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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디고 유니콘 원문보기 글쓴이: 봄날isu
세상을 응시하는 영원한 눈길
얼마 전에 후배가 보내준 이철수 판화달력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해 있는데 비 뿌린다. 하늘이 한 입으로 두 말 한다.” 본뜻과 상관없이 마음이 착잡하다. 헤아릴 길 없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인생이 엮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해가 쨍하든지 비가 후줄근하게 땅을 적셔야 오늘 내가 할 일을 정하고 장작을 패려고 도끼를 들든지, 집안에서 아기와 재미나게 놀 생각을 하든지 할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그제 밤에는 비가 오더니 새벽엔 눈으로 바뀌고, 어제 하루종일 오늘 이 시간까지 해가 밝게 들다가 말다가 하면서도 내내 눈은 그치지 않는다. 해 있는데 눈 내린다. 하늘이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것일까. 그러나 느낌은 이러하다. 하늘이 밝고 눈이 하얗게 내리니 세상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얼치기란 말 때문에
<풍경소리>라는 잡지를 읽다가 ‘얼치기 도사’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곧 통신에 들어가 관련된 지난 기사를 찾아 읽었다. 김규항이란 사람이 이현주 목사를 ‘얼치기’라고 몰아붙였다는데, 참 심경이 복잡했다. 그런 말은 술좌석에서 이래저래 했다면 그마저 탓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공개적으로 시사주간지에 글을 올렸다니 좀 무례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석(私席)에서 나누는 이야기야 반농담 삼아 과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글을 쓰는 식자(識者)로서 타인을 판단하는데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 단서만으로 사람을 얼치기 운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평소 김규항의 글이야 읽고나면 글발이 시원하고 입에 달라붙는 맛이 있어서 좋아했는데, 어찌 보면 그것 역시 나의 감수성이 엔간히 무디어져 버린 탓도 있으리라는 반성이 뒤따른다. 군더더기 없이 단호하고 명쾌한 결론, 그리고 대상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야 온당하고도 필요한 것일 테지만, 그가 사용하는 자극적 언어는 자못 폭력으로 비추어질 수 있겠다. 그렇게 자극적인 언어, 이를테면 앞서 말한 ‘얼치기 도사’와 같은 식의 표현이 아니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할 도리가 없다는 현실 판단이 엿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잔잔하게 생애의 복잡한 갈피를 살피고 따듯한 시선을 담아 타인의 성장과 세상의 진보를 위한 비판 담론을 건넬만한 여유는 없는 것일까. 예전에 목소리 큰 사람의 말이 먹히던 시절도 있었다. 이른바 사회운동 진영에선 원칙에 입각한 강경파의 목소리가 힘을 가졌고, 이는 그만큼의 폭압적인 정치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비판 언어가 폭력적이라 느낄 만큼 거칠어진 것은 우리 자신이 이미 웬만한 자극에는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사회적 감수성이 무디어졌거나, 또는 인터넷 등장 이래로 더욱 눈에 띄는 것이지만, 언어(또는 정보/광고) 자체의 범람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내 이야기 좀 들어봐, 라고 아우성 치는 형국이다.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김규항이란 한 사람을 집어 그 논리를 비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비판의 태도와 언어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우린 공개적으로 어떤 사상과 이론에 대하여, 때론 인물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다. 강준만으로 대표되는 <인물과 사상>이란 잡지가 드러내듯이, 그동안 금기의 영역처럼 인식되어 오던 사상과 인물에 대하여, 그것이 끼치는 사회적 영향력이 큰 만큼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비판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관행은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를 위하여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이 하나의 진리를 위하여 다른 진리를 배제하는 식으로 이뤄진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반편 진리가 될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의 요체인 다양성이 무시되고, 인간에 대한 존중심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땅속에 묻힌 진실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이현주 목사에 대한 내 소감을 단편적이나마 적어본다. 지금은 이 아무개란 필명으로 글을 쓰고 있는 그 목사님과는 깊은 정담을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몇 차례 우연한 기회에 만나 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주로 책을 통하여 그의 생각을 공감하면서 나누어 가진 경험을 지니고 있다. <예수의 죽음>이나 <예수를 만난 사람들>부터 노자와 금강경을 독특한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아우르는 궤적을 눈으로나마 좇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이현주 목사가 어쨌든 ‘도사(道士)’란 소리를 얻어듣기까지 나름의 실존적 고뇌의 흔적이 오래 전부터 새겨져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이십여 년 전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이란 유대인 학자의 글을 여러권 번역한 적이 있는데, 하느님 앞에 선 인간에 대하여 근본적인 진리를 성찰하는 글들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 갇힌 불꽃>(종로서적, 1979)이란 책을 옮기고 나서 “경구와 잠언들이 금강석처럼 번뜩이는 어둡고 긴 광갱을 뚫고 나온 느낌”이라고 적었다. 진리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고, 그곳에 영혼을 접속시키기란 다만 의지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 하늘이 도와야 하는 법인데, 내 생각엔 이현주 목사와 헤셀의 만남은 이현주 목사와 예수의 만남만큼 천부(天賦)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책을 옮기고 쓴 뒷글에서 그의 언어를 직접 들어보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땅 속에 묻혀 있는 진실, 진실이 묻혀 있는 땅의 껍질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는 인간들의 발바닥, 그리고 몇 사람이 울면서 진실의 이름을 부르는 고독한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런 이야기로 이 책은 시작된다. 그리고 산꼭대기로 무거운 돌을 나르는 시지푸스처럼, 진실을 찾아 부단히 출발하는 용감한 전사의 얘기로 이 책은 마감된다. 책은 마감되었지만 지금도 숨겨져 있는 진실을 찾아 온갖 거짓을, 속임수를 벗어 던지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의 발자국 소리는 우리의 무딘 귓전을 맴돌고 있다.
