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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한국 | 북한 | ||
관계수립 | 修交日 :1989-07-09 | 修交日 :1968-01-30 斷交日 :1980-10-10 | ||
공관개설 | 駐 이라크 | 駐 韓 | 駐 이라크 | 駐 북한 |
상주:89.9.8 | 겸임: | |||
공관장 | 장기호(2004-12-21) | |||
겸임국 | ||||
주요협정체결 | -뉴스교환협정(82.5) -무역 및 경제기술과학협력협정(83.3) -항공협정(85.5) -문화협정(87.7) -외교공관부지 교환협정(87.8) -뉴스교환협정체결연장(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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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남북한 통상 | 通商 (2002) - 수출: 3,854만불(원유) - 수입: 8,646만불(기계류,철강제품) |
通商 (2002) - 수출: - 수입: | ||
남북한의 주요진출 | -KOTRA(99.10) -現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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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민수 | 僑 民 : 0名 滯留者 : 0名 |
僑 民 : 0名 滯留者 : 0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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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개관
서아시아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땅에 있는 나라. 예로부터 두 강 유역의 <비옥한 초승달지대>에 위치하여 관개농업으로 번영하였다. 1920년대에는 북부지방에서 풍부한 석유자원이 발견되면서 수입이 정부의 최대 재원이 되어 경제개발에 힘쓰고 있다. 이란·쿠웨이트 등 6개국과 국경을 접하며 지리적인 이점으로 인해 정치·경제의 양면으로 중요성이 높으며 미국·소련 등 외국세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Ⅱ. 약사
BC 3000년대에 슈메르족이 도시국가를 형성했고, 셈족의 아커드 왕국을 거쳐 BC 2000년대에 바빌로니아제국이 성립되었다. BC 1000년대에는 신바빌로니아제국이 번영하였다. 그 뒤 아케메네스조, 파르티아 왕국, 사산조 지배를 받았으며, 7세기 전반 이슬람·아랍군에 의해 정복당했다. 우마이야조(661∼750)와 바그다드를 수도로 정한 압바스조(750∼1258) 시기에는 이슬람 세계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으나 1258년에 몽고의 침입으로 붕괴되었다. 그 후 티무르 사파비조·오스만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16세기 이후 오스칸 투르크제국의 지배는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20년에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았고, 투르크를 아라비아 반도에서 쫓아낸 메카의 명문 하쉼가의 파이잘이 1921년 이라크 왕국을 건설하였다. 32년 10월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와 더불어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완전한 독립왕국이 되었다.
55년 2월, 영국, 터키, 이란, 파키스탄과 바그다드 조약기구를 결성했다. 58년 7월 14일 카셈 장군이 거느리는 자유장교단이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카셈정권은 59년 3월 바그다드 조약기구를 탈퇴 친소경향을 강화했으나 63년 2월 바스당계 장군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카셈 장군을 살해했다. 같은 해 11월 알레프 대통령이 체제 내 쿠데타로 바스당에서 축출했다. 68년 7월 17일 군부와 바스당 온건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크르 장군이 대통령 겸 혁명지도평의회(RCC) 의장으로써 전권을 장악했다. 바크르 정권은 72년 4월 소련과 우호협력조약(기한 15년)을 체결, 친동구권 노선을 강화하고 6월 이라크 석유(IPC)의 국유화를 추진하여 75년 말까지 국내의 모든 석유회사를 국유화 시키기도 했다. 75년 3월 이란의 팔레비 정권과 아르제 협정을 체결하고 이라크 영토 내 쿠르드반군파에 대한 이란측의 지원을 중지시키는데 성공하고 6월 이란과 국경확정조약에 조인했다.
▼ 이란·이라크 전쟁 … 79년 7월 16일 바크르 대통령이 퇴임한 직후 사담 후세인 혁명평의회 부의장이 새 대통령에 취임했다. 80년 9월 17일 후세인 대통령은 알제 협정의 파기를 선언했다. 같은 달 22일 이라크군은 이란군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82년 6월 이라크군은 이란영토 내에서 철수하였으나 84년 3월 이란·탱커에서의 공격을 개시하여 전화는 페르시아만을 뒤덮었다. 88년 4월에 이라크군은 빼앗긴 땅을 회복하고 8월 20일에 정전에 합의했다. 90년 8월 이라크는 알제협정의 재수락 등 이란측의 평화조건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 걸프전쟁 … 90년 8월 2일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위기는 91년 1월 15일 무력행사를 용인하는 안보리 결의678호의 기한이 끝나 17일 새벽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군이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개시하며 걸프전쟁이 시작됐다. 이라크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며 응전했으나 다국적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에 눌려 개전 직후부터 패색이 농후했다. 다국적군은 2월 24일에 지상전을 개시하여 이라크군은 패배했고, 쿠웨이트는 26일 해방됐다. 부시 미대통령은 28일 전투정지를 명령했다. 4월 3일 안보리는 항구적인 휴전결의687호를 채택하고 이라크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11일 정전이 정식으로 발효됐다.
▼ 체제강화 … 95년에 유력 씨족인 도라이미와 공화국방위대의 장병들에 의한 반란이 발생했다. 8월에는 정권의 2인자로 후세인 대통령의 매제인 후세인 카멜 중장(전 공업광물자원장관)과 친동생 사담 카멜 대위가 요르단으로 망명했다. 이 들은 96년 2월에 귀국했지만 살해당했다. 95년 10월 후세인 대통령은 대통령 선출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99.96%의 득표율(이 기록은 2002년 10월의 국민투표에서 100%를 얻음으로써 깨졌다...)로 신임을 받고 96년 3월 걸프전쟁 후 첫 의회선거에서도 바스당이 압승했다. 같은 해 1월 바그다드 근교에서 대통령의 차남이자 치안부문 책임자 쿠사이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일어나고 12월에는 정권의 2인자로 대통령의 장남인 우다이의 암살미수수건이 일어났다. 우다이는 중상을 입었지만 97년 6월에 퇴원했다.
