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모아나 공원의 초목들
張 炳 善
영하의 서울을 떠나 호놀룰루 공항에 내린다. 기온이 후끈하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여기는 여름 날씨다. 그래선지 여행객들이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이다. 입고 온 외투를 벗고 호텔 가는 차에 오른다.
연말 연휴를 가족과 함께 지내고자 따뜻한 하와이를 찾았다. 이심전심일까. 거리엔 연휴를 즐기려는 관광객이 붐빈다. 울긋불긋 수영복 차림의 인파가 해변을 메웠다. ‘세계의 휴양지’라는 와이키키 비치(Waikiki beach)는 눈부시다. 내리쬐는 햇살, 출렁이는 쪽빛 바다, 파란 하늘, 흰 모래사장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그 비치에 연한 호텔에 닿으니 먼저 온 애들이 우리 부부를 맞는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큰애 가족, 일본에서 온 딸과 외손녀가 알로하(Aloha‧하와이의 환영 인사말) 하며 레이(Lei‧꽃목걸이)를 목에 걸어 준다. 그러자 전통 의상으로 단장한 훌라(Hula‧하와이 민속 무용) 댄서들이 다가서며 우리의 방문을 환영한다.
이런 환영 의식은 이 지역의 전통적인 풍습이다. 태평양의 섬나라, 하와이 ‧ 사모아 ‧ 뉴질랜드 ‧ 피지 ‧ 타히티 등지의 폴리네시아 문화다. 하와이는 원래 이 문화권의 섬으로 미국 영토가 아니었다. 2천8백 년 전에 해저 화산 폭발로 생겨난 주인 없는 섬이었다. 1788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이 섬에 상륙하여 세상에 알려진 땅으로 카메하메하(Kamehameha) 왕정을 거쳐, 1898년에 미국에 합병하였다. 그 후 1959년에 미국의 50번째 주(州)가 되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도 미국 본토와 같이 이민 온 사람이 대부분이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133만여 명의 인구 중 아시아계가 41.6%, 백인이 24.3%로 하와이 원주민은 18%에 불과하다. 사람만이 아니다. 식물도 동물도 외지에서 신천지를 찾아 이곳으로 오게 됐다.
‘빨리 바다로 가요’ 하는 손녀들의 성화로 비치에 연한 알라모아나(Ala Moana) 공원에 들어선다. 그 공원 입구에 둥치 큰 벵골보리수 한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그 나무는 제 나라 인도가 그리운지 줄기마다 공기뿌리를 바다 쪽으로 내려뜨리고 있다. 공원 여기저기에 아프리카에서 왔다는 바오바브(Baobab)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바닷가에는 키 큰 야자수들이 병풍처럼 서 있다.
먼 옛날, 이 초목들은 본의 아니게 여기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바닷물에 실려서 바람에 날려서 여기에 오기도 하고, 새들의 분(糞)에 섞여 온 씨앗들이 이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초목들은 상하의 이 땅에서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게 되었다. 4계절이 분명하지 않은 이 공원에서 잔디도 나무도 연중 푸르게 살아가야 한다. 그 푸른 잎들은 여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그늘을 보니 아침마다 산책하던 여의도 공원과 비교가 된다. 지금 한겨울인 그곳의 잔디는 누렇게 말랐고, 나뭇가지는 앙상하지 않았던가. 단풍 든 잎들을 다 떨어뜨리고 깊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여기의 초목들은 파란 잎을 달고 생기가 넘친다.
그래선지, 새들이 날아들었다. 남미에서 멧비둘기, 알래스카에서 개꿩, 캐나다에서 붉은 부리의 문조(文鳥)들이 여기에 둥지를 틀었다. 출생지가 다른 그것들이 낯선 나뭇가지 속에서 지저귀고 있다. ‘끼룩 끼룩, 따르 따르륵, 짹짹 짹’거리며 타향살이를 서로 위안이라도 하듯 속삭이며 대화하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나는 누구에게 저 나무와 같은 보금자리가 된 적이 있었는지?
그런 생각에 잠기고 있는데, “할아버지! 저기 봐요” 하며 여덟 살배기 손녀가 바다 쪽을 가리킨다. 저만치 물 위에 무지개가 떠 있다. 크레파스로 그린 것처럼 일곱 가지 색깔이 반원을 이뤘다. 좀처럼 카메라 앞에 서지 않던 아내가 “어서 이리 와요, 무지개 넣고 사진 한 장 찍읍시다.” 하며 옷소매를 당긴다.
바로 그때, 순찰하던 공원 관리인이 셔터를 눌려 준다. 그러더니 공원 안내를 한다. 수시로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리는 이 공원엔 하루에도 여러 차례 무지개를 볼 수 있다고. 그래서 하와이는 ‘알로하 주(Aloha State)’라고 하지만 ‘무지개 주(Rainbow State)’라고도 부른단다.
이 공원엔 “연중 초목들이 푸르고, 공원 요소요소에 히비스커스, 플루메리아(Plumeria), 부겐빌레아 등의 열대성 꽃들이 피어 있다”라고 설명을 한다. 그렇게 자랑삼아 얘기를 하지만 나의 인상은 좀 다르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느낌인지는 몰라도 연중 피어 있어야 하는 잎과 꽃들이 안쓰럽다. 그것들에겐 이곳이 오지가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1년 열두 달 덥기만 한 이곳, 그날이 그날 같은 나날을 푸른 잎 달고, 꽃 피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일까. 느긋이 잠 한숨 잘 수 없는 처지다. 수시로 소낙비가 퍼붓고, 끊임없이 몰아치는 세찬 바닷바람에 가지와 잎들이 마구 흔들리는 입지다. 물과 바람의 풍요 속에 갈증의 계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럴는지 모른다. 어쩌면 여의도 공원이, 아니 한국 땅이 복지다. 그곳의 초목들은 봄에 꽃 피우고 여름이면 열매를 달아, 가을에 익힌 후, 내년을 기약하며 동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4계절이 뚜렷한 지역에 사는 나 역시 복 받은 사람이 아닐까. 그런데도 그 복지에서 좀 더 편한 데를 기웃거리며 옮겨 다닌다.
이곳 초목들을 보라! 사시사철 날마다 바람에 시달리며 살지만 뿌리내린 땅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발붙인 이곳을 영생의 터전으로 여기며 제자리를 지킨다. 뿌리만이 아니다. 가지도 잎도 달린 자리를 놓치지 않는다. 바닷바람에 마구 흔들리다가도 잠시 바람만 잠잠해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와 반듯하게 중심을 잡는다.
장하다. 그 인내와 집착이. 그런 불우한 입지에서 그저 세월만큼 자라는 저 초목들이 높이 보인다. 좀 춥다고, 불편하다고 양지를 찾아다니는 내 일상의 행태가 부끄럽다.
첫댓글 장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정순입니다. 늦었지만 <오동나무 그 결처럼>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상도 타셨다구요? 축하드립니다. 1년 열두 달 덥기만 한 이곳, 그날이 그날 같은 나날들 일지라도 저는 그립기만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건필하세요.
한별 님, 감사합니다. 답글이 늦어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