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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쥐가 먹어버린 사과
1. 전화를 받다
너는 전화를 했다.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어. 누군데? 명순이, 나 명순이야. 명순이? 나는 머릿속을 굴린다. 이명순, 박명순, 강명순....... 내가 아는 명순이가 대 여섯 명은 된다. 어떤 명순이지? 강명순. 어디 사는? 너 참 똑똑했는데. 왜 그렇게 멍청이가 됐어? 완전 시비조다. 전화 잘못 하신 것 같네요. 나는 전화를 끊는다. 다시 전화벨이 바리바리 울린다. 전화를 받는다. 밤머릿재 명순이 몰라? 그제야 머릿속이 환하게 열린다. 밤머릿재,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그럼 너, 강명순? 그래, 강명순이다. 오랜만이다야.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어? 니는 내 사는 걸 몰라도 나는 니 사는 걸 손바닥 안처럼 훤히 안다. 어떻게?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으니까. 말도 안 돼.
너는 삼십 년 만에 옛 친구에게 전화를 해 놓고 대뜸 염장부터 지른다. 왜 내가 너의 인생을 망친 것일까. 오십 고개를 겨우 넘겼는데. 남은 오십 고개가 있는데 벌써 인생을 망쳤다니 나는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된다.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중에도 없다. 너의 말만 쏟아낸다. 그 인간 때문이다. 그 인간을 왜 나한테 넘겼어? 니가 꿰차야지. 왜 나냔 말이야. 누굴 말하는 거니? 나는 정중하게 묻는다. 그 인간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알게 말 좀 해라. 김상기 몰라? 김상기? 모르겠는데. 너 참 한심하다. 너는 기억도 못하는데 그 인간은 평생 너를 품에 안고 살더라. 그렇다 치고 김상기가 어쨌는데. 너는 목소리가 갈라진다. 악을 쓴다. 그 인간이랑 결혼해서 30년을 산다. 허깨비를 안고 삼십 년을 살았다. 너는 침을 튀긴다. 내 얼굴에 허연 침이 막 달라붙는 것 같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왜 상관이 없어? 너를 못 잊겠다는데. 무어? 말도 안 돼. 말 안 돼는 줄은 나도 안다. 알면서 왜 전화를 했어? 너도 알아야 하니까. 나만 고통 받을 수 없잖아. 그건 더 말이 안 되네. 전화 끊자. 끊지 마. 너는 악을 쓴다.
나는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다 말고 다시 귀에 댄다. 참, 순아! 나는 너를 다정하게 부른다. 너는 멍하다. 기억나니? 너의 아버지 제사 파지 날이라고 했었지. 너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잔 날 말이야. 너의 엄마가 주신 새빨간 사과 두 개, 한 개는 너랑 나누어 먹고 한 개는 우리 할머니 주고 싶다고 머리맡에 놔뒀다가 밤새 쥐가 먹어버린 사과 말이야. 기억나? 너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지금 사과가 문제니? 라고 너는 말한다. 너라는 것을 안 순간 내겐 그 사과만 떠오르는 걸. 그렇게 맛있는 사과는 처음이었어. 너는 피식 웃는다. 흰소리 그만 해라. 너의 목소리에 살기가 빠진다. 미안하다. 내가 돌았나 봐. 늘 궁금했어. 그제야 너 같다. 까맣게 잊고 산 어린 9년을 알고 지냈던 친구 명순이, 또 전화 할 게. 너는 기운이 쭉 빠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나는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백일몽인가. 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뱅뱅 돈다. 이제 생각난다. 어릴 적 너의 모습이 떠오른다. 너는 겉으로 보기엔 새침하고 얌전한 아이였어. 친구들 속에 묻히면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또래보다 성숙했지. 혼자 있으면 돋보이는 아이였어. 가슴이 풍만하고 엉덩이가 빵빵했어. 선생님들도 너의 앞에서는 눈 둘 곳을 몰라 했어.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 신체검사 날이었어. 그때는 풀데죽만 먹는 아이들이 수두룩해서 여자애라도 가슴이 나온 애가 없었어. 얼굴에 허옇게 마른버짐이 피고, 팔다리에 온통 부스럼딱지가 앉은 아이들이 태반이었어. 남자애는 원형 탈모증에 걸린 애도 많았어. 바리깡으로 머리를 깎아서 기계독이 올라서 그렇다고도 했지. 너는 우리들 속에서 독보적이었지. 활짝 핀 다알리아꽃 같았어. 밋밋한 가슴을 가진 우리는 부끄러움을 몰랐지만 가슴이 볼록하게 솟은 너는 부끄러움을 알았어. 남자선생님이 웃통을 벗으라고 해도 너는 끝내 거부했어. 덕분에 우리는 운동장에서 땅에 머리박고 뒷짐 지는 벌을 섰지만 너는 혼자 교실에 들어가 신체검사를 했어. 신체검사를 하고 나오는 너의 볼이 잘 익은 복숭아 같았지.
