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그 신비한 도시> 대구에서 성장했다. 내가 나온 대륜중학교는 일제시대 이상화·이육사 시인이 다녔던 학교다.
교정에 서서 먼 곳으로 시선을 두고 있으면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온갖 상념을 싣고 불어오는 <빼앗긴 들>의 바람소리가 어린 감성을 자극했고 누군가의 시를 가만가만 읊조리는 문학소년으로 만들어주었다.
중학교 1학년 시절 문예반에 들어가 처음 써낸 「정원」이란 제목의 시가 개교 50주년기념 시화전에 출품되는 기회를 갖게 돼 크게 고무된 적이 있다. 나의 시 쓰기는 그것이 출발점이었다.
중학교 문예반에는 서정윤, 박덕규, 김상윤 등이 있었다. 상급학교인 대륜고등학교 문예반에는 김수복, 김재진, 장옥관 등이 포진해 있었고 더 윗대 선배로는 정호승, 박해수 등이 있었다. 상화 이후 이어져 내려오던 문기(文氣)의 전통을 받은 대륜학교는 문예공모나 백일장을 휩쓸고 다니던 유명한 학생문사들이 많았다. 나는 이러한 선배들의 영향을 받으며 수성들의 그 부드러운 바람과 방천의 메서운 바람 사이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문학활동에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대구의 고등학교 문예활동은 꽤나 풍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의례적인 교내 문예반과 별도로 문학에 관심이 큰 학생들이 따로 모여 동인회를 결성하고 교외 활동에 더 열성을 쏟았다. 내가 다닌 대구고는 계단, 대륜고는 씨알, 대건고는 태동기, 대구상고는 소라, 경북여고는 햇살, 제일여상은 코스모스, 정화여고는 알암...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연합동인회로 회귀선, 백야, 산정 등이 있었다.
엘리어트가 황무지에서 노래한 잔인한 4월이 되면 시내 고등학교 별로 시화전이 열렸다. 봄가을에 주로 열리는 시화전은 학생문사들의 큰 축제였다. 대부분 시화전은 조명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두컴컴한 YMCA 복도에서 가졌는데 시화전을 보러온 여학생으로부터 꽃이라도 한두송이 받을라치면 두고두고 큰 자랑거리로 삼았다.
시화전 시즌이 되면 YMCA 뒷뜰에는 여학생들의 화사한 교복 같은 백목련 꽃이 활짝 피어나 남녀 학생들이 어울려 시를 이야기하는 풍경이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다. YMCA 1층에는 아루스제과점이 있었다. YMCA 건물과 나란히 붙어 있는 그 제과점은 남녀 고등학생들의 데이트 장소로 이용됐다.
문예현상공모나 백일장에 나가 두드러진 성적을 거두면 스타처럼 떠받들어지기도 했다. 동기생 중에는 대건고에 다니던 박덕규, 권태현이 산문부에서 자주 상을 탔고 대구고의 김상윤과 나는 운문부에서 단골로 입상해 주변의 부러운 눈길을 받으며 우쭐대고 다녔다. 나는 1977년 가을 제2회 공주사대신문 문학상에서 「불놀이」라는 시를 응모해 당선한 이후로 동국대학교 문예백일장, 밀양아랑제, 신라문화제, 영남전문대학교 주최 한글백일장, 학생중앙문학상 등에서 잇달아 상을 타내며 이름을 날렸다.
바로 윗대 선배들 중에는 이철희, 오두섭, 오정국, 장옥관, 임명수, 문경원, 서경삼 등이 학생문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시집과 문학이론 서적들을 구해보는 것이 쉽지 않던 그 시절 우리는 선배들의 수상작품을 공책에 잘 정서 해 두고 시를 공부하는 중요한 텍스트로 삼았고 후배들에게 물려주었다.
내가 다닌 대구고등학교는 역사는 짧지만 시인 문인수, 이하석, 송재학, 배창환, 윤성근, 소설가 겸 영화감독 이창동, 소설가 겸 평론가 이인화(류철균) 등 30여명의 현역 문인이 활동하고 있어 두터운 문학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전통 깊은 대륜중학교를 거쳐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포진한 대구고등학교를 다닌 것이 문학을 제대로 배우는 좋은 텃밭이 되었던 것 같다.
