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진의 포스트 모던이란?
이이자와 코우타로우(사진평론가)
찍는 사진에서 만드는 사진으로, 사진은 사진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사진표현에서 새로운 스타일과 오래된 스타일은 더 이상 없고, 우리들은 150년 동안의 여러 가지 표현의 가능성을 같은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1980년에 들어서면 사진계에는 그때까지와는 다른 경향의 작품이 일제히 출현한다. 일본에서는 보통 ‘구성사진(Constructed Photo)’으로 불리며, 여러 가지 인공적인 오브제와 소도구를 사용해서 세계의 모사(模寫;replica)라고도 할 수 있는 허구의 공간을 구축하고 그것을 촬영해 최종적인 작품으로 하는 경향의 사진집들이다.
Jo Ann Callis
‘찍는’사진에서 ‘만드는’사진으로
웨스턴 네프(Weston Naef)의 자주 인용되는 정의를 빌리면 ‘찍는’사진으로부터 ‘만드는’사진으로의 변화라 해도 좋다. 그러나 미국 등에서는 ‘Constructed Photo’라는 말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안 H. 호이(Anne H. Hoy)가 이러한 경향의 사진을 모아 편집한 사진집<Fabrications 1987>의 부제는 ‘Staged, Altered, and Appropriated photographs’로 되어 있다. ‘연출되고, 변형되고, 전유(專有)된 사진’이라는 말이 이 스타일의 특징을 보다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인 사진가를 예로 들어 보자. 미국의 바바라 카스텐(Barbara Kasten 1936-),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koglund 1946-),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 윌리엄 웨그먼(William Wegman 1943-), 프랑스의 베르나르 포콩(Bernard Faucon 1950-), 영국의 보이드 웹(Boyd Webb 1947-), 일본의 모리무라 야스마사(森村泰昌)등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조각가,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출발해, 후에 사진을 표현의 수단으로 선택하고 있다. 거기에는 각 장르의 구분이 붕괴되고 경계영역에 걸친 표현이 크게 클로즈업 되어갔던 1980년 이후의 문화 상황이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성사진’ 계열의 사진가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역사의 진행에 따라 새로운 표현양식을 추구하고 있는 듯한 태도 즉, 초기의 기록사진→예술사진(Art Photography)→근대사진(Modern Photography)이라는 형식을 버리고 각 시대의 스타일을 자유로이 잘라내고 인용해 간다고 하는 방식이 일반화 되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바라 카스텐의 경우 기하학적 도형과 거울을 사용한 추상 화면은 명확히 1920년대의 바우하우스의 디자인과 러시아 구성주의 회화 스타일을 인용하고 있다.
샌디 스코글런드의 경우는 정밀하게 조립된 허구 공간이 주는 심리적 충격 쪽에 역점이 놓여있다. 금붕어, 고양이, 옷걸이라 하는 일상적인 물체가 그로테스크한 물건으로 변하고 증식되어 방 안을 메워간다. 그 틈 사이에 사태의 진행을 바라보는 인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스코글런드의 사진은 조각(인스톨레이션)과 연극(퍼포먼스)의 절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나르 포콩
퍼포먼스로서의 사진표현
인용에 의한 퍼포먼스의 시도를 철저하게 한 것이 신디 셔먼과 윌리엄 웨그먼이다. 셔먼은 1977년경부터 메이크 업과 장면 설정을 바꿈에 따라 기억 속의 영화와 T.V의 주인공으로 변신하고 그 모습을 촬영한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시리즈를 시작한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셀프 포트레이트임에 틀림 없으나 유일한 자기 이미지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셀프 포트레이트(예를 들면 렘브란트와 고호의 자화상과 같은)의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다. 셔먼에 있어서 자기는 유일한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미디어 이미지의 침투에 의해 무한히 변모해가는 다중인격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후 셀프 포트레이트의 실험을 극한까지 추진하고 근래의 작품에서는 기형, 괴물, 죽은자(死者)등 인간 존재의 그로테스크한 암부(暗部)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데까지 도달하고 있다.
윌리엄 웨그먼의 경우, 퍼포먼스 아티스트는 만 레이라 이름 붙여진 그의 와이마르종 애견이다. 만 레이는 어떤 때는 새털 장식을 달아 인디언이 되고 탁구공의 안구를 넣어 개구리로 분한다. 박쥐와 같이 하늘을 날거나 하얀 가루를 전신에 끼얹거나 한다. 인간의 행위가 개로 비유되는 것에 의해 우리들의 생활이 얼마나 스테레오타입한 몸짓의 집적으로 성립되어 가는가를 보여주는 만 레이의 퍼포먼스는 사진집 ‘인간의 가장 좋은 친구’에 정리되어있다.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에서는 마네킹 인형들이 기억의 문을 여는 연기자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마네킹에 의상을 입혀 여러 장소에 놓고 그 사이에 실제 소녀들을 배치한 포콩의 사진은 잃어버린 소년시대의 기억을 소생시킨다. 그것은 환영임에는 틀림없으나 교묘한 장면 설정에 의해 강력한 현실감을 발하고 있다. ‘여름방학 Les Grandes Vacances 1980’은 현대의 신화작가라고도 해야 할 그의 대표작이다.
