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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머의 이해, 해석,응용과 수필의 의미화
박양근
문학은 텍스트이다. 작품에 담기는 내용이 철학적 진리이든 미학적 진리이든 그 다의성과 의미는 변해간다. 문학평론은 그 변화의 관점과 양상을 설명한다. 텍스트에 담기는 의미가 어떤 방식으로든 재구성되고 새롭게 풀린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텍스트의 의미화를 설명한 사람이 가다머이다. 그는 ≪철학과 문학≫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어떤 것에 질문하여 해답을 얻으려면 참으로 이해할 때만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예술의 진리는 과학적 방식으로 측정할 수 없다. 문학 텍스트 또한 질문과 대답이라는 과정을 통해 응답을 얻고 그렇게 이루어지는 텍스트는 진리 내용을 부단하게 갱신해 나간다.
갱신 방법과 관련하여 가다머는 세 가지의 상호보충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해와 해석과 응용이 그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나의 생각과 관계 없이 객관적으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무엇을 이해하는 데는 관찰자의 관점이 개입한다. 작가는 자신에게 의미로 다가온 것만 표현할 수 있고 어떤 대상도 제약을 받아서 인식한다. 이것이 이해이다.
작가가 수행하는 이해에는 단계가 있다. 작가의 삶이 좁거나 얕으면 작품도 그렇게 되고 범위가 다양하면 작품도 그만큼 다양해진다. 최고의 이해단계를 “예술의 경지에 이른 이해”라고 하는데 이것이 해석(interpretation)이다. 해석은 문헌학의 주요 책무이며 예술의 임무이기도 하다. 가다머가 말하는 해석은 언어적 파악으로써 언어가 지닌 기표와 기의, 이미지와 은유라는 수사법을 빌리는 것이다. 문학도 해석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술경지에 도달할 만한 이해와 언어표현력을 지녀야 한다.
응용은 이해의 실천적 측면으로서 어떤 텍스트를 자신의 삶과 현실에 적용시켜 가는 것이다. 텍스트가 지닌 질문을 삶을 통해 대답할 때 그 대답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역사적 지평과 융합한다.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이 부딪치면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긴장관계는 과거를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인식을 통하여 낯선 개념을 불러 오는 것이다. 이러한 응용 단계를 거치면 보다 긴밀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사건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이해와 해석과 응용의 융합과정이다. 가다머도 끊임없이 응답할 때만 참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수필가는 전체의 맥락에서 인간의 경험세계를 파악하고 경험의 구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독자의 수용기대에 부응해 나간다.
이현수의 <안 씨安氏>
작가 이현수는 동네 헬스장에서 만난 안 씨를 소개한다. 그가 안 씨를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누구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이현수와 안 씨가 무관한 사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밝히는 질문과 응답이다.
작품의 첫 문장이 “나는 안 씨를 좋아한다.”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그에게 호감과 호의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 그 반응이 작가의 원숙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설명되고 있다.
처음에 그는 헬스장에서 만난 안 씨를 주목하지 않았다. 고객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삼 년이 지난 지금 “내가 왜 안 씨를 좋아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해답을 찾아간다. 가다머가 말한 ‘이해’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다. 그는 몸집이 왜소하고 교양미나 지적 품격이 없고 경제적 여유도 없어 보인다. “첫눈에 호감이 가지 않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곧 그를 좋아하게 된다. 첫 번째 이유는 열심히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안 씨의 행동은 ‘그는 성실한 사람이다.’라는 답을 준다. 안 씨가 성실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작가 자신이 매사에 성실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두 사람이 ‘성실성’이라는 제약조건을 충족시켰다는 것이다. 가다머도 어떤 것에 대한 이해는 개인이 지닌 관심의 제약을 받는다고 하였다.
헬스장은 동네 주민지원센터에 마련되어 있다. 호화로운 장소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안 씨는 이현수를 만날 때마다 “어르신”으로 불러준다. 처음에는 그 호칭이 거북스러웠으나 친근해지면서 자신을 대우해준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안 씨가 소박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평점이 매겨진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에는 이현수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가를 보여주는 기준과 측도가 깔려있다. 예의바름이라는 이해 단계에서 ‘어르신’이라는 언어적 표현 단계가 끼어든 것이다.