사람이란 모두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이 땅에 내려온 영혼들이다. 그런데 사다리가 사라졌다. 하늘에서는 올라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쳐다보니 사다리가 없다. 어떤 자들은 일찌감치 하늘에 오를 일을 포기한다. 어떤 자들은 개구리처럼 뛰어본다. 그러나 결국 떨어지고 만다. 몇 번인가 시도해 보다가 그만둔다. 대부분이 그만두고 만다. 그런데 계속 뛰어오르는 자들이 있다. 지금도 그들은 사다리 없는 하늘로 뛰어 오른다. 오르다가 떨어진다. 다시 뛰어오른다. …
이 책의 본문 어딘가에 있어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그림이다.
우리는 지금 혁명처럼 소용돌이치던 70년대를 배웅하고 있다. 정의와 평등을 위한 투쟁은 제3세계를 앞장세워 전 지구의 껍질을 불태우고 있으며 민중이라는 새로운 주인이 세계의 안방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섬세한 비단옷을 감고 학의 다리처럼 날렵한 손길로 부채질을 하던 예술은 몽둥이와 쇠가죽 북을 두드리는 원시림의 함성에 밀려 무대의 언저리에 장식품처럼 남아 있다. 아직도 이른바 후진국이란 게 있어, 귀족주의적인 문화인들의 입김이 그 나라의 문화풍토를 좌우하는 곳이 더러 있긴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다.
이러한 흐름을 보면서 헤셀은 “그것은 좋은 일이다. 오랫동안 기다린 일이다. 그러나 잊지 말라. 우리 모두 인간임을. 그리고 아직도 진실은 땅속에 묻혀 있음을!”하고 외치는 듯 싶다.
이는 완결된 진리, 정답만 남은 진리란 사실 없다는 것이며, 우린 다만 진리를 찾아가는 길 위에서 자신과 주변을 되짚어보는 수행자일 따름이며, 모두가 진리 앞에선 학생(學生)으로 평생을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이게 이승에서 인간 존재로 목숨을 연명해 가는 자의 사명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것을 응시한다는 것은 순간에 충실하면서도 순간에 매이지 않는 거룩한 길이다.
영원한 눈길로
목전에서 벌어지는 인간상황에 대하여 눈감지 않고 불의에 과감히 항거하면서도 영원한 눈길을 거두지 않는 게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본분이다. 이현주 목사가 관심을 가졌던 헤셀은 <나와 너>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마틴 부버가 1937년에 프랑크푸르트의 유다인 레르 하우스의 후계자로 지명한 바 있지만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독일의 폴란드 점령과 유다인 대학살 두 달 전에 가까스로 런던으로 가서 죽음을 면한 인물이다. 그는 “내 동족들이 타 죽어간 …수백만의 인명이 악의 위대한 영광을 위하여 사라져간… 불길에서 건짐 받은 타다 남은 나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1945년부터는 미국의 아메리카 유다인 신학교에서 신비주의와 유다윤리학을 강의하였다는데, 그의 관심은 “정신적으로 넋을 잃은 인간의 고뇌”에 집중되었다.