보이드 웹도 윌리엄 웨그먼과 마찬가지로 신랄한 유머로 인간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재현하여 보여 준다. 그의 대규모 무대 장치는 그것이 허구의 공간인 것을 나타내는 실마리를 의식적으로 남기는 것에 의해 연극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으나 그것은 누구나가 극중 인물과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사회의 회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리무라 야스마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구성사진’에 몰두한 사진가일 것이다. 그가 인용하는 것은 앵그르, 고호, 뒤샹, 마네 등과 같이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들의 작품이다. 이들 ‘서양 명화’는 모리무라 자신의 신체로 연기되어진다. 그에 따라 기억 속의 ‘명화’의 이미지와 눈 앞에 있는 사진의 이미지와의 사이에는 삐걱거림과 틈이 만들어진다. 그는 그 틈을 의식적으로 확대함에 따라 시각의 제도로 화한 미술사의 구조에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상과 다른 차원에 있는 세계로의 회구
이들의 ‘구성사진’은 왜, 어떻게 해서 출현해왔던 것일까? 미국 근대 사진의 흐름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드워드 웨스턴→앤셀 아담스로 이어지는 스트레이트 포토그라피(Straight Photography)혹은 워커 에반스→로버트 프랭크→리 프리들랜더→게리 위노그랜드로 이어지는 미국 다큐멘트의 계보로 집약된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이 되면 스트레이트 포토그라피의 미학과 다큐멘트의 리얼리즘에 대한 도전의 움직임이 나타난다. 다중노광, 꼴라쥬와 같은 수법을 자주 사용하고 실크스크린, 리토그라프와 같은 사진 이외의 테크닉을 도입해 일상의 현실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세계(혹은 反世界)를 만들려고 하는 ‘조작적 혹은 수공적(manipulative)’이라 불리우는 경향이다.
로버트 하이네켄(Robert Heinecken 1931-), 제리 율스만(Jerry N. Uelsmann 1934-), 레스 크림스(Les Krims 1943-), 듀안 마이클(Duane Michaels 1932-), 루카스 사마라스(Lucas Samaras 1936-)등의 사진가들에 의한 ‘조작적, 수공적’인 작품이 80년대의 ‘구성사진’의 원형이 된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이네켄의 포르노 잡지 꼴라쥬, 율스만의 다중노광 몽타주, 크림스와 마이클의 연극적 요소를 집어 넣은 연속장면(sequence), 사마라스의 폴라로이드에 의한 셀프포트레이트 등은 명확히 ‘구성사진’사진가들의 표현과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60년대와 70년대의 ‘조작적인, 수공적인’사진가들이 일사의 현실에 대해 허구(反世界)를 대치시키는 전략에 의해 자신의 작품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80년대의 사진가들은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조금씩 무너져 애매하게 되어버렸던 세계를 상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짜보다 더 진짜다운 정보 미디어(TV, 비디오 영상, SFX, 컴퓨터 그라픽스 등)가 사회에 침투하는 것에서 우리들이 미디어로부터 시작되는 이미지와 ‘진짜’이미지를 구별 짓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계는 무한의 합경(合鏡;뒷 모습을 보기 위해 앞 뒤에서 거울을 비치는 것)과 같이 보여지는 것이 틀림없다. 허구는 현실을 모방하고, 그 허구를 모방한 또 하나의 현실이 출현해 그 과정이 무한정 증식해 간다. 그런 세계를 미디어의 악몽으로 보는가에 따라, 또는 모든 변신과 인용을 가능케 하는 게임 랜드(game land)로 보는가에 따라 표현의 방향은 전혀 틀려질 것이다.
“오늘날, 모든 것이 사진을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수잔 손탁은 그의 <사진론>(On Photography 1977)에 쓰면서 ‘영상마약 중독’이 되어 버렸던 미국사회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러나 ‘구성사진’사진가들은 손탁의 비판을 반대로 취해 사진이라는 合鏡을 사용해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지금, 150년 동안 시도된 사진표현을 같은 거리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물론 그 게임을 최후까지 계속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신디 셔먼의 변신 게임이 최후에는 그로테스크한 괴물과 죽은 자에 이르러버렸던 것같이 아무리 눈을 돌려도 병과 죽음의 광기와 같은 인간 존재의 파괴를 감출 수는 없다. 또 자기 자신을 일종의 기호로 바꾸어 표층의 이미지와 유희하려고 해도 성(性)과 육체의 문제를 피해 다닐 수는 없다. 기형인들의 육체를 광원(光源)으로 하여, 전도된 성스런 질서를 비추어 내려고 한 조엘 피터 위트킨(Joel-Peter Witkin 1939-)과 스스로의 성적 체험을 마치 상처를 열어 제치듯이 명확하게 드러낸 사진집 ‘성적 의존의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 1987)로 주목받은 낸 골딘(Nan Goldin 1953-)의 사진이 깊은 충격을 갖추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미디어 이미지에 침투하여 인용과 절충의 유희로서 채택된 사진표현의 스타일을 정의함에 ‘포스트 모던(Post Modern)’이라는 용어를 부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장르에도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포스트 모던을 의식하면 할수록 작고 아름답지만 야위어가는 표현이 되기 쉬운 측면에는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한마디 말할 수 있는 것은 ‘새로움’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던 시대가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일이 있다는 생각도 거의 해체되어 버렸다. 바야흐로 사진 150년의 역사 동안에 시도되었던 여러 표현의 가능성을 같은 거리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우리들은 서 있다. 이 거대한 이미지의 집합체로부터 무엇을 끌어내고, 무엇과 무엇을 조합해 가는 것일까? 오래 사용한 ‘아름다움’이나 ‘리얼리즘’이나 ‘새로움’은 아니다. 다른 선택 기준이 사진을 만드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