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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7일 |
강의내용 |
[2][알]의 어의(語義=語意)
생명의 뿌리 한울님(아리랑 어원을 세상에 밝힌다) <김대원 시인 논문집41쪽에서 퍼온글>
<“아리, 랑”의 어의(語義=語意)가 “하느님, 찬양” 이다.> 라는 계시를 받은 후 십여년(十餘年) 동안 이 사실을 규명하다가 히브리사전 “알”의 내용을 접하여 보니 정말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 “[아리랑][아리랑]아라라리”요 이 노래가 히브리어로는“[ @n"r' l[' ][hN:rI' l[ ][hN:rI' l[]” “[라난 알 ][린나 알 ][린나 알]”이다. 히브리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 때문에 우리 한글씩 읽기방법으로 펼치면 “[ l[ hN:r][l[ hN:r ][ l[ @n"r]” 이다 “[알 린나][알 린나 ][알 라난]” 이다. “[아리랑][아리랑]아 라라리요.” 이 얼마나 우리 [아리랑]과 흡사(恰似)하며 유사(類似)한 음(音)인가?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느님 찬양 !][하느님 찬양 !][하느님 차안양 !]” 이라는 말이다. 이 노래를 그 당시(當時)의 음운(音韻)이 그대로 전래된 것이 오늘날 우리말 [아리랑]이다. [아리랑]이란 그 원어(原語) 어의(語意) 이외의 모든 가사[고개]라 던가 [발병][버린다]등은 우리가 모두 쉽게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리랑]이란 단어를 포함하여 지은 노래 가사는 그 시대 시대의 정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고 수백 수천의 형용으로 그 의미 내용을 달리표현 할 수도 있다. 그 [아리랑]의 원어 해석과 그 뒤에 연결된 가사들을 굳이 결부시켜 해석시킬 필요는 없다. [아리랑]이란 단어 어원(語源) 이외의 [아리랑]노래의 가사들은 원어 해설에 참조할 뿐이지 원어를 적용하여 그 가사의 성질을 굳이 고집하여 언급할 성징도 아니요 내용도 아니다. 대부분 [아리랑]어원을 다루는 분들이 [아리랑]을 아리랑의 전체가사를 굳이 연결시켜 해석하려는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보아왔다. 그것은 아리랑의 어의를 정확하게 알고 가사를 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리랑](峨吏朗) ;ALIRANG;ll'h l[')>> 이란 이 어의(語意)나 그 출처(出處)는 본인 이외에도 수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자신의 견해를 언급하고 밝혀온바 있다. 이분들은 필자와는 달리 문교부가 인정하는 학위를 소유한 국문학자이거나 언어학자이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잘하시는 신부나 목사일수도 있고 교수나 언어학자이거나 고어(古語)를 전공한 분들이다. 필자는 이분들이 밝힌 수많은 견해나 주장을 존중한다. 나름대로 충분한 근거(根據)를 밝히고 있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이분들은 필자와는 출발부터 다르다. 본인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아리랑]의 어의를 알고자 하여 학문적으로 연구하신 후 발표하신 분들이다. 필자와는 비교가 안 된다. 필자는 저들의 학문을 따를 수가 없다. 다만 필자는 우연하게 하느님께서 계시로 알려주신 것을 찾아 확인한 것뿐이다. 지금필자는 그 계시가 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알려주신 각종 서적을 지시하신바 확인하였을 뿐이다. 이 책은 그 확인 결과를 모아서 책으로 엮어 독자에게 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혀 어떤 언어학도 전공한바 없고 그에 관련된 학문을 탐구한바가 전혀 없으며, 특히 우리나라고대어를 연구한 바도 없고 특히 영어도 히브리어도 전혀 배운바가 없다. 그야말로 불학무식한 초졸(初卒)자이다. 그런데도 [아리랑]어원을 이렇게 밝히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느님의 계시를 믿기 때문이다. 거짓말 같은 일이지만 이는 사실이다. “[아리랑]은 곧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라고 하느님께서 직접 저에게 계시하셨기에 겁(怯)도 없이 외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詩)의 원리인 신시원론도 “성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모님이시고 성신은 그 삼위일체신을 총칭하는 신칭(神稱)이요 성령(聖靈)은 성신의 영을 말하며 성신의 역사하심을 성령역사라 한다.”고 하셨기에 “성모님 지금부터 성부님과 함께 뱀의 머리 짓밟고 흠숭(欽崇)받으소서!”