Ⅲ. 지형·기후
국토는 크게 셋으로 나눈다.
① 메소포타미아·평원지역: 티그리스·유프라테스 두 강의 유역.
② 북동산악지대: 자그로스 산맥·쿠르디스탄 지방.
③ 남서사막지대: 국토의 태반을 차지하며 서쪽은 시리아·네푸드 두 사막에 이어지고 건조한 계곡이 많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서 한서의 차가 심하여 여름은 비가 거의 오지 않고 무더위가 계속된다. 바그다드의 1월 평균기온은 9.9°C, 7월에는 34.8°C. 여름에는 고온건조하여 40°C 이상이 되기도 한다.
Ⅳ. 정치
【유엔제재 흔들기】 유엔안보리는 90년 8월 6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 (1) 이라크 원유 등의 수출, (2) 해외로부터의 투자 등 경제활동 일체를 금지하는 대이라크 제재를 발동(결의안 661)했다. 91년의 쿠웨이트 철수 후에도 대량파괴병기의 폐기 미확인 등의 의유로 제재를 계속하고 있다.
90년 9월의 안보리 결의안 670과 미-영국 양국에 의한 [비행금지구역](북위 33도 이남, 36도 이북)이 설정되어 이라크에서의 항공기 이착륙은 제한되어 왔지만, 이라크 정부는 2000년 8월 17일 바그다드 국제공항의 운영을 약 10년만에 재개했다. 이틀 뒤인 19일에는 러시아의 비상사태부 대표단, 9월 17일에 러시아 석유기업간부단, 22일에 프랑스 인권단체도 항공기로 차례차례 방문하는 등 이라크 포위망의 완화가 이뤄지고 있다. 요르단, 예멘, 시리아, 튀니지, 모로코,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도 항공기를 들여보내고 있다. 11월 5일에는 바그다드에서 바스라, 모술을 잇는 2개 노선으로 국내선 정기여행편의 운항을 10년만에 재개했다. 아지즈 부수상은 같은 달 25일 시리아, 라마단 부대통령은 26일 인도 방문 시에 각각의 특별기로 방문했다.
8월 10일 석유수출국기구(OPEC) 의장국 베네수엘라의 챠베스 대통령이 이란으로부터 육로로 바그다드에 입국하여 후세인 대통령과 회담했다. 걸프전쟁 후 국가원수로는 첫 이라크 방문이라 환대를 받았다. 11월 1~2일에는 요르단의 라게브 수상도 방문했다.
▼ 9월 위기설 … 2000년 9월 4일 이라크군 전투기가 남부의 [비행금지구역]을 넘어 사우디아라비아 영공을 침범했다. 14일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은 [군사력을 행사할 용의가 있다]고 밢했다. 같은 일자 이라크지 [앗-싸우라]에서 샤힌 석유차관은 쿠웨이트가 이라크 남부로부터 석유를 도굴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석유를 도난 당하지 않기 위한 적절한 계획을 실행한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이라크의 진의를 놓고 긴장이 고조디었다. 뉴욕의 원유선물시장에서는 일시적으로 1배럴 당 36달러를 넘어서는 등 걸프전쟁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쿠르드人 총선거】 반정부 쿠르드 조직인 KDP, PUK의 연합체 [쿠르드 전선]이 92년 5월 19일 처음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족수 100명의 쿠르드인의회 의원을 선출했다. 결과는 KDP가 50.2%, PUK가 49.8%를 획득 의석을 50개로 나눴다. 6월 4일 북부의 아르빌에서 제1회 의회가 열렸다. 제1회 의회에서 동시에 실시된 최고지도자 선출선거에는 유력한 후보인 KDP의 벨자니 의장과 PUK의 타리베니 의장이 당선에 필요한 51%의 표를 얻지 못해 재투표에 들어갔다. 그러나 KDP, PUK의 지지자 사이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재투표는 연기되었다. 후세인 정권이 선거를 인정하지 않자, 선거는 터키에 주둔하는 미국 전투기들이 이라크군에 대해서 저공의 위협비행을 하는 동안에 실시되었다. 쿠르드인 의회는 10월 4일, 후세인 정권붕괴 후 쿠르드 지구가 이라크와 연방국가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선언을 채택하며 예전보다 더욱 강한 독립의지를 보이고 있다.
▼ 쿠르드人 동지끼리 충돌 … 터키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터키 남동부의 반정부조직인 쿠르드노동자당(PKK)의 게릴라가 터키군의 작전을 피해서 이라크측의 쿠르드人 지역으로 국경을 넘어갔다. 터키 정부가 물자원조를 제공하여 이라크의 쿠르드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자 KDP등 이라크·쿠르드는 10월 4일 이라크 영내의 PKK진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하여 쿠르드인 동지끼리 적과 아군으로 갈려져서 전투에 돌입했다. 전황은 터키에서 무기원조를 받는 이라크·쿠르드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됐다. 11월 초순에 PKK측의 2500명이 KDP측에 투항했다. PKK는 KDP와의 사이에서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는 게릴라의 안전을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 전투가 종결됐다.
