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은 불교서적 중에서 영원한 베스트 셀러이다.
이는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로 시작되는 공사상을 문답형식으로 엮어서 한 권의 경으로 탄생한 이후에 인도의 많은 성인들과 동양불교권의 많은 고승 碩德들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깊이 연구하고 숱한 疎, 抄들을 출판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것으로는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약 900년 경에 무착 보살은 이 금강경을 해석하려 하였으나 너무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고심하던 중 일광정에 들어 도솔천의 미륵보살을 친견하게 되었다. 그때 미륵보살에게 금강경을 물었는데 미륵보살은 89수의 시로써 금강경의 대의을 해석해 주셨다 한다. 그것에 의하여 무착은 무착론 2권을 지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제자인 천친보살은 천친론 3권을 지었으며, 공덕시보살도 공덕시론 2권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이어 중국에서도 구마라십이 금강경을 번역한 후 진나라 승조(383∼414)의 금강경 주석서를 시작으로 이 경을 강설하는 이가 많았고 주공, 전흡, 진제 등의 소, 찬, 기, 론 등 천태종, 삼론종, 화엄종 등 중요한 불교학과의 고승학자들의 이에 관한 주석서가 수천 권에 이르고 있어 초교과적인 경전으로 널리 퍼진 것으로 전하여진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국 중엽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신라의 원료 대사가 쓴 금강경 소로부터 경허, 대현, 함허 스님 등이 수십종의 소, 사기 등을 편찬하여 크게 유통시켰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구미 각국과 동양 각국, 특히 일본에서도 많은 번역서와 주석서가 출판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이렇게 경이 집필된 후 많은 경전 중에서 특히 이 금강경이 많이 연구되고 읽히게 된 요인은 무엇일까?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대소승의 불교 교리 전책에 있어서 금강경이 그 기본이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금강경의 구체적인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하며 이는 산스크리트 경전인 Vajracchedika-Prajna-Paramita-sutr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600부 중에서 57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00송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성립시기를 대략 서기 150∼200년경의 대승경전 초기에 만들어진 가장 순수하고 대표적인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옛부터 많은 학자들은 어떤 경전을 이해하려 할 때는 반드시 그 경의 위치를 헤아리려 했는데, 본래 부처님은 이런 분별을 지어서 설한 적은 없으나 후세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교리 발달사적인 측면에서 관찰해 볼 것 같으면 소승교, 대승시교, 대승종교, 대승돈교, 일승원교로 분류하고 있다. 금강경은 이 가운데서 대승시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초기교설(소승교)은 제법실유, 즉 모든 법은 실로 있다는 우리의 세속적인 상식의 모든 범주에 맞추어 교설하신 것이 아함경 등이다.
그러나 청법자들이 성숙함에 따라 부처님이 성도 후 20년 뒤부터는 이러한 소승적인 제법실유를 부정하기 시작하면서 공사상을 설파했는데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주된 사상인 것이다. 허나 이것은 주된 흐름이 그렇다는 것이지 소승교의 아함이나 일승원교의 화엄, 법화 같은 경에도 부처님의 기본 가르침인 반야사상, 공사상은 하나로 꿰뚫려 있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교상판석한 것이 천태지의(531∼597)의 오시교로써 법화경 신해품에 있는 못난 아들의 비유에 맞추어 보면 한결 흥미 있으리라 본다.
옛날 어떤 사람이 한 아들을 두었는데 그 아들은 어려서 집을 나가 떠돌기를 수십 년, 거지가 되어 유랑하였다. 그 아버지는 큰 부자가 되었어도 아들 찾기에 부심하던 중 어느날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는 거지를 보는 순간 자신의 아들임을 알고 뛰어나가 붙잡으려하니 그 거지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이를 본 아버지는 이대로 아들을 붙잡으려하면 안되겠다 싶어서 방편으로 하인을 시켜서 그를 유인하여 똥이나 거름을 치우는 품팔이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그 집안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출입을 자유롭게 하다보니 그 집의 재산 상황를 훤히 알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그 아버지는 그를 불러 전 재산을 관리하도록 배려를 했고, 그가 성숙함에 따라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그가 아들이란 이야기를 하며 그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노라고 선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연히 만든 비유가 아니라 이 간단한 비유의 내용 속에 부처님의 일생에 걸쳐 설하신 교화의 순서가 그대로 그 속에 수용되어 있는 것이다.