지금까지 안 씨를 행동과 말씨로 이해하였다면 다음에는 성품과 지적 수준과 성격으로 그의 됨됨이를 가늠한다. 날품팔이 노동자로서 그는 교회 일에 만족하고 막노동꾼답지 않게 신문을 읽는 지적 생활을 유지하며 편견 없는 사회관을 바탕으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안목도 지니고 있다. 안 씨는 순박하고 가식이 없으며 균형 잡힌 성품을 갖고 있다. 이런 요소는 이현수가 사람의 외모나 직업보다 인품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해력이 총체적 관점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혀준다.
그러나 안 씨처럼 생각이 온건하고 행동이 바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안 씨 같은 사람과 더불어 편안하게 정을 나누면서 영육 간에 평화롭고 진실한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나 같은 보통사람이 누리는 행복이 아닐까 한다.
이현수는 안 씨를 지켜보면서 그와 지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다. 두 사람 사이에 호감이 상호교류하고 있는 응용의 단계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안 씨라는 외부의 자극이 무엇을 답하는가. 그것은 “안 씨 같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정을 나누는 것”이다. 서두가 “나는 안 씨를 좋아하였다”는 개체적 반응이었다면 결미에서는 “안 씨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라는 복수 개념이 등장한다. 이해의 층위가 개체에서 류類로, 개인에서 사회로, 하루생활에서 보통사람의 행복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작품은 일상적 삶을 바탕으로 독자가 편안하게 읽을 수 있게 표현되어 있지만 해석과정은 누구나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듣고 인생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만이 쓸 수 있다. 그 점에서 <안 씨安氏>는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냐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는 도록圖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영채의 <그녀의 눈물>
가다머는 이해의 최고 단계는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이해는 작가가 지닌 이해력과 언어적 경험으로 이루어진다. <그녀의 눈물>은 태풍을 심미적으로 이해하고 ‘여성’으로 은유한 작품이다.
“그녀”로 의인화하는 효과는 생사라는 의미소를 이끌어낸다. 태풍의 생성과 이동경과와 소멸을 여성의 사랑과 죽음으로 묘사하여 미적 진리를 극대화한다. 김영채는 태풍의 생사를 여성의 “시한부 인생”에 일치시켜 끊임 없는 대화를 생성시켜 나간다.
우선 태풍의 발생이 흐느낌으로 표현된다. 김영채가 운무 속으로 걸어 들어가 바위 턱에 홀로 앉아 파도소리를 듣고 있을 때 “깊은 바다 속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을 여자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해한다. 그가 들은 말은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지만 당신을 만나게 되어 참 행운입니다.”라는 내용이다. “인연으로 마음을 열게 된 텔레파시”가 응용되고 있다. 화자인 ‘나’와 태풍인 ‘그녀’간에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면서 김영채에게 태풍은 파괴적인 기상변화가 아니라 영감과 환상으로 꾸며지는 만남으로 바뀐다. 짧은 인생이므로 태풍은 자신의 모든 삶을 이야기하여야 하고 태풍의 찰나적인 소멸을 알고 있는 작가는 모든 세포를 열고 평소 연마한 언어로써 그녀의 인생을 해석해 줄 의무를 지닌다. 이것이 태풍을 ‘그녀’로 의인화하고 심미적으로 해석하는 이유이다. <그녀의 눈물>은 기상통보관의 일기예보가 아니라 태풍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미적 해답이다.
