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문학관
(2013년 11월 27일 개관)
나는 도봉구 방학동에서 15년째 살아오고 있지만
전혀 정보를 모르고 있다가 바로 엇그제 산책길에서
문학관 현판을 발견하곤 정말 깜짝 놀랐다.
명색이 문인이요 작가라는 사람이 한 동네 문학관이 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시인 김수영은 도봉구와 인연이 깊은 관계로
이곳에 그의 문학관이 건립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고장에 살았을 뿐 아니라 묘역도 시비도 도봉산을 마주보기 때문이다.
사후 45년만에 문학관이 건립된 것인데
이곳은 일반인들이 찾기엔 퍽 외진 곳이다.
정확한 주소로는 도봉구 방학동 해등로 32길 80이다.
총 15억5000만원의 기금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문학관을 물어서 찾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연산군묘나 정의공주묘 혹은 방학동 은행나무를
찾는 편이 훨씬 빠르다.
연산군묘나 은행나무 혹은 북한산 둘레길에서
100여 미터 안팍의 거리이기 때문이다.
시내서 오려면 지하철 4호선 쌍문역 2번출구로 나와
마을버스 06번을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바로다.
이 건물은 원래 방학4동 주민센터로 지어졌다가 방학 3,4동이
통합되면서 5년간 방학동문화센터로 활용되다가
이번에 유지들의 뜻을 모아 문학관으로 개조된 것이다.
현관 안내실
4층 건물로 지하 1층과 지상 4층으로 되어 있으며
전시실을 무척 공들여 만들었다.
저지난 해에 영동의 정지용문학관을 가보고 작년엔 춘천의
김유정문학관을 다녀왔는데 그것들에 손색없이 잘 꾸며져
마음이 흐뭇했다.
김수영의 대명사는 자유와 사랑이 아닐까
김수영의 약사
1921년 서울 종로에서 아버지 태욱(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 중퇴.
1944년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하였다.
광복 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편입, 중퇴.
북한의 남침으로 미처 피난하지 못해 북한군에 징집되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그 뒤 미군통역생활도 하고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 이후부터는 시작과 번역에만 전념하다가 1968년 6월 15일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김수영의 작품 세계
1945년 문예지 《예술부락(藝術部落)》에 시〈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1949년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각광을 받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을 벗어나
지적 방황과 번민을 풍자적이며 지적인 언어로 시화하였다.
1959년에 간행된 《달나라의 장난》은 이 시기의 시적성과를 수록한 첫 개인시집이다.
그의 대표작 〈달나라의 장난>, 〈헬리콥터>, 〈눈>, 〈폭포〉 등이 여기에 수록되었다.
그가 본격적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은 1960년의 4.19 의거이며,
여기서 그는 평등한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자유를 위한 혁명에서 시적 열정을 얻는다.
강렬한 현실비판의식과 저항정신에 뿌리박은 시적 탐구는 그로 하여금
1960년대 참여파 시인들의 전위적 구실을 담당하게 했다.
이때의 대표작품으로
〈푸른 하늘을〉, 〈후란넬저고리〉, 〈강가에서〉,〈거대(巨大)한 뿌리〉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풀〉등을 들 수 있다.
그는 현실의 억압과 좌절 속에서 일어서고자 하였던 196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며,
현실참여의 생경하지 않은 목소리를 보여줌으로써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문단에 큰 영향을 미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교단에 있을 때 국어 교과서에서 가르쳤던 작품이
<풀>과 <폭포>와 <눈>이었다.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일 게다.
천천히 다시 음미해봐도 깊은 의미가 되새겨 진다.
여기서 '풀'은 민중이나 언제나 선량한 서민들이다.
'폭포'에서 주목할 대목은 ' 고매한 정신','곧은 소리'
그리고 '나태와 안정을 용납하지 않는'
폭포의 상징성이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가 포인트다.
김수영 시인의 출생
시인의 탄생일에 맞추어 문학관을 11월 27일에 개관식을 가졌다.
시인의 중학교 시절 얼굴
그가 마지막 남긴 글에서
민중과 함께 고난을 건너는 시인의 고뇌에 찬 얼굴
고인의 장례식 광경
1968년 6월 15일 밤 11시 10분 교통사고로
다음날 16일 8시 50분에 임종했다.
도봉공원에 세워진 김수영 시비
대표작 <풀>을 새겼다.
김수영의 자필 원고와 주고받은 편지
김수영의 시적 세계를 평한 평론가들의 말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
시인 신동엽
한반도 위에 그 긴 두 다리를 버티고 우뚝 서서 외로이 주문을 외고 있던 천재시인 김수영,
그의 육성이 왕성하게 울려 퍼지던 1950년대부터 1968년 6월까지의 근 20년간,
아시아의 한반도는 오직 그의 목소리에 의해 쓸쓸함을 면할 수 있었다.
그는 말장난을 미워했다.
말장난은 부패한 소비성 문화 위에 기생하는 기생벌레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 질서에 아첨하는문화를 꾸짖었다. 창조만이 본질이라고 굳게 믿엇다.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엇다.
그의 죽음은 민족의 손실, 이 손실은 서양의 어느 일개 대통령 입후보자의 죽음보다 앞서
5천만배는 더 가슴 아픈 손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은 죽지 않았다.
위대한 민족시인의 영광이 그의 무덤 위에 빛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민족의 알맹이들은 다 알고 있다.
김수영이 남긴 시집들
김수영은 일어, 영어에 능하여 번역에 몰두하기도 했다.
영문판 3인 시집
김수영, 신경민, 이시영
일어판 3인 시집
김수영, 김춘수, 고은
1981년에 '김수영 문학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김수영의 시작 서재
문학관 1,2층의 전시실 모습
전시실 벽에 남긴 시인의 이모 저모
3층 일반 도서관
김수영 시 낭송 체험실
십여 개의 시 중에서 선택해 낭송하고
녹음을 다시 감상할 수 있는 체험교실을 운영한다.
'김수영 사전' 김수영 시어 연구' 등도 보인다.
첫댓글 배꼽만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