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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영국 텔레그래프지에 5월 17일 실린 기사입니다. (괄호)안의 내용은 제 의견이 아닌, 원 기사에 있는 내용이며, 제가 보충해 넣은 내용은 주석으로 대신했습니다. 글 중간의 그림들은 기사와 상관없이 임의로 넣은 것입니다.
발렌티노 롯시: 두 바퀴의 신
발렌티노 롯시의 모터사이클 레이싱에서의 우위는 우승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레이스에서 흥분되는 요소를 만드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과 함께 이 스포츠를 주류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그를 숭배적인 팬 그룹들에게 추앙 받는 슈퍼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롯시가 그의 여덟 번째 챔피언십 우승을 노리려고 할 때, 로리 로스는 스페인에서 그에게 따라 붙었다.
일곱 번의 월드 타이틀과 89번의 모터사이클 그랑프리 우승이 이탈리안 에이스이자, 우리 시대의 슈퍼스타 스포츠인인 발렌티노 롯시가 이룬 것이다. 그의 이름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롯시의 레이스를 보려는 바이크에 미친 유목민들에게 울려 퍼진다. 2001년부터 2005년까지 롯시는 두 바퀴에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다섯 번의 월드 타이틀을 가져갔다. 그 후 그는 비틀거렸다. 2006년, 마지막 레이스에서 사고로 탈락하면서 USA의 니키 헤이든에게 자신의 타이틀을 뺐겼다. 그리고 2007년은 더 나빴다. 비참한 세 번째 순위가 오랜 여자친구였단 아리아나 마테우찌의 결별과 그의 매니져의 해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이탈리아 세무국의 약 5백억원의 세금 조사와 함께 발생했다.
이제 세금 징수에 평화가 깃들었다. 롯시는 그의 왕관을 다시 찾으려고 필사적이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 출신의 20살의 호르헤 로렌조를 선두로 22살의 대니 페드로사의 젊은 선수 세대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있다. 이제 29살의 롯시는 모터사이클 레이싱의 최정점인 MotoGP에서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선수이다. 18번의 레이스가 열리는 MotoGP 시즌이 3월 카타르에서 시작되었고, 10달에 발렌시아에서 끝나게 된다. 6월 22일에는 영국 라운드가 더비 근처의 도닝턴 파크에서 열린다.
1949년, 첫 개최를 한 챔피언십은 모터스포츠에서 가장 오래된 월드타이틀이다. 70년대에 떠오르기 시작해서 80년도에는 호주, 미국에서 열리기 시작했고 TV에서 중계가 시작되었으며, 스폰서와 바이크 제조 회사들이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 때는 베리 쉰, 케니 로버츠, 프레디 스펜서, 케빈 슈완츠, 웨인 레이니 그리고 전설적인 남자 믹 두한의 시기였다. 그래도 롯시는 이 스포츠의 첫 번째 슈퍼스타다. 거리에서 누구에서 물어보더라도 그들은 그의 이름을 알아볼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롯시가 정확히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시즌 두 번째 라운드인 스페인 남부 헤레즈에 3월 도착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로렌조와 페드로사 덕분에 헤레즈는 레이스 일정에서 가장 많은 관중들이 붐비는 레이스다. 약 130,000명의 열광적인 팬들이 등에 텐트를 짊어지고, 헤레즈 주변은 바이커들의 난민 수용소처럼 변하게 된다. 모터사이클 레이서들보다 미친 사람들은 오직 모터사이클 팬들밖에 없다.
그리고 롯시의 팬들은 이중에서도 가장 미쳐있다. 매년 수백 명의 티포시들(이탈리아의 모터스포츠 팬들)은 자신들의 등에 롯시의 문신을 하고, 다른 자들은 가슴에 롯시의 46번을 새기고 다닌다. 이탈리아GP에서는 모든 언덕이 노란색으로 뒤덮인다. 독일에서는 팬들이 의학에 흠뻑 빠져 소리를 높여 ‘The Doctor’의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Doctor는 롯시의 다른 알려진 이름이다. 어떤 해에는, 한 팬이 그랑프리 레이스에 롯시의 그림이 그려진 자신의 개러지 문짝을 뜯어와서 이 위대한 남자의 사인을 받으려고 한 적도 있었다.