라는 책을 2007년 부활절에 집필하여 천주께 바친 것도 그 계시 때문이다. 이 모든 글들은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면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필자 혼자의 힘으로서는 결코 발표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우리는 [아리랑]을 즐겨 부른다. 수많은 종류의 [아리랑]1) 이 있다. 남북을 합하면 약 60여종이 있다고 전한다. 평안도의 '서도 [아리랑]', 강원도의 '강원도 [아리랑]', '정선[아리랑]' 함경도의 '함경도 [아리랑]', '단천 [아리랑]', ‘어랑타령’ 경상도의 '밀양 [아리랑]', 전라도의 '진도 [아리랑]', 경기도의 '긴 [아리랑]' 최근에 지어진 홀로[아리랑]독립군 [아리랑]등이 대표성을 띈 [아리랑]이고 그 밖에 지역마다 각기 다른 [아리랑]이 있다. 나라 밖으로도 우리민족이 사는 중국 땅에 ‘독립군 [아리랑]’, 러시아 땅에 ‘사할린 [아리랑]’ 등이 있다. [아리랑]이란 단어가 들어간 노래는 모두 [아리랑]이다. 하지만 그 [아리랑]이 무슨 뜻인지 누구의 작품인지 언제부터 어디서 어떻게 불렀는지 확실하게 알지도 못하고 불러왔고 부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도 그 뜻을 모르면서도 불렀다. 필자는 신시원론에서 [아리랑]은 비유와 상징적으로 쓰인 시어라고 했다. 신시원론에 보면 [한 예를 든다면 우리의 민요 가사 중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있다. [아리랑]의 노래는 본래 시였다. 지금도 물론 [아리랑]은 시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그런데 그 {[아리랑]}이란 말의 진정한 어의(語意)가 무엇이냐? 필자는 을 찬양한 노래라고 하였다. 이는 필자가 하느님의 계시를 믿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 객관적인 검정을 받은 바가 아니다. 하지만 독자도 그 어의를 모른다. 모르면서도 그 노래가 민요가 되고 지금도 즐겨 그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아리랑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뜻도 모르면서 말이다. 의미를 모르면서 부르는 노래이지만 그 말 속에는 무엇인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깊숙한 정감을 주고 있다. 이것이 무의미의 의미인 시적 언어를 설명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내용이다. [아리랑]이란 시는 창조예술의 진수이다. 왜냐면 {[아리랑]} 이라는 이 노래의 시어는 곧 비유와 상징어요 은유다. 이렇듯 시는 상징과 은유일 수밖에 없다. 또 한 그렇게 은유라야만 훌륭한 시라고 평가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천만독자가 각각 자기 가슴의 깊이와 넓이만큼 느껴도 무리함이 없고 자기의 잣대로 판단하고 느낀 대로 해석하여도 아무무리가 없는 언어적 창작예술이기 때문이다. (16쪽 참조) 필자는 우리나라 시(詩)중에 가장 대표적인 우수한 시가 [아리랑]이라고 본다. 모든 시가 우리나라 민요 [아리랑]처럼 가슴에 남아 읽혀진다면 그 시는 완벽한 시요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시가 된다. 아름다움이 [아리랑]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우리의 민중의 가슴에 영원토록 남겨지도록 연마하는 그 것이 시 창작과정이다. 그리하여 그 시어가 인간의 가슴에 영원토록 살아남아 있도록 하는 그것이 시의 존재의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시창작의 시간성이요 역사성인 것이다. (신시원론 73쪽 참조) 1988년 올림픽 때 우리는 우리 [아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 위대한지 누구나 체험 했으리라 믿는다. [아리랑]이란 노래의 마력이란? 자기(본인=독자) 감정 상태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는 그기에 있다. 때로는 즐거운 노래로 때로는 가슴이 에이는 아픔의 노래로 와 닿을 때도 있다. 필자뿐만 아니라 한국(韓國)민(民)이라면 이 노래를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자자손손 대대로 부르고 또 불러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노래를 모르는 자가 없다. 유소년 시절부터 절로 알게 되어 백발(白髮)노인이 될 때까지 듣고 불러온 가장 보편화된 노래 중의 노래다. 괴로울 때는 괴롭다고 부르고 기쁠 때는 기쁘다고 부른다. [아리랑]을 한껏 부르면 자연히 그 속이 후련해지고 쌓였던 그 모든 시름들이 흔적(痕迹)없이 사라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면 신비에 가까울 정도로 “우리는 하나”라는 강한 일치감(一致感)을 가지게 한다. 