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유래
효성동 (曉星洞)
효성동 지역은 원래 급수원이 없어 불모지인 황무지 벌판에 억새풀이 우거져 <새벌> <새벌이>
로 불려왔으나, 발음이 와전되어 <새별>, <샛별>로 변해 한자로 표기하면서 효성(曉星)으로
명명되었다. 이 지역은 원래 부평군 마장면 효성리 였으나 1914년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인천부로 다시 편입되어 일본식 이름인 서정(曙丁)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효성동으로
개칭되었다. 이곳에는 <임(씨)>, <이(씨)>, <김(씨)촌>과 같은 자연 부락이 있다.
계산동 (桂山洞)
계산동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주부토군, 통일신라시대에는 장제군. 고려시대에는 수주, 안남,
계양, 길주, 부평군으로 불려진 유서깊은 고장이다. 이곳은 원래 부평읍이었으나, 1914년 부천군
부내면으로 개칭되었고, 1940년 인천부로 다시 편입된 후 대정정(大正町)으로 개칭되었으나
1946년 계양산 밑에 위치하였다 하여 계산동으로 개칭되었다. 이곳에는 계양산에 있는 중심
성지(衆心城地)를 비롯하여 계양산성, 부평도호부청사, 어사대, 욕은지 등 많은 문화유적지가
있다.
작전동 (鵲田洞)
작전동 지역은 구한말 화전리, 신대리, 가현리, 작정리의 4개리로 1914년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
되었고, 1940년 인천으로 다시 편입되어 화전, 신대, 가현, 작정 4개리를 통합하여 가장 큰 마을
인 작정과 화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작전정(鵲田町)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작전동으로
개칭되었다. 이곳에는 <된밭>, <새대>, <가현>, <까치말>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서운동 (瑞雲洞)
서운동 지역은 원래 부평군 서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고 1940년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며 도두리와 하마리를 통합하여 동운정(東雲町)이 되었고 1946년 상서로운
고장이 되어 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서운동으로 개칭되었다.
계양동 (桂陽洞)
계양이란 고려시대 계양도호부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계양산은 수주악, 안남산으로 불려오
다가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이 자생하여 두 나무 이름에서 한글자씩 따서 계양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계양산에는 계수나무는 없고 회양목만 소수 자생하고 있다.
이 지역은 1914년 동면의 임학리, 용종리, 병방리, 박촌리, 방축리와 당산면의 동양리, 귤현리,
상야리, 하야리, 평리 등을 통합하여 부천군 부내면에 변입되었고 1973년 경기도 김포군에 편입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인천시로 편입된 지역으로 현재 계양구 전체 면적의 약 70%를 차지하는
광할한 면적에 19개의 법정동이 있는 거대동으로 향우 계양구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어 진다.
임학동 (林鶴洞)
낙낙장송 큰 나무로 둘러 쌓여 있어 경치가 아름답고 백로(鶴)가 많이 서식하여 지어진 명칭
용종동 (龍宗洞)
계양산 줄기가 임학골 서쪽을 감싸고 길게 흘러내려 그 형국이 용의 머리 같다하여 용마루,
용종(龍宗)이라 하여 지어진 명칭
병방동 (兵防洞)
조선 세조때(1455년)이곳에 중익진(中翼陳)을 설치하여 병영이 주둔하면서 지어진 명칭
방축동
마을앞에 방죽을 막아 방죽말이라 불리워 유래된 지명
장기동
황어시장(매월 3, 8일장)이 있어 황어장터, 황어장, 장터라 불리며 장이서는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
갈현동
칡이 많이 생산되는 마을이라하여 칠미, 갈산으로 불려왔으나 1989년 인천으로 편입될 때 부평구
갈산동과 중복되어 갈현동으로 개칭
오류동
오리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유래된 지명으로 오리울, 오릿골, 오류울, 오류동으로
불리어 옴
둑실동
조선시대(1596년) 부평도호부사 심신겸이 퇴임후 원리 청백한 분이라 가진 재산도 없이 이곳
황무지에 낙향하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개간을 하는데 합동단결하자는 깃 발을 만들어 꽂고
농경에 힘써 마을 이름도 그 뜻을 담아 둑실이라 하였다하여 유래된 지명
목상동
계양산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수림이 울창하고 서리가 많이 내린다 하여 유래된 지명
다남동
여자보다 남자가 많이 다랑(多郞)이라 불리며 유래된 지명
선주지동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을 구하기 위하여 배가 머물렀다 하여 선주 (船駐)라 불리며 유래된 지명
이화동
한강으로 통하는 배가 드나드는 곳이라 배곶이, 배꼬지, 선곶(船串)이라 불리다 한자 표기를
잘못하여 배(梨), 꽃(花)으로 불리며 유래된 지명
상야동 (上野洞)
벌판에 마을이 위, 아래로 있어 윗쪽마을을 윗벌말 또는 상야촌이라 불려지다 지어진 명칭
하야동 (下野洞)
벌판에 마을이 위, 아래로 있어 아랫마을을 아래벌말 또는 하야촌이라 불려지다 지어진 명칭
평동 (坪洞)
벌판이 많은 말을이라 하여 벌말로 불려왔으며, 일제시대 평뜨기(수확량 측정)을 많이 하였다.
