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성차밭, 변산반도 1박 2일 자연 테마 기행 ~~
◆ 2004년 8월 2일 8시 ~ 8월 3일 23시
* 담양읍(潭陽邑) 메타세카이어 가로수 길
* 4계절 푸른 대숲을 자랑하는 담양(潭陽) 대나무골 테마공원
* 보기만 해도 시원스런 대한다원 녹차밭
* 온양온천을 꿈꾸는 신생온천 - 도곡온천(道谷溫泉)
*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내소사(來蘇寺)
* 서해(西海)바다의 위대한 작품 채석강(彩石江)
* 피서 인파로 가득한 격포해수욕장
* 거대한 영토 확장의 현장 - 새만금

* 내소사 연꽃
* 인라인 프레임 형태가 아닌 하나의 익스플러어로
편하게 보고자 할 경우
여기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 8월 3일 아침 7시, 따사로운 아침 햇살의 눈이 뜨이면서
6시간에 걸친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나를 깊은 잠으로 유도한 푹신푹신한 물침대의 도움으로
전날의 피곤은 말끔히 잊은 채, 가뿐한 기분으로 새 아침을 맞이한다.
오전 7시 30분,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8시 30분에 도곡온천을 출발, 북쪽을 향해 어언 2시간을 달린 끝에
오전 10시, 이 날의 첫 번째 답사지인 내소사(來蘇寺)에 도착했다.
◆ 6.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내소사(來蘇寺)

▲ 내소사 대웅전 꽃창살
내소사(來蘇寺)는
변산반도(邊山半島)의 대표적인 고찰(古刹)로
능가산(관음봉) 남쪽 자락에 자리해 있다.
옛날에 변산에는 내소사 외에도 선계사(仙溪寺), 실상사(實相寺), 청림사(靑林寺)등의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들 절을 한 덩어리로 묶어 변산 4대 명찰로 꼽았다고 한다.
이 절은 633년(백제 무왕 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란 승려가 창건했다고 하나
별로 신빙성(信憑性)은 없어보인다.
어쨌든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大蘇來寺)와 소소래사(小蘇來寺)가 있었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소래사라고 한다.
창건 이후 16세기까지의 사적(史蹟)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며, 1633년(인조 10년)에
청민선사(靑旻禪師)가 크게 중건하였다.
그 이후 1865년(고종 2년)에 관해선사(觀海禪師)와 만허선사(萬虛禪師)가
중수했으며, 1983년에 크게 중창하여 지금에 이른다.
소래사(蘇來寺)라 불린 이 절이 언제부터 이름이 뒤바꿔
내소사(來蘇寺)로 불렸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 성종(成宗)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이 절의 이름이 소래사로 나온 것으로 봐서
그 이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을 것이다.
전해오는 거짓말에 의하면 660년에 신라(新羅)와 함께 백제(百濟)를 공격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이 절에 시주를 했는데,
그런 연유로 소정방이 왔다는 절,
즉
내소사(來蘇寺)로 이름이 바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으며 소래사(蘇來寺)나 내소사(來蘇寺)나
글 순서만 다를 뿐, 한자(漢字)와 뜻은 모두 같다.
현재 내소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선운사(禪雲寺)의 말사(末寺)이며
부속암자로는 청련암(淸蓮庵), 지장암(地藏庵)이 있다.
내소사 경내에는 보물 277호인 고려동종(高麗銅鍾),
보물
278호인 법화경 절본사본(折本寫本), 보물 291호인 대웅보전,
보물 1268호인 영산회괘불탱 등의 국가지정문화재
4점과
전북지방유형문화재 124호인 3층석탑 등의 지방문화재 2점이 있으며,
내소사 전체는 전북지방기념물 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은 변산국립공원 동남쪽에 자리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변산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 내소사 입장료. (* 2004년 8월 기준)
* 어른 3200원 (국립공원 입장료 포함,.)
* 중고생,군인 1300원 (국립공원 입장료 포함)
* 초등학생 700원 (국립공원 입장료 포함)
* 내소사 찾아가기.. (* 2004년 9월 기준)
대중교통 :
① 부안터미널 부근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내소사 방면 군내버스 이용, 30~50분 간격으로 1일 21회 운행,
② 격포에서 내소사 방면 군내버스 1일 6회 운행
승용차 : ① 서해안고속도로
→ 부안나들목
→ 부안
→ 고창방면(23번국도)
→
보안사거리(검문소)에서 30번 국도로 우회전 → 석포삼거리(내소사입구)
→ 내소사
② 호남고속도로
→ 정읍나들목
→ 흥덕,고창 방면 22번국도
→ 흥덕
→
부안방면 23번국도 경유 → 줄포
→ 보안사거리(검문소)에서 30번 국도로 좌회전
→
석포삼거리(내소사입구) → 내소사