【반정부 연합조직의 발족】 이라크 반체제조직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이라크 반체제조직 세계회의]가 92년 2월 14, 15일, 쿠르드인 조직 등 25개 조직이 참가한 가운데 워싱턴에서 개최됐다. 6월에는 빈에서 반체제조직인 이라크 국민회의(INC, 본부 런던)를 중심으로 PKK, KDP등이 참가한 공동투쟁회의가 이라크의 민주화와 경제개혁에 관한 계획을 확정했다. INC는 반체제조직의 연합체로써 10월에는 각 조직 등의 236명이 다시 사라텐에 모여 총회를 개최했다. 총회에서는 반후세인 투쟁을 시도하는 최고 지도자인 쿠르드족의 발자니 의장, 이슬람 쉬아파 측의 후보로 알우왈름 노사, 망명중인 나기브 전 장군의 3인을 선출하고 그 중에 25명의 집행위원을 뽑았다. 후세인 정권 후의 이라크의 상황으로써 쿠르드, 쉬아파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연합국가구상도 승인했다.
▼ 쿠데타 미수보도 … INC는 7월 2일, 이라크에서 대통령 경호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진압됐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즈지도 미정부고관의 얘기를 통해 위와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보도에 의하면 대통령 경호대의 장교 4명이 바그다드 시내에서 후세인 대통령의 차를 습격해서 암살할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내각개편】 후세인 대통령은 7월 30일, 3명의 각료를 교체했다. 악화된 경제를 본격적으로 재건해 보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으로 측근의 호타일 외무부장관을 세무장관에 앉히고 압달쟈파 세무장관과 하시미 고등교육과학연구장관을 해임했다.
【차례로 숙청】 94년 5월, 바그다드 주재 외교관의 정보로 인해 오랜 기간 후세인 정권을 지지해 온 이브라힘 혁명지도평의회(RCC) 부의장파의 장군 4명이 정부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다수의 군간부가 이에 항명, 배치전환의 처분을 받았다. 숙청의 대상으로서는 후세인 대통령의 출신지인 티크리트에서 가까운 마을 등에서 사는 관계자들이다. 걸프전쟁 이는 이래의 경제제재로 정치기반이 약체화되고 있는 것을 알려준다. 10월에도 이라크공화국 방위대의 간부장교 등 몇 명이 후세인대통령의 암살을 모의했다하여 처형되었다. 이라크 반체제파는 11월 정부가 성직자와 군장교를 포함한 반체제파 1000명 이상을 정부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수상 해임】 후세인 대통령은 5월 29일, 호다일 수상을 해임하고 대통령 자신이 수상직을 겸임하여 라마단 부대통령과 주바이디 혁명지도평의회원을 부수상(겸임)으로 임명했다. 유엔 경제제재에 의한 생활수준의 저하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이다.
【쿠르드인 동지 간의 충돌】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인 지구에서 5월 초 2대 세력인 쿠르드민주당(KDP)과 쿠르드애국동맹(PUK)의 무력항쟁이 발생했다. 같은 달 30일에 일단 정전교섭 개시에 합의했지만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전투가 계속되었다. 전투에서는 이란의 혁명방위대와 친이란의 쿠르드인 이슬람원리주의조직이 KDP측에 붙었기 때문에 PUK으로의 월경공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다이 당선】 2000년 3월 27일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어 쿠르드인 지배지역에 할당된 30의석을 제외한 220의석에 512명이 입후보했다. 후세인 대통령의 장남인 우다이가 바그다드의 제5 선거구에서 1등으로 당선했다.
우다이는 96년 12월의 암살미수로 중상을 입은 후 공화국방위대의 실권을 장악한 차남 쿠사이가 후계자로서 우위에 섰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우다이가 경영하는 유력지 [바벨]은 2000년 4월 17일부로 "형제 불화설은 반체제파가 흘리는 유언비어"라 부정하며 "형제는 대통령의 양 눈이자, 2개의 검"이라며 이들의 결속을 강조하기도 했다.
【공습이 계속됨】 국영이라크통신은 2000년 4월 6일 [비행금지구역]을 감시비행 중이던 미, 영국군 전투기에 의한 공중폭격으로 시민 14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미군은 이라크군 대공포의 공격에 응전만 했을 뿐, 민간시설은 공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라크공군사령부는 같은 날 20일의 공식발표를 통해 98년 12월 이후 시민 295명이 사망하고, 86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의 재산】 2000년 6월 19일 발매된 미 경제지 [포브스]는 같은 해 세계부자인명록의 [국왕, 여왕, 독재자 부문]에서 후세인 대통령이 자산 70억달러로 6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쿠르드 자치구】 2대 쿠르드인 조직인 쿠르드민주당(KDP)와 쿠르드애국동맹(PUK)가 대립했다. 98년 9월 17일 KDP의 발자니 의장과 PUK의 타라바니 의장이 미국의 중재로 연립정권수립과 99년 여름의 자치구 의회선거의 실시에 합의했지만, 각료의 배분 등으로 대립을 보여 실현되지 않았다.
Ⅴ. 정치조직
【원 수】 대통령. 임기는 7년. 혁명평의회(RCC)가 후보자를 지명하여 의회가 승인한다. 18세 이상의 유권자에 의한 국민투표로 신임여부를 묻는다. 혁명평의회 의장, 군 최고사령관, 바스당 지역지도부(RC) 서기장을 겸임한다. 2002년 10월의 국민투표에서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위협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100% 찬성으로 후세인의 연임을 신임하기도 했다.
【혁명평의회(RCC)】 국권의 최고결정기구로 8명으로 구성된다. 공석이 생기면 과반수의 찬성에 의해 새 구성원을 승인하고, 해임하기 위해서는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의 장: 사담 후세인 대통령
▽부의장: 이자트 이브라힘
▽평의회원(6명) ①마르프 부대통령
②라마단 부대통령
③주바이디 부수상
④타리크 아지즈 부수상
⑤함마디 국회의장(알리 핫산 알마지드 국방장관의 후임)
⑥쟈브리 국방장관(무즈반 키딜 하디 바스당 인민사무국책임서기의 후임)
【의 회】 국회는 대통령 또는 RCC의 하위에 속하며 군사, 치안관련 사항에 대해서는 입법권이 없다. 80년 6월 발족. 2000년 3월 27일 실시된 총선거에 의한 의석수는 바스당 165석, 무소속 85석이다. 북부 쿠르드 지구의 3개주에 할당된 30석에 대해서는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다.