내부에서 퍼져있는 MotoGP의 국제적인 팬층은 놀랍도록 폭넓다. 헤레즈에서는 프로디지의 키스가 참석했고,1 후앙 카를로스 왕은 깔끔하게 차려입고 이 경기의 심판이 되어 출발 라인에서 신호를 보냈다. 연습 세션이 진행 중일 때는, 작은 고 회전의 엔진 소리로 대기가 갈라진다. 선수들이 행동을 취하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면 마치 240km/h 로켓을 조종하는 것 같다. 코너링에서 라이더는 그들 바이크의 한 쪽으로 사라지며, 한쪽 무릎을 노면에 스치면서 지나간다. 몸을 크게 기울이는 것은 물리 법칙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모터사이클은 틈새 시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MotoGP는 주류 시장이다. 매우 두드러지는 기술들과 빠르게 움직이는 경기에서 나는 사고와, 다량의 추월의 볼거리가 산재한다. 이는 자동차 레이싱보다 더 검투사적이다. 선두 팀 중 하나인 야마하 레이싱의 매니징 디렉터인 린 쟈비스는 이렇게 말했다. ‘코너에서 네 대의 바이크들이 한 라인으로 달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자동차 레이싱보다 더 많은 사고, 선수들의 움직임, 선수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만일 사고를 보고 나면, 이 스포츠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자동차 레이싱과 비교하면, 모터사이클 레이스는 기계보다 인간이 훨씬 더 많이 강조되는 분야다. 바이크(롯시의 바이크는 프로토타입에 800cc 4스트로크 엔진을 쓴다.)는 ‘패키지’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롯시의 호주출신 크루 치프인 제레미 버지스는 라이더는 80퍼센트이며 바이크는 2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계산한다.(F1에서는 이는 60퍼센트가 차량이고, 40퍼센트가 드라이버일지도 모른다.) 바이크 라이딩은 회사와 회사간의 경쟁이기 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배틀이다. 위대한 모터사이클 레이서에게는 몇몇 능력이 요구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버지스가 언급하는 ‘매우 빠르게 달리는 것과 사고가 나는 중간 지대에서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적인 가상의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발렌티노 롯시에게 이 중간지대는 집과 같다.
나는 트럭 운전수들이 모이는 컨벤션이나 화물차 주차장 같은 ‘패독’지역에 갔다. 두 대의 모터사이클을 레이스에 보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양의 장비들이 필요한지 여러분은 믿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경기에 나서는 팀들-두카티, 혼다, 스즈키, 가와사키 그리고 야마하-은 스페어 파츠, 스패너, 기름으로 젖은 천등과 타이어 같은 연관된 장비들을 실은 트럭 화물을 가져온다. 롯시는 야마하에서 달리고 있고, 이 팀은 선두 팀인 혼다와 경쟁하고 있다. 롯시와 나는 야마하의 ‘접대용 유닛’에서 만났다.
그의 삼각형 얼굴과 턱의 수염선, 푸른색의 진주 같은 눈과 구리빛 피부는 롯시를 마치 피에로 델라 프란세스코가 그린 천사처럼 보이게 했다.2 그의 머리는 그동안 변해왔다. 구불구불한 큰 헤어스타일 전에는, 흰색부터 녹색까지 변화했었다. 지금의 그의 머리는 빠르게 달리기에 알맞게 잘라져 있다. 5피트 10인치의 그는 키가 컸고 손발이 길었다. 그의 긴 신장은 코너링에서 그에게 이점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이크의 한쪽에 더 많이 매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5피트 2인치의 대니 페드로사보다 말이다. ‘위대한 모터바이크 레이서가 되기 위해선, 가장 중요한 점은 바이크 열정을 가지는 겁니다.’ 우리가 찾아낸 조용한 모터홈에서 롯시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열정을 매우 일찍이 시작때부터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운이 좋았죠. 내 아버지가 바이크 레이스를 했었고, 그는 나에게 매우 일찍 그런 열정을 주었습니다. 나는 세, 네 살때 첫 바이크를 탔습니다.’