▲ 화려한 단청(丹靑)의 내소사 일주문(一柱門)
내소사의 정문으로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온다.
* 매표소 옆에는 수령(樹齡) 700년의 거대한 느티나무가 있음

▲ 내소사 전나무숲 (1)
일주문을 지나면 시원스런 모습의 전나무 숲길이 약 600m가량 펼쳐진다.

▲ 내소사 전나무숲 (2)
전나무가 불어주는 맑은 공기를 마시니
복잡한 생각으로 뒤엉킨 머리 속이 텅빈 듯 맑아진다.

▲ 내소사 전나무숲 (3)
복잡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부처의 세계로 들어선다.

▲ 연지(蓮池)에 피어난 수련(睡蓮)들
앙증맞게 피어난 분홍색의 연꽃과 흰색의 연꽃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둥그런 모습의 한쪽으로 입이 뻥 뚫린 연꽃 잎의 모습도 꽤 인상적이다.

▲ 연지(蓮池)의 모습

▲ 분홍색 수련(睡蓮)
수련(睡蓮)이란 낮에는 활짝 피어있고 밤에는 꽃잎을 오므리고
잠자는 연꽃을 말한다.
이때 시간 오전 10시 50분,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수련(睡蓮)은
슬슬 꽃잎을 펼쳐보이며 그 아름다운 모습을 온 천하에 드러낸다.

▲ 내소사 천왕문(天王門)

▲ 내소사 느티나무 (1)
나무의 나이가 무려 950 ~ 1000살이다.

▲ 거대한 덩치의 내소사 느티나무
1000년 가까이 내소사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노거수(老巨樹)로써
내소사의 오랜 내력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 느티나무의 자세한 신상이 적혀 있다.

▲ 내소사 봉래루(蓬萊樓)
누각(樓閣)과 문의 역할을 같이 하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이다.
조선왕조 당시 부근에 살던 양반들은 말을 타고 대웅보전(大雄寶殿)까지 진입하여
예불(禮佛)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폐단을 막기 위해 대웅전 앞에 지금의
봉래루를 세웠다고 한다.
조선시대 당시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으로 인한 많은 어려움과
양반들의 불교에 대한 무시와 천대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이 누각은
조선시대 불교사의 아픈 단면을 보여주는 듯 하다.

▲ 내소사 약수터
무섭게 생긴 용머리 위해 귀엽게 생긴 조그만 거북이가 앉아 있다.

▲ 내소사 약수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 잎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언제나 물로 넘치는 연꽃 모양의 석조(石槽)를 보니
술이 가득 담긴 연꽃 무늬의 술잔을 보는 듯 하다.
전날 술을 좀 마셨더니 그렇게 보이는구려..

▲ 내소사 삼성각(三聖閣)
산신(山神), 칠성신(七星神), 독성(獨聖)을 모신 전각.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아줌마들 자세로 앉아있는 나반존자(那畔尊者,독성)
그의 오른쪽에는 동자(童子) 1명이 살짝 머리를 숙여 그에게 예를 표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문신(文臣)으로 보이는 사람이 독성을 바라보며 서 있다.

