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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데프콘ForeverLove 원문보기 글쓴이: ZARD
구분 | 요동도행군 | 평양도행군 |
행군대총관 | 이세적 | 장량 |
행군부대총관 | 이도종 | 상하, 좌난당 |
행군총관 | 장사귀, 장검, 집실사력, 계필하력, 강덕본, 아사나미사, 국지성, 오흑달 | 염인덕, 유영, 장문간, 방효태, 정명진 |
병력 | 기병과 보명 6만 | 4만 군사와 전함 500척 |
그런데 이 기록에서는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친정군의 구성은 밝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요동도행군과 평양도행군의 규모만을 보고 당군의 전체 병력을 10만으오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신당서 고려전에는 당군이 퇴각해 돌아올 때의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처음 떠날 때는 병사가 10만, 말이 1만필, 해군이 7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 고려전에는 당나라가 요동도행군과 평양도행군을 먼저 보낸 후, 이세민이 친히 6군을 거느리고 요동에서 요동도행군과 만나기로 약속한 기록이 있다. 친정군의 숫자가 포함되면 당연히 당군의 숫자는 늘어난다. 그렇다고 당군이 17만명인 것은 아니다. 요동도행군과 평양도행군, 여기에 이세민이 친정군 7만이 단순히 합산된 숫자가 17만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군인 평양도행군 4만에다 추가된 3만의 군대는 이세민의 친정군이 아닌 추가된 병력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세민이 이끈 친정군은 모두 육군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주목할 기록이 자치통감의 기록이다. 여기서는 당나라가 장안과 낙양에서 수군으로 활용될 3,000명의 군대를 더 모았고, 육군인 요동도행군에는 6만명 와애 란주(감숙성)과 하주(오르도스)의 항복한 호족(胡族)들이 징발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10만명 외에 추가된 3천명의 군대, 항호의 병력, 그리고 이번전쟁의 주력군인 이세민의 친정군까지 합치게 되면 당군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대군이었다.
당군의 규모에 대해 전확한 기록이 없는 만큼 필자는 위의 행군총관 명단 기록에서 누락된 당나라 장군들의 행적을 살표보고자 한다. 행군총관은 1군의 사령관으로 대략 1만에서 1만 2500명을 지휘한 자다. 행군총관의 숫자를 살표보면 당군의 개략적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다른 기록들에서 살펴본 행군총관급 이상 장군들이다.
행군총관명 | 주요활동 | 직급 | 근거사료 |
장군예 | 요동성 전투에서 패해 퇴각 이세민에게 참수 당함 | 요동도 행군총관 | 자치통감 |
강행본 | 개모성 전투에서 죽음 | 요동도 행군총관 | 구당서 |
안현화 | 좌효위중랑장 겸 행군총관 | 책부원귀 | |
유홍기 | 주필산 전투에서 공을 세움 | 전군대총관 | 신당서 |
양홍례 | 주필산 전투에서 24개군을 지휘 | 병부시랑, 대총관 급 | 구당서 |
우진달 | 주필산 전투에서 장손무기 보조 | 행군총관 급 | 신당서 |
장손무기 | 주필산 전투에서 26개군을 지휘 | 정 1품, 대총관 급 | 전당문 |
왕군악 | 주필산 전투에서 전사 | 좌무위 장군 | 신당서 |
위지경덕 | 주필산 전투에 참전 | 좌1마군총관 | 구당서 |
아사나사이 | 주필산 전투에서 선봉장 역할 | 좌위대장군 | 구당서 |
이사마 | 평양도 행군에서 분리되어 압록수를 향해 진격 | 우위대장군 | 구당서 |
구효충 | 평양도행군총관 | 자치통감 | |
이들이 신당서 고려준에 누락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패장일 경우로 장군예, 강행본, 왕군악, 이사마등이며, 구효충도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수 있다. 두번째는 이세민의 친정군에 속한 장군들로 장손무기, 유홍기, 양홍례, 아사나사이, 이사마, 위지경덕 등이다. 안현화는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요동도행군총관임을 감안할 때 첫번째 사례에 해당딘다고 보겠다.
이 표를 보면 요동도행군에는 안현화, 장군예, 강행본 등 더 많은 행군총관이 참여 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요동도행군은 이세적과 마주 두 사람이 행군대총과으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대군이었다. 따라서 요동도행군은 6만명 이상의 대병력이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요동도행군에 속한 장검의 군대는 이세적의 요동도행군 본진에 합류하지 않고 별도로 건안성을 공격했으므로 이들까지 합칠 경우 요동도행군은 10만명은 족히 넘는 대병력이 분명하다.
이세민이 직접 이끈 친정군은 장손무기, 유홍기, 유홍례 등 대총관급 인물이 3명이나 포함되어있다. 여기에 돌궐왕자 출신으로 이세민의 부마가 된 아사나사이와 돌궐 귀족 출신으로 이세민의 총애를 받는 이사마는 각기 좌위대장군과 우위대장군을 맡았는데, 이들은 행군총관보다 상위 직급의 장군들이다. 여기에 현무문 사건에서 공을 세운 위지경덕을 비롯한 여러 행군총관들이 참여한 만큼 친정군의 규모는 요동도행군을 능가하는 대군이었음에 분명하다.