너는 외톨이는 아니었어. 여자 친구는 없었지만 남자친구는 많았어. 너는 또래보다 두 살이 많았어. 중학교 들어가 한 반이 됐을 때 공교롭게도 한 책상을 썼었지. 너는 살그머니 내 귀에 대고 말했어. 날 언니라고 불러. 너보다 두 살이 많아. 비밀이다. 소문내면 너 나한테 죽어. 나는 너의 눈을 봤어. 눈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 간 것이 독종 같았어. 어쩐지 또래보다 키가 크고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하다 싶더라. 공부는 중간 정도 했을까. 너는 겉보기엔 참 얌전했어.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에 딱 맞는 아이였어. 너는 초등학교 때부터 남자 친구가 있다고 소문났었어. 키가 훤칠하게 크고 여드름이 숭숭 났던 남자애, 또래보다 성숙했던 남자애, 그 애 이름이 김상기였나? 아니였어. 그 애는 조중구 아니었나. 조중구를 나는 기억한다. 은근히 짝사랑 했던 남자애니까. 1960년 대, 그 시절 깡촌의 면소재지에서 남녀 공학인 초등학교를 거쳐 같은 중학교를 간 세대는 이해할 것이다. 조중구는 초등학교 때도 전교 회장이었다. 또래보다 목 하나는 더 컸던 애, 공부는 전교생 중 중간이었지만 약간 껄렁하고, 주먹깨나 치고, 말주변이 좋아 인기를 끌었던 애, 그 애가 공공연하게 너랑 키스했다고 나발을 불고 다녔지. 그때마다 너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깡패 같은 새끼라며 새침해져서 고개를 돌렸었지.
아, 그래, 생각난다. 너는 뒤로 호박씨 까는 아이였어. 너의 어머니가 바느질 수선을 한다고 했지. 곤색 교복치마를 반이나 접어 올려 짧게 입고 다녔었지. 윗도리도 허리가 잘록하게 만들어 가슴이 풍만하게 보이게 입었지. 남자애들은 너만 지나가면 휘파람을 불었어. 너는 빈대 겨우 면한 내 가슴을 부끄럽게 만들었어. 여자애들은 너를 볼 때마다 뒤에서 수군거렸지. 저 애 가슴 큰 것 좀 봐. 남자가 만지면 젖이 자란대. 중구는 저 애 젖을 저녁마다 주무른대. 학교도 같이 다니잖아. 중구가 밤마다 저 애네 집 담벼락에 붙어 휘파람을 분대. 둘이 강가에서 껴안고 있는 걸 본 애들이 있대. 너는 친구가 없었어. 외톨이었지. 나는 그런 너를 적당히 흠모했어. 뭔가 있는 애 같았거든. 뭔가 속이 꽉 찬 것 같은 느낌말이야. 어쩌다 우리가 단짝이 되었지? 아, 그 사건 때문이었어.
2. 추억은 아름다워
아마, 중학교 2학년 가을이었을 게야. 푸른 들판이 누렇게 변하고, 길섶에는 분홍빛 이질풀 꽃이 도발적으로 피고, 아이들이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에 꿰어 뛰어다닐 때였어. 토요일이었어. 토요일은 괜히 가슴이 설레는 날이잖아. 공부는 강물 따라 흘러가는 종이배가 되고, 아이들은 수업 끝날 때만 기다리지. 어른이 더 아이들을 기다리는 날인지 몰라. 고구마도 캐 들여야 하고, 타작도 해야 하고, 이삭도 주워야 하고, 도토리도 주워야 하니까.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 너는 딱지처럼 접은 쪽지를 내게 줬어. 쪽지를 폈지. ‘저녁에 명주 골 정자나무 아래서 기다릴게. 조중구.’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는 너를 빤히 봤어. 너는 가만히 웃고 고개를 돌렸어. 장난 하는 거야? 내가 물었어. 너 중구 좋아하잖아. 내가 다리를 놨어. 너는 눈도 깜짝 않고 말했어. 말도 안 돼. 중구가 좋아하는 애는 너라고 소문이 파다한데?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하지만 너는 한 마디 변명도 안 했잖아. 소문의 진실에 대해서. 할 필요 없어. 저거 맘대로 찧고 까불라지. 관심 없어.