고3 시절 동아백화점에서 시화전을 가졌던 일. 그해 여름, 유별나게 무더웠던 날씨 속에서 윗통을 벗어 던진 채 학교 아래 중앙인쇄소에서 잉크냄새를 맡으며 밤새워 문집을 만들던 기억 등이 새롭다.
고등학교 생활이 슬슬 끝나갈 무렵 나는 박기영 등이 주도하던 59문학회에 가입해 1997년 12월 20일 시내 고려백화점 화랑에서 창립 시화전을 가졌다. 시화전에는 강남옥, 김경호, 김정학, 김정희, 나문석, 서유장, 박기영, 손태도, 윤상수, 이상수 등이 참여했다.
대구상고의 김경호는 2학년 때 이미 영남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된 경력이 있었다. 몇해 뒤에는 대구매일신춘문예도 당선됐고 국세청 옆 25시 다방에서 개인시화전을 갖는 등 무리 중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 같은 학교 이상수는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였고 박기영과 강남옥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해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박기영이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옥중 당선된 기막힌 일화는 지금도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사실 박기영의 필체는 본인도 알아먹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악필 중의 악필이었다. 예심을 보던 심사위원들이 읽지도 않고 멀찍이 던져놓은 것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신문사 선배가 발견하고 다시 정서를 해서 예심을 통과시켰다. 어쩌면 쓰레기통으로 곧장 들어갈 뻔한 작품이 우여곡절 끝에 본심까지 올라가 어렵게 당선되었는데 당선 통지를 받아야할 본인은 정작 연락이 되지 않았다.
박기영은 대구 50사단에서 군복무 중이었는데 손태도가 신춘문예 당선통지서를 들고 면회를 갔더니 무슨 사고를 쳐서 영창에 가 있었다. 신춘문예 당선의 위력은 군대서도 통해 박기영은 중대장의 특별한 배려로 곧바로 영창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손태도는 대학에 들어가 판소리에 빠져 창작과는 다른 문학의 길을 걸었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서울대 한국문화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광대집단의 문화를 연구한 『광대의 가창문화』를 작년 가을에 펴내 크게 주목을 받더니 국악방송에 ‘손태도가 말하는 우리문화 우리음악’ 진행자로 활동하는 등 다른 방면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985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돼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권태현은 요즘은 도서평론가로 줏가를 올리고 있다. 나랑은 아주 각별하게 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는 앞산 아래 한 아파트에서 동거동락한 적도 있다. 새해 첫 신문이 나오는 날 이른 아침부터 동대구역 신문가판대로 달려가 모든 신문을 한부씩 수거해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돌려보며 반드시 신춘문예로 등단하자고 각오를 다짐하던 때가 생각난다.
김용락 시인은 삼수 끝에 입학한 계명대학교에서 만나 친해졌다. 그는 대학졸업반 때 『송사리떼를 몰고 하늘로』라는 시 20편이 실린 작은 시집을 내고 대구의 <사랑마당>이라는 공간에서 개인 시화전을 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학시험에 낙방해 재수를 했다. 계명대학교에 원서를 내고 첫 시간 시험을 치르고 있는데 캠퍼스 한쪽에 가지런히 서 있는 나무들과 마지막 남은 몇 장의 잎새들이 너무나 시적으로 보여 한참동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시험감독관이 다가와 왜 컷닝 하느냐면서 답안지를 뺏어가 버렸다. 나는 기가막혀 항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대학은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하잘 것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음시간 시험마저 포기해버렸다.