김영채는 태풍을 설명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자신은 “태풍의 진로를 따르는 동행자와 말벗”이 되고 싶지만 태풍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역할도 뺄 수 없다. 이런 이중역할로 인하여 <그녀의 눈물>은 자아 생성적 요소를 지닌다. 글쓰기 과정이 나타나는 메타수필이다. 서두에서 초기 태풍의 눈은 작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몸짓이 자꾸 커진다고 알려 주듯 글이 전개부로 나아갈수록 태풍의 영향권이 비대해진다. 태풍이 지구 전체를 덮어가는 것과 비례하여 글에는 남녀의 만남이라는 연정의 주제가 덮이기 시작한다. 태풍은 흉포한 기상현상이지만 우주에서 내려다본 태풍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김영채는 기상통보관이 아니라 심미주의적 작가이므로 그녀(태풍)의 출현을 미학적으로 표현한다.
“하얀 구름 빛살로 감싸인 원형구름 띠 속에 백자 주둥이 같은 둥근 눈. 그 눈은 한여름에 갓 피어난 흰 옥잠화 같았다. 마치 지구가 허연 속살을 드러내어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
태풍이 사라지고 여성의 매혹적인 몸이 등장한다. 음성은 감미롭고 자극적이며 몸집은 간절한 만남을 소망하듯 팽창해 있다. 그녀는 “그렇게 되면 보고 싶은 당신을 만나게 되나요.” “별 하나에 내 외로움을 전해주고 싶어요.” “건장한 사내 같은 당신을 포옹하며 안기고 싶어요.” “생애의 마지막 열정을 바치고 싶어요.”라고 끊임없이 호소한다. 삶이 짧으므로, 달리 진로를 바꿀 수 없으므로, 오직 화자만을 향하여 달려온다. 비극적인 파국이 예정되어 있어도 상봉은 피할 수 없다. 작가는 태풍의 소멸을 지켜보는 대신에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희생자를 응시한다.
태풍에 대한 해석에는 객관적인 이해과 주관적인 해석이 함께한다. 태풍은 지구 온난화가 빚어낸 에너지이므로 육지에 재앙을 가져올지라도 위력을 더욱 키워갈 수밖에 없다. 작가는 종말에 다다랐을 즈음에야 사실적인 표현을 모아 태풍의 마지막 운명을 설명문으로 풀어낸다.
검은 비구름은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물안개를 이루며 장대비 같은 빗줄기를 퍼부어 댔다. 삽시간에 불어난 빗물은 계곡이나 개천은 말할 나위 없이 강줄기로 넘쳐났다.
낭만이 충만한 전반부에서와 달리 태풍이 주택, 도로, 하천시설과 농산물에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해석은 사실주의적 시선이다. 그녀라는 3인칭이 사라지고, 가슴 설레는 재회가 사라지고 태풍이 남긴 피해상황만 티브이 방송과 신문기사에서 강조된다.
아무튼 <그녀의 눈물>은 신문기사가 아니라 심미적인 수필 작품이다. 이미지의 주인공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그녀’이다. “밀월 같은 짧은 만남”의 추억만을 이룬 태풍은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태풍이 작별의 아픔으로 해석되었다. <그녀의 눈물>이 저널리스트가 아니라 태풍을 은유하고 의인화하는 해석자에 의하여 쓰인 결과이다.
김미자의 <찻집에서>
가다머는 미적 진리는 질문과 대답의 과정으로 나타나며 과정은 이해, 해석, 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응용이란 이해한 미적진리를 생활과 삶에 적용하는 실천적 측면을 말한다. 이런 과정으로 우리들은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작가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긴장 관계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응용에는 이해뿐만 아니라 언어로 표현하는 해석도 함께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김미자는 <찻집에서> 무엇을 이해하고 해석하려 하는가? 과거의 무엇을 현재의 무엇에 응용시키려 하는가?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얄밉도록 천연스러운 바다”는 단순히 파도만 일으키는 바다가 아니라 그녀의 가슴에 묻힌 과거의 바다를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하얀 파도는 고향 바닷가에서 자라던 아까시 꽃향기를 떠올려주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를 놓는다.