너는 물었어. 올 거지? 나는 대답을 할 수 없었어. 거긴 너무 머니까. 밤에 나갔다간 혼나. 아버지는 여자가 밤에 마실 나가는 것을 아주 엄하게 다스렸다. 큰 언니가 아버지 출타한 틈을 타서 엄마에게 명주 골 친구 집에 간다고 나갔다가 아버지께 들켰다. 하필이면 우리 동네에서 밤머릿재를 넘는 길옆에 있는 다랑이 짚동 새에서 아랫집 현수 오빠랑 나오다가 명주 골에 다녀오던 아버지께 딱 걸렸었다. 우리 동네에서 명주 골은 멀었다. 밤머릿재 너머가 명주 골이고, 밤머릿재 아래가 우리 동네인 실골이었다. 조중구가 사는 명주 골 친구 집에 간다던 언니는 부모를 속이고 아랫집 현수 오빠랑 동네 들판의 짚동 새에서 연애질을 했던 것이다. 열여덟 살 언니의 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왔던 머리카락이 뒤통수에서 잘려 달비 장사를 따라갔다. 아버지는 언니께 조용히 말했다. 한번 만 더 현수를 만났다가는 삭발을 시켜 뒷방에 유폐시키겠다.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어른이다. 일 년 생 산죽 대를 곱게 다듬어 시렁에 얹어 놓은 아버지다. 자식이 잘못 되는 것은 집안 우사이기 전에 부모 잘못이라고 당신 다리에 피가 맺히도록 회초리질을 하는 어른이다. 아랫집은 빨갱이 집이라고 했다. 빨간 줄이 그어진 집 아들은 독립운동가 집안과 얽혀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도 했다.
독립운동가 집안, 맞을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께서 삼일 만세 운동 때 동네 사람들을 소집해서 태극기를 들고 저자거리로 몰려나갔다는 것은 안다. 몽둥이를 들고 경찰서에 들어가 사물함이고 서류고 작살을 내고 유치장에 갇혔다가 풀려 난 전적이 있다. 동네 순사도 할아버지에게 벌벌 떨었다니.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시절이었으니 이해는 하지만 아버지가 목에 힘을 줄 정도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것은 유치하다. 아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전국적으로 삼일 만세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할아버지는 경찰 서장과 너나들이 할 정도로 친분관계였단다. 껄렁패 몇 명 데리고 다니며 순경나리 앞잡이는 아니었을까. 할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고 깎아내린다고 무엇이라 할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그 시절엔 역적이 충신 되고, 충신이 역적으로 몰리던 시절이었으니 하늘이 알고 땅이 알 뿐이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일자무식이었지만 기갈이 세고 막가파였단다. 할아버지에 얽힌 무용담은 참 많다. 지리산에 호랑이가 인근 동네에 내려와 소를 물고 간 사건이 있었단다.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고, 밤만 되면 문을 꼭 닫고 마실조차 못 다녔단다. 경찰서 순사와 할아버지 떨거지들로 구성된 사냥꾼이 범을 잡으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사흘 만에 할아버지는 장터목 아래 통신 골에서 호랑이를 만나 씨름을 했고, 할아버지 주먹 한 방에 호랑이가 나가 떨어졌단다. 할아버지는 축 늘어진 호랑이를 등에 지고 금의환향 했다니. 믿거나 말거나.
삼일만세 사건 덕에 할아버지는 마을 불한당에서 애국자가 되었고, 후일 삼일독립운동가로 추대 되었다. 유관순 누나 덕이다. 역사가 아무리 바뀌어도 유관순 누나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평생 독립만세 부른 유관순 누나로 남아 있듯이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을 빛낸 독립운동가 선생님이다.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 되고, 이승만 집권이 시작되었을 당시 아버지는 혈기 왕성한 이십 대였다. 봇짐장사를 했다. 자연히 집에 있는 시간보다 도시로 농촌으로 발품을 팔면서 돌아다니게 되면서 불온사상도 접하고, 애국지사도 만났다. 아버지가 대한청년단에 들었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는 부자간의 의를 끊자고 할 만큼 대차게 대한 청년단에서 아버지 이름을 뺐다. 봇짐장사도 때려치우고 가솔이나 돌보면서 땅 떼기나 파라고 하더란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같이 흔들리는 시대에는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것이 상책이라 하셨단다. 작은 땅덩이를 놓고 노선이 다른 대국이 서로 먹겠다고 음모술수가 판을 칠 때였으니 아버지까지 앙급지어 당할 필요가 없다 하더란다. 