일찍 두 바퀴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것은 결정적인 요소로 보인다. 뒤늦게 연습을 시작하지 않고 바이크의 시트에서 이런 자라나는 시기를 보내는 것은 바이크가 신경 중심부에 자리잡게 되게 한다. 롯시의 공식적인 경력은 실제로는 이탈리아에서 카트를 몰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그라지아노 롯시는 바이크를 타는 것에 신중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두 바퀴 레이서로써 사고를 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들을 네 바퀴 위에 두려고 노력했다. 발렌티노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바이크는 더 위험할지도 모르죠.’ 롯시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자동차에 대한 열정은 바이크에 비해 두 번째였어요.’
여태까지 롯시의 경력에서 최정점은 2004년이다. 그전의 3년 동안 롯시는 혼다와 함께 했고, 혼다와 성공적으로 월드 타이틀을 획득했다. 사람들은 롯시의 우승은 최고의 바이크 때문이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보다 머신이 문제라는 이런 생각들은 롯시를 지겹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혼다에서 야마하로 팀을 바꾸게 된다.
한 팀에서 다른 팀으로 건너가는-특히나 혼다 같은 우승하는 팀에서 1992년 이후로 월드 타이틀을 가져가지 못한 야마하로의 이적은-것은 마치 완전히 반대쪽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은 롯시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롯시는 단지, 얼마나 머신이 좋은지에 상관없이 이 탑의 사람은 정말로 경기를 하며, 진정한 탑은 언제나 우승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야마하도 역시 원하는 바가 있었다. 야마하는 헌신적인 회사였으나, 그때까지 주말마다, 매 경기마다 혼다에게 격파 당했었다. 야마하는 이 상황을 뒤집고 싶었다.
롯시와의 협상은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 일이 새어나가면 당시의 그의 팀의 의욕이 꺾일 수도 있었고 롯시의 타이틀 획득 기회가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야마하는 월드 챔피언을 원했지, 2위는 필요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들의 미팅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어느 날 밤에, 롯시는 린 쟈비스를 체코혜의 메디털 센터의 한 텐트에서 만났다. 그들은 누군가의 발 소리가 들리면 테이블 아래로 숨어 들어가기도 했다. 야마하가 롯시를 얻기 위해서 이런 방식의 협상이 10개월간이나 지속되었다.
롯시에게 이것은 큰 도박이었다. 2003년에 야마하는 18번의 레이스에서 단 한 차례 포디움에 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는 모든 것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시기였어요.’ 롯시는 말했다. 야마하도 도박이긴 마찬가지였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롯시는 다년간 계약에 120억원 이상을 요구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행되어야만 했다. ‘만약 당신이 팀에 다년간의 월드 챔프를 한 선수를 데리고 오려고 한다면. 그냥 데려오는게 아닙니다. 정말 크게 쏴야 합니다.’ 쟈비스가 말했다. ‘그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 였습니다.’
롯시는 2004년 3월 남아프리카 벨콤에서 첫 레이스를 하기 전까지 단 네 번의 테스트 세션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최고의 바이크는 아니었어요.’ 롯시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맥스 비아지는 혼다에 롯시는 야마하에 있었지요.’ 쟈비스가 이야기했다. ‘나는 피트 레인에 서서 그들 사이의 거대한 전투를 지켜봤습니다. 그들은 서로 강력한 적이었습니다. 비아지(2002년까지 야마하 라이더)는 항상 혼다로 가길 원했었습니다. 레이스는 구세대와 새로운 세대, 혼다와 야마하의 대결이었어요. 선수들은 매 코너마다 서로 추월을 반복했습니다. 마지막 두 랩은 짜릿했어요. 롯시가 먼저 결승점을 지났고, 그것은 정말 근사했습니다.’
