良洞의 歷史
양동마을은 고려이래 경주부의 속현(속현)인 안강현에 속하였다. 이 마을의 주성인 여주이씨와 경주손씨는 각각 다음과 같은 역사적 과정을 밟아서 성장 번영하였다. 손씨는 본래 경주부의 토성이속(土姓吏屬)으로서 사족화(士族化)의 길을 걸으면서 타읍으로 이주하였고, 다시 상경종사(上京從仕)하다가 입향조인 손소가 처가를 따라 이 양동마을에 입주한 후 곧 그 부자대에 공신과 고관의 반열에 오르게 됨으로써 그 후손들은 경상도지방의 한 대표적인 도반(道班)으로 성장하였다. 이씨는 본래 경기도 여주의 토성이속으로서 상경종사하다가 고려말의 왕조교채기에 처향 또는 외향을 따라서 영일지방으로 낙남한 것 같으며, 15세기에 처가를 따라 이 양동마을에 입주하게 되고, 저 손씨의 외손인 이언적(李彦迪)이 학문과 사환(仕宦)을 겸비하여 사후에 종묘배형(宗廟配享)과 문묘종사(文廟從祀)라는 최고의 영예를 향유한 데서 그 후예들은 일국의 한 대표적인 양반인 국반으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두 가문은 처음에는 내외손간으로 서로 공존공영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경쟁 반목하기도 하였는가 하면, 이씨 내부에서도 나중에는 양동과 옥산을 중심으로 적.서 양계로 나누어져 때로는 서로 협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반목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손 양가문은 조선왕조 양반사회의 진전에 따라 양동을 근거로 그들의 세력은 4방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가세.족세의 번창과 그들의 활발한 지역개발로 인하여 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더욱 다져져 나갔으며, 그들의 세력권은 안강현 일대를 중심으로 경주부의 임내(任內)인 기계.신광현과 죽장.성법.북안곡부곡 및 경주부 관할인 흥해.영일현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특히 그들은 옥산.서악서원을 중심으로 경주권의 유림을 대표하여 영남의 열읍향교(列邑鄕校).서원세력(書院勢力)과 연합하기도 하였으며, 한편 그들은 조선후기의 서인 내지 노론정권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야당인 남인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활발한 정치.사회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의 경제적 기반은 거의 전천후 수리시설을 갖춘 안강.기계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형산강 하류에서 올라오는 풍부한 해산물을 확보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 손소.손중돈.이언적을 비롯한 이.손 양가문에서 명공(名公)과 석학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양동은 경주권에서 재지사림(在地士林)을 영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 영남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양좌동연구 -
향단 (香壇)
보물 제 41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 1491-1553) 선생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였을 당시에 지은 건물이라 한다.
후에 임기가 끝나고 동생에게 이집을 주니 그의 아들에게 집이 승계되고 그아들의
호가 향단이어 택호가 되었다 한다.
두 개의 중정을 두고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붙어 마치 전체가 일자형의 한 건물같이
배치하였으며. 상류주택의 격식을 갖추면서 주거건축의 묘를 살리고 있다.
사가로서 전 건물이 둥근기둥(두레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선생이 감사로서 사가에 내려와 나라일을 돌볼 때 관청역할을 하였다.
동측의 사랑채는 간단한 초익공계의 양식이면서도 보아지(양봉)나 파련대공등은 섬세하고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이 조화를 이루어 입면상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다.
국시(國是)인 忠孝思想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사가에서 관의 업무를 본 것은 이언적선생이 어머니를 그리워하여 벼슬하기를 즐기지
아늠에 중종이 그 뜻을 헤아림에 가능했다.
향단에 따린 정자로 심수정이 있고 이곳에서 취화선을 촬영했다.
이 심수정은 1800년대 새로지을 때 적송으로 지어 겨울 노을이 질 때 붉은 빛으로
장관을 이룬다.
그 외 이문의 서당 강학당( 일명 명리정= 明理亭))과 손문의 서당 안락정(일명 성산제=聖山濟)이 있다.
무첨당
보물 제411호
이 건물은 조선조 때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이었던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 선생의 종가댁의 일부로 조선중기에 세운 건물이다.
ㄱ자로 평면에 둥근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배치하고, 간단한 초익공계 양식으로 꾸며 소박하면서도 보아지(양봉)나 파련대공 등 에서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별당건축의 기능에 충실하도록 하였다.
별당은 상류주택에 부속된 사랑채의 연장건물로 가장의 접객, 독서, 한유 등 다목적인 용도로 쓰여지던 곳이다
누마루의 생김새가 인상깊다.
