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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뉴 컬러 포토의 전개
1. 텅빈 풍경
잰 스텔러(Jan Staller) 짐 도우(Jim Dow)
최근, 한 달 정도 도쿄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몇 년 사이에 벽이나 천장을 거울 면으로 마무리한 빌딩이 눈에 띄게 늘어 있는 점이었다. 아마도 이 번쩍이는 감각에 사람들은 현대의 가슴 설레는 환상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최근 수 년 동안 일본에서의 폐허 붐은 이 번쩍이는 감각의 뒷면과 같은 것으로서, 번쩍임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반대의 폐허적인 것에의 희구가 강해져 가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는 생명체이다. 어떤 부분은 새로 태어나고, 어떤 부분은 죽음으로 사라진다. 도시는 초현대적인 번쩍거림과 폐허화된 어둠이 한데 뒤섞이어 다이내믹하게 약동한다. 이러한 반대의 극에 접하는 궁극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표현해 보인 영화가 「블레이드 러너」일 것이다. 이 영화는 2020년, 핵전쟁 후의 가까운 미래도시가 그 무대이다. 대기가 오염된 암흑의 도시에는 항상 끊임없는 산성비가 내리고 있다.
이 도시의 주택 지구에는 피라미드의 상부를 수평으로 잘라낸 것 같은, 마야문명의 유적을 상기시키는 수백 층의 초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에 반해 도심지는 다채로운 네온사인이 지나치게 화려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 폐허화된 거리이다. 약간 더러운 번화가에서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고, 그 위의 거대한 광고탑 스크린에는 일본 여자가 나와 상품을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번화가에서 한 발짝 벗어나면 거리는 유령의 도시처럼 인기척이 없다.
감독에 리들리 스콧, 특수효과는 더글러스 트런블이 담당하여 선명하고 강렬하게 시각화되어진 이 가까운 미래도시의 디스토피아(distopia; 공상의 암흑세계―역주)는 핵전쟁의 음산하고 참혹함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우리들은 이 폐허화된 거리의 전율적인 아름다움에 도취되고야 만다.
필립 K. 딕의 원작에서는 이 미래도시는 샌프란시스코 이지만, 영화에서는 로스앤젤레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이미지로 볼 때, 뉴욕이 더 적합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주인공 블레이드 러너와 안드로이드(인조인간)의 두목과의 옥상에서의 결투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폐허의 빌딩 기둥과 장식물이 싸움의 무대로 자주 등장한다. 그 기둥과 장식은 음울한 중세기적 모양, 고대 그리스의 코린트 양식, 아르 데코 양식들을 괴물같이 왜곡시킨다. 변형된 ‘패스티시 양식’이라고 부름직한 그로테스크한 형체로서 등장한다. 이것들이 전율적인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필자가 이 미래도시는 뉴욕이어야만 한다고 말한 것은, 뉴욕이야말로 이 종교배의 경관(景觀)을 갖은 거리이며, 죽음으로 없어져 가고 있는 부분이 블랙 홀과도 같은 자력으로 다이내믹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종의 모자이크 도시인 뉴욕에는 가지각색의 건축양식이 집적되어 있어 견디기 힘들 정도의 착잡한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파리와 같이 조화된 아름다움은 없다. 그러나 19세기 도시 파리에는 없는 20세기의 폭력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도시의 모습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뉴욕의 거리를 애증어린 이중의식(ambivalence)의 감정으로 전 생애를 통해 그려온 미국의 대표적 화가인 애드워드 홉퍼(Edward Hopper)는 “각종 양식의 혼합체인 뉴욕의 건물은 오싹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말했다.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 도시는 뉴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잰 스텔러
잰 스텔러는 뉴욕의 죽음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하층사회를 눈앞에 펼쳐 보이는 사진가이다. 스텔러는 1952년, 뉴욕 주의 롱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있어서 뉴욕을 촬영하는 것은, 도시의 경관을 초월해서 자신의 고향의 본래의 풍경을 영상화하는 내증적(內證的)인 작업일 것이다. 그는 메릴랜드 인스티튜드에서 미술을 공부한 후, 뉴욕으로 되돌아와서 건축, 인테리어의 사진가로서 일을 시작했다. 순수사진으로 본격적으로 촬영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순경부터이다.
