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식 사랑
첫 목회지 해남에서 1989년 7월 전라도 광주 광산구로 와서 성광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현장 방문도 그곳의 정보도 전무한 상태로 이사하여 보니 그곳은 아파트를 짓기 위해 택지 조성이 된 상태이고
동네는 약 50여 가구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고 교회는 종교부지를 받아 지은교회 큰 교회 2. 다른 교단의 교회들까지
이미 5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중에 가장 늦게 들어간 교회가 바로 저희 교회였다.
교인으로는 저희 부부와 돌 전인 딸아이 이렇게 3명이 전부였다
그때 부천성광교회에서 교회 개척을 도와 주셨는데 성구와 주방용품, 그리고 전도지였다
창립예배 다음날부터 저는 딸아이를 업고 전도지를 들고 동네를 다니고 거기에서 도보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5층 건물 맨셜아파트 몇동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매일 매일 집집마다 찾아 다녔고 오후 퇴근 시간에는
버스 정거장에서 전도지를 나눠 주며 전도를 하고, 그 때 교회 아래층 1층에 부동산이 있었는데 거기 경리 아가씨를
전도하기 위해 틈을 살펴가며 자주 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부동산 경리아가씨가 드디어 교회 예배에 나왔다 친구와 함께
친구가 같이 온 이유는 우리교회가 이단인지 아닌지 봐 준다고 같이 왔다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 전라도에서는 감리교회가 이단이라고 하더라고요
그후 아래층 경리아가씨는 가끔씩 교회를 나왔지만 같이 온 그 친구는 우리 교회 등록 교인이 되었다
등록교인이 된 여자청년도 다른 곳 부동산에서 경리로 일을 하고 있는 청년이였다
그 이후 해남에 있던 청년들이 한명 한명 광주로 오게 되고 청년들 5~6명이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생활비는
부천 성광교회에서 보내 주시는 선교비 20만원이 전부인데 식구는 점점 늘어나니 기본적인 먹거리가
늘 빠듯했었다. 그날도 직장에서 돌아올 청년들을 위해 저녁밥을 하는데 쌀통에 쌀을 톡톡 털어서 밥을 해주고 나서
그때부터 저 혼자서 내일 아침을 어덯게 하나 걱정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시골 어느교회 부흥회 인도하러 가고 없었다, 출근해야 하는 친구들에게 아침에 쌀이 없어 밥을 줄 수가
없다고 할 수도 없고 돈을 빌릴 때도 없고. 동네 특성상 외상을 할 곳도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온다고 강사비를 가지고 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시골 작은교회 집회를 가면 거기 교회 사정에 따라
강사비를 헌금을 하고 올 때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새벽이 되도록 걱정을 하다가 문득 하나님께 화가 났다 ,그래서 하나님 왜 제가 이런 걱정을 해야 합니까?
내가 먹기 위함도 아니고 내 자식을 먹이기 위한도 아닌데 왜요?
저들은 하나님의 자식들이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세요~~ 하고서 이불을 머리까지 씌고 막 잠이 들려는도
딩동딩동~~ 딩동딩동 최인종이 울렸다
속으로 어떤놈이 이시간에 (3시30분 경) 하면서 인터폰을 보니까 여자청년이 근무하는 부동산 사장님이였다
사모님 문 좀 열어 주세요 이른 시간에 죄송한데요 제가 쌀을 좀 드리고 싶어서요 하시는 거였다
이 부동산 사장님의 말씀이 그 전날 문득 내일 낮에 쌀을 좀 가져다 드려야 겠다 잠깐 생각 했는데 그날밤 내내
쌀을 갖다드려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그 새벽에 실례를 무릅쓰고 정미소에 전화를 해서
쌀을 달라고 해서 그 시간에 가지고 오셨다고 하셨다
그때 저는 웃었다. 하나님이 자기 새끼들을 엄청 사랑하시네 ~~~ 하고
참고로 그 부동산 사장님은 여자청년 때문에 잠깐 얼굴을 봤을 뿐이고 그 사장님도 우리 사정을 모르는 상태였고
교회도 다닌적이 없는 분이였다. 물론 그 이후 그 사장님은 저희 교회 등록교인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