▽의 장: 사아둔 함마디(Saadoun HAMMADI)
쿠르드 자치구에는 쿠르드 입법의회가 80년 9월 발족되었다. 50의석이며 임기는 3년이다. 89년 9월 9일에 제4회 선거가 실시됐다. 사실상의 찬반의회로 반정부파가 92년 5월에 창설한 쿠르드민족회의와는 별개이다.
【내 각】 대통령이 임명한다. 94년 5월 29일에 개각을 단행했다.
【정 당】
1) 바스당(아랍 바스사회당): 47년 다마스커스에서 창설된 범아랍사회주의 정당. (1) 아랍 전체의 운동을 횡단적으로 하는 [민족지도부], (2) 나라별로 지부를 두는 [지역지도부(RC)]가 있다. 시리아의 바스당과 대립하고 있으며, 이라크의 지역 지도부는 후세인 대통령이 서기장이다. 인원은 약 10만명이다.
2) 국민진보전선: 73년 7월 바스당과 이라크 공산당이 통일전선조직으로 결성. 75년 쿠르드 각 정당에 가맹했다. 79년 3월 이라크 공산당이 탈퇴. 공산당은 비합법 화됨. 나임 하다드 서기장.
【반체제 조직】
1) 쿠르드민주당(KDP): 마스드 발자니 의장이 이끔. 당원 1만 5000명으로 감소추세이다.
2) 쿠르드애국동맹(PUK): 쟈랄 타리바니 의장. 단원 1만명.
3) 쿠르드민족회의: KDP와 PUK 등 8개 조직이 [쿠르드전선]을 결성. 9년 5월 첫 독자선거로 쿠르드 민족회의(정족수 105석)를 선출. KDP, PUK가 각각 50석을, 나머지는 기독교계 후보에 할당되었지만, KDP와 PUK 양대조직의 항쟁으로 정지상태이다.
4) 이라크·이슬람 혁명최고평의회(SCIRI): 이슬람 쉬아파의 망명인사로 이루어진 반체제조직으로 본부는 테헤란에 있다. 지도자는 무하마드 하킴師. 단원 4000명
5) 이라크국민회의(INC): 92년 6월 빈에서 쿠르드인, 쉬아파, 순니파 등 광범위한 30개 이상의 민족, 종쵸단체가 모여 결성된 반정부 연합조직. 본부는 런던. 아흐마드 챠라비가 대표.
6) 이라크국민합의(INA): 96년 2월 망명자들에 의해 결성. 본부는 암만. 사무국장은 이야드 알라위.
⑥ 공산당: 34년 창설. 79년 3월 비합법화.
⑦ 앗타와당: 68년 창설된 쉬아파 조직. 본부는 테헤란
【사 법】 최고재판소의 아래에 고등재판소가 5개, 제1심 재판소, 형사재판소, 간이재판소, 종교재판소가 있다.
【지방행정】 15개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외에 북부의 도호크, 아르빌, 슬레이마니야의 3주는 쿠르드 자치구가 되었다.
Ⅵ. 외교
【對유엔관계】 ▼ 핵시설 파괴 … 국제연합(UN)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라크의 대량파괴병기의 폐기를 요구하는 UN결의 687호에 의거하여 91년에 합동사찰을 계속 요구하자 이라크측은 92년 2월 스커드미사일의 파괴를 거부해오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안보리는 이라크가 파괴를 방해할 경우에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영국 등의 국제적인 압력에 의해서 이라크측은 3월 21일 미사일 제조시설의 파괴에 동의하여 대량파괴병기에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UN에 제출하고 파괴거부의 방침을 전환했다. IAEA는 4월 7일. 이라크 정부가 핵개발을 중단하고, 알아실에 있는 핵시설의 파괴에 동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12일 동안 폭탄파괴작업을 진행시켜 6월 1일에는 해체작업을 완료했다.
▼ 화학병기를 폐기 … UN화학병기 사찰단은 92년 4월에 화학병기탄두 4만발, 화학병기약제 2000∼3000톤을 바그다드 교외에 집적시켰다. 사찰단의 만리 단장은 4월 9일, 화학병기에서 약품류를 추출해 내는데 반 년이 걸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스타드 가스, 신경가스 등의 관련물질을 처리하기 위한 처리플랜트를 건설 중에 있어서 폐기완료에는 1년 전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남부에 비행금지구역 … 이라크 정부는 남부 습지대의 쉬아파 반정부세력에 대한 계속적인 공습을 감행하여 민간인들이 많이 사망했다. 92년 여름에 공격이 강화되자 미국, 영국, 프랑스는 쿠르드인을 보호하기 위해 91년 이라크 북부에 설정한 이라크기 비행금지조치와 같은 조치를 쉬아파 보호를 위해 설정하는 것에 대한 협의를 개시했다. 부시 미대통령은 8월 26일 북위 32도 이남의 이라크 영토에 군용기, 민간기를 사이에 둔 비행금지구역을 발표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UN상임이사국 4개국이 이라크에게 이를 정식으로 통고했다. 비행금지구역은 다음날인 27일 오전 10시 15분(미동부시간)부터 발효됐다. 미군의 조기경계관제기(AWACS) 등이 초계를 개시했다. 초계작전에는 뒤에서 사우디아라비아도 가세했다.
