의 조계(租界)가 여러 군데 생겨났다. 또한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타이완을 할양하였고, 조계에서 외국인 기업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더욱이 외국에 의한 세력 범위의 설정으로 중국은 반(半)식민지 상태로 머물렀다. 청·일전쟁 직후 캉유웨이[康有爲] 등이 주장한 점진개혁론인 이른바 무술변법(戊戌變法)은 보수파의 반격과 세력기반의 취약으로 곧 실패하였고, 외국 배척을 목적으로 일어난 의화단사건은 청나라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다. 러·일전쟁 후에는 일변하여 쑨원[孫文] 등이 주창하는 혁명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2) 중화민국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 선통제(宣統帝)를 폐위시키고 1912년 공화제인 중화민국을 건설한 것은 표면상으로는 혁명당의 성공처럼 보이나, 실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위시한 군벌에게 성과를 빼앗긴 것이었다. 이후 근 20년 동안 중국은 군벌의 압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중국의 근대화 및 혁명 달성의 조건은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 외국 조계의 존재는 새로운 사상을 육성, 보급하고 신문·잡지에 의한 정보활동을 활발하게 하여 노동자에게 신기술을 습득시킨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제 1 차세계대전은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상대적으로 향상시켰다. 쑨원은 광둥을 근거지로 하여 중국을 무력 통일할 것을 꿈꾸며, 중국공산당과 제휴하여(제 1 차국공합작, 1924∼27) 소련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가 죽은 뒤 후계자 장제스[蔣介石]는 무력통일 방침을 이어받아 북벌의 길에 올라 양쯔강 유역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때 난징사건이 일어났고, 장제스의 4·12쿠데타로 제 1 차국공합작은 분열되었다. 장제스는 소련과 국교를 단절하고 영국과 미국의 후원을 얻어 북벌을 속행했으며, 일본의 지지를 받던 군벌 장쮜린[張作霖]이 베이징을 탈출, 근거지인 만주로 돌아가다가 일본인에게 폭사당하자 일본에 불만을 품은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이 국민정부에 귀순함으로써 1928년 난징의 국민정부는 중국 영토를 거의 통일하여 중국의 정통 정부가 되었다. 일본은 <만주국> 정권을 수립하고 그 특수권익을 옹호하려고 했으나 중국인의 반항이 심하여, <만주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화베이에 출병하였고 다시 화중(華中)·화난[華南]을 공격, 전선을 확대하여 마침내 중·일전면전쟁으로 돌입하였다. 일본은 난징을 점령하자 일본에 협력적인 왕자오밍[汪兆銘] 정권을 수립하고, 외국 조계 등의 권익을 왕정권에 되돌려 주었다. 제 2 차세계대전에서 독일에 이어 일본이 항복하자 충칭[重慶]의 국민정부는 난징으로 되돌아갔으며, 외몽골을 제외한 중국의 거의 전지역을 평정했을 뿐만 아니라 45년 타이완도 일본으로부터 되돌려 받았다. 장제스는 앞서 소련과 국교를 단절했을 때 중국공산당도 탄압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지하로 숨거나 때로는 지방에 이른바 해방구를 세우고 버텼으며, 소련은 중국공산당의 장래를 기대하고 음으로 양으로 원조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이 급박해지자 장제스는 또다시 공산당과 화해(제 2 차국공합작, 1937∼46), 협력함으로써 일본과 맞싸우게 되었으나, 이 동안에 공산당은 세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공동의 적이었던 일본이 패망하자 국민정부와 공산당은 또다시 적대관계를 되풀이해야만 했다. 이때 국민정부는 일본점령지를 접수하면서 수단적 과오를 범하는 등 민심을 잃고 군대마저 전의를 잃어 공산당과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하여 타이완으로 쫓겨갔다. 승리를 거둔 공산당은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 혁명정권을 수립,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