신이 날 때 부르면 더욱 신명(神酩)이 난다. 이는 [아리랑]이란 그 어의 속에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말 속에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마력(魔力), 즉 신령(神靈)한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특히 모두를 하나로 결속하는 형제애 동포애 같은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대부분의 노래가 다 그렇다고 하지만, 그 노래들은 노래의 곡명과 가사의 내용을 안다. 부르는 자나 듣는 자가 공히 그 뜻을 알고 있기에 가능하다고 하지만 [아리랑]은 다르다. 오랜 세월 우리민족은 이 [아리랑]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그 어의를 전혀 모르면서도 불러왔고 모르면서도 이 노래에 익숙한 민족이라 <[아리랑]민족>이라 불릴 정도로 [아리랑]은 <단일민족>임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이 [아리랑]의 합창은 눈물이 핑 고일 정도로 강력한 동질성적 일치감을 호소하고 있다. 과연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앞으로 그 힘의 출처를 구체적으로 밝히겠지만 이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 성령의 힘이다. 스스로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민족은 자자손손 이 노래를 불러왔고 이 노래를 전 국민이 불렀으므로 전 국민이 하느님을 찬미하여 하느님 성령의 축복을 받아 왔으며 장소와 때를 초월하여 불러온 노래이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찬양한 노래이기 때문에 그 노래 속에 그토록 강력한 힘이 솟구친다고 필자는 믿는다. 어찌 보면 오히려 그 어의가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내용을 함축한 상징어 비유어인줄 모르기에 더욱 종파를 초원하여 함께 부를 수 있었고 각자가 자기의 감정대로 그 어의를 생각하게 되므로 더욱 효과적일 수도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어찌 그 뜻도 모르는 노래가 그토록 장구한 세월 전 국민이 한결 불러왔는지 시대의 장벽을 뛰어 넘고 오늘날까지 불리어 지는지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리랑]은 공산주의 속에서도 기독교인 속에서도 불교인 속에서도 재일교포 속에서도 그대로 불린다. 격동의 시기에도 정치적 쿠데타[coup d'Etat]공산독제 속에서도 일제치하에서도 [아리랑]은 사라지지 않고 불러왔으며 한민족의 동포애를 더욱 굳건하게 결속시켜 왔다. 사실은 [아리랑]이란 어의를 확실하게 모르고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는 일면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세상에 발표하기 직전 2007년 6월에 <천부인과 천부인의 비밀>이라는 <저자 구길수>선생님의 책을 구입했다. 이분도 [알=아리]의 어의를 필자의 견해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설명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리랑을 아픔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결론을 내리므로 하느님의 계시와는 엇갈리는 주장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알]자(字) [아]의“ㅇ”의 자음을 원시 한글 가림토어를 풀이하면서 [아리랑]어원을 밝히고 있는데 필자에게 계시하신 [아리랑]어의(語義)는“하느님 찬양”이고 그 어원이 [알 l['(5921, )](~위 ~높은 중앙, 하늘)이다. 그러나 적어도 “알”을 해석하는 그 내용만은 진리임을 밝히는 자료로는 충분하다고 본다. 이 알이 히브리어에서도 똑같이 전치사로 '~위에, ~에 대해, ~의 곁에, ~에 관하여, ~을 넘어서, 위쪽의, ~보다 더'.접속사로 '~때문에, 비록 ~일지라도' 등을 의미하고 있으며 결국 가장 높으신 분을 칭하는 고유명사로 변한 것임을 히브리어 성서의 내용으로 입증한 것1)과 같이 구길수 선생은 한글 자음 "ㅇ"은 “ㅎ”과 같은 말로 이라 하고 영어 "A" 나 히브리어“[(아인)”도 모두 <중앙> <위><하늘><위대한><거룩한>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확실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존경하는 구길수 선생의‘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한글 “O”은 “ㅎ"과 함께 위에 있는 <하늘>을 뜻한다.>>고 하였다. 사실 『<<“[아리랑]” 중“아리”의 이“알”이 하느님을 일컫는 것이라 하면 그럴만한 확실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가? 