▲ 삼성각 칠성도(七星圖)와 치성광여래좌상
산신,독성,칠성 가운데 유일하게 칠성만 존상(尊像)이 모셔져 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나는 개인적으로 산신도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① 복잡하게 그려진 난해(難解)한 수준의 불화(佛畵)와는 달리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 그림도 대개 단순하고, 알아보기가 쉽다.
②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숭상해온 존재로써 친근감이 느껴지며
③ 한민족(韓民族)과 더불어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호랑이의 모습이
그리 무섭지도 않으며 덩치는 호랑이, 얼굴은 고양이를 보는 듯한
편한 모습과 살랑살랑 흔드는 꼬리의 모습이 꽤 익살스럽다.
산신의 오른쪽에는 동자(童子)가 일산(日傘)같은 것을 들고 서 있으며
왼쪽에는 호랑이 1마리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사람들을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산신(山神) 뒤에는 산신의 본거지인 산(山)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다른 산신도와는 다른 특이한 점이 하나 있으니
바로 산신도 오른쪽 부분에 그려진 사람 2명.
저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산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들일까? 난 잘 모르겠음..

▲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조선시대 불교 건축물 중 제일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이 전각은
내소사의 법당(法堂)으로 1633년에 청민선사가 세웠다.
대웅전
문짝에는 꽃 모양의 꽃창살이 꽃들의 시샘을 받을 정도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고
기둥과 지붕 사이에는 수많은 공포(栱包)가 새겨진 다포(多包) 양식으로
전각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전각 내부에는 금빛 찬란한 3존불과 영산후불탱화가 걸려있고
내부 동쪽에는 파랑새가 그렸다는 불화가 있고
불단(佛壇) 뒤쪽에는 천하제일로 평가 받는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가 하얀색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 천장에는 연꽃이 새겨진 포작(공포)이 촘촘히 새겨져 있으며
대들보 위에 걸친 충량(衝樑)에는 화려한 모습의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전각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미술품으로
불교 미술의 화려한 극치를 보여주는 이 전각은
보물 291호

▲ 고색창연한 대웅전의 모습
오래된 멋이 물씬 풍기는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 총 9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 대웅보전 처마 밑에 매달린 풍경(風磬,바람방울)

▲ 대웅전 앞에 놓여있는 서양란(西洋蘭)
보라색 아름다움과 은은한 향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 대웅전 3존불과 영산후불탱화
불단(佛壇)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앉아 있다.
불단(佛壇) 앞에는 승려(僧侶) 2명이 동쪽을 향해 목탁(木鐸)을 두들기며
7주전 이승을 떠난 고인(故人)의 칠칠재(七七齋, 49재)를 지내주고 있다.
내소사는 명부전(冥府殿)이 따로 없기 때문에 칠칠재(49재,중유,중음)를
이렇게 대웅전에서 지내는 모양이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예사롭지 않은 필체(筆體)에 힘이 넘쳐 보인다.
현판에 쓰인 '大'의 모습이 마치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 포작(공포,包作)으로 가득한 대웅보전 내부 천장
공포 출목(出目)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에 그저 입만 벌이질 뿐이니
가히 조선 중,후기 불교 건축의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 조선 중기 대표적인 불교 건축물로 손꼽히는 내소사 대웅보전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난 전설(傳說) 2개가 전해오고 있다.
# 1번 째 전설~~
1630년 어느 날, 내소사(來蘇寺)에 주지로 있던 청민선사(靑旻禪師)는
어린 사미승(沙彌僧)에게
"절 입구에 가면 목수 한 명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모시고 오너라" 분부를 내렸다.
사미(沙彌)가 그 분부에 따라 내려가보니 과연 절 입구에
초라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는 바로 대웅전을 지을 목수(木手)였다.
그 목수는 다음날부터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대웅전을 지을 재목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3년이 다 되도록 법당(法堂, 대웅전)을 세울 생각은
안하고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목침만한 크기로 토막을 내어 다듬는 것이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사미승은
"3년 동안 목침만 깎고 있으니 법당은 언제 짓노?"하고
투덜거리며 그 목수를 골려줄 생각으로 나무토막 하나를 몰래 집어와
감춰버렸다.
그후
어느 날, 그 목수는 나무토막 다듬는 일을 다 끝냈는지
다듬은 나무 토막을 세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번 세고 나서
뭔가가 이상한지 계속해서 여러 번 세어보더니
청민선사 앞에 고개를 떨구어 눈물을 흘리며
"선사님, 저는 아직 법당을 지을 인연이 없나 봅니다"
이에 선사가
"법당을 지을 인연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에 목수 왈
"재목 하나를 덜 깎았습니다. 이런 주제에 어찌 법당을
짓는다고 하겠습니까"
이 말을 듣던 사미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는지 숨겨두었던
나무 토막을
내놓고 용서를 구했다.
그러자 목수는
"부정탄 재목(材木)으로 법당을 지을 수는 없다"라
말하며
그 나무 토막을 빼놓은 채로 대웅전을 지었다. 그런 연유로 인해
대웅전 천장에 공포의 목침이 있어야 할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자리는 비어 있음..