▼ 이라크 재공습 … 92년 12월 27일 비행금지구역을 정찰인 미공군 소속 F-16전투기가 공역을 침범한 이라크 공군의 미그전투기 2대를 발견하여 1대를 격추시켰다. 이라크 정부는 그날 성명을 내고 미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여 긴장이 고조되었다. 93년 1월, 이라크는 비행금지구역에 지대공미사일을 배치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4개국은 같은 달 6일 이라크에 대해 미사일을 48시간 이내에 제거하라는 최후통고를 보냈다. 결국 이라크는 8일의 기한이 끝나기 직전에 미사일을 이동하여 위기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났다. 그러나 10일부터 4일동안 계속해서 이라크인들이 쿠웨이트 영토에 침입, 미사일 등 군사물자를 포함한 구이라크 자산을 가지고 갔다. 이라크측은 미국과 UN에 대한 대결자세를 강화했다. 또한 이라크 정부는 사찰단을 태운 UN기의 이라크 입국을 금지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군은 13일, 110대의 비행기로 남부의 미사일 기지를 폭격했다. 이라크는 15일 UN기의 입국을 받아들이면서 [안전을 보증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보냈으나 UN은 거부했다. 16일에는 요르단에서부터 들어오는 것은 인정하겠다며 한발 양보했고 UN측은 이를 조건부로 받아들였다. 미국은 17일 바그다드 교외의 자아파라니에에 있는 [핵병기 관련시설]을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로 공격했다. 18일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 군대가 이라크 남부와 북부의 비행금지구역을 공습하여 [UN결의에 따르지 않으면 단호하게 대응할 것]임을 강조했다. 이라크는 19일 UN기의 무조건 입국을 받아들이고 일방적인 정전을 제안했다. 그 날 UN안보리는 비공식협의에서 회답을 받아들여 일촉측발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 국경 확정 … UN안보리 결의 687호에 기초한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국경확정작업을 진행시켜 UN국경확정위원회는 92년 11월 23일 국경선에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는 것으로 이를 종료하고 육상부분의 작업을 마쳤다고 발표했다. 이 위원회는 4월 16일 새로운 국경을 이라크쪽으로 600m 이동하겠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5월 11일부터 210km의 국경지대에 2km 정도 콘크리트 기둥을 박는 작업을 시작했다. 새로운 국경의 획정으로 루메이라 유전의 6개의 유정과 이라크의 군항이 있는 페르시아만의 우므카슬항의 일부가 쿠웨이트 영토가 되었다. 이라크측은 페르시아만을 통한 수로에 접한 항만부분을 받아들여 페르시아만으로의 출구가 확보되었다.
▼ 동결자산의 유용을 결의 … UN안보리는 92년 10월 2일 50억달러 이상되는 이라크의 재외동결자산의 일부를 UN의 특별구좌로 옮기고, 쿠르드인 지역은 이전에 이라크 국내로 들어온 인도적 원조재원을 충분히 확보하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번의 결의는 이라크의 석유관련자산을 1개국 당 최대 2억달러까지 UN의 공탁금 특별구좌에 이전시킬 것을 의무로 하고 있다. 자금 중 30%는 배상기금에서 충당. 나머지는 인도적 원조, 대량파괴병기의 해체비용으로 사용한다.
▼ 경제제재 해제를 바라는 움직임 … 90년 8월의 걸프위기 이래 5년째에 접어든 유엔의 對이라크 경제제재에 대해 터키의 데미렐 대통령은 94년 1월 [이라크 국민은 충분히 벌받았다]라며 해제를 호소했다. 프랑스도 연초부터 이라크와의 관계회복에 대한 움직임을 강화하며 3월에는 국영석유회사가 이라크 남부의 마지눈 습원에 대규모의 유전을 개발할 것을 이라크측과 합의했다. 러시아는 제재해제 후를 노려 9월에 이라크와 총액 100억달러에 이르는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중국도 11월 이라크에 의한 쿠웨이트 정식승인을 평가하며 [對이라크 제재의 단계적인 해제를 검토할 때다]라는 입장을 표시했다. 그러나 유엔안보리가 2개월 동안 이뤄지던 제재를 바라보는 협의에서 미, 영 양국이 제재를 계속할 것을 주장하여 [해제로의 합의가 안보리 내에는 없다]라고 함으로써 해제에는 이르지 않았다.
▼ 이라크군 남하 … 94년 10월 초순 이라크군의 정예부대, 공화국방위대 2개 여단(약 2만명)이 쿠웨이트 국경으로 향해 남하를 개시했다. 전차와 화포도 남쪽으로 이동하여 남부의 부대와 합류하면서 총 6만∼8만명이 쿠웨이트 국경에 집결했다. 유엔안보리에서 영국은 [이라크군의 이동은 극히 이상]하다고 경고했다. 안보리는 10월 9일 군의 집결에 유감을 표명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이라크는 군의 이동을 훈련중이라며 [영토 내의 군이동은 주권국가의 자유다]라고 반론했다. 또한 걸프지역의 안정은 이라크에 대한 제재해제만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는 주장만이 되풀이되었다.
▼ 위기 긴박 … 쿠웨이트 국경으로의 이라크군 집결에 대응하여 미해군의 함선 4척이 10월 9일, 2000명의 해병대원을 태우고 페르시아만으로 급행했다. 미육군부대도 10일 이후 계속해서 쿠웨이트에 들어왔다. 쿠웨이트군 1만 5000명도 방위체제를 강화하여 페르시아만에 걸프전쟁 이래의 긴장이 생겨났다. 사하후 외무장관은 10일, 남부에 집결중인 부대를 철수시킨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12일이 되자 이라크 군부대의 북상을 인정했다. 유엔안보리는 15일, 이라크의 공화국방위대의 남부전개를 금지하고 위반할 시에는 군사행동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미, 영의 양국은 이라크에 대해서 북위 32도선 이남으로 군부대를 이동하게 될 때에는 공중 폭격을 실시할 것을 경고하는 서간을 발표했다.