있다면 그 근거(根據)를 대시오!』 하고 질문을 하게 되면 그 답변은 매우 어렵다. 현존 어문으로는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구길수 선생은 가림토문을 해석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 실로 기적과 같은 진실이다. 그것을 어떻게 확실하게 옳다고 하느냐?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태곳적(太古的) 그 당시(當時)에 살았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필자가 제시한 구길수 선생의 게시(揭示)하신 그 자료들은 옳은 주장임을 입증이 가능한 추적임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겠다는 심정(審定)은 가지만 확정(確定)은 할 수는 없는 것이 지성계(知性界) 보편적 사고일 뿐이다. 필자는 다른 분들이야 어떻게 생각하시던 그 사실을 믿어주시기를 바랄 따름이지 믿지 않는다고 하여 어떻게 달리 더 이상 설명할 방법이나 방도가 없다. 필자는 하느님의 계시이기에 확실하게 믿고 발표할 따름이다. 발표할 즈음에 다행하게 구길수 선생의 저서를 입수 하였기 때문에 인용할 뿐이다. 그렇다 이 사실의 진실, 진가(眞假)의 여부는 타락한 인간이 남겨놓은 문서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서는 자기의 주장이 100% 확실하다고 고집할 수가 없다. 특히 태곳적(太古的)의 것은 모른다고 고백함이 100% 정확하다. 타락한 인간의 역사적 기록인 즉 역사서는 강자(强者)가 남겨놓은 흔적일 따름이므로 모르는 것이 거의 운명적이고 숙명적이다. 하느님과 같이 온전하지도 전지전능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 깊이 있는 학문의 진리탐구나 인류사적 근거자료는 확정적이지 못하다. “그 당시 당신이 살아보았느냐?”한다면 제 아무리 많이 아는 고고학박사라도 할 말이 없으리다. 우리는 누구나 그와 유사한 일을 경험한다. 심정은 가지만 자기로서는 어찌 할 수없는 일이있다. 결코 알아도 대답할 수 없는 일, 입증하기가 거의 불가항력적인 일이 많음을 알고 있다. 고고학자가 방사능(放射能) 동위원소(同位元素) 측정(測程)연대(年代)운운 해 버리면 전문가가 아닌 이상 진실여부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 사실을 믿게 된다. 그 방사성 동위원소(同位元素)란 과학적 실상을 믿는다. 고고학의 실재를 믿기보다. 학자의 인격을 믿고 과학이라는 학문의타이틀이 진실을 규명하는데 있음으로 믿게된다. 그러나 사적 자료가 무형실체일 경우 방사선(放射線) 측정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온전한 과학이란 무형실체세계의 현상까지 유형실체세계화 시킬 수 있어야 한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가장 먼저 태어나면서 지르는 소리가 무엇인가. 자음에 <ㅇ>소리가 들어간 소리가 아니던가? 그리고 그 모음 소리가 무엇이던가? << [ᆞ][ =아래]>> 아니든가? 앞에서 우리 고어(古語) 모음(母音) [ᆞ 혹은 ]하나 속에 <ᅡ.ᅢ.ᅣ.ᅤ.ᅥ.ᅦ.ᅧ.ᅨ.ᅩ.ᅪ.ᅫ.ᅬ.ᅭ.ᅮ.ᅯ.ᅰ.ᅱ.ᅲ.ᅳ.ᅴ.ᅵ.ᅶ.ᅷ.ᅸ.ᅹ.ᅺ.ᅻ.ᅼ.ᅽ.ᅾ.ᅿ.ᆀ.ᆁ.ᆂ.ᆃ.ᆄ.ᆅ.ᆆ.ᆇ.ᆈ.ᆉ.ᆊ.ᆋ.ᆌ.ᆍ.ᆎ.ᆏ.ᆐ.ᆑ.ᆒ.ᆓ.ᆔ.ᆕ.ᆖ.ᆗ.ᆙ.ᆚ.ᆛ.ᆜ.ᆝ.ᆞ.ᆟ.ᆠ.ᆡ.ᆢ > 모든 모음이 들어 있음을 밝힌바 있다. 자음(子音)은 <ㅇ>이요 모음(母音)은 [ᆞ]이다. 그 에 ㅇ 이란 밭임이 붙어 “앙”도 되고 “엉”도 되며 “응”도 된다. “‘아앙’ 울었다” <엉아 응아 앙앙 울었다.> 모두 ㅇ 이 최초의 소리 말이다. 아는 태어날 때 타고난 말이다. ㅇ은 곧 천부적으로 타고난 생명의 소리 자기 본연의 소리인 것이다. 그 때문에 ㅇ은 하늘을 나타내고 하늘을 부르는최초의 말이며 <아이>나 <애>라는 말도 곧 하늘 이 준 최초의 인간의 소리에 의한 말이라는 주장이 성립된다. 순수한 천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가 없다.” 이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천국이 어떠한 곳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젖꼭지를 입에 넣어 놓고 하는 ‘엉알’ ‘응알 ’‘응얼’ ‘엉엘’하는 소리는 아이가 엄마에가 처음으로 대화를 하는 소리다. 그리고 <엄> <압>은 아기가 최초로 엄마나 아빠를 부르는 소리이다. 그래서 최초로 아이입에서 나오는 그 소리가 곧 하느님을 찾는 소리로 보고 <아리>나 <알>을 하느님을 부르는 소리라고 그 당시 아이의 부모들은 만든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독자의 견해도 이와 거의 일치(一致)하여 합치(合致)가 된다면 객관적 입장이라는 말이 나오고 옳은 추론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더 이상 논의가 필요없다.