▲ 출목(出目)이 하나 비어있는 대웅보전 천장
사진 오른쪽은 그 비어있는 부분을 확대한 것임.
전해 오는 거짓말에 의하면 대웅전을 지은 목수는 호랑이가 화현(化現)된
대호선사(大虎禪師)라고 한다.
그렇지만 전설의 내용에 신화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실제로 있던 일을 전설화 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하나를 만들기 위해 3년 동안
출목(포작), 꽃창살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공을 들여 만든 그 목수의
정성에 그저 감탄할 뿐이며
그런 목수를 끝까지 믿고 위로했던 청민선사 또한 대단한 위인(偉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대웅전의 전설을 통해 생각나는 말이 하나 있으니
바로 대기만성(大器晩成), 즉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
이 전각 역시 대기만성(大器晩成)의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미승처럼 조급히 굴지 않고, 천천히 정성을 들여 만든 결과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이 대웅전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 2번 째 전설~~
대웅보전이 완성된 이후 단청(丹靑)과 벽화(壁畵)를 그릴 사람을 찾지 못해
근심에 쌓여있던 중, 어느 날 늙은 화공(畵工) 하나가 찾아와
단청을 그려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청민선사는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단청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그 화공은 단청을 그리는 100일 동안은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신신당부를 하는지라
이에 청민선사는 법당 내부를 봉쇄하여 승려들의 접근을 막았다.
한편
대웅전 목침 사건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장난꾸러기 사미승은
이번에도 역시 장난기가 발동하여
99일째 되는 날,
문 틈으로 법당 안을 훔쳐보고 말았다.
법당 내부를 살펴보던 사미는 그만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 했으니.
그림을 그리겠다는 화공은 온데간데 없고 대신 황금빛의 새 한마리(관음조라고 함)가
입에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사미의 놀란 인기척을 들은 새는 마무리 채색작업을 멈추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이유로 대웅전 양쪽 도리에 그려져야할 용과 선녀의 그림이
왼쪽 도리는 있고 오른쪽 도리에는 없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거짓말에 의하면 단청을 그린 새는 관음보살(觀音普薩)의
화현(化現)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 전설은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아마도 황금새로 비유된 화공이 채색(彩色)을 하는 도중 갑작스런 일이나
절의 내부 사정으로 인해 채색이 중단된 것이 아닐까 싶으며
혹은 채색하는 과정에서 화공이 실수로 빠뜨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 이 불화(佛畵)의 윗부분 도리가 그 문제의 부분으로
채색만 되고 덧그림이 빠져 있다고 함

▲ 사람들로 가득한 불화(佛畵)
등장인물을 세어보니 가히 40명이 넘는다.
그림의 중심 인물은 중앙에 그려진 부처이며
두광(頭光)을 가진 인물만 3명에 이른다.

▲ 관음보살이 그려진 후불벽화(後佛壁畵)
3존불과 영산후불탱화가 있는 벽 뒤에 그려진 백의관음보살도(白衣觀音菩薩圖)이다.
이 벽화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후불벽화로 황금새(관음조)로 비유된
늙은 화공이 그렸다고 전하며
하얀 옷을 입은 관음보살의 모습이
마치 하얀두건을 쓴 여인(女人)같다.
전해오는 속설(俗說)에 의하면 관음보살의 눈을 보며
좌우로 왔다갔다하면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사람의 눈을 따라
좌우로 움직인다고 하며, 그런 모습을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한번 관음보살을 보며 좌우로 열심히 걸어봤으나 그의 눈은
나를 외면한 채, 계속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음..
나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야속한 백의관음 앞에는
예사롭지 않은
모습의 불상이 하나 서 있다..