할아버지는 꼴뚜기가 뛰든 메뚜기가 뛰든 당하는 입장이 민초란 것을 모르진 않았을 텐데. 아마도 기골이 장대한 할아버지를 닮지 않고 곱상하고 작은 할머니를 닮은 아버지가 할아버지 눈에는 반도 안 찼던 것을 아닐까. ‘쯧쯧 남자가 제럽데기 맹키로 비쩍 골아서 오데 힘이나 써것나. 남자가 말이야 맷집이 좀 있어야지.’하셨다니. 삼대독자 외아들이 정치노선에 나섰다가 집안 문 닫을까봐 못하게 말리셨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할아버지께 한 번 걸렸다 하면 곤죽이 되었다니 동네 사람들도 할아버지 말이라면 뒤탈이 무서워 설설 기었단다. 입만 열었다 하면 육도문자요. 술 한 잔 걸쳤다 하면 선술집이 난장판이 되었단다. 남의 등 잘 쳐 먹고, 동네 유지 영감 찾아가 행패 부려 돈 뜯어 먹고, 삼이웃 예쁘장한 여자만 보면 침을 흘리며 어떻게 한 번 새끼줄을 엮어 볼까 상낸 수컷이었던 할아버지가 졸지에 독립운동가가 되고 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입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독립운동가 집안과 빨갱이 집안이 엮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니. 현수 오빠와 조중구는 같은 조 가였다. 조 가를 순 쌍것들, 축생으로 여기는 아버지였다. 내가 머슴아, 그 중에 성 씨가 조가인 머슴아를 만난다는 것을 알면 난 모가지다.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연애질부터 배워? 가문의 수치다. 아버지의 노기어린 얼굴이 코앞에 닥쳤다. 아버지 때문에 안 되겠어. 그리고 좀 있으면 기말 고사잖아. 난 공부해야 해. 숙제도 많잖아. 너는 내 말을 툭 잘라버리고 말했어. 너는 좋겠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서. 나는 그런 아버지라도 있으면 좋겠다.
너는 진짜 부러워했어. 너의 얼굴에는 아버지 없는 아이의 부러움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 나는 미안했어. 그래 갈게. 하지만 아버지 허락을 받으려면 네가 와야 해. 알았어. 학교 끝나면 집에 갔다가 너에게 갈 게. 너의 얼굴이 환해 졌어. 나는 생각했지. 이게 잘 하는 짓일까. 왜 조중구가 나를 만나려 할까. 너의 가슴을 저녁마다 주무른다는 그 애가 하필 나를 찍었을까. 뭔가 둘 사이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상했다. 너와 조중구 모습을 연상하면 내 가슴은 심하게 뛰었다. 얼굴에 불이 났어. 너와 조중구가 입술을 합치는 상상만 해도 다리가 떨려. 너의 가슴을 주무르는 조중구, 너의 팡파짐한 엉덩이를 만지는 조중구, 현수 오빠를 따라 도망가 버린 언니, 호적에서 파 버리겠다고 벼르는 아버지.
너는 발그레 물든 단풍잎을 달고 왔어. 단풍잎이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너, 요정 같았어. 아버지는 단번에 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야. 처니가 한남 띠 딸이야? 예, 너는 다소곳했어. 마치 선보는 처녀 같았지. 바느질 하는 밤머릿재 한남 띠 딸이가? 엄마가 또 물으셨지. 예, 너는 참 얌전했어. 축담에 오른 너의 앞에 엄마는 삶은 고구마를 내 놓고, 아버지는 장롱에 고이 모신 귀한 꿀단지를 꺼내 꿀물을 타라고 했지. 곱기도 해라. 우리 영이랑 친구라고? 우리 영이는 영 얼라 티가 나는데. 옷이 참 예쁘구나. 엄마가 말했어. 엄마가 지어 주셨어요. 너는 바느질 솜씨 좋은 엄마 자랑을 했지. 나는 바느질 솜씨 없는 엄마가 얄미웠어. 나도 저렇게 나비날개같이 예쁜 옷을 입고 싶다고.
저 오늘 영이랑 같이 우리 집 가서 공부하면 안 될까요? 숙제가 많은데 영이는 공부를 잘 하잖아요. 영이한테 공부 좀 배우려고요. 제가 영어와 과학이 좀 떨어져요. 우리 엄마는 허락했는데. 엄마는 영이랑 친하다니까 참 좋아해요. 영이 아버님과 어머님께도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고맙기도 하지. 지난번에 우리 영이아부지 모시적삼을 올매나 꼼꼼하게 잘 맹글었던지. 여름 내내 참 시원하게 잘 입었단다. 영이야, 저물기 전에 퍼떡 가거라. 밤머릿재까지 갈라모 서둘러야겠다. 나는 속으로 우리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면 했어. 너랑 같이 가고 싶지 않았거든. 더구나 너의 집에서 잔다니. 나는 그때 한창 명작에 팔려 있었어. 너는 알 거야. 교과서 밑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펴 놓고 읽었던 나를,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오랑 같은 여자가 우리 엄마라고 눈물 짜던 나를 기억할까. 샬롯브론테의 <제인에어>에서 제인에어를 닮고 싶어 한 나를. 그런데도 나는 말 한 마디 못했어. 왜냐면 너의 눈빛이 나를 꼼짝 못하게 했으니까.