대학을 미련없이 포기하고 인생공부를 위해 세상을 떠돌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다. 내가 갈 길은 대학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생각이 굳어진 것도 그때였다. 집에서는 삼수를 한다고 학원비를 받아서 ‘문지’, ‘창비’ 등의 문학잡지와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 강은교의 『풀잎』 등 민음사 시집 시리즈를 사서 읽고, 때로는 그것들을 옆구리에 끼고 한껏 폼을 잡고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대부분의 날들을 중앙파출소 옆 심지다방 구석자리에서 뭉기적거리며 종일 죽을 치다가 어스름해지면 몇몇 친구들과 연매시장에 가서 꽁치구이나 찌짐 안주에 막걸리를 마셨다. 심지다방과 연매시장은 그 시절 문학지망생들의 아지트였다. 아무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또래의 문학지망생들은 하루에 한번씩 심지다방에 들렸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이면 연매시장의 술판으로 이어졌다. 그 시절 우리가 토론하는 문학 혹은 시는 청춘의 덧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처방이었거나 암울했던 시대의 한 점 불빛이었고 희망의 샘이었다.
박기영 시인은 심지다방의 터줏대감이었다. 이 친구는 다방을 열기도 전에 문앞에서 기다렸다가 문을 열면 뮤직박스 아래 한자리를 차지하고 가져온 군용모포를 덮고 잠을 자곤 했다. 그의 잠을 깨우는 것은 언제나 나였다. 나는 근처의 시립도서관에서 입시공부를 하다가 점심을 먹고 나면 그 다방에 가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는 그를 깨웠다. 우리는 문학에 대해 인생에 대해 토론을 나누거나 어두운 불빛 아래 깨알같은 글씨로 시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방 마담은 정말 지겨워 죽겠다고 우리를 보면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번번이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우리는 그 다방을 떠나지 않았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마담이 성화를 부릴 때마다 말려주는 맘씨 좋고 예쁜 종업원 아가씨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이양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 다방 이양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 얼굴이 뽀얗고 가끔 모나리자의 미소 같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을 때 살짝 드러나는 하얀 덧니가 매력적으로 보이던 아가씨였는데 나이가 나보다 서너 살 많은 데도 이양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면 마치 어른이 다된 기분이 들었다.
어느날 박기영이 심지다방으로 장정일을 데리고 나타났다. 흐름사(시조시인 김종윤 선배가 운영하던 출판사)에 갔다가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시에 관심이 많은 듯해서 한 수 지도해주겠다고 데려온 것이라고 했다. 장정일과는 그때부터 문학활동을 같이하며 자주 교류를 갖게 됐다.
59문학회는 1981년 3월 첫 동인지를 발간하고 시내 왕실다방에서 두 번째 시화전을 가진 다음 해체되었다. 1982년 11월에는 권승하, 김용락, 박기영, 오승건, 이문재, 장정일 등과 시내 런던제과 옆 골목 탈다방에서 7인 시화전을 가진 일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나와 박기영, 안도현, 장정일, 권태현, 김상윤 등이 『국시』동인을 결성하기로 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80년대 벽두에 문단의 대표적인 두 계간지 ‘창비’와 ‘문지’가 돌연 폐간되고 새로운 정기간행물의 창간이 허용되지 않던 시기였다. 계엄선포 등 경직 일로에 있던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당국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했던 문학지들의 소극적 자세 때문에 각종 시 동인지가 ‘자유의 바람’을 몰고오던 시기였다. 이기철·이하석·이태수·이동순·박해수 등을 축으로 하는 ‘자유시’, 박재열·구석본 등을 축으로 하는 ‘형상’, 송재학·장옥관·김재진 등을 축으로 한 ‘오늘의 시’, 김용락·배창환 등을 축으로 한 ‘분단시대’, 서지월·김세웅·김상환 등을 축으로 한 ‘낭만시’, 김선굉·서정윤·하청호·박곤걸 등을 축으로 한 ‘자연시’ 등이 동인지 전성시대를 열어나갔다. 국시는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질경이처럼 태동했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하면서 자유롭지 못한 방법과 새롭다고 말하면서 새롭지 못한 정신의 허울좋은 가면을 거부한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독자이고 시인이며 바로 시의 실체인 동시에 시의 목적이기를 시의 전부이기를 원한다.”