‘발레는 바이크에서 내리면서, 그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정말 많은 감정을 표시했습니다. 그는 바이크를 금속 조각의 조합 그 이상으로 봅니다. 그것은 마치 여자친구에게 하는 것 같았지요. 그는 그 자신과 바이크가 함께한 일에 정말로 감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선수들과 그와의 차이점이에요. 다른 선수들은 단지 바이크를 탈 뿐이지만, 발레는 바이크와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롯시는 그 시즌에 여덟 번의 우승 이상을 가져갔고, 그는 월드 타이틀을 챙겼다. ‘그것이 롯시의 영리함이고, 우승을 하길 바라는 욕구입니다. 그의 경쟁심, 모든 이에 대한 관대함은 항상 옳을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그를 그처럼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레미 버지스가 말했다. ‘우리는 최고의 장비로 레이스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확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발렌티노는 겸손함과 성공에 대한 결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궁금해졌다. 어떤 능력이 그를 우뚝서게 만든다고 롯시는 생각하고 있을까? ‘좋은 집중력이에요.’ 그가 말했다. ‘나는 전략과 타이어에 대해서 명확하게 생각하면서 달릴 수가 있습니다. 또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죠. 나는 결정적으로 건설적이에요. 나는 매우 정확하고 매우 매우 체계적이지요…’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스쳤다. ‘음, 일반적인 생활에서보다는 레이스 주말에 더 체계적이게 되죠. 나의 평상시는 주말같아요. 하지만 레이스에서는 100퍼센트 집중을 합니다. 만일 집중력을 잃는다면 많은 순간 사고가 나겠죠.’
그도 불안감을 느낄까? ‘네, 그래요. 레이스 시작 2시간 전에요. 하지만 레이스가 시작되면 두려움은 긍정적인 힘으로 바뀝니다. 우리는 위험한 일을 하기 때문에 두려움은 한계를 아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때때로 그것은 한계를 넘어서게도 하지만, 매번 그렇지만은 않아요.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약간 한계 뒤편에 머무는게 낫다고 말이죠.’
롯시의 아이디어인 레이스 주말에 ‘집중’하는 것은 아마도 판에 박히지 않는 것일 거다. ‘발레는 파티를 좋아해요.’ 야마하 흥보 담당의 케이티 베인스는 말했다. ‘나는 그가 새벽 3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고 알고 있어요. 우승하고 나면 말이죠. 그는 차를 좋아해요. 그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타블리아 근처에서 모터보트를 가지고 있구요. 그리고 그의 부모님을 위해서 집을 샀어요. 그는 멋진 삶을 좋아합니다.’
‘나는 새벽 2시 이후에 많은 에너지를 받아요.’ 롯시도 동의했다. ‘나는 아침에는 자는 걸 좋아합니다. 나는 하루를 시작하는데 문제가 좀 있어요.’
롯시의 강점은 코너에 들어가면서의 늦은 브레이킹과 타이어의 응착력이 떨어지는 레이스의 후반부에 바이크를 다루는 기교다. 그의 스타일을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대단한 마찰력자이다. 그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선수의 리어휠에 붙어서 약점을 찾아내고 그 선수가 틈을 보일 때까지 압박을 가할 수 있다. 열에 아홉은 그렇게 한다. 아주 순식간에 롯시는 냉정한 킬러로 공격을 한다. 그의 닉네임 Doctor처럼.1 롯시의 트랙에서의 마인드 게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한 선수는 22살의 작년도 월드 챔피언인 케이시 스토너 뿐이다.
롯시가 1990년대에 등장했을 때, 로마 출신의 맥스 비아지는 이탈리아의 영웅이었다. 차갑고, 어렵고, ‘심각한’ 비아지는 한번도 롯시와 함께 어울린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폭발은 차츰 진행되었다. 그들의 라이벌 싸움은 비아지가 나오미 켐벨과 사귄다는 루머가 돌 때부터 였다. 1997년 레이스를 끝내고 세레모니를 하면서 롯시는 축구 저지를 입힌 ‘클라우디아 쉬퍼’라는 이름을 쓴 금발의 인형을 그의 뒤에 얹고 달렸다. 2001년 그와 비아지는 스페인GP에서 싸움을 벌였다. 다음날 비아지는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힐끗 쳐다보면서 카탈루냐 모기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했다.
또 다른 라이벌은 세테 지베르나우였다. 그는 스페인의 다혈질이었고 최고의 라이더였으나 한번도 타이틀을 얻지는 못했다. 그와 롯시는 친했고, 롯시의 스페인 이비자의 빌라에서 함께 주말을 보내는 사이였으나, 롯시가 지베르나우를 계속 이기면서 친구 관계가 틀어졌다. 그 일은 롯시가 스페인에서 폭 넓게 인기를 얻게 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지베르나우도 그로 인해서 이탈리아에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 2004년, 카타르에서 롯시는 그의 그리드 포지션에 대한 규칙에 어긋나는 위반 행위로 스타팅 포지션을 맨 뒤에서 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지베르나우와 그의 팀을 손가락질 하면서 언론에서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오르내리게 되었다.2 롯시는 지베르나우가 다시는 우승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그는 그것을 부분적으로 증명했다. 왜냐하면 그 해에 11번 우승을 하게 되었다.