▼ 쿠웨이트 승인 … 이라크군의 집결로 쿠웨이트 국경이 긴박해 있던 10월 13일 러시아의 코즈이레흐 외무장관이 이라크를 방문, 후세인 대통령과 회담하여 석유금수조치의 해제를 조건으로 쿠웨이트의 주권을 승인하는 방침을 이끌어냈다. 이라크 국회는 11월 10일 무조건적으로 걸프전쟁 후에 유엔 안보리가 정했던 쿠웨이트와의 국경을 인정하고 주권과 영토보전, 정치적 독립을 승인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혁명지도평의회도 승인을 결정한 14일에 이를 유엔안보리에 정식통고했다.
▼ 장기간의 감시를 위한 감시카메라 설치 … 유엔의 이라크 대량파괴병기폐기 특별위원회의 에케우스 위원장은 94년 7월, 對이라크 석유금수조치해제로의 최후의 조건으로 남아있는 대량파괴병기의 장기감시를 시작하기로 이라크측과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10월에 감시카메라 설치작업이 완료했지만 이라크측의 병기감시를 위한 협력현황을 조사하는데에만 반년정도가 필요하다.
▼ 새로운 사찰기관 … 98년 12월의 미영에 의한 대규모 공중폭격 후 이라크에 대한 대량파괴병기의 사찰은 중단되었다. 2000년 1월 22일 핵의 평화적 이용을 감시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단이 사찰을 실시했지만, 대량파괴병기에 대한 사찰은 이라크가 거부했다.
유엔 안보리는 99년 12월 17일 대량파괴병기의 사찰을 위한 새로운 기관으로 유엔감시검증사찰위원회(UNMOVIC)의 설치를 결의하고 브릭스 위원장이 2000년 3월 1일에 취임했다.
▼ 달러에서 유로화로 … 유엔 안보리는 95년 4월 이라크 국민들을 위한 인도적 원조문자의 구입 등에 한정하여 반년에 20억달러 어치의 석유수출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96년 12월 10일 6년 반만에 석유수출이 재개되었다. 수출분은 98년 반년에 52억달러 어치의 분량을 완화되어 99년 12월에는 상한이 철폐되었다.
이라크는 [달러]를 적국의 통화로 신설된 유로화 결제로 변경해줄 것을 강하게 요구하여 안보리의 이라크 제제위원회는 2000년 10월 30일 석유대금을 유로화로 받는 것을 승인했다. 이라크는 11월 원유수출로 유엔관리의 구좌에 불입되는 대금과 별도로 석유구입업자로부터 1배럴당 50센트의 특별대금징수를 요구했지만, 유엔은 이를 거부했다.
▼ 원조조정관 사임 … 이라크 담당의 유엔인도원조조정관인 한스 본 스보넥은 2000년 2월 13일 유엔제재 하에서의 원조할동에는 한계가 있다며 사임했다. 4월 30일 후임의 툰 미얏트 새 조정관이 도착했다.
【對미관계】 미의회는 98년 10월 후세인 정권타도를 위한 반정부세력에 9900만달러의 무기공여 등을 인정하는 [이라크 해방법](군사원조에 9700만달러, 라디오 방송에 200만달러)를 가결했다. 이어 같은 달 30일에는 프라하를 거점으로 하는 [라디오 자유유럽]이 이라크를 향한 반정부방송을 개시했다. 클린턴 미대통령은 99년 1월 19일 쿠르드민주당(KDP), 쿠르드애국동맹(PUK), 이라크-이슬람혁명최고평의회(SCIRI), 이라크국민회의(INA) 등 일곱 단체를 지원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연락-조정 담당에 프란시스 리치어드니 특별대표를 임명했다.
미국무성은 2000년 2월 29일 후세인 대통령이 석유밀수 등으로 궁전을 건설하고 있다며 위성사진을 공개했다. 91년 이후, 20억달러의 추정금액을 투입하여 바그다드 주변을 중심으로 대통령궁전과 요인용 주택을 건설했다고 비판했다. 한편, 미정부는 3월 반체제 쿠르드인 조직 이라크 국민회의(INC)에 약 27만달러의 경제지원을 실시했다. 6월 26일 고어 부대통령이 워싱턴에서 챠라비 INC대표 등 반체제조직 지도자 9명과 회담을 갖고 지원을 계속할 것임을 약속했다. 9월 14일 미국무성 당국자는 INC에 400만달러의 추가지원을 표명하기도 했다.
【對러시아, CIS관계】 러시아는 구소련시대의 무기수출 등으로 약 70억달러의 對이라크 채권이 있는 등 70년에 군사협정을 체결하여 러시아가 이를 이어오고 있다. 쟈브리 국방장관은 2000년 4월 14~16일 러시아를 방문했다. 7월 26일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한 아지즈 부수상과 회담을 갖고 미국과 영국의 공폭에 반대하여 유엔제재 해제의 입장을 확인했다. 11월 13일 러시아의 이와노프 외무장관이 이라크를 방문했다.
살레 외무장관은 12월 3일 벨라루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에 대사관을 개설한다고 밝혔다.
【對이란관계】 이란은 11월 7일 이라크 국내에 있는 이란의 반정부조직인 모자히딘 헐크(MKO)의 거점을 스커드 지대지미사일 4발로 공격했다. MKO의 이란국내로의 게릴라 활동에 대한 반격에 있었지만 이라크는 [적절한 방법으로 이란의 부당한 공격에 대항하는 방위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란은 이틀 후인 9일에도 이라크 영내에 있는 이란의 반체제조직 이란·쿠르드 민주당의 거점을 공군기 4기로 폭격했다.