83년 4월 박기영·장정일·안도현·박상봉·권태현·김상윤이 동인으로 그루 출판사에서 발간한 국시동인지 맨 뒷장에 적힌 행동강령은 자못 도전적이고 문학적 길트기에 앞장서려는 젊은 시인들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때 다방을 경영한 적이 있다. 커피와 몇가지 차류를 파는 단순한 형태의 다방이 아닌 책도 볼 수 있는 책방과 커피숍 형태의 아이디어 사업을 구상하여 시인다방을 열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면 마땅히 취직을 해야 할텐데 경험도 없는 사업에 뛰어든 것은 이재(理財)에 밝아서도 아니요, 나쁜 머리로 겨우 생각해낸 아이디어를 놓치기 아까웠기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졸업식만 하였지 학사자격증을 받지 못했다. 억울하게도 졸업이수 학점에서 1학점이 모자라는 바람에 대학을 한학기 더 다니게 된 것이다. 1학년 때 따 놓은 교양 한 과목을 나중에 수강신청을 하지않아서 그리된 것이므로 수강신청만 하면 학점은 그대로 나오게 되어 있었고, 강의를 들을 필요도, 학교에 갈 일도 없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1학점만 달랑 수강신청을 하고 등록금 3만원을 내고 1학기를 더 다닌 경우는 아마 우리나라 대학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사례가 될 것이다. 졸업장 없이 취직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학교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무 하는 일없이 집에서 빈둥거리자니 날이 갈수록 식구들의 눈총이 따갑게 느껴졌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졸업생들 틈에 섞여 대학도서관에서 취직시험 준비라도 하면서 유예된 시간을 보람있게 보낼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 당시에는 원인이야 어찌 됐든 제때 졸업 못한 것이 그저 쪽팔려서 학교에는 발길도 들여놓기가 싫었다.
그래서 조그만 사무실을 빌려 집에 있는 책들을 갖다놓고 독서도 하고 글도 쓰고, 문우(文友)들과 커피를 마시며 문학이야기로 하루를 소일하는 백수 노릇을 남몰래 궁리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집필실 비슷한 개념으로 개인사무실을 갖고자 시작한 것인데 사무실 임대보증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집에 돈을 빌리기 위한 핑계거리로 다방 형태로 위장하였던 것에 불과했다.
취직도 안되고 해서 다방을 차리려는데 목돈이 좀 필요하다고 어머니에게 손을 벌렸다. 1년 뒤에 돈 벌어서 꼭 갚겠다. 평생 집에 손벌리는 일은 더 이상 없도록 하겠다. 등등 온갖 감언이설로 5백만원을 빌리는 데 성공하여 대구학원 건너편 봉산동에 보증금 5백만원에 월세 25만원 하는 사무실 자리를 하나 얻었다.
이십여년 전의 일이니 당시로서는 꽤나 비싼 편이었지만 건축사무실을 하던 곳이라 실내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고 한쪽 구석에 붙박이 책꽂이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어 앞 뒤 생각도 재어보지 않고 선뜻 계약을 해버린 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용기가 넘쳐서 그랬다기 보다는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기 때문에 그런 무모한 시도를 감행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온다.
이사하면서 버리고 간 건축사무소 간판에 검정 페인트로 덧칠을 하고 노란색 스프레이 물감으로 <시인> 이라고만 써서 입구에 걸어 놓았다. 동생한테 신용 카드를 빌려 백화점에 가서 월부로 식탁 몇조를 구입하고 헌나무를 얻어와서 어설픈 솜씨로 톱질하고 망치질을 하여 주방을 꾸미고 탁자와 의자도 더 만들어 공간을 채웠다.
