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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
장마비가 오기까지 꽤나 오랫동안 가물었지요? 가뭄도 막바지인 6월 26일에 강릉시 왕산면에 위치한 칠성산을 찾았습니다. 이 산은 1996년 강릉시 안인 앞 바다에 난데없이 나타난 북한 잠수함으로 인해 전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널리 알려진 산입니다. 하늘은 연천 GP 총기 난사 사건으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드러내듯 잔뜩 흐린 잿빛이었습니다.
6.25 동란 55주기에 맞물려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우리 사회는 또 한번 우울한 한 주일을 보내야만 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남북 장관 회담의 성과가 대단하였다지만 꽃다운 나이에 숨진 병사의 가족에게는 한낮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었습니다. 서해 교전에서 희생당한 고혼이나 GP 총기난사 사건에서 희생당한 영혼이나 모두 뜻하지 않은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민족의 비극 6.25와 맞물려 일어나는 요즈음의 일들이 아무래도 우연한 일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6.25 55주년이자 토요휴무일이었던 어제도 우리 사회의 수많은 구성원들은 추모회 아닌 야유회에 나섰으니까요.
칠성산(981m)은 백두대간의 석병산(1,055m)과 두리봉(1,033m) 사이에 위치한 산입니다. 두리봉에서 강릉을 바라보며 북으로 뻗은 지맥의 약 9km 지점에 솟은 봉우리로 지도상에는 주봉(981m)과 칠성대(954m)라 표기되어 있을 뿐입니다. 국립지리원이 발행한 지형도에도 칠성산이란 지명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주봉(981m)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입니다. 대동여지도에는 '담정산' 이라 하였지만 언제 그 이름을 잃었는지 모르며 다만 산자락 아래에 담산동이라는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 산이 칠성산으로 불리우는 까닭은 바위를 이고 길게 드리운 산등성이의 품새가 북두칠성과 흡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 강릉 고을 원님이 기거하던 칠사당자리(강릉의료원)에서 올려다보면 여러 개의 바위 봉우리들이 별과 같은 형상으로 빛을 내고 있어 칠성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칠성산의 기상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 모습이기 때문에 강릉시에 화재가 자주 일어난다는 설도 있다고 하는군요.
오늘은 장마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놀라 산행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산행버스에는 불과 18명의 산꾼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영동고속도로를 쾌속으로 내어 달린 산행버스가 대관령에 다다른 것은 불과 두 시간만의 일이었습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울울창창한 소나무숲이 장관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린 까닭에 솔숲의 풍경은 반감되었지만 첩첩산중의 산자락은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를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대관령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달리는 차안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대관령을 관통하는 대여섯 개의 터널을 지나자 차는 곧장 강릉시로 접어들었습니다. 3시간을 예상하였던 도착 시간을 30분이나 앞당기는 것이었습니다. 백두대간을 관통한 터널이었지만 도로 한번 시원하게 잘 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칠성산은 강릉의 도심에 인접한 산이면서도 원시림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이곳 강릉의 바다 풍경이 워낙 뛰어난 탓이기도 하였습니다. 모두들 동해의 푸른 바다와 경포대 백사장으로 몰려가는 탓에 칠성산은 오히려 조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칠성산의 산행은 35번 국도변의 도마천에 걸쳐 있는 탑동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리 건너 마을입구에 놓인 칠성산 등산로의 안내표지에는 '칠성산 4.7km, 관음사 1.1km'란 말목이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탑동교를 건너자 하늘을 찌를 듯한 소나무에 둘러 쌓인 하나의 돌탑이 나타났습니다. 마을 앞 돌탑에서 언뜻 느껴지는 것은 돌탑을 쌓고 밤하늘의 북두칠성을 숭배하던 원시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산의 들머리에서 때마침 벼논을 둘러보고 나오는 이순(耳順)의 농부에게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이곳이 왕산면으로 불리는 까닭이 따로 있는가요?"
나그네의 질문에 둥근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농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이곳 산간에 임금 왕자가 들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강릉 김씨의 시조인 신라왕자 김주원의 묘소는 이곳에서 가까운가요?"
"왕릉은 이곳에서 좀 떨어진 사기막골에 있지요."
강릉(江陵)은 본래 AD 1세기 무렵 이곳에 자립한 부족국가 동예(東濊)의 도성지(都城地)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고시대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했으며, AD 313년에 이르러 강릉은 하서라(河西良) 또는 하스라(河瑟羅)라 불리웠습니다. AD 550년에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AD 639년 2월에 신라의 소경(小京)이 되었다가 AD 685년에 하서주(河西州)로 개편되고 AD 776년에 다시 명주(溟州)로 개편되었습니다.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시조 신라 왕손 김주원(金周元)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1세손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신라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5세손입니다. AD 777년, 신라왕손 김주원은 시중(侍中)의 벼슬에 올랐습니다. AD 785년, 선덕왕(宣德王) 6년, 왕이 아들 없이 죽자 시중 김주원은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신라의 도성 금성에 큰비가 내려 금성을 흐르는 알천(閼川)의 냇물이 갑자기 불어났습니다. 이 사태로 시중 김주원은 왕으로 추대되고도 알천을 건너 입궐(入闕)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상대등 김경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 며 김주원을 대신하여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할 것을 거론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어긋나자 김주원은 그의 아비가 태수로 있던 강릉으로 물러나와 왕위 즉위를 포기하였다고 전합니다.