물론 그는 유다 중심주의자가 아님이 분명하다. 그는 1965년 봄에 앨라배마의 셀마에서 마틴 루터 킹과 함께 행진하였으며,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반대하는 항거자의 지도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얽혀 들어가는 것, 행동하고 반응하는 것, 놀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알거나 모르거나 우주의 드라마의 한 배역을 맡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분을 우리 마음 속의 어떤 대상으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 썼듯이, 우리의 배역은 때로 내 결정사항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의 그늘아래서 그분이 하자는 대로 움직이고 있을 따름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실 신앙과 상관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이현주 목사 역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인간상황에 예민하게 감수성을 열어놓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일이 생겨난 연유를 스스로 또는 하느님께 여쭙고 길을 찾고자 한다. 비록 그가 내놓는 해결책이 <풍경소리>의 필자들에게서 느껴지듯이 사회의 구조악 보다는 자기 성찰에 더욱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 사실 그런 이유로 이 부류의 사람들은 도사 흉내를 낸다고 핀잔을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런 내면의 신성한 불꽃을 헤아리는 영원한 눈길이 아니라면 사태의 핵심을 꿰뚫어볼 재간도 없을 것이다. 아직도 땅속에 깊이 파묻혀 있을 진리를 탐색하는 자기성화의 길에서 얻은 눈길로 세상의 문제를 응시하고 땅을 다지고 있는 자들과 겨루는 삶이 그나마 역사를 한 걸음 제대로 진보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영원한 눈길로 볼 때, 부시와 라덴은 한 통속이라는 말이 영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대변하는 세계의 인간상황은 영 딴판이며, 강자의 횡포와 무력한 자의 분노를 동렬(同列)에 놓을 수는 없을 테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힘의 논리는 똑같다. 이에는 이, 힘에는 힘, 살생에는 살생이다. 이 밀림의 논리가 부시/미제국주의와 라덴/탈레반 정권의 고갈되지 않는 행동의 원천이다. 여기엔 어떤 종교적 차원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정치경제학적 이해관계가 뒤엉켜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해결책이 없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도 저마다 이해관계에 따라 편들기에 가담하고 공개적인 살생을 인준한다. 부시가 대통령이 될 때, 단상에서 성서 위에 손을 얹고 하느님의 영광과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정치할 것을 맹세하지 않았을까. 그 나라의 관례를 모르지만, 미국 영화에서 보니 법정에서 증인들마다 성서 위에 손을 얹고 사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 걸 보면, 대통령도 공개적으로 하느님 운운할 것이며, 그 역시 명색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행동에 예수란 인물은 도무지 영향력이 없는 것 같다. 하느님이 허락할만한 정당한 폭격이란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 힘의 논리를, 약육강식의 논리를, 복수의 논리를 “진리가 아니다”라고 갈파하고 나서는 용기가 지금은 더 필요한 때가 아닐까. 김대중 정부의 얄팍한 경제논리가 부시의 편을 들어주도록 허락한 국민 역시 그 복수전에 이미 가담한 셈이며, 신앙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바꾸자 또는 나를 바꾸자
이참에 생각나는 글이 있다. 몇 사람이 함께 쓴 <시간의 종말>(1999, 끌리오)이란 책인데, 여기서 움베르토 에코는 이데올로기의 몰락과 뉴에이지 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1968년 유토피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적색 테러주의가 종말을 고했을 때,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의 시대가 왔을 때,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의 신화로 채워졌던 서가는 이미 당시에 뉴 에이지로 불리던 것들로 교체되었습니다. … 이것은 1968년 혁명가들이 신비주의로 개종하면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과학적인/합리적인 사회변혁운동을 통하여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투신했던 사람들이 그 현실불가능성을 깨닫고 절망한 나머지, 겉으로 보기엔 전혀 엉뚱한 방향처럼 보이는 뉴 에이지 운동이나 종교에 귀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뉴 에이지란 “종교보다 덜 까다롭고 철학보다 더 재미가 있으면서 억압적이지 않은 사교”라고 말하는데, 이는 신비적/영성적 자기변혁운동이라고 편의상 말할 수도 있겠다.
