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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촌이란 지명이 남마창일대에서 항일하다 희생된 항일투사 박영산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것은 전부터 알고있었지만 박영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잘 몰라 언젠가는 상세히 알고싶었는데 당년에 항일투사 박영산과 함께 했던 리의필의 아드님인 리명천씨가 찾아오게 되여 답사와 방문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리의필씨와 함께 영산촌에서 20여리 상거한 항일투사 박영산이 체포되였던 차구(岔沟)바위골을 찾았을 때의 마음은 무어라 형언할수 없었다. 소한을 눈앞에 둔 엄동의 날이였지만 전혀 추운줄을 몰랐으며 오히려 손에서 땀까지 배여나왔다. 그사이 세월은 무정히도 몇십년이 흘렸지만 산천초목은 여전함에 이름할수 없는 감정이였다. 리명천씨와 함께 영산촌의 남청룡로인장님(84세)을 찾아갔을 때는 오전 아홉시경이였으며 따뜻한 온돌방에서 비상한 기억력으로 조리정연하게 이야기하는 로인님과 마주하는 내내 마음은 설레임 자체였다고 하면 가장 적절할것 같다. 남청룡로인장님은 항일투사 박영산을 직접 보았고 또 전후시말을 제일 잘 아는 분이였다.
남호두일대에서의 활동
박영산은 쏘련 극동군 사령부의 조직부부관으로 사업하였으며 한어는 물론 로어, 일어에 능통하여 쏘련의 파견을 받고 녕안일대로 정찰임무를 수행하고저 잠입하게 되였는데 그때가 1938년이였다. 박영산은 1,70메터가 넘어되는 신장에 아주 멋스럽게 잘 생긴 얼굴이였으며 사격술도 아주 뛰여나고 무예도 익혀 동작이 날렵하였다 한다. 당시 박영산과 함께 동행한 이들로는 마씨라는 한족과 김씨라는 조선족이였는데 그들은 박영산을 도와 정찰임무를 수행할뿐만아니라 박영산을 호위하는 임무도 수행하기로 되였었다. 그때 일본관동군 한개 려단이 녕안현석두에 주둔하고있는 상황이였다.
박영산이 제일 먼저 발을 들여놓은 곳이 녕안현경박공사 남호두 방신구 학원부락이였다. 학원부락에는 리의필(1903년생)이 살고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하였다. 하여 집에 일군을 두려고 하였는데 그곳에 발을 붙이려고 하는 박영산이 이 소식을 접하게 되였으며 마침내 리의필댁에 일군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물론 초기에는 리의필도 박영산을 일군으로만 생각했으며 박영산 또한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고 일군으로서만 충실하였었다. 허나 시간이 감에 따라 리의필의 눈에 박영산의 일거일동이 그저 일군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맞지 않게 들어왔으며 박영산도 차츰 리의필에게 혁명사상을 심어주기에 이르렀다. 하여 그때로부터 리의필은 혁명에 어섯눈을 뜨게 되였으며 박영산이 일군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일들을 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박영산의 교육으로 리의필도 함께 혁명사상을 전파하게 되였는데 손잡고 당시 학원마을 사람들을 크게 선동하게 되였는바 이것이 일본놈들의 신경을 예민하게 하였다. 하여 일본놈들은 조선사람들을 그대로 두었다간 무슨 일이라도 날것 같아 1942년 네개마을의 210여가구를 강제이주시키기에 이르렀는데 그 이주지점이 바로 산골인 남마창이였다.
잘못된 만남
남마창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막힌 골안이여서 만주국때부터 말먹이는 장소로 되였기에 마창이라고 이름을 갖게 되였는데 그때까지만해도 미개척지였다. 강제이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주민들은 미개척지에서 새로이 삶의 터전을 닦지 않을수 없었다. 방신구의 조선족들이 모두 강제이주하게 되자 박영산도 더는 그곳에 머무를수 없게 되여 다시 자리를 옮긴 곳이 바로 남마창과 20여리 상거한 차구였었는데 당시 차구산골에는 대여섯집이 귀틀집을 짓고 농사로 살아가고있었다. 박영산이 방신구를 떠나 차구에 와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박유덕이였다. 신분은 로출하지 않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중 같은 박씨여서 형제를 맺게 되였고 박유덕이 나이가 이상이여서 형님으로 모시면서 호형호제사이까지 가게 되였으며 차츰 시간이 감에 따라 박유덕은 박영산이 하는 일이 무엇이고 신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였다. 그후로 둘사이는 끔찍하게 되여 박유덕이 사냥할 때면 박영산의 총을 빌려쓰기까지 했다한다.