온몸을 긴장시키는 모티프는 “세월을 등에 지고도 새살이 차오르지 않는 그리움”이다. 작가가 해석하려는 그리움의 정체는 두 가지이므로 <찻집에서>는 전·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에 나타난 “고향 바닷가, 아까시나무, 5월의 향수, 눈 내리던 날”이라는 의미소로 노스탤지어라는 해석을 이끌어낸다. 이것은 고향 바다의 이미지와 현재의 바닷가 찻집의 이미지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매년 아까시꽃이 향내를 내기 시작하면 나는 홀연히 길을 떠난다. 가슴에 새긴 그림 한 장을 꺼내들고 꽃향기에 젖어 고향 바다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때면 그리움에 짓눌려 숨이 막혔던 가슴이 해방된다. 지천으로 광대한 향기를 피워내는 5월의 꽃은 이상하게도 여인의 마음이 아니라 나지막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고향 아까시나무를 나지막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로 이해한다. 그 남자의 정체는 아버지이거나, 고향 친구이거나, 혹은 고향에 대한 믿음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이런 존재는 추상적인 관념의 대상이다. 관념으로서 대상은 누구에게나 의미화되고 향수라는 정서에 응용될 수 있다. 나아가 현재화도 가능해진다.
<찻집에서>의 후반부는 그 정체를 만나려는 욕망을 풀어낸다. 간절함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서 ‘그 남자의 목소리’는 “속병에 시달리는 속내를 홀라당 내보이고 싶은 ‘쓰는 것에 대한 갈망’”과 결합한다. 표현 욕망은 라이브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무명가수가 가시화 해준다. 이름 없이 노래를 부르는 그와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그녀의 비애”가 교감한다. 고향 바닷가의 아까시나무와 라이브 무대의 무명가수와 김미자가 공유하는 것은 ‘이름 없는 존재’라는 언어이다.
독자가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해와 해석과 응용이라는 가다머의 미적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피면 쉬워진다. 작가가 처해 있는 환경을 이해하면 훨씬 쉬워진다. 이것은 글쓰기가 의식 있게 펼치는 경우로서 흰 파도와 흰 아까시꽃처럼 이질적이고 낯선 것끼리의 융합은 긴장미를 높여준다. 그 중심에 자리한 언어가 ‘이름’이다.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다. 작지만 귀한 이름이 있다. 어쩌면 내 영혼을 유린한 것은 그 찻집의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 해풍의 길목에서 나그네처럼 자리하고 있는 바닷가의 찻집이었다.
이름은 실존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고향에서 이름이 없었고 지금도 ‘작으나 귀한 이름’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므로 바닷가 찻집과 고향 바닷가를 동일 공간으로 간주한다. 어린 시절에 까닭 없이 아까시나무를 바닷가 나그네로 여기며 속내를 토로하였을 것이다. 아까시꽃이 만개하면 5월의 신부가 되는 꿈도 꾸었을 것이다. 지금은 바닷가 찻집에서 동일한 감수성에 빠져 있다. 바닷가 찻집을 “바다, 고향, 아까시, 무명가수, 이름”이라는 실존성을 탐색하는 미적공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찻집에서>는 어떤 것을 참으로 이해하려면 삶과 사색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조건을 보여준다.
덧붙이며
생에 대한 해석학으로서 수필이 미적 가치를 지니려면 외부 현상을 단순히 설명하기보다는 경험을 통하여 내적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자신에게 친숙한 질문과 해답의 과정을 따르면서 문제를 참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런 과정을 체계적으로 풀이한 것이 가다머가 말하는 이해와 해석과 응용의 상호 보충작용이다. 이현수의 <안 씨安氏>, 김영채의 <그녀의 눈물>, 김미자의 <찻집에서>는 가다머의 미적 해석과정을 무리 없이 보여주는 예문에 속한다. 세 편의 작품을 함께 읽으면 지평의 융합은 사물을 읽어내는 투명한 안목과 미적요소를 갖춘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람직한 수필작가란 이해하고 해석하고 응용하기 위한 감수성을 갖춘 작가라고 할 것이다.
<작품>
안 씨安氏
이현수
나는 안 씨를 좋아한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이 헬스장인데 아마 3년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일주일에 적어도 사나흘, 잦으면 대엿새쯤 만나는 셈이다. 운동하면서 마주치는 사람이야 한둘이 아니고 또 특별히 어느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운동을 하러 왔으니 주위 사람들을 눈여겨 볼 마음도 시간도 없다.