▲ 관음보살입상(觀音普薩立像)
백의관음보살도(白衣觀音菩薩圖) 정면에 서 있는 불상으로
그 모습이 마치 화려한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무희(舞姬)의 자태를 보는 것 같다.
왼손에는 연꽃으로 보이는 장식물을 들고 있으며, 머리에는 육계(肉髻)처럼
생긴 꽤 무거운 모습의 장식물이 달려 있는데,
관음보살은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육계는 아닐테고 과연 무슨 장식일까?

▲ 대웅보전 꽃창살 (1)
섬세(纖細)하고 정교하게 새겨진 꽃잎의 모습의 부근 꽃들의 시샘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대웅전 주변의 자연산 꽃은 아까전 모란꽃과 불단에 바쳐진 꽃 외에는 없기 때문에.
아마도 시샘에 배아픈 꽃들이 바람을 타고 멀리 가버린 모양이다.

▲ 대웅보전 꽃창살 (2)
나는 문짝에 새겨진 창살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그냥 지나치는 편이다.
그러나 대웅전을 지은 그 목공의 손길이 거친 저 꽃잎들은 문살에 무관심한
나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다.
꽃창살을
멀리서 보면 거의 '@' 모습처럼 보인다.

▲ 내소사 3층석탑
대웅보전(大雄寶殿) 앞뜰에 서 있는 이 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머리 부분에 상륜부(相輪部)를 얹힌 형태로
신라 탑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전북지방유형문화재 124호

▲ 내소사 3층석탑 기단부(基壇部)

▲ 내소사 설선당(設禪堂) -
전북지방유형문화재 125호
이 전각은 승려와 신도들의 공부방으로 1640년(인조 17년)에 청명대사가
세운 정면 6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이 건물은 뒤로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와 연결되어있다.

▲ 고려동종의 보금자리 - 내소사 보종각(寶鐘閣)

▲ 내소사 고려동종(高麗銅鍾)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동종으로 높이는 103cm, 입지름은 67cm이다.
이 종은 1222년(고려 고종 9년)에 변산 4대 명찰(名刹)중 하나였던
청림사(靑林寺)에서 주조(鑄造)된 것으로 청림사가 파괴된 이후
오랜 세월 청림사터 땅 속에 묻혀있다가
1853년(철종 4년)에
부근 주민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아무리 종을 쳐도 종소리가 나질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소리를 낸 사람이 그것을 갖기로 하고 각자 종을 쳐보았는데
내소사 승려가 종을 치자 비로소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렸다고 하며
그런 연유로 이 종은 내소사로 오게되었다는 거짓말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이는 이 동종에 대한 내소사의 소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소사에서 꾸민 이야기임이 틀림 없으리..
이 동종은
보물 277호

▲ 고려동종(高麗銅鍾)의 머리 부분
힘찬 표정의 용뉴(龍紐)가 800년 가까이 무거운 종을 들고 있다.
용뉴 옆에는 한국 종에서만 볼 수 있는 용관(음통)이 있으며
그 주위로 중생들이 던진 동전들로 가득하다.

▲ 내소사 고려동종(高麗銅鍾)
당초(唐草) 무늬로 가득한 상대(견대) 아래에 9개의 유두(乳頭)가 달린
유곽(遊廓)이 있으며 종의 배 부분에는 보개(寶蓋)를 휘날리며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는 모습의 3존불이 새겨져 있다.
하대(구연대) 위에는 종을 치는 당좌(撞座)가 양쪽으로 2개가 새겨져 있다.
유두로 가득한 유곽을 잘 보면 유두 하나가 뽑혀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종을 이곳으로 한번 옮겨왔기 때문으로
종을 옮길 때마다 유두를 하나씩 뽑아낸다.