롯시는, 마지막 최후의 몇 분은 ‘즐거움을 두는’쪽으로 향하게 하면서, 피니쉬 라인을 위해 자신의 전력 질주를 남겨둔다. ‘심지어 그가 우세를 보인 해에도 롯시는 몇 초의 차이로 매우 드문 우승을 했습니다.’ 제레미 버지스가 말했다. ‘그는 선두를 가져가면서 큰 차이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향의 관중들이 휠-투-휠의 배틀을 벌이는걸 원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발렌티노가 멋진 레이스에서 더 좋아하는 것은 굳이 우승을 하는 경기는 아닙니다. 만일 그가 멋진 배틀을 하고 2위를 한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기뻐할 겁니다.’
이제 36살의 비아지는 슈퍼바이크에서(실제 모터바이크를 가지고 레이스를 한다. 혼다 파이어 블레이드, 야마하R1, 그리고 두카티 1098R) 레이스를 한다. 35살의 지베르나우는 은퇴해서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오늘날의 라이벌은 호르헤 로렌조와 대니 페드로사간에 있다. 이들은 이베리아인들의 태도로 서로를 미워한다. 20살의 나이로 2번의 월드챔피언을 할 수 있었던 로렌조는 자기 중심적이며 오만한 성격이다. 그는 막대 사탕 회사의 스폰싱을 받고 있다. 매번 사탕을 빨면서 계약을 이행하는 그는, 거만함과 우승꽝스러움을 동시에 조절한다. 페드로사는 매력의 부족으로 고생한다고 이야기되어진다. ‘실제로’ 패독 내부의 한 명이 말했다. ‘페드로사는 확실히 MotoGP에서 미움받는 인물입니다.’
롯시는 모터사이클 밖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여러분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지와 포브스중 어느쪽을 믿느냐에 달렸지만, 그는 작년에 7위 혹은 11위로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스타 순위에 브라질의 축구선수 호나우지뉴 바로 뒤에 올라갔다. 이탈리아 정부에 따르면, 2000년과 2004년 사이에 그는 960억원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롯시는 2000년에 런던으로 이주해 2007년까지 살았다. 그는 피카델리의 다운 스트리트에 살면서 외국인의 이득을 누렸다. 그런 부자들이나 스포츠 스타들과 다르게 롯시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했다. 차이나 화이트China White, 패브릭Fabirc, 더 박스the box에 가면서 그는 가발과 콧수염으로 변장하고 갔을 것이다.3 ‘발렌티노는 국제적인 스포츠스타임에도 불구하고.’ 린 쟈비스가 말했다. ‘그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 스스로 남아 있어요. 그의 많은 친구들은 그가 10대 시절과 어릴 때 친구들 그대로입니다. 그에게는 만들어진 인물이 없습니다. 그는 어떤 거만함없이 침착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게 독특한 점이지요.’
롯시는 런던을 사랑했다. ‘놀라웠어요.’ 그가 말했다. ‘매일 무언가 다른 일을 하는게 가능했어요. 나는 바에도 갔고, 레스토랑이나 디스코 클럽에 가곤 했지요. 나는 많은 이탈리아인 웨이터나 주방장들을 친구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은 제르민 스트리트의 알 두차와 Locanda Locatelli다. ‘발렌티노는 로칸다 로카텔리에서 빌 클린턴이나 토니 블레어를 합친 것보다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조르지오 로카텔리가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가 내 사무실에 사인한 것에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2006년에 이탈리아 정부는 롯시가 런던에서 살고 있음에도 그가 이탈리에에서 세금을 공제받아 해를 끼쳤고, 약 2천 억원의 수입에 대하여 내지 않은 세금등에 대해서 청구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롯시는 530억원을 냈다. ‘2005년 말에 나는 다시 이탈리아에 돌아오고 싶었기 때문에, 그 돈을 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이제 이탈리아 북동부 해안가의 페자로 부근의 타블리아에서 그의 부모님 근처에서 살고 있다. ‘나는 전보다는 덜 부자지만, 내 선택과 내 삶의 질에 행복합니다.’