[3]판단(判斷)의 기준(基準) 여기서는 이런 경우를 생각하고 주관적 가치 판단과 객관적 가치판단에 관한 이야기 중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한다. 이성(理性)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과 나를 비교하고 크고 작음을 비교하고 미와 추를 비교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게 따져서 본인들이 생각하기에도 옳다고 인정되면 인정해 주어야 한다. 누구나 인간은 자타(自他)의 실상(實相)을 파악할 때 스스로의 존재의미와 존재가치에 대한 결과를 알게 되고 그 자기의 세계만큼 나름대로 진실여부나 가치의 실상을 평가하게 된다. 그 평가의 기준은 자기의 안목이다. 스스로 만든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자기의 존재가치를 파악하고 측정(測定), 서로를 비교하여 자신이 처해진 현실적 위치에 불만을 가지게도 된다. 그때 비교의 결과가 남과 내가 현격(懸隔)한 차이가 있을 때 가끔은 만족할 때도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대부분은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비관하게 된다. 그때는 인간이 만든 불합리한 사회적제도와 환경에 대한 불평불만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필자가 겪은바 경험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일 때는 물론 인정해 줌이 마땅하나 혹은 패거리학문이 될 때는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때문에 학자나 작가가 진실로 작가적 양심으로 발표한 계시의 기록이라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봄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현실적 가치기준이나 법제도, 도덕적 가치기준 등에 형평의 원리가 전혀 적용되지 않고 있음이 많음을 알게 될 때 실망하게 된다. 양심적 학자나 작가는 이에 대한 반발을 하게 되고 작가적 자존심은 이런 현실적 불합리에 직면하여 분개하게 된다. 작가적 양심을 포기하지 않을 때는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할 수도 허다하다. 어느 천문학자가 거짓말을 하여 사형을 피한 후에 “그래도 지구는 여전히 돌고 있다.”고 실토하다 사형을 당하게 됨과 흡사하다. 진실한 학자나 작가는 사회적 여론을 무시하고 자연스럽게 그 원인을 분석하게 되고 결과론적(結果論的) 사실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진실을 규명하고도 죽을 수밖에 없음은 자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음으로 하느님께 맡기고 십자가를 지게 된다. 그것이 이 시대에는 감당할 수 없는 운명적으로 수용해야할 것임을 알게 된다. “[아리랑]은 곧 [하느님 찬양]”이라고 주장함도 “[삼위일체]는 [성부 성모 성자가 한 몸이다.][성령]은 곧 이 [삼위일체신의 거룩한 영을 말한다.]고 주장하니 대부분의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분들은 필자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 정죄 당함은 본인으로서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하느님께 맡길 뿐이다. 적어도 현재까지의 지성이 말하는 객관적 가치 기준으로 볼 때는 필자의 주장이 진리인 것만은 틀림없다.