그때 남마창에는 인명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식해도 아주 점잖아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슬하에는 세자식이 있었는데 맏아들 인수천은 남마창부락의 부락장이고 목사였으며 둘째아들 인경천은 위마창경찰분주소소장으로 있었는데 일본놈들의 앞잡이로서 공산당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죽여 두손에 피가 랑자한 놈이였다. 인경천은 배짱이 세고 사격술이 좋았으며 성품이 포악하여 그일대 사람들은 인경천이라면 부들부들 떨 지경이였다고 한다. 셋째아들 인덕천은 그때 학생이였는데 남청룡로인장님(당시 18세)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하여 간혹 인덕천이네 집에서 함께 숙제공부를 하고 난후이면 덕천이가 자기 형의 칼을 보여주군 하였는데 칼이 무려 7자루나 있었다고 한다. 놀음에 탐하거나 늦게까지 숙제를 하다보면 때로는 밤이 늦어 덕천이와 함께 잘때도 있었는데 밤중이면 인경천이 벽에 걸어놓은 칼에서 윙 – 윙 소리가 나기까지 하여 머리카락이 쭈볏이 일어서고 소름이 끼칠 지경이였다고 한다.
인경천이 일본놈들의 앞잡이였다면 박유덕이 또한 인경천의 앞잡이였었는데 항일하는 공산당을 붙잡으려고 혈안이 되여 날뛰는 인경천에게 호형호제로 그렇듯 절친하게 보내는 박영산이를 고해바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인경천이가 박영산을 생포만한다면 많은 돈을 줄수 있다고 하였으며 박유덕은 그 돈의 유혹을 떨쳐버릴수가 없어 결국 박영산을 물어먹기에 이르렀던것이다.
리의필과의 재상봉
후일 박영산이 남마창으로 이주한 리의필을 우연하게 만나게 되였는데 두사람은 여전히 친숙한 사이로 되였다. 당시 산속에서 활동하는 박영산에게는 소금과 성냥이 제일 귀중한 물건이였는바 박영산이 리의필에게 부탁만하면 리의필은 어김없이 소금과 성냥을 공급해주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박유덕이 리의필과 박영산이 아주 가까운 사이임을 눈치채고는 그 사이에 끼여들면서 의도적으로 그들의 사이를 리간질하였을뿐만아니라 천방백계로 리의필과 거래를 못하게 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리의필과의 거래가 잦게 되면 인경천과 박영산을 생포할 계획이 파탄될수도 있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리의필은 박영산에 대한 모든 일을 가슴에 깊이 묻고 비밀에 붙였으며 박영산의 부탁이면 무조건 들어주었다.
간사한 계교
그무렵 박영산은 일본군들의 거점과 공장들에 대한 정찰임무를 거의 완수해가면서 한편으로는 쏘련으로 돌아갈 준비도 다그치게 되였다. 어느날인가 박영산은 박유덕에게 고아로서 쓸만한 조선족청년을 쏘련으로 갈 때 데리고 가려 하는데 물색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박유덕이 그 부탁을 듣자 곧바로 그대로 인경천에게 알렸는바 인경천은 박영산에게 접근할 목적으로 그날부터 석달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수염도 머리도 깎지 않았다. 어느날인가 박유덕과 함께 인경천의 앞에 초라한 행색의 고아로 나설 심산이였으며 그로부터 기회를 엿보아 박영산을 생포할 목적에서였다.