며칠이 지나도 찾아오는 손님이 없었다. <시인>이라고 쓰인 간판 하나 입구에 덜렁 걸어놓고 커피집이라든지 다방이라는 수식어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손님이 들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그것은 내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얼마동안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거나 클로바 타자기로 시를 쓰기도 하고 친구들이 오면 바둑도 두고 문학 이야기도 하면서 입이 심심하면 원두커피를 뽑아 먹었다. 그러나 정작 사무실을 얻어 놓고 보니 매달 25만원씩 월세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이 됐다. 처음 한달은 또 이리저리 돈을 빌려서 메꾸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집에서 빌린 보증금 마저 거덜낼 것 같아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커피값을 받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하루에 고작 10명 정도. 커피 한잔에 5백원을 받았으므로 쉬는 날 없이 한달 꼬박 문을 열어도 월세를 매꿀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 커피 20잔 파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점심, 저녁 끼니를 아래층 분식집에서 5백원짜리 라면으로 떼우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간판도 하나 새로 만들어 걸었다. 밤에 불이 들어오는 형광아크릴 간판에 <시인다방>이라고 써놓고 나니 낯선 손님들이 간혹 들리긴 했지만 입구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을 보고 황급히 돌아나가기 일쑤였다.
그 어설픈 시인다방에 그래도 부지런히 찾아주는 단골손님이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주었던 이하석 선배, 당시 매일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투명한 속』,『김씨의 옆얼굴』이라는 시집을 낸 중견 시인이었는데 지금은 영남일보 논설실장이 되었고 시인으로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예나 지금이나 그저 너그럽고 마음이 따뜻한 선배일 뿐이다.
또 쌀살돈, 책살돈이 필요하다면서 내 궁핍한 주머니를 심심찮게 털어 가던 장정일, 하루종일 바둑을 두면서 개기다가 커피 값은 달아놓고 돈까지 뜯어간 박기영, 장편소설 『영원한 제국』으로 유명세를 떨친 이인화는 대구고 후배로 시인다방 주방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의 문학』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강』이라는 시집을 낸 구광본, 우리나라 초유의 베스트셀러 시집 『홀로서기』의 서정윤, 그리고 송재학, 엄원태, 장옥관, 김재진, 손진은.. 등 주옥같은 이름들이 모두 그 당시 시인다방의 단골손님들이었다.
사실 <시인>은 다방이라기에는 여러모로 어설픈 공간이었지만 은하, 아세아, 왕비, 유경, 심지 등으로 이어지던 문학청년들의 단골다방이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문을 닫거나 시끄러운 음악다방 형태로 변해버려 당시 대구에는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서로를 고무할만한 장소가 없었다. 시인다방은 이런 문화적 향수를 달래고 지역 문화공간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점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냈다고 자부한다. 궁핍하고 암울했던 당시의 문학청년들과 문인들 사이에 정신적 출구역할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다.
좌충우돌하였던 나의 문학청년 시절을 돌이켜보는 일은 어설픈 삶의 파편들을 꿰맞추는 일 같아 웃음이 먼저 나오지만 분명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며 다시 걷고 싶은 그리움으로 가는 여행길이다.
박상봉
1958년 경기도 양주 출생. 대구고,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3년 『국시』동인으로 작품 활동.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문화공간 ‘시인’ 경영. 현재 한국산업단지공단 홍보실 근무.
한번 더 읽어보니 정말 재미 있네요.이 자료를 만든 사람이 박상봉 시인이네요.박시인이 경영하던 다방과 심지 다방이,그리고 누나 같았지만 친구처럼 불렀던 "이양"생각이 눈에 선합니다.넌픽션은 전혀 없으면서도 옛추억이 아련히 떠오르게 하는 글입니다.두터운 안경은 쓴 박상봉 시인이 갑자기 그립네요
첫댓글 선배님들의 모습을 그려볼수 있어서 좋은 글이라 생각을 합니다만 실명으로 활동하여 주시면 더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디서 가져오신 자료인 지 몰라도 상당히 정확한 추억입니다.박기영이는 영창을 밥먹듯이 여러번 갔었는데...저와 관련되어 영창간 사건은 상당히 비도덕적인 사건이었으므로 절대 밝힐 수가 없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준석아 실명으로 바꿔라...
한번 더 읽어보니 정말 재미 있네요.이 자료를 만든 사람이 박상봉 시인이네요.박시인이 경영하던 다방과 심지 다방이,그리고 누나 같았지만 친구처럼 불렀던 "이양"생각이 눈에 선합니다.넌픽션은 전혀 없으면서도 옛추억이 아련히 떠오르게 하는 글입니다.두터운 안경은 쓴 박상봉 시인이 갑자기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