허락 하신 거예요. 영이야 책가방 챙겨 빨리 가자.
너는 물이 흥건한 배를 한 입에 베어 문 것처럼 사근사근하게 말했어. 어쩜 말도 그렇게 잘 하니? 학교에서 봤던 너와 우리 집에서 보는 너는 진짜 달랐어. 너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너는 아주 친한 척 굴었어. 속에서 우웩! 구역질이 나려고 하더라. 너 아니, 내가 별로 너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거. 너와 조중구가 그렇고 그런 관계여서만은 아니야. 모범생이자 공부벌레였던 나는 너의 넘칠 것 같은 끼를 질투했어. 모든 남자애들의 선망의 대상인 네가 싫었어.
어쨌든 나는 너를 따라 갔어. 너의 집에서 먹은 저녁은 참 맛났어. 너의 엄마 음식 솜씨는 진짜 좋았어. 김치 국이 그렇게 시원하고 맛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거든. 너의 아버지가 경찰이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너의 아버지는 산청군 경찰서에 근무했다고 했어. 1963년 망실공비로 분류되었던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 토벌 작전이 벌어졌을 때 공비가 쏜 총에 맞았다고 했어. 그때 서너 살이었던 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너, 너의 아버지 사랑은 거기서 끝나버렸지만 너의 가슴에 살아있는 아버지는 무척 자애롭고 다정다감했던 것 같다고 했지.
저녁에 우리는 명주 골로 향했어. 달빛이 참 푸지게 좋았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를 따라오는 달빛을 나는 황홀하게 바라봤어. 어떤 인위적인 소리도 없이 조용하고 으슥한 작은 동네, 명주 골 오르는 산자락 길옆에 있는 늙은 느티나무는 그 길을 오가는 나그네의 쉼터였어. 길은 명주 골에서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실골로 향했어. 느티나무 아래는 둥그스름하게 공터를 다듬어 놨고, 띄엄띄엄 반반한 돌을 깔아놨었지. 시월 중순이면 첫눈이 온다는 지리산 자락은 밤이 되면 추웠어. 나는 너의 겨울 잠바를 걸치고 있었지. 느티나무 아래 불빛이 보였어. 그들이 촛불을 켜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조중구 혼자 나오는 거야?
아니, 중구 친구랑 둘일 거야.
그 친구가 누군데?
너는 몰라. 도시에 살거든. 주말이라 자주 놀러와. 중구랑은 동갑이고 외사촌이야.
너는 그 애를 잘 아는 것 같네.
잘 알아. 사실 그 애가 널 보고 싶어 해서.
날 알아?
잘 아는 것 같던데. 아마 중구가 말했을 거야.
느티나무 아래 촛불 다섯 개를 켜 놓고 우린 빙 둘러 앉았어. 중구와 너는 자연스럽게 짝이 되었고, 나는 그의 어색한 짝이 되었지. 우리는 촛불에 찬 손을 녹이며 너는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었는지. 수시로 깔깔 터지는 웃음보를 자제하지 못했어. 너와 중구는 참 자연스럽게 손뼉을 마주치며 가위바위보 놀이를 했고, 서로 이마에 알밤을 퉁기며 어울렸지. 학교에서 보던 너랑 거기서 본 너랑 같은 아이란 것을 믿을 수 없었어. 그와 나는 슬쩍 곁눈질만 하며 웃기만 했어. 눈치가 백단인 네가 모를 리 없었겠지. 우리 고매 삶은 거 뚱치 올게. 중구 엄니가 고매 삶아 놨단다. 그동안 두 사람 좀 친해봐라. 영이야, 상기가 오래 전부터 너를 짝사랑 했단다. 상기야, 소원성취 했으니 우리 없는 사이 잘 해 봐. 너는 장난 끼가 발동했는지 촛불을 후 불어 끄고 중구 손을 잡고 깔깔 거리며 동네로 멀어져 갔어. 그래, 그 머슴아가 김상기였어. 달빛이 왈칵 달려들더라. 달빛은 느티나무 그늘을 침범하지 못하고 명주 골 다랑이를 비추었어. 나락을 벤 다랑이나 아직 나락이 서 있는 다랑이나 어쩜 그리도 아름답니. 풀벌레조차 숨을 죽이더라. 두근거리는 내 가슴이 무서웠어.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 다음으로 남자랑 같이 있었으니 얼마나 겁났겠니. 어쩌면 겁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을까. 나는 그 애가 싫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어. 여드름이 숭숭 난 얼굴에 어른스러워 보이는 머슴아, 겉늙어버린 아랫집 현수 오빠 같았거든. 사실 나는 네가 부러웠어. 중구랑 손잡고 멀어져 가며 너의 뒷모습, 그 손을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나였거든. 나는 내 옆에 앉은 머슴아의 숨소리가 거슬려서 그 애 곁에서 뚝 떨어져 앉았어. 바람이 불 때면 나뭇잎이 떨어져 어깨에 앉곤 했어. 나는 난간에 앉아 다리를 까딱이며 고개를 젖혀 하늘을 봤어. 성글어진 느티나무 가지사이로 본 하늘은 청회색 바다 빛이었어.