1944년6월의 어느날 박영산이 박유덕을 만났을 때 이제 곧 쏘련으로 돌아가겠는데 막걸리 생각이 난다고 말하자 박유덕이 며칠후에 자기 아들 돌생일이여서 막걸리를 빚고있으니 마시게 가져오겠다고 하였다. 실은 아들 돌생일도 거짓인 계교였다. 그럭저럭 며칠이 지나 박영산이 이튿날 쏘련으로 떠나려고 모든 준비를 마친날 박유덕이 쏘련으로 함께 보낼 고아를 데리고 막걸리를 가져오겠다고 하였다. 그날 박영산과 마씨, 김씨 세사람은 차구의 산비탈에 숨어서 산아래 굽이돌이를 바라보고있었는데 오전 열시쯤 몇사람이 막걸리가 담긴 술통과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오는것이 보였다. 그날 동행한 이들로는 인경천, 박유덕, 윤창호, 김용구 등이였다. 일행은 만나 서로 수인사를 나누었는데 인경천은 고아로 자청하면서 박영산을 따라 쏘련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화창한 초여름의 날씨에 임무도 원만히 완수하고 데려갈 고아까지 왔으며 또 막걸리까지 있게 되자 박영산은 마음의 탕개를 늦추기 시작하였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 빙 둘러앉아 막걸리를 들기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마씨는 웬지 이상한 감을 느끼였는지 술을 사양하고는 한쪽에 총을 잡고 서있게 되였다. 인경천이 술을 마시면서 어림짐작해보니 술을 마시지 않고 서있는 마씨가 섬찍해났으며 만만치 않은 적수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인경천과 박유덕일당들은 박영산과 김씨에게 흥을 돋궈주면서 막걸리를 억수로 권하기에 이르게 되였다. 술이 얼근하게 되자 인경천이 박영산에게 이제 자기도 쏘련으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겠지만 여직껏 총을 만져도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한번 쏴볼수 없겠는가고 청을 들었다. 그러자 술이 거나하게 된 박영산이 흔쾌히 동의하게 되였는데 술을 마시지 않은 마씨가 한사코 말리였지만 박영산은 형님으로 모신 박유덕을 전적으로 믿었기에 마씨의 말을 귀등으로 흘리고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 주었다. 그러자 인경천이 자기는 총을 다루어보지 못했으니 박영산보고 먼저 시범으로 쏘아보라고 하였다. 박영산이 총을 들어 앞의 나무에 대고 한방 쏘고 그대로 총을 인경천에게 넘겨주자 인경천이 총을 받아쥐고 나무를 겨냥하는 척하다가 서있는 마씨를 단방에 명중하여 쓰러뜨리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자리에 있던 박유덕을 비롯한 일당들이 일시에 일어나서 박영산을 쓰러뜨리고 제압하였으며 그 자리에 앉아있던 김씨는 눈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태를 감당할수 없게 되자 미처 정신도 차리지 못한채 냅다 뛰기 시작하였다. 김씨는 축지법을 알아서 산을 주름잡아 하루에도 몇백리씩 다녀올수 있는 정도였기에 취김이였지만 아주 날렵하게 내뛰였다. 인경천이 냅다뛰는 김씨를 향해 총을 쏘았는데 첫발은 다리를 명중하고 두번째는 관통상, 세번째에야 명중하여 쓰러뜨리였다. 무예를 익혀 날렵하고 사격술도 좋은 박영산은 미처 손도 써보지 못한채 일당들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당시 박영산은 그때까지 진정 형으로 모시고 믿었던 박유덕에게 “개새끼야, 너 이따위 놈이였나?”라고 하면서 대성질호했다 한다.
강철같은 의지
늦은 점심시간이 지나서 자위단들이 하늘공중에 총을 쏘면서 “공산당을 잡았다!”고 득의양양해서 고함지르며 마을로 들어왔는데 수레에는 일본군복색을 한 박영산이 묶이워있었다. 현재 영산촌중심에 있는 공소합작사터가 그제날 경찰분주소자리였는데 박영산은 묶이운대로 분주소로 압송되여 왔다. 인경천과 마주하고 앉은 박영산은 인경천의 낯에 침을 마구 뱉으면서 구경온 사람들에게 “동무들, 뭐 볼게 있습니까? 다 같은 조선족입니다. 이제 곧 해방의 날이 올것입니다. 오늘 내가 죽고 김씨만 살았어도 이 정도는 아닐겁니다”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였다. 당시 남청룡로인님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은 처음으로 동무들이라는 낱말을 들어보았다고 한다. 저녁때가 되자 일본군을 실은 두대의 자동차가 뽀얀 먼지를 일구면서 마을로 들어왔으며 조금후 박영산을 압송하게 되였다. 차에 오른 박영산이 웃옷호주머니에서 굵은 만년필을 뽑아 차아래에 던지면서 “이 만년필을 리의필에게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한다. 허나 당시로서는 그 만년필을 주을수도 없는 상황이였으니 만년필이 어떻게 되였는지 알길이 없다. 박영산은 목단강 애하(爱和)감옥에 실려갔으며 해방을 맞기 직전 인경천이 자기 손으로 직접 박영산을 총살해버리겠다고 떠벌리였다하는데 박영산이 정말 인경천의 손에 희생되였는지 아니면 일본놈들에게 희생되였는지, 희생되였다면 어떻게 희생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있다. 단 리립필의 말에 따르면 박영산은 강직하고 대바르기에 절대로 굽어들 사람이 아니라는것이였다.