카라카스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수뇌회담에 출석한 이란의 하타미 대통령과 라마단 부대통령이 2000년 9월 29일 회담을 갖고 외교관계의 격상 등을 협의했다. 10월 13일 이란의 하라지 외무장관이 이라크를 방문했다. 이란 외무장관의 방문은 1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對아랍관계】 레바논 정부는 94년 4월 이라크와의 국교단절을 발표했다. 같은 달 12일 베이루트에서 이라크 반체제파의 지도자가 암살되어 이라크 대사관원이 체포되었지만 레바논이 외교면책특권의 방기를 요구하는 데에 대하여 이라크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2001년 1월 23일자 미국의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지는 82년에 폐쇄된 이라크로부터 시리아로의 파이프라인에 의한 송유가 2000년 11월 중순부터 비밀리에 재개되었다고 보도했다. 유엔제재위반에 해당하지만, 이라크는 하루에 200만달러의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양국은 98년 7월에 파이프라인 재개에 합의했었다.
▼부시 암살미수로 사형 … 쿠웨이트의 국가치안재판소는 94년 6월 전년의 부시 전 미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관여한 죄로 기소되었던 이라크인 5명의 피고와 쿠웨이트인 1명의 피고인에게 사형판결을 언도했다.
Ⅶ. 경제
【재 정】 걸프전쟁 중이었던 90년 8월부터 시작된 對이라크 경제제재로 인해 이라크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폭격 등으로 파괴된 경제기반의 피해액은 1900억달러로 GNP의 5배에 해당한다. 국민의회는 92년 2월 13일, 동년도예산을 승인하고, 세비를 명확히 했다. 정부는 5월, 경제제재로 인해서 90년 8월부터 92년 2월까지 11만 9352명의 국민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라크는 3월 11일 UN안보리에 제재해제를 요청했으나 안보리는 이라크에 대해 대량파괴병기에 대한 파괴나 정보를 제공하라는 결의를 완전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하여 제재를 계속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후세인 대통령은 8월 12일, 제재를 극복하는 [행동계획]을 발표했다. 제재 당시에 부당이익을 취한 상인이나 부패 공무원을 적발하는 등 경제통제를 강화한다는 내용이다. 대통령은 모든 농민에게 대맥, 소맥의 전량공출을 명령했다. 암시장에서의 취급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일반소비재 157품목의 수입금지를 포고했다. 이 조치로 인해 적발된 상인은 600명이 넘었고 그 중 42명이 처형당했다. 걸프위기 당시부터 실시된 기초물자의 배급제는 계속되고 있다. 국민 1인당 1개월에 쌀 1.5kg, 소맥분 8kg, 세제 200kg이 제공된다. 식료품의 지급은 평균 소비량의 3분의 1정도이다. UN과 이라크는 10월 22일, 인도적 원조에 관련된 각서에 조인했다. 식료품, 연료, 의약품 등 원조물자의 총액은 약 2억달러에 이르고 이중의 절반인 약 9000만달러를 이라크 북부에 있는 쿠르드인 지역에 보내야 한다는 내용이다.
【경 제】 바그다드 시내는 전화와 전기, 수도가 복구됐으며 다리나 건물의 재건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통화인 디나르의 對달러 실제 교환비는 걸프위기 전의 1대1에서 11대1로 폭락했다. 물가는 연간 1000%를 넘는 급상승 중이며 실업률도 30%이상이 되는 등 국민생활을 압박하고 있다.
92년 3월 25일 이라크에 주식과 외국인 시장이 개설됐다. 개인이나 기관의 주식, 채권, 통화 취인을 촉진하도록 환경을 정리하여 이라크 경제의 활성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43개의 기업과 19개의 서비스 기관이 두 시장에 참가했다. 국영 이라크 통신은 1월, 이라크가 걸프전쟁 때 파괴된 페르시아만에 접해있는 미나 알바클 석유의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석유업계에서는 이 유정에서 배출될 석유의 양은 걸프전쟁 전의 약 절반 수준인 하루에 40만배럴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영국지 "멜 온 선데이지"는 8월 이라크가 터키에 대량의 석유제품을 육로를 통해 밀수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라크 정부는 12월, 바그다드 근교와 남부의 도시 바스라를 잇는 새로운 운하인 [사담강]이 완성되었다고 발표했다. 총연장 565km, 폭 24m이며, 유역 150만ha에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외국기업이 반쯤 만들다가 중단한 것으로 반년간의 추가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 석유증산계획 … 쟈와드 석유장관은 94년 7월 이라크에서는 석유금수해제 후에 일간 200만배럴의 원유수출을 재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걸프전쟁으로 손상된 석유시설을 보수하는 부품이 입수된다면 10개월에서 14개월 이내에 이란과 같은 규모인 일간 360만배럴까지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 對이라크 배상 1600억달러 … 유엔배상위원회는 94년 8월, 걸프전쟁의 對이라크 배상 청구액이 정부, 기업, 개인 분을 포함해서 약 1600억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각국정부에 의한 배상청구가 총 350억달러, 기업에서는 총 900억달러, 개인이 총 350억달러 등이다.
▼ 계속되는 인플레 … 유엔경제제재의 영향으로 이라크의 통화인 디나르는 폭락을 계속하고 있으며 특히 이라크군이 쿠웨이트 국경에 남하해 걸프정세가 긴박했던 94년 10월에는 암거래로 1달러=580디나르로 떨어졌다. 공정거래는 1달러=0.55디나르로 암거래와의 차는 약 1000배. 가방에 돈을 쌓아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면 보통 판매되는 물건도 사기 어려운 상황이다.