▲ 동종에 새겨진 3존불(三尊佛)
다른 동종에는 보통 비천상(飛天像)이 새겨져 있으니 이 종에는
특이하게도 3존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꽃송이로 된 구름을 탄 3존불은 서쪽을 향해 어디론가 볼일을 보러 가는 모양인데,
서쪽이면 혹시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는 건가?
3존불의 본존(本尊)은 연화(蓮花) 위에 앉아 있고, 그 양쪽으로
협시불(夾侍佛) 2상이 본존을 호위하며 정중히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이 탄 구름 위에는 보개(寶蓋)로 보이는 부분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어 그들이 탄 구름의 속도감을
간접이나마 느끼게 해준다..
이른 새벽이나 저녁 6시에 왔으면 이 종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을텐데 어정쩡한 시간에 와서 종소리도 못듣고 참 아쉬울 뿐이다.

▲ 내소사 범종각(梵鍾閣)
범종각 내(內)에는 흔히 사물(四物)이라 불리는 범종(梵鍾),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이 매달려 있다.
이들 사물은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극락(極樂)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새벽 예불과 저녁 예불에 저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2002년 8월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딱 1번 들어봤음..
목어의 모습이 거의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통을 혼합한 듯 하며
참고로 아래 목어는 내장산(內藏山)에 속한 내장사(內藏寺)의 목어로써
진짜 물고기를 보는 듯, 그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 내장사 목어(木魚) - 진짜 물고기를 보는 듯 하다.

▲ 내소사를 나오면서..
약 1시간에 걸친 내소사 관람은 이로써 끝난다.
◆ 7. 서해(西海)바다의 위대한 작품 채석강(彩石江)
내소사를 둘러보고 갯뻘로 가득한 서해바다를 왼쪽에 끼고 20분을 달려 변산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격포(格浦)에 이르렀다.
격포에서의 일정은 점심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고,
오후 5시까지 해수욕시간이 주어진다.
어쩌면 이번 1박 2일 태마여행의 최대 알맹이는 바로 이 격포에서의 물놀이가
아닐까 싶다.
격포에 이르자 사람들은 해수욕에 대한 기대감을 가득안은 채
다들
간편한 복장으로 변신하여 격포해수욕장으로 달려가고.
나와 친구는 해수욕장 대신 채석강 해변을 먼저 찾아갔다.
채석강 해변은 2002년 8월 이후 2년만에 와보는건데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다만 해수욕장 앞에 조그만 바위섬이 하나 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보이질 않는다. 분명히 2년 전에 바다를 건너 바위섬까지 갔었는데
그 사이에 없어진 모양이다. 아쉽구먼..
격포에는 강(江)이 들어가는 명소가 2곳이 있다.
그중 우리가 찾은 채석강은 격포해수욕장 남쪽부터 격포항까지 펼쳐져 있으며
적벽강(赤壁江)은 해수욕장에서 북쪽 2km거리에 있는 해안으로
모두 강을 칭하는 해변가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것이 진짜 강(江)인줄 알고 강이 어디있냐고 물어보는
재미난
에피소드도 있었음.
채석강(採石江)은 전북지방기념물 28호로 이 곳이 채석강이라 부르게 된 것은
당(唐)나라 때 유명한 시인(詩人)인 이백(李白)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뱃놀이를
즐기며 호수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설치다가 그만 물에 빠져 죽었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풍경이 비슷하다 하여 그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중국에 있는 명소의 이름을 따서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긴
중국 문화에 대한 지나친 모화사상(慕華思想, 사대주의와는 엄연히 다름.)에 빠져 있던
우리 선조들로써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 채석강 해변 (1)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아무렇게나 생긴 바위와 함께
바쁘게 움직이는 조그만 생명체들을 만날 수 있다.

▲ 채석강 해변 (2)
약간 붉은 색이 띠는 채석강 해변..

▲ 채석강 해변 (3)

▲ 채석강 해변 (4)
바위와 나무(식물)의 절묘한 만남

▲ 채석강 해변 (5)

▲ 채석강 해변 (6)

▲ 채석강 해변 (7)

▲ 채석강 해변 (8)
수만 권의 책을 쌓아 올린 듯한 모습이다.

▲ 채석강 해변 (9)
채석강은 서해(西海)바다와 바다 바람이 공동으로 빚어놓은 거대한 작품이다.

▲ 채석강 해변 (10)
저런 모습이 나오기까지는 수억 년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 채석강 해변 (11)

▲ 채석강 해변 (12)
채석강의 절묘한 모습..

