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찌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어떠한지를 빌레몬서를 통하여 잘 볼 수가 있습니다. 주인과 종이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당시에 종과 주인을 형제로 연결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요 빌레몬은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진실한 형제의 교제가 나누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환경은 유교적 환경으로 장유유서가 철저한 편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나이를 우선으로 따질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외적인 조건들도 얼마나 많이 따지는지 모릅니다. 학력, 지역, 혈연을 따집니다. 요즈음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개인의 능력을 따집니다. 외모도 능력이 되기에 남자들이 성형수술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능력이 없으면 어느 곳에서나 퇴출이 되지만 능력만 있으면 살아남고 좋은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풍토가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교역자나 교인이나 간에 그 사람이 어떤 외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는 가로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야고보서 2:9절에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부자라고 특별대우하고 가난한 자라고 무시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런 풍토가 없습니까? 세상이 모든 것을 물량적으로 평가를 하니 교회에서도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누가 눈에 보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가로 사람을 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무리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여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보면 그런 외적인 조건을 전혀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모두가 복음에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무언가 행한 것이 있거나 무슨 조건이 있어서 복음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은혜로 된 것이기에 서로의 관계가 형제의 관계로 되는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이 아무른 장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선 바울사도 자신을 봅니다. 바울은 유대인 중에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열심이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섬긴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과 은혜가 바울에게 임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어떤 조건에 의하여 된 것이 아니기에 이제는 자기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해서 자기가 무슨 기득권을 가지거나 사욕을 위한 권위를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자세입니다. 이런 것을 사랑의 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8절입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의 빚은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빚을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의 빚을 갚아버리거나 갚을 수 있다면 사랑도 물량화 하여 계산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참된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제 오네시모를 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복음을 듣고서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동역 자가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4:9절에서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굡箚?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오네시모는 골로새에서 노예로서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오네시모는 복음에 빚진 것만이 아니라 자기 육신의 상전인 빌레몬에게 물질적인 빚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빚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빌레몬 1:18-19절을 봅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을 진 것이 있으면 자기가 갚겠다고 합니다. 바울이 지금은 감옥에 있습니다. 자비량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갚는 것입니까? 그것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연보한 것이 있습니다.
빌립보 4:10-20절의 말씀을 보시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유명한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이 말씀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연보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중에 있는 말씀입니다. 마게도냐 지역을 떠날 때 바울에게 연보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이고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한두 번 보내었고 지금도 그런 교제가 있음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합니다. 즉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연보를 보낸 것이 형제의 교제인 것입니다.
로마서 15:25-28절도 봅니다.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2)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3)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기뻐서 하였습니다. 기쁘게 동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빚진 자라고 합니다.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빚의 개념이 아니라 기쁨으로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복음이 들어간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가 사랑에 빚진 자입니다. 이 빚은 사랑이기에 은혜이기에 억지로 마지못해 갚은 빚이 아닙니다.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가 유대인과 이방인인 바울과 오네시모사이에 있고, 이제는 노예와 주인인 오네시모와 빌레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빌레몬 1:19-20절입니다. 오네시모의 물질적인 빚을 자신이 갚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친필로 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빌레몬이 바울 자신에게 빚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빚을 말하지는 않겠다고 합니다. 이 빚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말한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사랑의 빚인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자면 빌레몬에게 당연히 명령하여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을 수 있지만 그러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빌레몬에게 오 형제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바울과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무엇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까?
이 세 사람이 형제의 교제가 가능한 이유는 모두가 복음에 빚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21-35절에 형제를 몇 번 용서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갚을 능력이 없어서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탕감을 받았기에 갚은 의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받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는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도 오네시모도 빌레몬도 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였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야 하는 빚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탕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용서를 다 받았기에 서로 용서 받은 자로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용서를 모르면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목을 잡고 감옥에 가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주님의 용서를 모독한 것입니다.
20-21절을 봅니다. 빌레몬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울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마음이 평안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순종할 뿐만 아니라 빌레몬이 더 할 행할 줄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형제로 맞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유인이 되게 하여 바울을 섬기게 하는 정도까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옛날 노예가 재산의 손해를 입히고 도망간 자를 형제로 맞이하라고 하면서 그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고 합니다. 얼마나 부담이 됩니까?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22절입니다. 오직 저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고 합니다. 자기가 머물 처소도 예비하라고 합니다. 빌레몬에 대한 부탁도 엄청난 부탁인데 자기 처소도 예비하여 두라고 합니다. 이러한 교제가 되는 것이 형제의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진정으로 용서를 받은 자라면 자신이 갚은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자라면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錚?모습입니까? 과연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를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까? 갚아 낼 수 없는 빚이지만 그것이 의무나 억지로 갚아야 할 빚이 아닌 사랑의 빚이라면 목숨을 내어 놓은들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복음을 듣고 나서 여러분이 율법이나 종교적인 의무감에서 해방이 되셨습니까? 그러면 전에 의무감에서 하던 것보다 더 하고 있습니까? 덜 하고 있습니까?
아마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전혀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점검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을까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씀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하자고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될 일도 압니다. 제도적으로 공동체를 만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수많은 공동체들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들은 모두가 나름대로의 법이 있습니다. 그들의 법을 따르지 않으면 그 공동체에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오네시모 빌레몬의 관계는 공동체로 모여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습니다. 노예제도를 무너뜨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형제의 교제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빚진 자들의 모습입니다.
끝으로 23-25절에서 바울과 함께 하는 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축복으로 이 서신서가 마무리 됩니다. 바울과 함께 하는 자들의 이름이 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를 언급합니다. 이들을 바울의 동역자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함께 문안을 합니다. 그 문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 찌어다.
우리가 빌레몬서를 보면서, 우리 안에 바울과 오네시모 빌레몬과의 교제 같은 교제가 있는지를 점검해보았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없음을 인하여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있도록 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내가 과연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 자신을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3:5절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이 스스로 예수 믿는다고 착각하고 살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축복이 우리 안에도 성취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