이세민은 요하를 건넌 후 마수산에 진영을 갖추기 위해 갑사 6만명을 동원했다. 이세민은 진영을 갖춘 후 8일 후에야 이세적의 군대와 만나게 된다. 따라서 갑사 6만은 전부 이세민의 친정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6만명 외에도 주위를 경계하고 고구려군과 싸우는 병사들도 있어야 하므로 친정군의 숫자는 가장 적게 잡아도 6만 이상이 된다.
장손무기는 당시 당나라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그는 주필산에서 고구려 고연수 군대와 싸울 때 이세적, 이세민과 함께 당군의 한 축을 담당해 지휘했다. 장손무기는 품계가 정1품으로 정3품인 이세적 보다 정치적 위상이 높았던 만큼 요동도행군 대총돤인 이세적 보다 더 많은 군대를 지휘했다. 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은 이세적으로 하여금 장사귀를 비롯한 14명의 총관을 거느리고 고구려군의 서남쪽을 맡게 하고 장손무기에게는 26총관을 거느리고동쪽으로 나아가 고구려군의 배후를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북쪽 산에 올라가 전황을 살폈다. 그렇다면 이세민 주변을 호위한 군대까지 합친 친저운의 숫자는 요동도행군의 최소 두 세베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양홍례가 지휘한 24개군 또는 장손뮈가 지휘한 26개 총관이 거느린 군대의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1군은 한명의 행군총관이 지휘한다. 1군은 1만 2,500명을 가리킨다. 춘추전국시대에 유일하게 제나라 1군이 1만명을 의미했을 뿐이며, 마차 부대는 4천명이 1군이었다. 당나라 1군을 대략 1만 명으로 본다면 양홍례는 무려 24만 명을 지휘한 셈이다.
또 장손무기와 이세적이 40총관을 거느렸으므로 이들만 해도 40만에 이른다. 여기에 이세민을 호위하는 군대까지 합친다면 당시 당나라 육군의 규모는 족히 40~50만에 육박하게 된다. 당과 주필산 전투에 맞선 고구려군대가 15만 명이라고 전하므로 원정군인 당군이 그것의 두 세배 숫자로 파악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사서에 기록된 행군대총관은 이세적, 장략 외에 유홍기, 장손무기 등이 있다. 양홍례도 대총관으로 볼수 있으니 그 숫자는 더 많아진다. 이 가운데 양홍례, 유홍기, 장손무기 등은 이세민의 본진에 속하는 인물들인 만큼 규모가 기록되지 않은 이세민의 친정군의 숫자는 요동도행군, 평양도행군을 훨씬 상회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세민의 본진과 항복한 이민족들을 제외한 요동도행군과 평양도행군 10만명을 당나라군의 전부라고 보는 것은 일부를 보고 전테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해군인 평양도행군의 경우도 4만 보다는 많은 군사가 동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당서 소려열전에 기록되지 않은 행군총관 구효충의 존재는 분명 해군에도 별도의 추가 병력이 있었으며 그래야만 퇴각할 때 7만이었다는 기록이 설명 된다.
당군이 장량, 이세적의 대총관이 16명의 총관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편성되었다고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이외에도 행군대총관 세명(장손무기, 양홀례, 유홍기), 행군총관 이상에 해당하는 장군 아홉(장군예, 가앵본, 안현화, 우진달, 왕군악, 위지경덕, 구효충, 아사나사이, 이사마)을 추가로 찾아 볼 수 있었다. 실제 인명이 등장하는 사례를 찾았을 때 이 정도가 파악된 것이지만, 실제로는 50명이 넘는 행군총관이 차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적구성을고려해 본다면 당군의 규모는 10만이 아닌 5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세민은 정주에서 요동성에 올 깨까지 매 수십 리마다 봉화대를 두었는데 그 봉화대를 지키는 병력만 해도 족히 수천명은 되었을 것이다. 2000~ 3000리나 되는 거리에는 봉화병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보급병도 있어야 한다. 탁군에서 요동성 사이에는 당군이 군수물자를 제공 받을 만한 곳도 없다. 보급로가 매우 길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보급병의 숫자 역시 매우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수나라의 경우는 이들 보조 인원이 정규군의 수와 거의 같았다. 당군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군의 규모가 이 정도 되었기에 토번에서 100만 명으로 당군의 숫자를 본 것이지, 전혀 근거 없는 외교적 언사를 남발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당군의 군대 규모가 대군임에 밝혀진 이상 이에 대응하는 고구려 군의 작전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가 가능해진다. 고구려가 쉽게 적진을 행햐 공격하지 못하고 수성방어 전략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군이 엄청난 대군이었기 때문이지 적이 적었음에도 그들을 두려워해 소극적 방어에만 치중했던 것이 아니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IN (원출처는 김용만 선생님의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