맨해튼의 허드슨 강을 따라서 십수 년 정도 전까지 ‘웨스트사이드 하이웨이’라는 고가고속도로가 뻗어 있었다. 이 고속도로가 노후화되면서 위험한 곳들이 생겼기 때문에 73년부터 자동차의 통행이 금지되었다. 그 후 당분간은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조깅 및 사이클링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결국 고속도로로서 다시 사용하기에는 파손이 너무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77년에 해체되게 되었다.
스텔러는 고속도로가 해체되기 일 년 전부터 이 고속도로 근교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해체되어 철거되기 전에 죽어가는 고속도로와 그 주변의 환경을 사진에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웨스트사이드 하이웨이’의 사진이 그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들 중 7점은 <도시의 빛>이라는 제목으로 『1979년 라이프 사진연감』의 신인란에 게재되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필자도 이 ‘웨스트사이드 하이웨이’ 근교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사진의 대상이 되고 있는 풍경은 모두가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눈에 익은 풍경이 작품화되면서 도시의 정적과 긴박감을 시각화시켜 눈앞에 내밀어졌을 때, 필자는 오랜 세월동안 살아온 자신의 근교의 경치를 처음으로 보았다는 경건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예술가는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곳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스텔러는 이러한 사실을 작품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모든 사진가는 빛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에서 스텔러는 ‘빛의 사진가’이다. 낮 시간의 빛으로 촬영된 도시의 광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진은 해질 무렵이나 밤의 도시가 찍혀져 있다. 도시가 시각적인 힘으로써 그 정체(正體)를 나타내는 것은, 황혼의 빛이나 인공조명에 의한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하이웨이/창고 32>(1977년)는 원경에 세계무역센터의 두 개의 장방형의 빌딩이 일루미네이션의 탑처럼 솟아올라 있고, 하늘은 뉴욕의 일몰시 볼 수 있는 특유의 선명한 울트라 마린으로 물들어져 있다. 중경에는 일찍이 현대적인 건물이었을 것임이 틀림없는 낡은 창고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전방에는 무거운 철제 교각의 일부분과 황폐한 고속도로가 펼쳐져 있다. 도시의 시간대에서 말하면, 방금 태어난 세계무역센터와 지금 죽어 사라져 가려하고 있는 고속도로의 대조가 생명체로서의 도시, 약육강식의 도시의 참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스텔러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신구 도시의 경관의 대조는 아니다. 그 관점의 핵심은 죽음으로 사라져 가는 부분 즉 도시의 하층사회, 도시의 정적으로 향해져 있다. 그 중에서도 그가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고 있는 정적은 고속도로의 여러 부분에 삽입되어 있는 장식적 조각이 있는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이웨이/입체 교차로의 경사진 도로>(1978년)는 날개를 새겨 넣은 돌의 가드레일이 밤의 고속도로에 웅크리고 있다. 이 날개는 순간적으로 우리들에게 고대의 인두유익상(人頭有翼象)을 연상시킨다. 오래된 고무공장의 빌딩과 녹이 슨 철제 가드레일이 석양에 물들어져 있다. <하이웨이/서버 러버 컴퍼니(Server Rubber Company)>(1978년)는 교형(교각 위에 걸쳐서 널빤지를 받치는 재목―역주)의 기묘한 패턴이 인상적이다.