【석유생산】 이라크 원유의 확인 매장량은 1120억배러로 세계전체의 약 11%를 차지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이다. 걸프전쟁 전에는 하루에 약 300만배럴이었지만 전쟁하면서 파괴됐다. 한정적인 석유수출해금으로 이라크의 원유수출량은 하루에 200만배럴 이상으로 회복, 석유수출국기구(OPEC) 가맹국 중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두 번째 수출국이다.
【제재의 영향】 유엔의 경제제재 하에서 유엔과의 합의에 의한 석유수출은 확대했지만, 물자구입에는 유엔제제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하는 등, 불어만가는 대외채무(93년 시점에서 233억달러), 걸프전쟁으로부터의 피해보상(총액 약 1900억달러)을 포함해서 엄한 경제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Ⅷ. 사회·문화
【FAO 습격】 2000년 6월 28일 바그다드에 있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사무소를 2명의 남자가 습걱하여 직원 등 2명을 사살했다. 체포된 이라크인 용의자는 유엔의 대이라크 제제해제를 요구한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사우디기 납치】 2000년 10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항공기가 이집트 상공에서 2명의 남자에게 납치되어 바그다드 공항에 착륙했다. 범인은 사우디의 왕정제 폐지 등을 요구하는 반체제 사우디인사로 이라크 당국에 체포되었다. 이라크는 사우디의 신병인도 요구를 거부하고 정치적 망명을 인정했다. 기체는 사우디측에 반환되었다.
【교 육】 74년부터 모든 교육을 무료화했다. 의무교육인 국민학교(6∼11세)의 취학률은 84%이고, 중학교(12∼17세)의 취학률은 39%이다. 교원양성기관이 7개, 기술전문교가 19개교가 있으며, 바그다드 대학 등 8개의 대학이 있다.
【매스컴】 주요 일간지는 앗-사우라(바스당 기관지), 알-이라크, 알-주므후리아(이상 정부계), 알-카디시야(군기관지), 바그다드 옵저버(국영 영자지) 등이 있다. 후세인 대통령의 장남인 우다이가 바벨지를 발행한다. 통신사는 국영 이라크통신(INA)이 있다. 이라크 공화국방송공사 아래는 바그다드 방송 등 라디오방송국이 4개, 텔레비젼 방송국이 24개가 있다. 우다이가 [청년텔레비]를 경영한다.
Ⅸ. 군사
걸프전쟁으로 인한 이라크 병사의 사망자수는 전쟁 직후에 10만명으로 추정되었지만, 93년 3월 미국방성이 1500명 정도인 것으로 판명되어 당초의 추측에 의한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확실하다. 94년 4월 14일 이라크 북부의 [비행금지구역]으로 미공군의 전투기가 자군의 수송 헬리콥터 2기를 적으로 오인, 격추하여 승무원 등 26명 전원이 사망했다. 페리 미국방장관은 7월, 지휘계통의 인위적 착오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조사보고를 발표했다. 7월, 미국의 올프라이드 유엔대사는 안보리에서 이라크가 대량파괴병기를 만들기에 앞서 서둘러 구입하면서 걸프전쟁 전의 공급원과 접촉을 시작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한편, 11월에는 이라크군 내부에서 병사들의 탈주가 급증하여 수개월동안 6만 7000명에 달하고 있다고 전했다.
병력은 42만 9000명으로 추정된다. 징집기관은 18∼24개월. 예비역은 65만명. 걸프전쟁으로의 피해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 병력은 추정치이다. 전병력의 50%를 부품이 부족한 상황이다.
【육 군】 37만 5000명(예비군 10만명을 동원했을 때의 수치로 추정된다). 7개 군단과 3개 장갑여단, 3개 기계화사단, 11개 보병여단, 6개 공화국방위대여단, 4개 공화국방위특별여단, 대통령경호사단(3개 보병사단, 4개 기계화사단) 등이 있다. 주력전차는 T72, 62, 55, 치프텐, M60등 2200대가 있다. 장갑보병전투차 BMP 1, 2가 총 1000대가 있다. 장갑병력수송차 BTR 60, 50, M113등 2400대가 있다. 화포는 D74(122mm)등 1900문, 자주포 150문. 다연장 로케트포 150기가 있다. 공격 헬리콥터는 BO105, Mi24, SA321 등 120기가 있다. 대공포는 ZSU234 등 5500대와 지대공미사일로는 SA6, 7, 8, 9 지대공 미사일이 있다고 하며, 그 외에 스커드 지대지미사일을 약 27기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다.
【해 군】 2000명. 기지는 바스라, 주바일, 움카슬(현재 폐쇄중)에 있다. 프리게이트함 2척, 고속정이 10대, 초계정 6척, 소해정 4척, 지원함 3척 등이 있다.
【공 군】 3만 5000명(방공요원 1만 5000명). 폭격기는 Tu22 등 6기가 있다. 전투공격기는 미그23, 수호이25 등 130대가 있다. 전투기는 미그23, 25, 29, 미라주F1 등 180대가 있다. 대지미사일은 AM39, AS4, 5, 11이, 공대공 미사일은 AA 2, 6, 7, 8이 있다. 그 외 급유기로 IL76 등이 있다(날개를 고정시킬 경우 추정가동률은 55% 이하).
【방공부대】 대공자주포는 ZSU23-4, ZSU57-2 등 6000문이 있다. 지대공 미사일은 SA16, 14, 13, 9, 8, 7, 6, 2, 롤랜드 등.
【그 외】 치안부대 1만 5000명, 국경경비대 2만명, 사담 훼다인 약 1만 5000명.
【외국군】 유엔 이라크-쿠웨이트감시단(UNIKOM)이 30개국에서 1111명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