▲ 격포 앞바다에 출현한 거북선
저 거북선은 9월 4일부터 방영하는 '불멸의 이순신'의 촬영용 소품이다.
참고로 부안에 '불멸의 이순신' 촬영세트장이 있음
아마도 촬영에 앞서 시범항해(航海)를 하는 모양이다.

▲ 채석강 해변 (13)
멀리 격포방파제가 보인다.

▲ 채석강 해변 (14)

▲ 채석강 해변과 격포항 방파제(防波堤)

▲ 한가로운 모습의 격포항
* 격포해수욕장,채석강,적벽강,수성당 찾아가기.. (* 2004년 9월 기준)
대중교통 :
① 부안터미널에서 격포까지 직행버스,
군내버스, 군내좌석버스가
수시로 운행함
② 내소사에서 격포 방면 군내버스 1일 6회
운행
* 격포정류장에서 격포해수욕장,채석강까지 도보 5분,
수성당까지 도보 20분, 적벽강까지는 도보 20분,
후박나무자생지까지는 도보 15분,
승용차 : ① 서해안고속도로
→ 부안나들목
→ 부안
→ 격포방면(30번국도)
→
하서 → 변산해수욕장
→ 격포
② 호남고속도로
→ 정읍나들목
→ 흥덕,고창 방면 22번국도
→ 흥덕
→
부안방면 23번국도 경유 → 줄포
→ 보안사거리(검문소)에서 30번 국도로 좌회전
→
석포삼거리(내소사입구) → 상록해수욕장입구
→ 격포
③ 내소사
→ 내소사입구(석포3거리)에서
우회전 →
상록해수욕장입구 → 격포
◆ 8. 피서 인파로 가득한 격포해수욕장에서 피서를..
채석강과 격포항을 한바퀴 둘러보고
오후 2시에 늦은 점심을 하였다.
점심을 먹고 간편한 복장으로 변신을 꾀한 후,
친구와 함께 격포해수욕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그 친구는 물에 들어가기 싫다고 그런다.
그냥 발만 담구는 선에서 때우다가 쉬러 갈 모양이던데.
아무래도 7월 한달동안 세무서 등의 알바를 끝내고 느긋하게 온 나와 달리 그 친구는
요 몇일동안 계속 가이드를 뛰어 많이 피곤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냥 발만 담구며 바닷가를 거닐고 있으려니 갑자기 내 앞으로 풍선공이 하나
떨어진다. 하여 그 공을 주워 공놀이 하던 여인들에게 던져주었는데
알고보니 나와 같은 버스를 탔던 여인들이었다..
공을 던져주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라 그 공이 또 나에게 떡 떨어진다.
그래서 다시 그 공을 주워 던져주니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같이 놀자며 나를 부른다.
그들의 초청에 거절할 이유가 없어 바다로 뛰어들어가 그들과 공놀이를 하였다.
공놀이를 어느정도 한다음 커다란 튜브를 빌려 그들과 더불어
해수욕장 앞바다를 이지러지 움직이며 종종 튜브를 전복시키는 수법으로
그들에게 소금물도 먹이고, 또는 역으로 내가 당하여 소금물을 마시는 등.
간만에 재밌는 피서를 즐겨본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그들과 놀지 않았다면 올 여름에는 바닷물에 풍덩들어가지도
못하고 지나갈 뻔 하였다.
영상 35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씨임에도 바닷물은 꽤 시원스럽다.
도저히 나가고 싶지가 않으이..
오후 4시가 되자 다들 물놀이에 지친 듯, 육지로 나가자고 그런다.
그래서 다들 육지로 나와 소금에 절인 몸을 물로 닦고 버스로 돌아온다.