그런데 내가 왜 안 씨를 주목하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는 나보다 적어도 20년은 젊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년의 사나이다. 몸집도 왜소하고 인상도 첫눈에 호감을 느낄 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렇다고 교양미나 지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날마다 헬스장에 다니면서 건강관리에 힘쓸 만큼 여유(?)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운동을 한다. 아마도 나는 그 성실한 모습을 보고,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냥 쉽게 ‘헬스장’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천차만별의 종류가 있다. 수천만 원을 주고 회원권을 사야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매달 기십만 원의 회비를 내야 되는 곳도 있다. 내가 다니는 곳은 동네 주민지원센터 건물에 마련된 조그만 규모의 헬스장이다. 공간이 좁고 설치된 운동기구도 많지 않으나 나 같은 사람이 운동하기엔 크게 불편하지 않는 곳이다.
우선 우리 집에서 걸어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경로우대로 월회비도 절반만 받으니 감지덕지 다닐 수밖에.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 생활패턴에 맞는 시간을 선택하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대가 아니면 똑같은 사람을 자주 만나기는 어렵다. 나는 가장 한가로운 시간대인 점심시간 이후, 퇴근시간 이전의 시간을 택하여 운동을 한다.
안 씨는 헬스장과 바로 이웃한 교회에서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하고 퇴근하는 길에 들른다고 하니까 나와 거의 매일 마주치게 되는 셈이다.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그가 나를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처음 그 호칭을 들었을 때 나는 무척 거북스러웠지만 점차 친근해지면서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아마 그럭저럭 이름 없이 늙어가고 있는 나를 ‘아저씨’나 ‘형씨’로 부르기가 불편하고,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대해 주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일정한 직장이 없이 건축 공사장으로, 막노동판으로 날품을 팔고 다니다가 교회에서 일하게 된 지 3년쯤 되었다고 한다. 교회에는 별로 힘든 일이 없고 전보다 안정되고 규칙적 생활을 할 수 있으니 좋다고 하였다. 아침 일찍 출근하려니 아침 식사는 못하지만 점심은 교회에서 얼마든지 공으로 먹을 수가 있고 이렇게 퇴근길에 운동까지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자기 사정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현재의 처지에 고마워하면서 행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아마 그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했을 것이다. 철봉을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날렵하게 잘하는지 나는 그의 흉내조차도 낼 수가 없다.
몇 가지 자기 마음에 드는 운동을 매일 꾸준히 하는 걸 보면 건실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항상 밝은 표정을 지니고 인사를 잘한다. 헬스장에 들어오면서 낯익은 사람들에겐 반드시 먼저 인사를 한다. 혹 대면이 안 되는 사람에게는 가까이 다가가서까지 인사를 하고, 운동을 끝내고 나갈 때에도 그렇게 한다.
그전에는 흔히 품삯을 떼인 일도 있었는데 이젠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으니 저축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매일 신문을 꼼꼼히 읽고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들에 대해선 예리한 촌평도 마다하지 않는다. 때론 사회적 관심사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일들에 대하여 나의 견해를 떠보기도 한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그의 판단은 대부분 정확하고 올바르며, 편견이 없다. 생활이 조금만 궁핍해도 자기의 가난이 남의 탓이라 생각하면서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게 보통인데 그에게서는 전혀 그런 점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정부에서 시행하는 보편적 복지정책에 대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지사적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와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그의 순박하고 가식 없음에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잃어버린 천진성이 회복되는 듯한 평화로운 느낌을 갖게 된다. 그를 만나면 언제나 반갑고 정겹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이 혹 며칠이라도 생기면, 내가 그를 걱정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염려한다고 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신분보장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그가 하루아침에 실직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요, 그가 걱정하는 것은 행여 내가 병이라도 앓고 있지 않나 하는 염려일 것이다. 힘에 부친 운동도 그와 함께하면서 농담을 주고받으면 나는 힘든 줄을 모른다.