이들 장식적 조각은 현재, 우리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상한 형체일 뿐이다. 하지만 이 고속도로가 건설될 당시는 미래를 형상하는 환타즘이었다. 붕괴되고 녹슨 이들 장식적 조각에서는 당시의 사람들의 열정적인 생각이 되살아나고 있다. 즉, 스텔러는 이 묘비명화한 부조물과 장식물에서 죽음으로 사라지려고 하는 도시의 우수의 미학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점은, 그 우수의 미학을 감상적으로 포착하지 않고 딱딱한 도시의 부분으로써 냉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블레이드 러너」의 가까운 미래도시는 디스토피아로서 제시되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상에서 우리들이 전율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도시는 항상 죽음으로 없어지려는 디스토피아를 포함해서 다이내믹하게 약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도시설계사는 도면 위에 테크놀로지를 구사한 이상적인 도시를 구상할 수가 있다. 하지만 실제의 도시가 전율적인 것은 늘 계획되지 않은 균열을 만들어내고, 그 부분이야말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러너」의 도시와 스텔러의 도시의 의도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곳에서 통하고 있는 것은 도시가 죽음으로 사라지려 하는 부분을 가진 생명체라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 대담하게 말하면, 양자 모두 건물은 폐허가 되는 쪽이 장대하고 화려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마야 문명의 피라미드와 같은 초고층 건축이 미래도시의 상징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언뜻 보기에 기묘한 형태로 보이지만, 미국의 고층빌딩으로서는 그다지 기묘한 것은 아니다. 건축가 휴 훼리스는 『내일의 메트로폴리스』(1929년)에서 피라미드와 같은 건축물의 수많은 드로잉을 남기고 있다. 아마도 이들 드로잉은 미국의 자연, 모뉴멘탈 밸리(Monumental Valley; 아리조나 주와 유타 주에 걸쳐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국립공원―역주), 그랜드 캐년 등의 경관과의 관련 속에서 성립된 것으로 생각한다. 피라미드 형태는 유럽과 일본에 있어서는 브뤼겔의 바벨의 탑 등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인간계(人間界)를 넘어선 형태를 상기시키지만, 서부의 대자연이 뇌리에 새겨진 미국인에게 있어서 이 형태는 대자연의 은유인 것이다.
실제로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의 대단원의 무대가 된 건물이 피라미드형이었다. 또한 스텔러의 『맨하탄 다리에서 본 브룩클린』(1983년)의 시계탑이 있는 빌딩은 「블레이드 러너」나 휴 휘리스의 드로잉을 연상시킨다.
스텔러는 88년에 사진집 『프론티어 뉴욕(Frontier New York)』을 간행했다. 주제는 메트로폴리스 뉴욕의 정적의 빛, 뉴욕 거리의 프론티어를 찾는 것이었다. 진홍의 석양을 배경으로 잠잠한 주차장, 무인의 지하철, 조용해진 거대한 다리 등 모두 인기척이 없는 텅 빈 뉴욕이 촬영되어져 있다.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뉴욕이라는 메트로폴리스에는 때때로 기분 나쁜 정적감과 함께 텅 빈 풍경이 출현한다. 뉴요커들에게는 잘 알려진 이 마(魔)의 시간대를 스텔러는 강렬한 터치로 시각화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를 끄는 것은 미국인에게 있어서 텅 빈 풍경은 전통적인 소재라는 점이다. 워커 에반스는 텅 빈 가게나 방 등 많은 걸출한 사진을 찍었었고, 가까이는 로버트 프랭크나 리 프리들랜드 등도 텅 빈 풍경의 뛰어난 사진을 남기고 있다. 그렇지만 시종일관 텅 빈 풍경만을 찍는 사진가는 스텔러 이외에는 없다.
에드워드 호퍼
사진에만 국한되지 않고 텅빈 풍경은 미국 미술의 큰 주제로서, 이 정점에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가 있다. 그리고 이 테마는 미국의 SF 소설과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레이 브레드베리(Ray Douglas Bradbury)는 때때로 텅 빈 정경을 소설 속에서 묘사하고 있다. 딱딱함이 감도는 우수미(憂愁美)라는 점에서 스텔러의 사진은 브레드베리의 감촉과 매우 비슷하다.
레이 브레드베리의 「휴가」는 공포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담은 단편소설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 세계가 텅 비어 버리고 단 한 가족의 부부와 아들만이 남겨져 버렸다. 그들은 사태를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역사가 시작한 이래 가장 긴 여행을 출발한다. 신세계에서는 초원으로 변한 대지의 부드러운 소리가 들리고 거리에는 사벨의 풀, 마거레트 등 여러 가지 꽃이 만발한 꽃의 바다로 변모해 있다. 그런 거리를 빠져나와 철도선로에 닿은 가족은 2기통 엔진이 달린 트럭을 타고 끝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인류가 소멸한 이후의 정적 그 자체의 세계, 그 속에서 일가족만이 생존하여 여행한다는 설정은 마치 환상시인 브레드베리의 진수를 상징하고 있다. 그는 「화성연대기」와 「침묵의 마을」, 「긴 세월」속에서도 인류가 소멸한 텅 빈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들은 물질문명, 핵전쟁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일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그런 목적론적인 종말론에는 수긍할 수가 없다. 진지한 소설은 모랄을 넘어서 온갖 위험한 비전을 포함하여도 좋은 것이 아닐까? 모랄리스트인 브레드베리에게는 물질문명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이들 텅 빈 풍경에서 서정 시인으로서 미적 황홀감을 발견해낸 것이다. 이들 광경에 이상할 정도로 매료당하는 것은 우리들이 오늘날의 거울면으로 만들어진 빛나는 빌딩의 도시에 두근거림을 느끼는 한 편, 텅 빈 정적, 폐허화된 공간 등 브레드베리의 미의식이 나타내 보이는 정경에 강한 동경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잰 스텔러는 이러한 브레드베리적 광경을 가공의 것으로서가 아닌 실제의 도시 뉴욕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것은 딱딱한 도시의 고독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고도소비사회의 스크린과 네트워크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생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고독은 일종의 궁극의 환희인 것이다.