▲ 채석강에서 바라본 건너편 언덕
건너편에 보이는 언덕 자락에 수성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내던
수성당(水聖堂)이
있으며, 언덕 아래 해변에는 채석강에 버금가는
적벽강(赤壁江) 해안이
넓게 펼쳐져 있다.
적벽강은 채석강에 버금가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으나 격포관광단지에서
2km거리에 떨어져 있어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건너편에 보이는 하얀색의 건물 뒤쪽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후박나무 자생지가 있으므로, 격포에 온 김에 적벽강, 수성당, 후박나무 자생지(自生地)도
같이 덩어리로 둘러본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 피서객들로 가득한 격포해수욕장 (1)

▲ 피서객들로 가득한 격포해수욕장 (2)
오후 3시가 지나서부터 밀물이 계속 밀려오면서 그 넓던 해수욕장과 채석강 해변이
순식간에 물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 9. 거대한 영토 확장의 현장 - 새만금
오후 4시 30분이 넘으면서 바다에서 신나게 놀던 사람들이 하나 둘
차 안으로 들어오며 소금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오후 5시가 되자 격포를 출발, 부안으로 가는 도중 잠깐
새만금방조제를 타고 방조제 끝까지 달려 그 끝지점에 잠깐 정차,
10분 정도 방조제와 주변 바다를 둘러보았다.

▲ 공사중인 새만금 방조제 1공구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 긍정으로 보는 쪽과 부정으로 보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과연 하는 것이 좋을까? 포기하는 것이 좋을까?
만약 계속 한다면 우리 국토는 4만ha 정도 넓어지게 되며
침체에 빠진 전북 경제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넓은 해역(海域)이 육지화 되면서 어장은 줄고, 서해(西海)의 특징인
갯뻘이 그만큼 없어지며 김제(金堤)의 대표적인 고찰(古刹) 망해사(望海寺)에서
더 이상 석양(夕陽)의 모습을 못보게 될 것이다.
만약 포기한다면 갯뻘과 어장은 그대로 유지되고, 망해사의 석양도
볼 수 있을 것이나 지금까지 쏟아부은 돈은 어떻게 되는 건지,
지금까지 만들어놓은 제방은 뭐가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니 이제 와서 포기하는 것도 좀 그렇다. 하도 요란스럽게 벌려놓아서..
부디 정부(政府)의 고위층 관료들은 현명한 판단을 해주기를 바란다.

▲ 방조제 안쪽으로 어선 몇 척이 유유히 떠 있다.

▲ 좀 있으면 해가 질 시간

▲ 끝없이 펼쳐진 새만금 방조제(약 5km)
◆ 10. 상경(上京)길 - epilogue
거대한
규모의 새만금 방조제를 10분 정도 둘러보고
5시 30분경에 출발,
6시 40분에 익산시(益山市)의 중심인 익산역에 도착한다.
여기서 2일 동안 우리를 태워준 관광버스 운전사와 아쉬운 작별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 고속전철(KTX)을 타고 상경하기 때문에
관광상품이 그리 되있더군..
익산역에서 고철을 탈 시간은 20시 09분으로 아직 1시간에 여유가 있다.
나는 격포해수욕장에서 같이 놀던 여인들과 함께 부근 시장 골목 분식집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역으로 향한다.
이제 여행은 마지막을 향하고..
20시가 되자 개표를 받구 열차 타는 곳으로 나가
고철(KTX)을 기다린다.
20:09분이 되자 날랜 모습의 길쭉한 고철이 익산역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나는 고철을 4번째 타보는지라 별로 신가할 것은 없다.
날랜 모습과 화려한 모습의 외형과는 달리 내부는 좁아터진 좌석에 리클도 안되는 시트,
잠을 자려고 해도 좌석이 불편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잠의 기운이 확 도망을 쳐버린다.
21시에 서대전역에 정차, 그 이후 대전조차장을 지나 고철 전용선로로 진입
여기서부터 그나마 고철이 이름값을 하며 시속 300km로 달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렇게 달렸음에도 마지막 역인 용산역(龍山驛)에는 정시보다 10분이 늦은
22:10분에 도착하였다.
고철 4번 타서 모두 제시간에 도착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철도청 특유의
고질병인 열차 지연이 나타났구먼.. 이 넘의 열차 지연은 언제나 치료가 될련지..
고철(KTX)이란 이름이 참 무색할 정도이다.
용산역에 도착 후, 각자 집으로... 총총~~
-> 이로써 1박 2일 남도 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본 후기는 2004년 8월 20일에
작성하여
9월 4일에 완성하였으며
9월 5일부터 만천하에 공개함
Copyright (C)
2004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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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참 부지런하십니다, 잘 보았읍니다.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능가산내소사 언제 보아도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