안 씨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안 씨처럼 생각이 온건하고 행동이 바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안 씨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편안하게 정을 나누면서 영육 간에 평화롭고 진실한 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나 같은 보통사람이 누리는 행복이 아닐까 한다.
-≪수필과비평≫, 147호.
<작품>
그녀의 눈물
김영채
솜털처럼 감싸이는 운무 속으로 걸어간다. 가는 바람살에 흩어졌다 다시 싸여오는 희미한 미립자들이 내 몸을 휘감아 돈다. 걸어가고 있다. 적막이 인도하는 대로 가고 있다. 홀로 바위 턱에 올라 벼랑 끝에 서서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만 듣고 있다. 어딘가 깊은 바닷속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같은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듣자니 흐느낌이 아니라 여자 목소리다. 뭔가 말하고 싶었는지 내게 말을 건넨다.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나 봐요.”
“짧은 삶을 외롭게 견디다보니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 참 행운이에요.”
“일생 동안 누군가는 꼭 만나고 싶었는데 당신과는 무슨 인연인지 마음이 열리며 소통하고 싶은 텔레파시가 통하게 되었군요.”
잠시 당황했다. 그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간밤 꿈속이었다. 방금 그 소리는 떨림이 있었으나 차분히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더듬어 가고 싶었다. 잠시 후 이야기는 이어졌다.
“먼 바다 적도 부근이 제 고향이어요. 아직 어려서 그런지 눈은 작지만 몸집은 자꾸 커지고 있어요.” 곧 침묵이 흐르더니.
“참! 인공위성에서 지구를 내려다본 영상사진을 본 적 있나요? 파란 색감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지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 같지 않나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명들이 땅과 바다에서 생존해 가는 한 떨기 별. 우주를 향해 생명의 속삭임을 전파하는 지구. 그도 열병이 도지는 계절인 여름이 오면 바닷물이 더워져 몸살을 앓는다고요?”
그 말소리 때문인지.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의 복합체로 구성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느껴졌다. 매년 바닷물이 더워지면 불안정한 기압이 상승기류를 타고 느리게 자전 방향으로 돌면서 그녀가 태어난다. 많은 수증기는 두터운 구름층을 이루며 강한 바람과 동반하여 동북 방향을 향해 느리게 움직여 간다.
계속 이동진로를 추적하고 싶었다. 시한부 인생 같은 그녀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을까? 그 궤적을 좇아 동행자로서 말벗이 되고 싶었다.
잠시 위성영상으로 지켜본 거대한 구름은 소용돌이에 휘감긴 채 시계반대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하얀 구름 빛살로 감싸인 원형구름 띠 속에 백자 주둥이 같은 둥근 눈. 그 눈은 한여름 갓 피어난 흰 옥잠화 같았다. 마치 지구가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대만해협을 지나온 바다를 하얗게 뒤덮었다. 스펀지처럼 바닷물을 흠뻑 빨아들인 비구름은 강한 바람과 함께 북쪽으로 서서히 움직여가고 있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흥분된 음성.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워진 바다는 아우성이어요! 열을 받아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바닷물은 구름층으로 상승하고 싶어 안달이어요. 이젠 강한 바람이 천천히 휘어돌면, 바닷물은 온통 증발하여 무거운 구름층으로 방대하게 제 몸집을 키워 주어요. 그렇게 되면 보고 싶었던 당신을 만나게 되나요. 바다 깊은 어둠 속에 갇혀 늘 푸른 하늘로 나래를 펼쳐 포근한 숲 속에 잠기고 싶었고, 어둠이 오면 밤하늘을 보며 별 하나에 내 외로움을 전해주고 싶어요. 맑은 공기로 감싸인 산하. 굽이도는 해안, 도시, 평야와 강줄기를 거슬러 쭉 뻗친 아름다운 산줄기를 더없이 사랑하고 싶어요. 건장한 사내 같은 당신을 한없이 포옹하며 안기고 싶어요. 생애의 마지막 열정을 바치고 나면 형체 없는 운무로 사라져버릴 운명이어요.”