스텔러는 이런 고독의 환희를 텅 빈 정경으로, 사진으로 결정화하고 있다. 텅 빈 정경은 이 도시가 살짝 보여주는 벌거벗은 알몸의 참된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뉴욕에서 살고 있는데, 붐비던 거리가 휴일이 되면 갑자기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광경이 눈앞에서 전개되면, 텅 빈 거리에서 잊어버린 것 같은 자신을 발견하고 흥분되면서 일종의 전율적인 시정(詩情)에 사로잡힌다.
화제가 잠시 옆길로 새는데, 최근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비슷한 텅 빈 정경을 만났다. 도심의 친구의 맨션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하오의 그 맨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정경은 도쿄와 같이 과밀한 도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텅 빈 풍경이라는 것은 탈공업사회 도시가 갖는 일면일지도 모른다.
일찍이 미술가인 로버트 라우젠버그는 뉴욕의 다양성을 좋아하며 “어떤 구획에 40층짜리 빌딩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 옆에 작은 판잣집이 있다. 이런 거리에 있는 것에 나는 흥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실 뉴욕도 유럽의 도시와 비교하자면 탈구축하고 있지만, 도쿄의 패스티시의 짜깁기와 같은 무계획적인 탈구축주의에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스텔러는 직업으로서 늘 새로운 도시의 건축물을 촬영하는 사진가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도시의 블랙 홀에서 가장 도시적인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필자는 변하기 쉬운 애매한 ‘미’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스텔러의 사진은 다이내믹한 도시의 밑바닥에 생식하는 도시의 ‘정적미’를 표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의 황폐한 모습은 아름다운 것 그 자체보다도 더 아름답다.”라고 로댕(Auguste Rodin)이 말하지 않았던가?
짐 도우
앞서 텅 빈 풍경은 미국 예술의 중요한 모티브라고 필자는 언급했는데 회화만이 아니라, 사진에서도 많은 현대사진가가 텅빈 풍경에 도전하고 있다. 아서 올맨은 샌프란시스코 특유의 주택, 선인장, 야자나무 등에 조명을 비추어 인적 없는 밤의 광경을 70년대 후반부터 찍고 있다. ‘뉴 컬러’ 계열의 사진가이다. 마찬가지로 인적 없는 광경을 찍는 사진가로서 윌리엄 머그와이어를 들 수 있다. 그의 경우는 뉴올리언즈와 조지아 주의 시골티 나는 남부의 목조 가옥을 흑백으로 영상화하고 그 중에서도 짐 도우는 텅 빈 풍경을 향수의 원점으로 삼아 지극히 감상적으로 포착하는 뛰어난 작가이다. 잰 스텔러가 대도시에서 빛과 정적을 추출하고 있는 것에 반해서 도우는 소도시의 대수롭지 않는 공간을 아주 소중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서 제출한다. 그것은 「라스트 쇼」나 「다이너」 등 50년대, 60년대를 무대로 한 향수어린 영화의 감촉에 가까울는지도 모른다. 구성사진가가 과거로부터 여러 가지 것을 인용해 오듯이 도우도 과거의 건조물이나 인테리어를 사진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패러디나 패스티쉬가 아닌 희미한 기억 속에 머물고 있는 과거의 향기를 붙잡기 위한 것일 뿐이다.