그런데 말이야. 사람의 마음이란 참말로 조석변이가 아닌가 싶어. 조중구에게 쏟아지던 내 마음이 나도 모르는 새 그 애에게 쏟아졌거든. 계기야 물론 그 날 밤이야. 너랑 중구를 기다리며 둘이 말없이 앉아 있었어. 그 애는 말이 없었어. 나도 별로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 애가 다가와서 내 옆에 앉았어.
나랑 있는 게 별론가 보네.
아니.
그런데 왜 아무 말도 안 해?
할 말이 없으니까.
지난봄이었어. 중구를 따라 너의 학교에 놀러 갔을 때야. 벚꽃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있던 너를 봤어. 다른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노는데 너는 책에 푹 빠져 있더라. 중구에게 누구냐고 물었지. ‘아, 저 애? 우리 학교 범생이. 전교 일등짜리야. 책벌레지.’라고 말했어. 내게 소개해 달라고 했지만 너는 남학생에게 관심 없는 애라고 했어.
그랬어? 잠깐, 그럼 너 나에게 편지 했니?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제야 나는 그 애를 다시 봤어. 나는 가끔 편지 한 통을 받았어. 편지는 별게 없어. 첫 줄만 이랬어. 너를 생각하며. 내용은 늘 톨스토이의 인생론에서 한 줄 따다 놓은 것이거나 릴케의 시 한 수였지. 가끔 윤동주나 한용운, 조지훈, 김소월, 바이런의 시도 적혀 있었어. 그런데 보내는 사람 주소가 없었어. 편지는 내 책상 서랍에 들어 있었어. 누가 이런 짓을 할까. 궁금했었지. 나 외엔 별로 책벌레가 없었거든. 그런 시인의 시를 읽을 만큼 유식한 남학생이 내 주위엔 없다고 믿었거든.
이해가 안 돼. 우표가 붙지 않고 도착한 것이었는데. 너는 아니야.
중구가 심부름을 해 줬어.
그랬구나. 그렇게도 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어. 그 애는 가만히 내 어깨를 감쌌어. 그리고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외우더라.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어. 시인, 얼마나 멋지니. 어쩐지 그 애가 어느 별에서 온 어린왕자 같았어. 황홀했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어. 감미로운 바람이 싸싸 불어왔어. 어깨를 감싸던 그, 살짝 고개를 돌리는 찰라 마주친 입술, 온몸을 꿰뚫고 가는 첫 키스의 날카로운 전율, 온몸의 기운이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지. 그때까지 난 남자와 키스 해 본 적이 없었거든. 우리는 그렇게 한 덩이가 되어 가만히 있었어. 멀리서 너희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어. 그날 밤 나는 둥근 보름달이 왜 아름다운지 알게 됐어.
3. 늙어가는 우리
며칠 후, 너는 다시 전화를 했어. 그 인간이랑 헤어질 거라고 했어. 너는 너희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면 절반의 책임이 내게 있다고 했어. 나는 웃었어. 무슨 그런 억지가 있니. 뜬금없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네가 30년 만에 전화해서 할 수 있는 소린지 모르겠다. 너는 내가 너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더군. 그런 인간과 헤어지게 해 준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어. 그래 고맙다. 눈물 나도록 고맙다. 그러니까 이런 전화도 하지 마라. 장난 전화라면 더더욱 사절이다. 난 너희들 둘 다 잊은 지 아주 오래 됐는데. 나를 가운데 두고 싸웠다니 심히 불쾌하네. 나는 진짜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어. 한 번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새삼스럽다 야. 도대체 모르겠다. 네가 내게 전화해서 너희들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해가 안 돼.
어떻게 너는 잊었다고 말할 수 있니? 내 삶의 곳곳에 네가 있는데. 너 때문에 내가 당한 고통이 얼만데. 너 때문에 이혼까지 생각하는 난데. 너는 양심도 없어. 너로 인해 망가져버린 나를 어떻게 잊었다고 말하니?