95%의 숙명과 4%의 운명과 1%의 자기 노력
본론과는 좀 다른 방향이긴 하지만 여기서 맥 빠지는 이야길 해야겠다. 인간 자신의 노력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얼마나 미약한지 소인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첫째 태어남에 대한 모든 문제들은 본인으로서는 100% 숙명이다. 언제 (때 )어디서(장소)(국적)(빈부) 누구(부모)(형제)(성(姓)이나 )의해서 무엇 때문에(성별(性別)(인종 )(언어)(체질)) 왜(태어난 이유와 사명) 어떻게(태어나게 된 동기와 과정과 그 결과) 그 전부 본인 자신으로선 어찌할 수가 없다.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숙명적 운명으로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 이 지구성을 둘러싸고 있는 천제와 태양에너지로 유지되는 생명체의 본질적 바탕 소양을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그 사실 앞에는 자신으로써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도 100% 운명이 아닌 숙명적인 것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외적 환경이다. 셋째 자기의 생명체 생존법칙이다. 이 지구성에서 생존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를 취해야 생존이 가능하다. 인간의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식물은 미생명체(微生命體)의 영양(營養)을 흡수(吸收) 취해야 생존이 가능하고 동물은 자기보다 약한 동물이나 식물을 취하여 생명을 유지 보존하며 인간은 자기보다 약한 자를 지배하거나 동식물을 잡아 음식을 취한다. 이도 거의 숙명적이다. 이 약육강식의 대자연의 법칙은 다소 인간이 성숙한 이후에는 아주 작은 1%정도의 변화를 가질 수는 있으나 결론적으로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이도 거의 95%가 숙명이요 4%가 숙명이며 1%가 인간의 의지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한계이다. 넷째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법칙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다소의 길고 짧음에 대한 조절은 가능하다지만 결국 마침내는 생로병사의 굴레를 탈피할 수 없다. 이 또한 95%는 거의 숙명이고 4%가 운명이며 1%가 인간의 의지일 뿐이다. 필자의 이 저서(著書)도 수천년 정통신앙을 하신 분들이나 혹은 진실한 학문으로 믿고 있었는데 엉뚱하게 하느님의 계시 운운 한다면 당장 이단시 할 것은 너무나 95%당연하고 4%은 운명에 맡기고 나의 노력으로 이를 모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백분율은 1이다. 이는 기적이 없이는 인정을 받기가 어렵다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깊이 따지면 이런 숙명적인 운명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본인뿐만 아니라 대부분 모든 인간은 이런 숙명적 운명에 대해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분하게 생각하며 발발하고 반항하며 극복하려 한다. 이는 인간이 가지는 본성과 본능은 이 지구성에서 이루어지는 이 자연의 법칙과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신이 인간의 근본 양심 속에 작용하여 본연의 인간모습과 현재의 인간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려주고 현재의 이 지구성의 삶이 인간창조 본연의 삶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런 본성과 본능이 추구하는 그 삶의 현장은 어디인가? 여기에서 인간은 인간 이전의 절대적 존재를 인정해야하고 이 절대자에 의하여 이미 95% 이상 자신은 숙명적이고 4는 운명이며 1%가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드려야 한다. 인간은 그 절대자를 알이야 개개인의 인간의 지니고 태어난 본성과 본능의 추구욕의 실상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무튼 인간은 생로병사를 원치 않고 약육강식을 원치 않고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서로 항상 사랑하면서 살기를 원한다. 그런 개인 그런 가정 그 그런 사회와 국가와 그런 인류가 되기를 원한다. 바로 이것이 대부분 인간의 본성과 본능이 추구하는 일관된 가치인 객체점(客體點)이다. 하늘은 영원하다. 하늘의 생명은 영원하다. 하늘의 생명의 연장인 나의 생명도 영원하다. 태초 그 하늘을 [아리(알)]라 칭 그 알은 곧 영원한 생명의 실상(實相)이다. 하늘나라는 인간이 항상 건강하게 희락을 누리며 살도록 마련되어있는 그러한 나라다. 그러한 나라를 하느님의 나라 에덴이 혹은 낙원이라 한다. 이세상이 <<알>>의 세상 <<아리>>의 세상 <<아리랑>>의 세상 에덴이다. [4]“아리랑”의 나라 하느님의 세상