이 담론은 실상 우리나라에선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에 걸쳐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기에 귀가 솔깃해졌다. 김규항의 말대로라면 얼치기 도사들이 대거 등장하는 시기인 셈인데, 내가 만나본 그 사람들 중에는 실제로 사회변혁 운동진영에서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신명을 바쳤던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도 시민사회단체에서 합법적으로/반(半)합법적으로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많지만, 이미 그러한 길이 과거지사(過去之事)로 여겨지고 새로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많다. 요즘은 사회운동도 전문직능의 하나처럼 여겨지는 시절인지라 성공회대학에선 NGO학과가 생겨나 활동가들을 제도적으로 양성하고 있으며, 활동가들의 ‘능력’이 운동에 대한 ‘열정’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 같다. 한편 수완이 뛰어난 - 다른 의미에서, 권력을 향한 욕구가 강렬한 - 사람들은 사회운동 과정에서 닦은 기량을 정치권에 뛰어들어 발휘하고 있다. 이들은 어쩌면 권력 장악을 통하여 민주화를 완결짓겠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대안적 권력을 만들어보자는 방향으로 옮겨간 것일 텐데 시간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권으로 옮겨가지도 못하고 전문역량도 갖추지 못한, 어쩌면 열정은 여전한데 현실에서 좌절감을 맛본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들은 유토피아에 대한 열정이 아직 식지 않았는데, 이 에너지를 쏟아낼 장(場)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더 이상 현실 사회운동에서 매력을 느끼지도 못하고 투신을 요청받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대의(大義)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곤혹스러운 현실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대학원에 진학해서 미루어 두었던 학업을 계속 하기도 하고, 이른바 명문대 출신은 운동을 그만 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더라도 학원 강사나, 심지어 고액과외 선생으로 돈을 만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금은 정상적 과정을 밟았어도 취업이 어려운 시절이기에 대부분의 운동권 출신의 삼, 사십 대에게 2000년대는 가혹한 순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나마 취업이 되더라도 유토피아에 대한 열정 탓인지 쉽게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한다. 그 열정이 순수할수록 그 사회 부적응증은 심해져서 정신 분열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다.
다행이라 할까. 한편 그 열정을 받아줄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실 변혁에 절망하였지만, 영혼의 유토피아를 찾아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 예나 지금이나 안락한 삶에 대한 관심이 없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를 마음으로 다스리며, 소박한 삶을 오히려 바람직한 생활양식으로 삼고 위로하며, 오직 영적 깨달음을 통해 내적 자유를 얻고, 그 발랄한 에너지로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화택(火宅)/멸망에서 구출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다. 이들은 마음의 정치경제학을 학습하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나는 곁에서 이런 사람들을 발견할 때마다 부디 소원성취하길 간절히 빌고 있다. 여기서 다시 절망하면 갈 곳을 나도 모르는 까닭이다. 그들은 스스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한 화신(化身)이 되고 싶어하는 그 만큼 스스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꼼꼼히 섬세하게 챙겨주지 않는 까닭이다. 때로 영적 변혁을 꿈꾸는 자에게도 비용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도처에 생기고 있는 영성개발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짐짓 빠른 길을 택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상업적으로 제도화된 영성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겐 시한부의 생명력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좋은 스승을 만나 바닥부터 천천히 그러나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다행(多幸)스럽고, 소박하더라도 자기 살림을 돌보며 일상도(日常道)를 터득하고 자기 혁명이 세상의 변혁과 상관 있음을 잊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은 다복(多福)하다.
자본주의와 슬픔의 능력
다시 돌아가 움베르토 에코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격동의 시대에 사회혁명에 투신했던 이들이 이젠 그 열정을 쏟아부을 다른 대상을 갈망하게 되고 결국 종교적/영적 혁명에서 그걸 찾게 되었다는 말인데, 이걸 비난할 수는 없겠다. 그들은 아마 너무 순수하고 래디컬〔근본적/뿌리에 관심 갖는〕한 것인지 모른다. 경박하고 표피적인 삶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사는 요즘 세태에선, 자못 영웅적 발상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자들이기에, 모든 권위/권력에 거부감을 느낀다. 따라서 기존의 정치권력/경제권력과 마찬가지로 제도화된 종교권력에도 거부감을 동일하게 느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뉴 에이지적 흐름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뉴 에이지 운동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層位)를 갖고 있지만, 기성종교와 달리 제도화된 권력이나 교리로부터 자유로운 게 사실이다. 인류가 낳은 다양한 정신적 유산을 나누어 갖고 있으며, 이러한 지혜들이 서로 소통하고 있음을 믿는다. 이들은 작은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고, 개별로 흩어져 살면서 네크?p 형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책임의 주체는 ‘나’다. 나의 성화(聖化)/깨달음에서 출발해서 우주로 자아를 확장하는 시스템이다. 그런 점에서 뉴 에이지는 은총의 측면을 갖는데, 저주의 측면도 함께 나타난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시장의 세계화가 이뤄진 것과 마찬가지로 뉴 에이지 운동 역시 영적 상품의 세계시장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메커니즘은 영성(靈性)마저도 언제든지 돈이 되기만 한다면 상품화시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뉴 에이지 이론과 프로그램과 도구들이 값비싼 상품으로 헐벗은 영혼들의 주머니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 에이지 운동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내가 지금 서 있는 또는 가고 있는 길의 진정성을 스스로 따져 묻는 것이다. 내 선택의 종교적/영적 의미와 더불어 정치/경제적 의미 역시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자본주의의 늪 속에서 살고 있는 까닭에, 나의 수행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주의에 오염/이용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선전하는 영적 관심이 곧 반(反)/탈(脫)자본이라 여기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다.