너는 불 같이 화를 냈어. 너의 화난 목소리를 듣자 생각나는 것이 있더군. 조중구의 자살이었어. 네가 시집 간 지 한 달 후였던가. 중구는 밤머릿재 느티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했어. 왜 자살했을까. 아무도 중구가 왜 자살했는지 몰랐지만 나는 알았어. 어른들은 중구가 집이 가난해서 고등학교를 갈 수 없게 되자 비관해서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알 것 같았어. 중구는 너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어. 너는 중구를 죽인 거야. 어쩌면 상기와 너, 두 사람이 중구를 죽인 셈인지 몰라. 상기와 내가 사귀는 동안, 너는 나를 질투했었지. 상기의 편지를 보여주면 너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숨을 할딱이곤 했어. 어쩜 이렇게 편지도 잘 쓰니? 진짜 너를 사랑하나 봐. 나도 이런 연애편지 받아보고 싶다. 너희 둘은 참 잘 어울려. 상기는 진짜 남자야. 그러던 네가 날 찾아왔어. 그날 밤 기억하니? 우리가 걸었던 실골 골 안의 너른 강변을,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으며 우리는 자갈밭을 걸었어. 자갈밭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물결 위에 물수제비를 떴던 그 날을, 은파로 반짝거리며 흐르는 강물 우는 소리를 기억하니? 나는 상기가 있는 T시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한껏 들떠 있었지. 상기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진짜 행복했어. 너는 그 행복에 찬물을 끼얹었지.
난 못 가
왜? S여고에 합격 했잖아.
결혼해야 할지 몰라.
에이,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너보다 두 살 많다고 했잖아.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아이를 가졌어.
세상에....... 중구니?
아니, 상기야.
나는 망부석이 되었어. 네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못 했어. 나는 상기에게 절교장을 보냈어. 상기는 나를 찾아와 만나기를 요청했지만 나는 만나지 않았어.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편지는 읽어보지도 않고 찢어버렸어. 나는 T시의 S여고로 가지 않고 2차로 Y시의 R여상을 갔지. 전액 장학생으로 가게 된 것이 기뻤어. 상기도 너도 잊기로 했던 거야. 청춘의 한 때는 아름다웠다고 나름대로 첫 사랑의 이별을 미화하면서 말이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진실을 알았어. 상기는 내가 왜 마음이 변했는지 알고 싶어 너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고, 너는 상기를 품어주며 은근슬쩍 나를 나쁜 여자로 몰았어. 사랑할 가치도 없는 애라고, 나에게 다른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거짓말도 했더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상기를 다시 만나고 싶어 애가 탔었어. 너에게 중간에서 다리 좀 놓아달라고 어려운 부탁도 했지.
그런데 들려온 소문은 네가 상기랑 결혼한다는 거였어. 고등학교 2학년짜리가 학교를 중퇴하고 시집을 간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 진짜 너는 상기의 아내가 된다는 거야. 그해 겨울 방학 때 너를 찾아갔었어. 기억하지? 우리가 만났던 밤머릿재 느티나무를. 아직도 그 느티나무는 살아 있는 줄 알아. 허리가 더 굵어지고, 평수가 더 넓어졌지만 느티나무는 밤머릿재와 명주골과 실골 사람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보며 서 있어. 속울음 삼키며 돌아서던 나를 바라보던 느티나무도 어느 새 내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때 너와 나눈 대화는 기억나. 너는 말했어. 아주 당당하게.
내가 진짜 좋아한 남자는 김상기야.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그 애를 사랑했어. 상기가 너를 먼발치에서 보고 좋아하게 됐다고 다리를 놓아달라고 했을 때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상기는 나와 중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 믿었던 거야. 하지만 난 아니었어.
우리 모두 너희 둘이 진짜 사귀는 줄 알았는데.
아니, 중구가 나를 좋아했을 뿐이야. 사랑한다고 고백도 하더군.
그런데 너는 안 좋아했다?
그래, 난 상기를 좋아했어. 아니, 사랑해.
중구도 이 사실을 알아?
내가 말했어. 우린 절대로 안 되는 사이란 거 알지 않느냐고.
왜 안 돼?
그건 비밀이야.
상기도 알아?
나는 그 애 아이를 가졌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린 겨우 열여덟 살이야. 한창 피어나는 청춘이라고.
내겐 상기와 아이와 결혼이 중요해.