그 후 원성왕에 즉위한 김경신이 김주원과 화해하여 다음 대의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하며 강릉에 은거하였습니다. 이에 원성왕 김경신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봉했다고 전합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계보를 이어오고 있으며, 그의 후손으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金時習)을 들 수 있겠습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숙부 수양대군의 폐륜에 통분하고 저항하여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사람인 바, 역사의 두 인물은 뛰어난 자질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대가 그를 선택하지 않았던 불운의 인물로 보여지는군요.
마을회관앞 돌탑을 지나 20분쯤 산을 오르니 대승불교 관음종단의 관음사가 있었습니다. 관음사 뜰앞 한 쪽에 연꽃 문양을 새긴 사각형의 반석 위에 놓인 자연석이 이채로웠습니다. 어찌보면 사람의 형상이지만 달리 보면 남근석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절에서 가까운 도마천에서 가져다 놓은 듯 하였습니다.
칠성산의 능선으로 오르는 길에 '통정대부 강릉 박공'이란 표지를 세운 묘가 하나 있었습니다. 강릉부를 다스린 고원 원님의 묘지라기에는 그 모습이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후손들이 묘지를 다듬을 때에 박공의 벼슬을 한 계급 올려 세운 표지인 듯 하였습니다. 묘소를 지나 주릉으로 오르는 칠성산의 가지능선은 제법 가파른 비탈길이었습니다. 바위를 돌아 주능선에 오르니 거북이 등짝 같은 비늘갑옷을 입은 적송 흑송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칠성산 주봉에 오르는 능선은 떡갈나무 숲과 붉은 소나무 숲으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동해바다 쪽은 울창한 떡갈나무 숲이고 그 서쪽은 흑송이 드문드문 섞인 적송 숲이었습니다. 남서쪽의 비탈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빼곡이 솟았고 북동쪽의 산비탈은 잎이 무성한 떡갈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본래부터 그리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산불에 그을린 이후에 이루어진 숲인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만. 숲이 깊은 것을 보면 아마도 자연스레 이루어진 숲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떡갈나무 푸른 숲과 붉은 숲의 적송이 이루는 대조적인 장면을 감상하였습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신비로운 형상의 기이한 숲이었습니다.
적송 숲이 끝나는 곳에 이른바 7개의 손가락 바윗돌로 이루어진 칠성대가 있었습니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빠져나와 잡목이 무성한 능선에 올라서니 아름드리 노송이 용트림하며 바위와 놀고 있었습니다.
칠성산의 주봉에서 가까운 963봉은 전망대 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서쪽편의 조망이 일품이었습니다. 발 아래로 산행을 시작한 도마리 마을이 내다보이고 멀리 우쭐우쭐 달려가는 백두대간의 웅장한 모습이 멋들어졌습니다.
963봉을 지나니 10평 정도의 공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칠성대 0.2km, 단경골 3.5km, 법왕사 2.5km, 탑동입구 4.7km'란 이정표가 있었습니다. 이정표가 없었다면 이곳 공터를 정상으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나보다 10분쯤 앞선 일행들은 이곳에서 도시락을 펼쳐놓고 점심을 들고 있었습니다.
김대장이 나를 기다려 냉장고에 얼려 온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권하였습니다. 누룽지 맛이 감도는 포천 막걸리는 단숨에 넘기기가 아쉬울 정도로 감칠맛이 있었습니다. 이어 아트 디자이너 이형이 칡술 한 잔을 슬며시 건네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박형이 집에서 정성 들여 담근 인삼주 한 병을 꺼내 들었습니다. 나와 박형은 멸치 볶음과 열무 김치를 안주하여 인삼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난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해발 981m의 칠성산 정상은 바위와 고사목으로 치장한 작은 봉우리였습니다. 어디 발 디딜 틈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행은 남쪽 주릉을 타고 하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서 간 일행의 발자취를 쫓아 산등성이로 난 길을 무작정 따라가다가 그만 지도상의 길을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접어든 듯 하였습니다. 철탑이 세워진 곳에 이르러 모대장이 나누어준 지형도를 꺼내보았으나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지도상에 방위표시가 그려져 있지 않아 방위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칠성산 주봉에서 유턴 하듯 되돌아 섰어야 하는데 그만 길과 시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몇 잔 술에 취해 길을 잃은 듯하여 발길을 재촉하였습니다. 바쁜 걸음으로 능선을 타고 산을 내려오다 보니 소나무를 베어내는 산 판이 보였습니다. 산판의 주변에 놓인 묘지의 비문을 보니 강릉김씨와 강릉박씨의 합장묘였습니다. 상석에는 잘 마른 북어포와 막걸리잔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나의 고조 할머니도 강릉김씨인지라 어쩐지 나는 묘주의 손자인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순간 버릇없는 손자의 장난기가 발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석에 놓인 잘 마른 북어포를 반으로 찢어 들고 하산하였습니다.