2004년 호주 F1 그랑프리가 멜버른에서 열렸다. 롯시는 그의 친구이자, 최근에 장 토드처럼 페라리 F1의 수장이 되는 성공을 거둔 스테파노 도메니칼리를 만났다. 도메니칼리는 롯시에게 페라리를 위해서 달릴 생각이 있는지 물었고, 롯시는 2006년 초에 발렌시아에서 테스트를 했다. ‘그건 환상적이었어요.’ 그가 말했다. ‘약간 두렵기도 했죠. 자동차는 매우 바닥에 가깝게 붙어 있어서 마치 침대에 누워있는 것과 같았죠. 볼 수 있는건 오직 두 개의 거대한 타이어 뿐이에요.’
롯시는 0.5초 이상 미하엘 슈마허에게 느렸으나, 레드불 레이싱의 데이비드 쿨사드와 마크 웨버, 그리고 도요타 F1의 야노 트룰리보다 빨랐다. 슈마허는 롯시는 F1으로 이적할 완벽한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바로 경기에 나가도 될 정도라고 밝혔었다.
‘나는 빨랐어요.’ 롯시가 이야기했다. ‘좋은 퍼포먼스였습니다. 이탈리아 사람으로 그것은 꿈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았죠. 그러나 나는 바이크 머물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내가 이것을 후회할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페라리와 달리지 않아서 슬프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궁금했습니다. 페라리를 지금 타고 달리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을지도 모르겠지요.’
헤레즈에서 레이스가 시작되었고, 마치 영화 매드 맥스의 출연자들로 긴장이 가득 차 있었다. 두 번째 랩을 지나면서 롯시는 다섯 번째에서 4위로 올라갔고, 위로 껑충 올라섰다. 그의 야마하 팀 메이트인 로렌조는 롯시에게 앞서 있었으나, 뒤로 쳐졌고, 그 동안 대니 페드로사는 압도적인 선두를 벌려나갔다. 그 후에 선수들은 경기종료 깃발이 내려지기 전까지 포지션을 유지했다.
롯시는 2위로 경기를 마쳤다. 5위에서 출발해 만족스러운 결과였으나, 그는 여전히 2000년 이후로 가장 오랫동안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롯시는 마침내 이번 달의 초에 열린 상하이에서 우승을 달성했다. 첫 네 번의 경기에서 네 명의 다른 선수들이 우승을 하고 있다. 2008년은 가장 흥분되는 시즌으로 동의를 받을 것이라 예상되는 라이벌 시즌 2006년을 구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즌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페드로사가 81점으로 챔피언십 선두이며, 롯시는 72로 세 번째이다.)
이후에, 나는 롯시의 가장 최고의 후원자인 아버지 그라지아노 롯시를 만났다. 그는 야마하 모터홈에 앉아서 T셔츠를 입고 멜빵을 하고 있었다. 그는 1972년에서 1982년 바이크 레이싱을 했고, 1973년에는 250cc 챔피언십에서 3위를 했다. 발렌티노는 ‘그라지아노의 아들’로 알려져 있었으나, 발렌티노가 1997년 첫 월드 타이틀을 따면서, 그라지아노는 ‘발렌티노의 아버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라지아노는 그의 오래된 볼보를 몰고 차 뒤의 매트리스에서 자면서 모든 유럽 그랑프리에 참가한다. 반면, 발렌티노는 그의 모터홈에서 잠을 잔다. ‘나는 그가 레이싱을 할 때면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없어서 오게 됩니다.’ 그라지아노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레이싱에 대해 조언을 해준게 그가 11살이었을 때입니다. 이제 나는 단지 잘 했다. 아니면 운이 나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나는 그라지아노에게 어떤 능력을 발렌티노가 그에게서 물려받았는지 물어보았다. ‘빨리 달리고 우승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스스로 경기를 즐깁니다. 우리는 농담을 하고 노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이 아니야, 이것은 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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