** 대원군이 죽필로 쓴 편액이 있다==재해금서(在海琴書) = 학문과 악(樂)이 있는 곳
관가정 (觀稼亭)
보물 제442호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중종때 청백리에 선정 기록된우재 손중돈1463-1539 과 연고가 있는 집이라 하며, 조선중기에 지은 주택건물이다.
건물의 평면이 ㅁ형을 이루고 아담한 중정이 있으며, 안채는 뒤편 동측에는 맞배지붕의 사당이 있다.
안채는 네모기둥을 세우고 간소한 외관을 이루고 있으나 사당과 누마루는 둥근기둥을 세우고 초익공계의 공포를 결구하였으며, 누마루 둘레에는 길게 난간을 돌려 격식을 갖추고 있다
세부구조에서 안대청의 주두위 초공과 종도리를 받친 대공의 조각 등은 특이한 수법이다.
*한국의 정원:
누마루에 앉으면 양동마을앞 전경이 눈에 다 들어온다.
우리선조들은 경관이 펼쳐 지는 곳에는 담장을 쌓지 않아 담장밖 시야를 막는 일이
없었으나 후대에 복원시 담장을 쌓았다.
회나무( 귀와나무) - 자손무성= 수분을 가장많이 흡수하여 발산하는
나무로 문둥병을 예방한다 믿었다.
이 관가정에서 정원수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 일반적인 상식들 모음===
** 한국의 집터을 잡는 조건:
1) 풍수지리관(음택,양택......
2) 간방(看方)=방향
3) 일조량과 바람의 방향
4)안대(眼臺)의 높이=사랑방에서 보이는 집전경
5) 집앞의 전경
** 반가에서는 각기둥을 쓰며 , 지붕의 높이와 칸수의 제한을 받는다.
단청도 사당이나 관가 서원등 공적인 건물에만 한다.
**사당에 들어 갈 때== 대문이 세 개가 있다.
- 입주 - 납주 - 출주 -
위패를 가지러 들어갈 때 입주로 들어가서 납주로 나와 다시
제례를 모실 제례상을 들고 납주로 들어가 제례후 출주로 나옴
**정자의 유형:
1) 외막(외서리) = 쉼터의 역할
2) 정자 = 들가운데 네기둥과 천정만 있는 쉼터
3) 멍석만 깔아놓음= 호남지역의 정자역할
4) 반드시 방과 청으로 지어진 정자 = 영남지역
**유교 마을에는 성황당이 없다. 그러나 마을 입구에 마을의 고사를 지내는 곳은있다.
**삼현지지(三賢地指)= 우재 손중돈 회재 이언적 1인 미탄생
**3개 민속마을**
안동 하회마을
안강 양동마을
충남보령 화산마을
양동 낙선당 (良洞 樂善當)
중요민속자료 제73호
이 가옥은 조선 중종 35년(1540)경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당호가 낙선당이며 이 가옥을 일반적으로 낙선당이라 부른다.
안채, 대문체, 행랑채 등이 ㅁ자형으로 배치되고 일자형의 사랑채가 안채 측면에 연접되어 있는데, 안채, 사랑채 모두 나지막한 기단 위에 세운 것은 일반 대가들이 높은 기단을 둔 통례를 벗어난 흔치 않은 수법이며, 안채는 모두 네모기둥이나 사랑채 전면에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위에 익공을 두어 격을 달리 하였고, 모두 홑처마에 맞배지붕으로 구성하였다. 비교적 기능과 실용에 치중한 간결한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월성 손동만씨 가옥 (月城 孫東瞞氏 家屋)
중요민속자료 제23호 이 가옥은 경주 손씨 대종가로임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가 건립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우재 손중돈(1463-1539)과 그의 외손이며 동방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회재 이언적(1491-1553)이 태어난 곳이라 한다.
일자형의 대문채 안에 ㅁ자형의 안채가 있고, 사랑후원 뒤쪽 높은 곳에는 신문과 사당이 배치되었다.
종가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이며, 사랑대청에서 바라보이는 후원의 경치 또한 가경이다.
이 집의 당호는 송첨 또는 서백당이라 하며, 과거에는 이 가옥 주위에 외거하인들이 거처하던 가람집이 있었다 한다.
정원에는 그 당시에 심은 향나무가 있어 경상북도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랑과 안채를 구분하는 담장뒤로 삼현을 낳는다는 산청(산실)이 있다.
2002년 6월20일 답사하다.
양동마을의 문화해설사 이지휴님의설명과 나름의 자료를 정리해보았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정정해 주길 바라며....
돌아오는 길 안계댐의 정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