그후의 이야기
후에 쏘련군대가 들이닥쳐 인경천을 잡으려고 하자 눈치빠른 인경천이 지붕우로 피신하는 바람에 결국 잡지 못하였다. 당시 인경천은 쏘련군까지 진주하여 더는 일본놈들에게 매달릴수 없음을 간파하게 되자 그날 밤으로 본댁과 첩(본댁이 아이를 낳지 못하여 한마을 엄양섭의 딸을 첩으로 맞아들였는데 당시 만삭이였다 한다)을 이끌고 그사이 일본놈들의 앞잡이노릇을 하여 모은 숱한 재물을 가지고 도망치게 되였는데 이 소식을 알고 뒤쫓았는데 인경천이 끌끌한 자위단을 호위해서 도망치고있어 멀리까지 쫓았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게 도망을 친 인경천은 조선에 넘어갔다가 후에 다시 한국으로 넘어갔으며 6, 25전쟁당시에는 한국국방군7사단에 편입되여 공을 세워 유공자로 되였다한다. 1972년에는 한국방송에서 인경천이 1천여만원의 돈을 사회에 기부했다는 방송까지 했다고 한다. 듣는 말에 의하면 인경천의 자식들은 현재 한국경기도 김포시에서 꽃가게를 운영하면서 살아가고있다고 한다. 참으로 세상에 가늠할수 없는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며 한 하늘아래에서라도 환경이 다르면 변신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한다.
그후 인경천의 형님 인수천도 조선으로 이주하였고 동생 인덕천은 마을을 떠나 길림성왕청현으로 이주하였으며 후에 왕청현 가무단에서 사업했다고 한다. 해방을 맞아 1946년에 마을의 빈곤골간단에서는 인경천과 손잡고 박영산을 체포하여 일본놈들에게 넘긴 박유덕, 윤창호, 김용구 등을 체포하여 공판대회를 연 즉시로 사형에 처하였다. 당시 즉석에서 살해당한 마씨와 김씨는 차구에서 살고있던 농호들이 산에 매장하였댔는데 후에 마을골간협회에서 나서서 다시 마을 동구밖으로 이장하고 비석을 세워 기념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박영산을 기념하여 마창촌을 영산촌으로 고치게 되였다. 지금도 영산촌의 동구밖에는 마씨와 김씨의 무덤이 있는데 전에는 소학교학생들이 청명과 추석이면 성묘하였으며 애국교양기지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리의필과 박영산
박영산이 녕안일대로 와서 제일 처음 알게 된 사람이 리의필이였고 또 박영산의 하는 일들에 대하여 끝까지 비밀로 지켜준 사람이 리의필이였다. 리의필은 박영산과 거래하면서 사격술도 배워 후일 일등 사냥군으로 손꼽히기까지 하였다. 헌데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은 리의필도 무사히 넘길수 없었다. 박영산과 거래했다면서 왜 박영산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였는가 하는 억울한 무함속에 오류분자의 모자를 쓰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 고생을 겪어야 했었다. 허나 리의필의 마음속에는 항상 박영산이 존경스러웠고 박영산이 우러러보이여 늘 자식들에게 이야기해주었다고 한다. 197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자식들에게 이야기해주었으며 어느날인가 돈 잘벌면 마을 동구밖의 마씨와 김씨의 묘지를 잘 수건해주라고 부탁까지 하였다고 한다. 리의필의 아들인 리명천씨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이제 한국에 갔다가 돌아오면 어느날인가 꼭 묘지를 잘 수건할것이라고 자신의 뜻을 밝혀왔다.
그 정신은 영원할것이다
투사들, 그리고 투사들과 어깨곁고 싸워온 이들이 비록 지금은 저세상사람으로 되였지만 후대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잊지 않고 그들을 기리고있어 위안되는 마음이였으며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긴 투사들의 정신은 영원할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2년1월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