놀랍게도 그녀가 또 다른 대지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면 큰 재앙을 불러들일까 염려된다. 두려움과 걱정 섞인 감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이 육지로 올라온다면 큰 재앙을 가져오고.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이룩해왔던 주택, 도로, 하천 시설뿐만 아니라 농어업물이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면 사망자가 속출할 것인데……. 슬픔은 비극으로 이어져 한을 품고, 더욱 악마가 할퀴고 간 피해 자국이라 분노할 것이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녀를 다시 영상 속에서 지켜보니 눈동자는 뚜렷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더 거대해진 원형 몸집은 광대한 대양大洋을 하얀 드레스 같은 구름층으로 뒤덮으며 제주도를 향해 북상하고 있다.
그녀는 흥분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이동진로를 바꿀 순 없어요. 알 수 없는 재앙에 가슴이 무척 아프고요! 그런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은 어찌할 수 없네요. 너무나 괴롭네요.” “하나 지구 온난화로 인해 바다 온도가 상승하여 열병을 앓은 바닷물은 방대한 수증기 증발로 열을 식혀요. 또 남은 에너지는 더 강하게 거대한 구름층을 형성하며 영역을 크게 넓혀 이동해 가고. 더욱 폭염과 가뭄으로 찌든 대지는 열병을 앓는 신음소리를 연신 토해내며 방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어요. 단비, 아니 폭우를 한바탕 퍼부어야 열을 식혀 대지도 병이 낫게 되겠지요.”
더 이상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태풍의 진로는 마지막 끝자락을 향해 이동해가고 있다.
남해안으로 무섭게 올라오면서 강한 바람은 바닷물을 온통 뒤집어 놓았다. 거센 파도는 해안선을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며 무섭게 내리쳤다. 검은 비구름은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더 내륙으로 올라오자 산줄기에 막힌 구름층은 물안개를 이루며 장대비 같은 빗줄기를 퍼부어 댔다. 삽시간에 불어난 빗물은 계곡이나 개천은 말할 나위 없이 강줄기도 물로 넘쳐났다. 그러자 벼락이 내리치더니 삽시간에 마을, 도시는 암흑으로 휩싸였다. 겁먹은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신음과 아우성, 탄식소리 그리고 가슴 아픈 눈물은 불어나는 강물 속으로 잠겨들었다.
눈물 젖은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운무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그 밀월 같은 짧은 만남은 허전한 가슴속에 실비처럼 젖어왔다.
-≪수필과비평≫, 147호.
<작품>
찻집에서
김미자
바다는 얄밉도록 천연스러웠다. 지난밤 바람의 광란을 모를 리 없건만 침묵으로 일관하는 표면 위엔 하얀 파도만 산산이 일고 있었다. 하늘과 물빛이 분간 없는 수면 위로 물새가 소리 없이 날고 있었다.
찻집 창가에 앉아 있으면 오월의 아까시 꽃향기가 난다. 바다가 창문을 덮쳤는지 창문이 바다를 품었는지 알 리 없지만 파도의 몸짓 하나하나마다 아까시 꽃빛이 스며있다. 마술 같은 인테리어도 인공적인 햇살 때문도 아니다. 세월을 등에 지고도 새살이 차오르지 않은 내 그리움 탓이다.
고향 바닷가에는 오래된 아까시 나무 한 그루가 반쯤 휘어진 채 서 있었다.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던 나무가 신작로가 생기면서 우연히 모습을 보인 것이다. 너무나 오래 묵어 아까시 가지들은 무성한 잎에 묻혀 버렸다. 내가 어린 탓에 그 나무가 아까시 나무라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냥 바닷가에 묵묵히 서 있는 나그네로 보였다. 해풍에 시달린 노목에서 꽃망울이 터져 바다를 덮을 즈음이면 아까시 나무임을 비로소 알았고, 오월이 곁에 와 있음을 또한 알았다. 나는 이유 없이 오월을 가슴에 새겼다. 마음에 새겨진 아까시꽃은 내 영원한 향수가 되었다. 가끔 삶이 지루하여 바다로 나서면 목마르게 품었던 열병 같은 그리움을 아까시는 늘 나누어 주었다.
