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의 남편은 행복했을까? | …인물이야기 2005/09/14 09:18
http://blog.naver.com/sh30141/17365888
------------------------------------------------------*
----------------------------------------------------------------------------------------
신사임당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으로써 한국여성의 표본이며 뛰어난 예술적 자질을 보인 여류 화가였으며 율곡 선생의 어머니로 유명한 대표적인 능력있는 커리어 우먼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인 이원수는 과연 어땠을까?
능력있는 아내를 두고 똑똑한 자식을 둔 그이기에 그의 가정생활은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그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집에도 잘 안들어가는 등 신사임당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은 다른 여자와 동거를 하게 된다.
이원수의 다른 여자는 신사임당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주막집 권씨였는데 그녀는 술도 매우 좋아하고 성격도 거칠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원수는 신사임당 보다는 주막집 권씨를 더 좋아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신사임당이 지적이고 능력있는 여인임에는 분명했지만 남편 입장에서 필요로 하는 부인의 애교라든가, 남편에 대한 자상한 배려라든가 하는 아내로써의 아기자기한 맛이 없었을 것이다.
이원수가 퇴근하여 집에 왔을 때 따뜻한 아내의 미소보다는 심각한 얘기로 남편을 맞이하였을테니 이원수 입장에서는 집에 별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안생겼을 성 싶다.
그래서 급기야는 다른 여자가 생겼는데 그여자는 신사임당의 재능이나 지적인 수준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신사임당에게서 채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성격 측면이나, 행실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원수가 아끼고 결국에는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곧 정식결혼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신사임당과 이원수의 결혼 과정을 살펴보자.
신사임당은 가난하고 한미한 집안의 여자로서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들과는달리, 태어날 때부터 행복한 인생을 살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신사임당의 집안에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어른이 적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신사임당을 아끼고 사랑했던 아버지 신명화는 별다른 벼슬 없이 진사에 머물렀던 인물이지만, 딸 신사임당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신사임 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선비나 관료로서의 길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이 그만큼 더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 진사는 부인 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두었고, 신사임당은 그의 둘째 딸이었다.
신 진사는 둘째딸 신사임당의 성품과 자질을 아껴서 그 어느 딸보다도 신사임당을 사랑했는데, 신사잉당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가적 재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아버지의 절대적인 후원에 힘입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신 진사가 사윗감을 고르는 데서 보여 준 태도를 보면 그가 딸의 재능을 얼마나 아꼈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신 진사가 신사임당의 배필을 고를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의 서화 활동을 키워 줄 수 있는 상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고난 재능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그녀의 예술가론서의 길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하는 점이 신 진사의 주된 관심사였다.
지체 높은 권문세가의 집안에서 새로 시집 온 새댁의 그림 활동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반대로 집안이 너무 볼품이 없거나 가난한 경우에는 살림살이에 바빠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의 생각이었다.
딸의 재능을 키워 줄 사윗감을 고르던 신사임 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선 택한 인물은 이원수라는 총각이었다.
이원수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홍씨 슬하에서 독자로 자랐다.
무엇보다도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를 만족시켰던 조건은 이원수가 편모 슬하에서 독자로 자랐기 때문에 아마도 신사임 당에게 시집살이를 시킬 만한 가족이 없을 뿐 아니라, 신사임 당의 어머니 이씨 부인처럼 친정살이가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문벌이나 가문 재력을 좇아 혼인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신사임 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특이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신사임 당이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한들, 이처럼 트인 생각을 가진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 자질을 꽃피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예상대로 마음씨 착하고 겸손한 이원수와 그의 어머니 홍씨 부인은 신명화의 결혼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드디어 1522년(중종 17년) 6월20일 강릉 북명촌, 오늘날 오죽헌이 있는 그곳에서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혼례가 치러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몇 달 후 신사임 당의 아버지 신명화는47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였다.
신사임당의 결혼 생활은 처음에는 비교적 순탄한 듯 보였다.
그녀는 선(瑄), 번(燔), 이(珥), 우(瑀)의 네 아들과 세 딸을 낳았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과 일곱 남매를 키우면서 글공부와 그림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남편 이원수는 나이 50줄에 들어서면서 수운판관(조세로 거둬들인 곡식을 운반하는 선박을 관리하는 정5품 벼슬)의 벼슬을 얻었지만,그는 아내 신사임 당과는 달리 학문에 별 뜻이 없었다
아마도 신시임 당은 남편에게 아버지 신명화처럼 자상하고 인자한 사랑을 기대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남편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시련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된다.
남편에게 다른 여인이 생겨 아예 방을 얻어 살림을 차린 것이다.
아버지 신명화는 평생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부인과 떨어져서 생활을 했지만, 주변에 여인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그의 외할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일 없이 평생을 산 분이었다.
때문에 남편의 외도는 신사임당에게 예기치 못했던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다.
어찌 보면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를 두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사회에서 남편의 외도가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현모양처의 표상인 동시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던 신사임당의 남편이 다른 여자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의아스럽다.
東溪漫錄에 적혀 있는 신사임당과 그의 남편 이원수의 대화를 보면
신사임당 :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이미 7남매의 자리가 있는데, 또 무슨 자식을 더 두어 『예기』에 가르친 훈계를 어길 수가 있겠소?'라며 신사임 당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합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남편이 재혼하지 말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은 예법과 자녀 교육을 들어 남편의 재혼이나 외도를 강력히 거부하고 있지만, 결국 현실은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주막집 여인 권씨를 만나 딴살림을 차렸고, 신사임당의 사후에는 그녀를 아래로 맞아들였다.
부부 일심동체, 부창부수란 말이 있듯이 부부는 손발이 맞아야 상호 존중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신사임당은 그의 남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었고, 반면에 남편 이원수는 출중한 아내와 지적인 교감을 나눌 만큼 학문적이지도 뛰어나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를 둔 남편의 비애와 허전함이 이 원수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그래서 아래를 따라 서울서 강릉을 오가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구석을 채워 줄, 자신을 인정해 줄 수 있는 여인을 원했을 것이다.
그때 마침 나타난 여자가 권씨 부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사임당과는 반대로 현모양처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신사임당도 평범한 아낙네들과 똑같이 남편의 외도를 경험하며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했으니, 세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행복하고 완벽한 결혼 생활은 누리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임당은 지(知)와 덕()熱을 겸비한 총명하고 인자한 어머니였지만, 자식들의 곁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그녀는 남편의 외도로 인한 충격이 겹쳐서 그랬던지 , 병약한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나이 겨우 48세에 세상을 떠났다.
자녀들이 한참 어머니를 필요로 할 나이에 신사잉당이 세상을 뜨자, 남은 자식들은 새어머니 권씨 부인 밑에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잉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격이었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빈 독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어댄다든가 노끈으로 자살 소동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참다 못한 이이가 가출하여 절로 들어갈 정도였으니,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이 악덕스런 서모 때문에 오히려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