너는 진짜 당당했어. 볼록하게 나오기 시작한 아랫배에 내 손을 강제로 끌어다 댔지. 상기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 이젠 상기를 단념해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 아니냐고. 덧붙여서 이런 말도 했었지. 상기 부모님은 네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더 좋아한다고. 상기는 4대 독자에 누나가 6명이나 된다고 했어. 연세가 많은 상기 부모님은 막둥이 아들이 빨리 장가를 들어 대를 이을 손자를 낳아주길 고대한다는 거야. 상기 어머님이 두 사람의 사주를 보러 갔더니 첫 애가 틀림없이 아들이라 했다지. 너는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고. 상기는 빨리 결혼을 해야 할 처지고. 너희는 천생배필이라고 했어. 너는 이렇게 물었어.
축하해 줄 거지? 너는 꿈이 높잖아. 지금 결혼 할 처지도 아니고, 대학 가서 학교 선생님 하고 싶다며? 그 꿈대로 살면 너를 상기보다 더 사랑해 주는 새로운 남자도 만날 것이고, 상기는 금세 잊어버릴 거야.
그래, 축하할게. 잘 살아.
나는 손톱으로 느티나무를 박박 긁으면서도 웃으며 말했어. 진심으로 너희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줬어. 그래서 무거운 짐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고향을 떠날 수 있었는지 몰라. 그리고 중구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왜 그랬을까. 후일 나는 확실하게 그 이유를 알았어. 네가 비밀이라고 했던 거. 너와 중구는 사랑하면 안 된다고 했던 거. 너의 엄마와 중구 엄마가 시장 바닥에서 서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대판 싸웠다더군. 명주골부터 밤머릿재, 실골까지 쫘하게 소문이 퍼졌어. 그 이유는 별 것도 아니야. 쉬쉬 하던 소문이 당사자에 의해 겉으로 드러났을 뿐이지. 두 여자가 으르렁 거리며 했다는 말은 입담 좋은 촌로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떠돌았다더군.
남의 서방 꿰 찬 년이 오데서 행패고?
너거 서방 좀 빌린다고 거기 닳았더나?
그래, 달아서 심도 몬 쓴다. 니가 진을 다 빼 무서 그렇제. 요 여시겉은 년아.
웃기지 마라. 너덜너덜 해서 거시기가 들락날락해도 모르고 잠만 자는 년이 소박 안 만내는 것도 다 내 덕인 줄이나 알고 살아라.
두 여자의 옷고름이 떨어져 나가고 치맛말기가 찢어져 박꽃 같은 속살이 드러나고, 출렁거리는 젖통이 불거져도 부끄러운 줄모 모르고 싸움질을 했다는 거였어. 너의 엄니가 엎어져 버둥거릴 때 치마 말기가 풀어져 고쟁이가 밖으로 드러났고, 단속곳의 벌어진 틈새로 무성한 거웃이 어찌나 탐스럽던지 구경꾼으로 섰던 남정네들 침 넘어가는 소리가 꼴깍꼴깍 했다는 우스개도 전해지더군.
그때, 중구 아버지가 나타났어. 게거품을 물고 싸우는 두 여인을 떼어내면서 중구 아버지는 중구 어머니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너의 엄마를 껴안고 시장 안으로 사라졌다더군. 중구 엄마는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꺼이꺼이 울면서 ‘중구야, 불쌍한 우리 중구야, 니가 우째 죽었는지 내 모를 줄 아나.’하면서 서럽게 울었다지.
그리고 너를 까마득하게 잊었어. 우리 집이 Y시로 이사를 했기 때문일 거야. 오래 전에 부모님도 다 돌아가셔서 고향 갈 일도 없어. 고향은 이제 마음속의 그리움일 뿐이야. 너로 인해 추억 속을 걸을 수 있어 나는 반가웠네. 내게 첫사랑은 그때 쥐가 먹어버린 홍옥 같은 게 아니었나 싶어. 달콤새콤하고 아삭아삭 했던 참 귀했던 사과, 우리 할머니께 갖다 드리고 싶었던 그 사과 같은 것이었어. 쥐가 먹어버렸기에 더 애틋했을 수도 있지만. 순아, 가능하면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 두 아이가 벌써 장가를 들었다며? 그럼 부부만 남았겠네. 이혼 같은 거 하지 마라. 요즘 세상에는 자식 소용없어. 부부가 마음 맞추어 살면 그게 행복이야. 나 때문에 속 썩었다면 미안해. 툭 털어버리고 둘이 마음 합쳐 봐. 너희 부부, 쥐가 먹어버린 사과 한 개 때문에 남은 인생 종칠 수는 없잖아. 아름다운 황혼을 맞이해야지. 아름답게 마무리 해야지. 이 세상에 나왔다 간 흔적은 흔적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잘 살아. 친구.
<2013. 경남작가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