다른 많은 사진가가 여행을 통해 모티브를 찾듯이, 그도 자동차로 여행을 하면서 지방의 소도시의 40년대, 50년대에 아메리칸 드림으로서 빛나던 일상적 현실의 기억을 집요하게 탐색하여 작품화한다. 영화관, 이발관, 레스토랑, 간판 등 거리 속에서 지금 막 사라지려 하고 있는 낡은 양식의 것, 이러한 대상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주류가 된 중류 미국인의 일상어(日常語;vernacular)를 다시 재현해 내고 있다. 원색으로 칠해진 바로크풍의 장식품, 하늘을 날 듯한 디자인의 당시의 대형차는 나중에 ‘미국의 어리석음(american follies)’이라고 불렸다고는 하지만 역시 그것들은 천진난만한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한 빛나는 시대였다. 도우는 이러한 과거의 미국, 죽음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는 소도의 각종 부분을 영상화함으로써 향수를 환기시킨다.
예를 들면 아르 데코 양식의 변형이나 50년대의 미국적 바로크 양식이라고 표현하면 어울릴 듯한 기묘한 디자인의 스탠드 레스토랑, 민속예술과 같은 치졸한 페인트화가 있는 방, 화려한 프린트로 된 커튼이 걸린 시골티 나는 호텔의 오락실 등을 찍은 작품은 사람의 인기척이 없기 때문에 반대로 우리들은 그 당시의 숨이 막힐 듯한 흥청거림을 상상하며 마음을 달랠 수 없는 우수의 느낌을 받는다.
40년대부터 50년대에 걸쳐서 휴가가 라이프스타일에 비집고 들어온 시대에 미국의 소도시에는 각각의 지방어(地方語;venacular)가 번성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현재의 도시는 모든 것이 획일화되어 재미있는 맛을 잃었다. 예를 들면 맥도널드가 그 대표적인 것으로, 그 어느 것 모두가 정확하게 계산된 것 같은 공간이지 않은가!
도우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고는, 소도시의 잃어버리고 말았던 따뜻함이 남은 과거를 사진 고고학자로서 발굴하는 거t이다.
그러나 그의 80년대에 시작한 <스타디움(Stadium)> 시리즈는 지방색과 과거를 떨쳐 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 시리즈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 아르헨티나 등의 야구, 럭비, 축구 등의 그라운드와 관람석의 전체를 찍은 텅빈 스타디움 풍경이다. 필자는 84년에 브룩클린 미술관에서 개최된 사진전 「여름의 색(Color in the Summer)」에서 도우의 이 시리즈 작품 26점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신선하다고 느낀 것은 각각의 스타디움이 원색의 색채로 각각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아마도 도우는 각 스타디움의 색채에 그 지방색을 중합시키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 사진전에는 그 외에 조엘 메이어로윗츠, 존 팔(John Pfahl) 등 뉴 컬러의 대표적인 사진가가 선출되어 있었지만, 도우의 <스타디움>은 그 양이 많은 점도 있어 강인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짐 도우는 1942년에 보스턴에서 태어나 뉴욕의 롱 아일랜드 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그 당시, 교수 중에 핼리 캘러한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때부터 사진에 흥미를 갖고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도우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은 워커 에반스이다. 60년대 말에 에반스의 사진집 『미국의 사진(American Photographs)』(1938년)을 보고 강렬한 감명을 받아 72년에 개최된 「워커 에반스 회고전」(뉴욕 현대미술관)의 준비를 위해 에반스의 암실 조수로 일했었다. 에반스는 무인의 방, 무인의 거리를 찍는 것으로 일상적인 현실을 의식적으로 부상시킨 최초의 사진가이다. 도우는 이 수법을 계승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에반스의 『미국의 사진』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과거에 대한 동경으로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당시의 일상적 현실을 눈앞에 펼쳐 보였던 획기적인 작업이었다. 이에 반하여 도우의 무인의 광경은 과거의 속삭임과 냄새를 다시 재현해 보이기 위한 노스탤지어의 장치인 것이다. 어째서 지금에 와서는 노스탤지어로 보이는가? 그것은 고도소비사회에 의해서 가족의 굴레가 약해지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희박해지고 있는 하이퍼리얼한 현재에서는, 노스탤지어는 자기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감정의 남겨진 중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텅빈 풍경은 이제는 소외도 비극도 아니다. 미디어 사회에 있어서 이것은 ‘자아’를 감수(感受)시키는 황홀한 광경인 것이다.
『현대사진의 전개』, 고쿠보 아키라, 김남진 역,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