대체로 아들이 처음 아버지를 만나 놀랐던 때를 궁자경악 화엄시라 하여 화엄경을 설할 때와 같다고 보는 것은 화엄경이 부처님의 깨달은 내용을 듣는 사람의 사정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채 직설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근기가 얕은 사람들은 놀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의 근기에 맞추어 방편으로 똥을 치우고 삯을 받는 것은 아함경을 설할 때로서 서분정가 아함시라하여 이같이 표혔고, 여러 해가 지나서 그 집에 자유롭게 출입할 때를 방등부 경전을 설할때로 출입자재 방등시라 설할때라 하여 영지보물 반야시에 배대하고, 이어서 모든 재산을 모두 아들에게 상속시키는 때를 전부가업 법화시라하여 법화 열반경을 설할 때를 부처님의 모든 사상을 다 드러내어 상속하는 것으로 비유한다. 이는 부처님의 49년 동안 설법한 것과 그 연대가 맞는 것으로, 화엄경은 순간적인 일로써 3·7일간이었고, 아함경은 12년, 방등부는 8년간이며, 그 다음 600부 대반야는 21년간이나 설하셨고, 최후 입멸하시기전 8년간은 법화(열반)경을 설하신 것으로 분류되어 있다.
금강경은 부처님 성도 후 21년째부터 21년 동안 설하신 가장 방대한 분량의 600부의 반야경전 중에서도 골수라고 표현될 만큼 귀중한 경이다. 흔히 금강경의 대지를 파이집 현삼공이라 하는데, 역자의 소견은 파이집 현반야가 아닌가 생각된다. 두 가지 집착을 파하면 결국 공인데, 공은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종공 배공이라’ 공은 쫓아가면 등지게 되므로 이집을 깨뜨리고서 반야를 나타내는 것이 금강경의 대지가 아닌가 한다.
이상으로 볼 때 금강경은 대승시교로써 하찮은 경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다른 경전과 달리 이 금강경만은 묘하게 대승시교인데도 불구하고 선서 이상으로 격상시켜서 받아들였고 격상시켜서 보고 있다. 이는 달마 스님도 금강경을 전하였지만 동토선파의 주봉 육조 스님께서는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써 깨달으셨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외우면 온갖 만법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금강경 제목을 칭송하셨기에 우리나라 선종인 조계종에서도 이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강경오가해는 거의 선사스님들의 주해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무착, 천친은 보살인 동시에 교종에 해당되지만 그 외의 종경, 육조, 전대사, 야부, 함허 스님 등은 전부 선사에 해당된다. 그래서 그 설한 내용이 모두 선리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선서로 격상된 것이다.
이렇게 금강경이 선서로까지 취급받는 것은 바로 오가해의 선사스님들이 금강경을 선의 입장에서 간파한 때문이며 오늘날까지 여러 불자들이 아끼는 요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오가해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금강경을 조사스님들이 여러 가지로 설명했는데, 실은 우리나라 함허 스님의 설의까지 합해서 육가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 보면 규봉 스님의 소에는 미륵 보살의 80송과 무착론, 천친론 등 세 분의 사상과 자신의 견해를 합한 네 분의 소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육조, 종경, 야부, 부대사, 함허 등 아홉 분의 뜻이 오가해에 담겨있고 또 번역 해설하는 사람의 소견을 합하면 열 사람의 견해가 금강경이라는 한 경전을 통해서 표출된다고 볼 수 있다. 불과 몇 장의 작은 분량의 경전이 오가해가 완성됨으로써 여러 화음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연주를 방불케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은 아주 단순한 하나의 멜로디뿐인데 거기에 숱한 화음이 하나의 멜로디를 아주 멋있게 장엄하고 있다고 보면 이 오가해는 음악적으로도 아주 멋진 하나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아홉 분의 선지식들의 멋진 화음이 부처님의 금강경을 화려하게 장엄하고 있다는데 오가해의 참 뜻이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 금강경을 한역한 구마라즙은 인도인 부친과 구자국 왕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7세에 출가 수행하였다. 서역을 유역하며 뭇 서적을 총람하였으며 대승에 매우 밝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요흥에 의해 후태의 장안으로 초빙되어 국빈으로 모셔졌는데 장안의 서명각과 소요원에서 13년 동안 경율론 등 380여 권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 금강경은 서기 4년(402) 장안 초당사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것으로, 이 일을 마친 후 어느날 병이 든 구마라즙이 번역에 오류가 없다면 분신후에 혀가 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태후 서기 15년(413) 세수 70세로 장안사에서 입적, 다비하였는데 오직 혀만 타지 않은 신이를 보였다.
첫댓글 큰스님! 오래오래 강녕하시어 불자들의 혜안을 많이 많이 열어주세요.
큰스님! 언제나 최상승의 삶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니 감사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