기존 현실에 함몰되지 않는 순수한 열정을 지켜 나가기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참으로 어렵다. 유토피아에 대한 간절한 열망, 그리고 구체적인 길 찾기. 이 길에서 실족하지 않으려면, 여전히 우린 세상이 몸으로 겪고 있는 고난의 현장에서 마음을 거두어 들여서는 안 된다. 가난/청빈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이 자기를 지키는 방패요, 가련한 인생들에 대한 멈추지 않는 연민이 참된 자기성화/변혁운동을 이끌어 가는 고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길을 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빛 속에서 춤추듯이 기쁘게 투신/정진하도록 기도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풍경소리> 2001년 10월호에는 시빗거리가 되었던 이현주 목사의 글에, 그 글을 쓰던 당시의 심경이 적혀있다. “저는 이번 미국 영토 안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테러사건을 보면서 처음 며칠 동안은 의식이 멍한 상태였고 그 뒤로 뭐라 설명 못할 슬픔과 답답함 때문에 사실상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글도 사흘쯤 밤낮으로 자리에 누워 혼미한 수면 상태에 있다가 겨우 일어나 앉아 쓰고 있습니다.” 그 글의 내용에 앞서 나는 이현주 목사처럼 나 역시 그 테러 사건을 접하고 슬픔과 답답함으로 자리에 누울 정도였는지 스스로 되묻게 된다. 그 사건은 단순히 수많은 미국민들이 죽고 다친 슬픔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건이 가능한 인간상황에 대하여 절절히 슬퍼할 줄 아는 공감(共感)능력이 우리에게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 보도를 마을 사람에게서 듣고, 도무지 믿지 않다가 면에 나가서야 신문에서 확인하고도 한동안 영문 모르고 죽어간 미국민들에게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현주 목사는 “다만, 저의 남은 인생이 참된 사랑에 동기를 둔 섬김의 순간들로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을 맺고 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했던가. 동기의 순수성을 믿는다면, 우리가 연대하고 성장을 부추기며 끌어안지 못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모두에게 스승이고, 모두가 모두에게 제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진리 앞에 마음을 닫아걸지 않기로 작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첫댓글 님의 글이 이곳에 실리면서 줄곧 잘 읽고 있습니다. 님의 감성 과 지성이 참 맑다 고 느낍니다. 몇 글귀 마음에 담아 봅니다. 고맙습니다.
참 공감이 가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을 오래전부터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는 이 지기로서 몇 년전의 그런 비난에 참 마음 아팠지요. 사회변혁운동에 있어 영성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중요성을 늘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에 그러한 움직임을 늘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고 또 공감하고 있습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
"가난/청빈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이 자기를 지키는 방패요, ....연민이 참된 자기성화/변혁운동을 이끌어 가는 고삐...그리고 이런 길을 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빛 속에서 춤추듯이 기쁘게 투신/정진하도록 기도하는 마음..동기의 순수성을 믿는다면, 끌어안지 못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가 모두에게 스승이고,.
모두가 모두에게 제자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진리 앞에 마음을 닫아걸지 않기로 작정할 수 있다면.....//님의 말씀대로 사필귀정(事必歸正)함을 망각 하지 않을 것입니다...감사합니다.
유익한 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성스럽게 올려 놓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공감을 받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진합니다.늘 그렇게 있어주십시요...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절절히 슬퍼할 줄 아는 공감이 나에게도 있는지...
고맙습니다..................................................................................보스턴에서/하늘.
가슴 가득 담았습니다.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이 현주 목사님책, 이책, 저책에서 = 여기서 풀어주셔 감시합니다.
"완결된 진리, 정답만 남은 진리란 사실 없다는 것이며, 우린 다만 진리를 찾아가는 길 위에서 자신과 주변을 되짚어보는 수행자일 따름이며, 모두가 진리 앞에선 학생(學生)으로 평생을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이게 이승에서 인간 존재로 목숨을 연명해 가는 자의 사명일지도 모른다. 영원한 것을 응시한다는 것은 순간에 충실하면서도 순간에 매이지 않는 거룩한 길이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