귤현동 (橘峴洞)
굴재(고개) 아래 위치하여 굴재, 굴현(堀峴)으로 부리다 지어진 명칭
동양동 (東陽洞)
계양지역의 동쪽에 위치하였고 1914년 당미, 양지말, 모텡이, 동녘해, 서녘해를 통합하여
동녘해와 양지말의 이름을 따서 동양리라 지어진 명칭
박촌동 (朴村洞)
박씨(朴氏) 집성촌으로 조선초 중기까지 박촌을 중심으로 300호가 넘는 부평 제1의 집성촌을
이루어 지어진 명칭
노오지동 (老吾地洞)
큰 연못에 오래묵은 잉어가 있어 노어지(老漁地)라 불려지다 지어진 명칭
기타지명
◎ 안하지고개 (雁下地)
효성동에서 서구로 넘어가는 천마산의 고개로 청천천(淸川川)의 발원지로서 큰 연못이 있었고
이곳에 기러기가 많이 서식하여 생긴 지명이라고도 하고, 조선말 대동미를 서울로 운반할 때
이곳에 있는 주막에서 쉬어 갔는데 주모의 이름이 안아지(安阿只)였기에 생긴 지명이라고도 함.
◎ 독갑산 (獨甲山)
계양산을 지나 쓰레기 수송도로 사거리에서 서쪽 다남동(多男洞)을 보면 벌판 한가운데 바가지
를 엎어놓은 것 같이 위치한 원형 동산이 독갑산이다. 고려시대 독갑산 주위를 돌아가며 도랑을
파서물을 채우고 동산주위에 목책을 쳐서 죄수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한쪽에 외나무다리를
놓아 감시하는 노천 감옥으로 사용하여 유래된 지명
◎ 징매이고개
현재 공촌로가 개설된 곳으로 옛날 지형이 험준하고 숲이 무성하여 도둑의 소굴이 됨에 따라
많은 사람이 모여 고개를 넘어야 안전하다하여 천명이 고개라 하였다고도 하고, 고려시대
국영 매방이 위치하던 곳으로 전국 각지에서 매를 징발하여 사육하였으므로 징매(徵罵)고개라
하여 징매고개가 되었다고 함
◎ 살라리 (殺拿里)
현재 서운동과 용종동 계산천변에 사형장이 있어 망나니가 죄인을 사형시켰던 곳
◎ 갈매마을
현재 경인고속도로 부평I.C를 넘어 가현로 주변에 있던 마을로 전주이씨(全州李氏) 효녕군
파가 많이 살던 양반촌으로 정치인과 학자들이 많이 배출됨
◎ 장사굴
계양산 주봉에서 남쪽으로 산중턱에 있는 석굴로 이 굴에서 키가 구척장신이고 힘이 센 장사가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70년대초 간첩의 은신처가 된다하여 폭파함
◎ 까치말
현재 작전3동에서 위치한 마을로써 마을 한복판에 큰우물이 있고 주변에 숲이 우거져 까지가
많이 서식하여 까치우물 또는 까치말이라 함.
[자료제공 : 문화공보실 조원형 (☎450-5093)]
첫댓글 地域 의 洞 명칭은 한문 풀이가 참 재밋네요. 궁금했던 洞 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잘 알게 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