아리랑의 세상이란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사는 에덴의 세상이다. 이 에덴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기 전까지는 인간은 항상 약육강식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희노애락에 대한 불평등을 고발하게 된다. 생로병사에 대해 억울함을 느끼고 이를 벗어날 수 길이 없을 을 허무하게 생각하며 탄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런 세상이 있을 것인가? 인간의 본성과 본능의 추구하는 바를 보면 분명 있다. 아예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있기 때문에 상상이 가능하다. 그런 상상의 이상천국 에덴의 세계가 있다면 인간은 분명코 찾던가 아니면 만들어야만 한다. 찾는 것이나 만드는 것이나 모두 힘들다. 찾고자하는 것이 종교라면 만들고자 하는 것이 과학일 것이다. 이런 본성적 본능적 작용은 곧 창조본연의 인간성 회복을 하기위해 자연적으로 숙명적으로 발현하는것이다. 만약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그 그런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인간이 본래 살아야할 세상일 것이다. 이상 천국일 것이다. 그럼? 창조본연의 삶은? 영생복락의 삶이다. 에덴의 삶이다. 영원토록 서로가 사랑하면서 자유와 행복과 평화를 누리며 무수하게 펼쳐진 온 우주천체를 두루 여행하면서 사는 삶이다. 그런 삶이 곧 사랑의 세계 아리랑 춤사위의 삶이다. 아리랑의 세상을 이 지구성에서 인간이 만들든가 그런 아리랑의 세상을 인간이 찾아 가서 살아야한다. 그래야만 우리 인간의 본성적 아리랑의 삶인 참사랑의 욕구가 충족될 것이다. 인간이 이 지구성에서 저 천체를 정복하고자 함은 바로 본성이 요구하는바 그 그런 아리랑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의 반영이다. 그 반영으로 나타나는 것이 오늘날 첨단 과학이다. 분명하게 언젠가는 인간의 노력 1%가 4%의 운명을 바꾸고 95%의 숙명을 극복할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이다. 아리랑 정신문화는 아리랑 물질문명을 실현하여 최첨단과학을 활용 우리 인간의 욕망을 100%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이다. 이는 영원한 아리랑의 본연인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찾던지 만들던지 한다. 하여간 인간은 아리랑의 실상을 바탕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그런 아리랑의 세상에서 살게 된다. 그 그런 삶이 곳 창조본연의 삶이요 가장 높은 분의 뜻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며 인간이 추구하여온 바 삶이 바로 그 그런 삶이다. 가장 존귀(尊貴)한 삶, 가장 숭고(崇高)한 보람된 삶. 가장 성스러운(至聖)삶, 행복한 삶, 알 찬 삶, 창조본연의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다. 이것이 알찬 삶이고 참된 삶이며 행복한 삶이다. 이 참된 알찬 삶이 신(하느님)과 같이 온전한 삶이다. 앞에서도 여러번 언급했만 그“알”이란 말이 히브리 원어에는 l['(5921, 알) “보다 높은”이라는 전치사와 접속사로 사용되는 용어로 지존자(至尊者)를 칭할 때 사용되고 있다. 그 높다는 의미 알은 알라(hl;[; , 5927)에서 유래했으며, 전치사로 “'~위에, ~에 대해, ~의 곁에, ~에 관하여, ~을 넘어서, 위쪽의, ~보다 더 위'.” 라는 의미로 쓰이고 접속사로 '~때문에, 비록 ~일지라도' 등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고 특히 이 알은 욥기와 호세아서에서 신의 명칭, '지존자= Most High'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를 실례로 들자면 아래의 히브리어 성구를 찾아 읽어보시길 바란다. [ 창 14:19, 창 21:33, 신 33:12, 삼상 2:10, 시 7:6, 시 7:8, 시 7:10, 시 16:6, 시 18:41, 시 55:22, 시 57:2, 시 62:7, 시 68:29, 시 68:34, 시 75:8, 시 106:7, 시 119:104, 시 119:127, 시 119:129, 시 119:136, 시 139:14, 시 139:15, 시 141:3, 시 144:5, 시 146:5, 사 63:7, 호 10:5.]. 이 알은 곧 하느님을 뜻하고 알찬 삶은 창조이상과 인간 존재 이상이 일치를 이룬 그런 삶을 알찬 삶이이라 한다. 하느님의 이상이 실현된 인간의 삶이 곧 알찬 삶이란 말이다. 이런 삶이 바로 인간이 누려야할 창조본연의 삶이다. 이 삶이 알맹이가 있는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삶이다. “알차다” 하는 말은 “배속에 (생명 있는) 알이 가득 차있다.”라는 말이고 이는 곧 참생명의 말씀이 꽉 찬 삶을 뜻한다. 알맹이는 곧 그 알이 살아있는 씨알 생명 있는 씨눈을 말하는데 그 씨눈 자체에는 그 개성체가 지니고 있어야할 모든 인자(因子)를 다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를 이 지구성의 생명적 존재를 에를 든다면 씨알 씨눈 그 자체의 속성(屬性)은 (♂+성)알 과(♀-성)알이 결합한 생명알 (± ☯)을 뜻한다. 