단경골로 이어지는 산 아래에서는 오색 천을 두른 서낭당이 눈에 띄어 무척 반가왔습니다. 칠성님께 자신의 소원을 빌고 빌던 전통 신앙의 성소인 서낭당이 칠성산에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반가운 모습이었습니다. 나의 고향에 있던 서낭당은 이미 40여 년 전에 그 흔적마저 사라지고 없으니까요.
단경골에 위치한 식당에서 위치를 확인하니 일행은 이미 도착 지점의 반대편 계곡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급히 모대장에게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했으나 난청 지역이라 통신이 되지 않았습니다. 단경골을 빠져나가는 봉고차를 잡아타고 강릉 시가지로 나왔습니다.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서 버스기사에게 전화를 하니 통화가 가능하였습니다. 일행 중 5명이 이곳에 선착하여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고 강원도의 별미인 막국수와 회냉면을 주문하였습니다. 막국수는 여러 번 먹어 본 음식이어서 입에 맞았으나 이곳 강릉 회냉면은 이름만 듣던 낯선 음식이었습니다. 일반 생선으로 만든 회냉면일 것이라고 주문하였으나 가자미로 만든 회냉면이었습니다.
지음!
일행 중의 누군가는 쭈욱쭉 하늘로 치솟은 적송을 보고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인의 늘씬 다리가 연상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누군가는 비 맞는 아름드리 적송을 보면 물맞는 여인의 살구빛 고운 몸뚱이가 생각난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문득 고려 때의 승려 일연선사 김견명이 서술한 삼국유사의 한 토막이 생각났습니다.
신라 성덕왕 때의 일입니다. 어느 늦은 봄날, 강릉 태수로 부임하던 순정공이 그의 수로부과 종자를 거느리고 동해 바닷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순정공이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닷가 어느 곳에 점심 자리를 벌였습니다. 그 곁에는 바다를 향해 병풍처럼 둘러선 천 길 높이의 절벽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활짝 핀 철쭉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습니다. 수로부인은 그 꽃을 갖고 싶어 종자들을 둘러보며 물어 보았습니다.
"누가 저 꽃을 꺾어다 나에게 줄 사람은 없느냐?"
그 말을 듣고도 종자들은 난색을 지으며 수로부인의 요구에 아무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침 한 노옹이 암소를 끌고 그 곁을 지나다 수로부인의 말을 듣고서 천길 석벽 위로 올라가 철쭉꽃을 한아름 꺾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시가를 지어 읊으며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쳤습니다.
「자주 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날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순정공 일행이 이틀 길을 더 가서 바닷가 어느 정자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 때 홀연히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납치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순정공은 허둥지둥 발을 구르며 야단을 쳤으나 아무런 계책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 때 또 한 노인이 지나다가 그 계책을 알려 주었습니다.
옛 사람의 말에 뭇사람의 입질은 쇠도 녹인다고 했는데, 이제 바닷속의 한 축생이 어찌 뭇사람의 입질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보오. 토경 내의 백성들을 모아들여 노래를 지어 부르며 막대기로 바닷물을 치노라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순정공은 노인이 일러준 대로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남의 부녀 빼앗아 간 죄 그 얼마나 클까.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사로잡아 구워 먹고 말테다」
뭇사람들이 모여 해가(海歌)를 외치며 막대기로 물가를 쳤더니 그제서야 수로부인을 납치한 용은 부인을 받들고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순정공은 수로부인에게 바닷속의 일들을 물어 보았습니다. 부인은 일곱 가지 보배로 지은 궁전이 있었고, 그 음식은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요리와는 전혀 다르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수로부인의 옷에서는 일찍이 인간 세상에서 맡아볼 수 없었던 신비한 향내가 스며 있었습니다. 수로부인은 자태며 용모가 절세의 미녀라서 매번 깊은 산골이나 연못을 지나다 이처럼 여러 번 신물들에게 납치되곤 했습니다.
지음!
대관령을 넘어 오는 길에 기다리던 장마비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내리는 비는 푸른 숲에도 감자밭에도 옥수수밭에도 골고루 쏟아져 내렸습니다. 하얀 감자꽃이 어른대는 창가에는 대관령의 수묵화도 내려앉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경치요 무심한 산하입니다. 올해의 6.25도 그렇게 땅거미에 묻혀가고 장맛비에 씻겨 가는 푸근한 저녁입니다.
첫댓글 고인돌씨의 글을 접하면 같이 산행하면서도 산을 대하는 맛을 진정 잘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