마음이 눅눅해지는 날이면 나는 찻집으로 향한다. 애써 웃던 웃음처럼 밋밋했던 첫 만남, 통일감 없는 탁자와 제각각 모양의 의자들, 제 몸을 녹아내며 마지막 환희로 불태우던 벽난로 속 장작개비. 그때마다 두리번거리는 내 뒷덜미를 낚아챈 건 널빤지만 한 푸른 유리창이었다. 비상을 꿈꾸던 물새 한 마리가 창문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멈출 줄 모르는 눈은 끝없이 바다 위에서 자맥질하고 나는 윙윙거리는 마음을 커피 한 잔만큼씩 내던지고 있었다. 겨울 어느 날 그와 나는 찻집 창가에 마주앉았다. 양 볼에 홍조가 일고 마음은 파도처럼 철썩였다. 입술을 적신 한 모금 블루마운틴 커피향이 아까시 꽃향기로 피어났다. 눈 속에서도 오월의 신부가 된 순간이었다. 몸안으로 스며드는 진한 초콜릿의 달콤함 같았다. 오월은 뿌리칠 수 없는 향기의 유혹을 그때에도 가슴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매년 아까시꽃이 향내를 내기 시작하면 나는 홀연히 길을 떠난다. 가슴에 새긴 그림 한 장을 꺼내 들고 꽃향기에 젖은 고향 바다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때면 그리움에 짓눌려 숨이 막혔던 가슴이 해방된다. 지천으로 광대한 향기를 피워내는 오월의 꽃에는 이상하게도 여인의 마음이 아니라 나지막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가슴에는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하나가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냥 외로웠다. 그때는 솟구쳐 고이는 차가운 석계수 한 모금을 속이 뻥 뚫리도록 들이켜고 싶었다. 그것은 간절함이었다. 배고픔이기도 했다. 고민인지 아픔인지 원인 모를 속병에 시달리는 속내를 홀라당 내보이고 싶었던 것이 쓰는 것에 대한 갈망임을 알았다. 나는 서투른 손짓으로 두레박을 물속에 던져 조심스레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목마름의 연속이었다. 좌절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기도 했다. 내 외로움의 근원은 철철 넘치지만 퍼내지 못하는 무력감에 있었다.
바람소리를 듣는다. 손바닥만 한 메모지를 낯빛이 까맣게 타들어 간 라이브 무대 위 무명가수인 그에게 건네고 돌아와 자리에 앉는다. 창밖에서는 바람을 탄 눈이 획을 긋는다. “갈대밭이 보이는 언덕 통나무집 창가”로 시작하는 음악이 핏줄 고운 음성으로 들려온다. 그는 고운 음성으로 꺼져가는 불꽃을 피워 올린다. 이름을 날리지 못한 비애가 얼마나 고독한지 그도 알고 있는 듯하다. 머물지 못하고 무대 위에서도 창밖 바다 위에서도 그리고 내 가슴에도 날개를 휘젓는 한 마리 물새가 표류하고 있다. 지금처럼 말이다.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다. 작지만 귀한 이름이 있다. 어쩌면 내 영혼을 유린한 건 그 찻집의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바다를 흠모해 바다에 미친 사람이나 아픈 사연 하나 가슴에 묻고 사는 힘든 이를 가리지 않고 따뜻한 불씨로 데워 줄 것 같은 곳, 뙤약볕 아래 무던히 영근 열매 하나가 해풍의 길목에 선 나그네처럼 자리하고 있는 바닷가의 찻집이었다.
지금 창밖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겨울이 느린 걸음으로 때로는 급한 걸음으로 오고 있다. 나는 오월의 아까시꽃 같은 흰 파도가 이는 겨울이 오면 그가 앉았던 자리를 찾아 바닷가 찻집으로 떠날 것이다. 그럴수록 바다는 모른 척 침묵할 것이다.
-≪수필과비평≫, 1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