즉 한 생 알(卵)의 구멍(卯)마다에 생명 점(丶)이 찍힌 알이 한 알이면서 두 알(卵), 두 알이 한 알이 된 것을 알이라 했고 이를 성서에서는 엘로힘 [ !yhiOla>(430,)]이라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을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인간 타락이전 하느님 나라에서 이 지구성과 흡사한 에덴을 창조하셨는데 그 천지창조 과정을 살펴보면 이 지구성을 중심한 천지창조와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흡사하다. 물론 모세가 이지구성 실낙원에 살면서 성서를 집필하다보니 이 지구성의 언어와 지구성의 지형과 지구성환경을 비유로 이 지구위의 어느 특정 지역의 환경을 예화로 비유했다고 보지만 놀라운 사실은 우리나라 민요 [아리랑]의 아리의 알이 곧 구약의 창세기에 나타난 최초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히브리어로 나타낸 알 (l['(5921,)로 나타냈고 그것을 ALL( 엘(laE) 혹은 알라(hl;[; , 5927) 라고 표현하여 우리의 [아리랑]의 “아리”라는 말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알이 한분의 하느님으로 나타난 말이 복수개념인 엘로힘 !yhiOla>(430,)이니, 히브리어 알 (l['(5921,)과 우리나라의 <알 이>의 알(卵)이 이같이 최초의 생명알인 하느님을 뜻하고 있음, 이 어찌 우연의 일치라고만 하리요? 이는 우리 동이족 한민족이 하느님이 태초에 창조한 창조본연의 에덴의 나라에서 가장 처음으로 추방당한 땅이 바로 이 지구성(地球星)이요, 그 지구성 지역 중에 대문구문명을 이룬 우리한반도를 포함한 만주일대 요동반도일대임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인간이 최초로 사용되었던 언어는 에덴에서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천지를 창조하면서 하나하나 그 이름을 지으면서 그때 아담이 붙인 것이 모든 언어의 시작이요 기원이라고 필자는 판단하고 바로 이 말이 지구성으로 추방된 이후 인간이 사용한 말이요 오늘날의 모든 말의 기원 그 어원이 된 것이다. 천국의 낙원에서는 온전한 사람(神)만 살기에 말도 글도 필요가 없었다. 보아서 알고 느껴서 알고 이미 모든 것을 서로가 알기에 굳이 글도 소리도 말도 필요 없다. 이것이 전지요 전능의 경지이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지구성으로 온 인간은 그 온전성이 상실됨과 동시에 서로간의 의사소통을 굳이 표현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지구성에서 여러 가지 환란을 겪게되었지만 그 본성만은 창조본연의 것으로 보존되어 자연스럽게 창조본연의 인간모습으로 되돌리고자 원하게 되고 최후 언젠가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었으니 결국 하느님과 같이 온전한 모습이 되어야만 만족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인간은 그 본성과 본능적 욕망은 자연스럽게 그런 하느님의 형상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변하여 영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그런 창조본연의 세계 에덴천국을 회복하고자하는 것이다. 아리랑의 나라 하느님의 세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찾고 구하는 것이 인간이 지닌 천만 년 전이나 오늘날 현실적 의지요 욕망이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런 욕망은 그렇게 살도록 지으신 낙원동산에서 본래 인간은 그렇게 영생을 누리며 살지 않고는 사라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 낙원을 벗어나 실낙원인 이 지구성에서 살게 됨과 동시에 창조본연의 그 낙원의 삶을 본성적으로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다. 그때 쫓겨난 지구성에서 최초로 사용했던 말이 우리나라의 말이요 그때 하느님을 존칭하여 부르는 명칭이 <<알>>이며 하느님을 찬양한 노래가 <<아리랑>>이다. 그때 우리가 사용했던 말이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되어 히브리어가 되었고 일부는 동으로 흘러 오늘날 우리민족이 사용하는 조선말이 되었다. 그 말 중에 우리가 사용하는 님과 히브리어 = ()은 같은 말이며 이는 최초의 생명 씨알이 곧 우리나라 말, 알찬의 “알”이다. 그 알이 곧 사랑으로 둘이 합하여 탄생한 생명 씨알이며 그 한 씨알 속에 웅(雄)(♂+성)알 과 자(雌)(♀-성)알이 결합한 한 생명알 (± ☯)이 되었다. 이는 아름다운 참 생명의 자웅(雌雄)의 신비가 결합하여 바로 참사랑의 알, 곧 아름다운 참 웅자(雄雌)(♂+♀-)알이 결합한 한 생명알 (± = ☯)로 사랑으로 일치를 이룬 복수개념으로 쓰인 하느님을 칭하는 히브리어 엘로힘과 같은 하나의 “알”님이다. 아리랑의 나라는 곧 하느님의 나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