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외가
원범은 19살부터 14년간 나라님 자리에 있었다. 그 동안 호적상 8명의 부인에서 5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보았다. 그러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 철종이 세상을 떠날 때는 딸 하나만 남아, 뒷날 개화파로 알려진 박영효(朴泳孝 : 1861~1939)와 혼인을 한다. 그러나 그도 얼마 뒤 자식 없이 죽고 말아, 훗날 명절에 원범에게 제사 상 차려줄 자손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선원면 냉정리에 있는 원범의 외가 집으로 가본다. 원범의 외가는 용담(龍潭)염씨인데 그의 외가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 커다란 비석 두 기 - ‘파주염씨시조설단(坡州廉氏始祖設壇)’ 과 ‘충경염공신도비(忠敬廉公神道碑)’ 가 눈에 띈다. 파주 염씨의 제단과 중시조 염제신(廉悌臣)의 신도비가 서있는 것이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원범의 외가가 파주 염씨로 오인하게 할 수 있는 비석들이다.
그리고 외가의 오른쪽 언덕에는 외가 쪽의 묘로 오인될 수 있는 4기의 묘가 있다. 파주 염씨의 중시조 염제신과 그의 세 아들, 정수(定秀)․흥방(興邦)․국보(國寶)의 가묘(假墓)이다.
왜 파주 염씨 집안에서 하필이면 용담 염씨 집이 있는 이곳에다 묘와 단을 마련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용담 염씨는 파주 염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파주 염씨의 중시조인 염제신이 고려 말 문하시중의 벼슬에 오르고 그의 세 아들 모두 대제학 벼슬까지 지냈다. 그러나 당시 새로운 권력층으로 떠오른 세력(최영․이성계)과의 파워 게임에 밀려나 모두 죽고, 그의 후손들이 여주군 금사면 용담리로 이주, 정착하여 용담 염씨로 본관을 바꾼다. 그들의 후손이 원범의 외가 쪽 조상인 것이다.
따라서 파주 쪽에서는 용담 집안도 크게 보아 한 집안으로 본 것이다. 더구나 용담 쪽에서 한 나라의 왕이 나왔으니 더더욱 ‘한 집안’이라는 생각이 간절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파주 염씨 염제신 등의 묘와 신도비 등은 원래 경기도 장단[북한]에 있는데, 지금은 갈 수 없는데다 또한 6․25 사변으로 그것들이 파손되었을 것으로 추측한 파주 염씨 집안에서 1980년 대 중반, 이곳에다 신도비와 가묘를 만든 것이다. 이 때 서울시장이 파주 염씨(염보현)이었다. 조상도 후손을 잘 두어야 한다.
원범의 외가 쪽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나, 원범이 왕이 된 후 이 집에 많은 땅과 커다란 새 집, 그리고 벼슬도 함께 주어졌다. 이 집안의 묘는 왼쪽의 작은 동산에 3기[원범의 외할아버지, 증조부, 고조부]가 있다. 여느 사대부집안의 묘와 별반 다른 것이 없으나, 이상한 것은 비석 3기 모두 비문의 ‘龍潭’ 부문이 긁혀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드러낸 추한 역사의 흔적이다. 원범이 왕이 되자, 파주 염씨 집안의 염종수라는 사람이 ‘용담’ 과 ‘파주’는 같은 조상이라는 생각을 하며 분에 넘치는 출세를 꿈꾼다. 원범의 외할아버지[염성화] 집안이 아들, 손자도 없이 거의 멸문되었다는 것을 알고, 원범의 외가 쪽 가계가 자신의 집안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족보를 고쳐버린다. 그리고 철종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이를 인정받으니, 철종은 염종수를 외숙이라 부르게 된다. 족보 하나를 바꾸어 한 나라의 임금을 조카로 만들어 버리는 희대의 사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비문의 ‘용담’을 ‘파주’로 바꾸어 버린다. 그는 정 3품짜리 벼슬을 하고, 아울러 벼슬을 이용하여 갖은 나쁜 짓도 같이 한다. 몇 년 후 이 사실이 낱낱이 발각되고 염종수는 처형당하고 만다. 그리고 비문도 다시 긁혀져 ‘용담’으로 바뀐다.
지금 외가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이 집에 살던 용담 염씨의 후손들이 큰 집의 관리가 어려워 강화군에 관리를 맡기고 옆집으로 옮겨 간 것이다.
원범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 같다. 철종과 그의 부인은 지금 고양시 서삼릉에 잠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