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역 천주교 전래와 확산>
천주교는 프랑스 로베르 신부에 의해 17세기 초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전래된 뒤 충북에도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옹기굴을 경영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1856년에 세워진 제천 배론 신학교에 이어, 1885년에 세워진 원주 부엉골 초가집 신학교가 강원과 경기, 그리고 충북지역의 충주, 청주, 괴산 등을 관리하며 당시 22개의 공소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였다.
특히 진천 배티는 1853-1856년까지 조선의 첫번째 신학생이자 두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1821-1861)의 본당 중심지였다. 또 그는 이곳의 조선교구 신학교에서 청소년 신학생들을 지도하였고, 한글 천주가사와 한글 교리서, 한글 기도서를 저술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사실상 그 시기 진천 배티는 조선 천주교의 산실 역할을 한 곳이다.
배티성지 최양업신부 동상과 신학교터 그뒤 부엉골의 위치가 관할지역의 한쪽에 치우쳐져 있어 관리하기에 불리하기 때문에 1896년 음성 감곡지역으로 거점을 옮겨 부이용(R. Camillus Bouillon)신부에 의해 감곡본당이 건축되고 선교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음성 감곡성당은 전국에서 18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며 충북도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그 뒤로 음성 감곡성당은 충북 북부지역에 천주교가 확산되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충북 남부지역 천주교 확산의 거점은 1906년에 설립된 옥천성당이었다. 옥천에 천주교가 전래되시 시작한 것은 1903년에 공주 본당의 신부인 파스키에(P. Pasquier)에 의해 옥천 공소가 설립되었서부터이다. 더욱이 1905년에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어 옥천이 교통이 요지로 새롭게 부상하자, 공주 본당은 1906년 5월 20일 옥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고 홍병철 구가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1909년에는 20평 규모의 성당도 완공되었으나, 이후 1948년 7월 본당으로 승격될 때까지 다시 공소로 격하되어 운영되었다. 음성 감곡성당 1927년 현재 천주교 포교소는 23개나 되었는데, 음성 감곡성당을 제외하면 모두 공소였다. 프랑스인 1명을 비롯해 23명의 신부가 있었으며 신도수 역시 2,946명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에 따라 청주성당(1932), 증평성당(1936), 제천성당(1940), 야현성당(1945) 등이 차례로 설립되어, 해방 이전 충북지역에는 모두 5개의 본당 성당이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 전교가 어렵게 되자 교황청의 인가를 얻어 1953년 서울 교구안에 충북 감목대리구를 두기로 하고 해방 전 평양교구를 맡아보던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로 하여금 충북지역을 맡게 하였다. 이후 메리놀회의 후원과 전교 활동에 힘입어 1958년 청주 대목구로 독립하게 되었고, 1962년 청주교구로 승격된 이래로 60년대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 결과 1997년 당시 충북지역 천주교 신자수는 108,763명, 본당수 52개소, 공소수 69개소 등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충북지역 개신교 전래와 의의>
개신교는 초기에 미국 북장로회 선교구역이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에 국한되어 선교의 힘을 집중하였으나, 1900년경 경기도 죽산군 둥벙리 교회에서 사경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청주군 신대리에 사는 오천보, 문성심, 오삼근 등이 마을에 전도하여 1901년 충북지역 최초의 교회가 성립하였다.
그뒤 서울에 주재하며 미노아학당을 운영하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밀러(F. S. Miller) 목사가 청주 선교에 관심을 두고 있던 차에 신대교회가 생성되어 교회로 모인다는 소식에 접하여 본격적으로 청주를 목표로 자주 내려와 전도하며 준비하던 중, 1904년 김흥경 조사와 함게 설립한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를 시작으로 1905년 밀러목사가 청주에 안착하여 미 북장로회 청주선교부를 설립하고 선교함으로써 본격적인 충북지역 개신교회가 시작되었다.
기독교 감리교 역시 1900년 전후 충북지역에 전래되기 시작하여, 1902년 이전에 음성지역에 교회가 건립되었으며 진천, 청주, 보은지역에도 감리교 신자가 생겨났다. 특히 서원보 선교사의 순회 활동으로 감리교 신자가 증가하였으며 교회수도 증가하였다. 1903년 충주 유봉교회, 1904년 청주 읍교회(현 청주 제일교회)와 제천 백운교회, 1906년 음성 감리교회와 충주 목계교회, 1907년 제천 제일교회, 1910년 영동 양산교회, 1913년 단양 감리교회 등이 속속 건립되었다.
그런데 1909년 선교협정에 의해 청주를 중심으로 한 충북의 남부지역은 북 장로회 구역이 되고, 이북지역은 미 감리교 구역으로 나뉘어지었다. 그에 따라 장로교로 출발한 충주 제일교회, 제천 제일교회 등은 감리교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충북지역은 다른 지역의 경우 단일 교단의 선교부 책임 하에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두 교파의 구역으로 나뉘어, 청주를 중심으로 이북은 감리교가, 이남은 장로교가 구역을 정하였다. 그 때문에 충북 북부지방의 감리교는 단일 구역으로 묶이지 못한 채 수원이나 제천 선교구역으로 편입되고, 청주 선교부는 북 장로회 여러 선교부 중에서 가장 열세한 선교부가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 학교나 병원에 대한 선교부의 지원도 약했다. 이것이 충북지역 근대종교역사의 가장 큰 특징이다.
1927년 당시 충북지역 장로교회는 42개나 되었으며, 영국인 1명과 미국인 3명을 비롯한 51명의 목사가 있었다. 신도수는 1,820명에 이르렀다. 반면에 주로 충북 북부지역에 분포해 있었던 감리교회는 19개 있었으며 30명의 목사가 활동하였다. 신도수는 1,668명으로, 1개 교회당 평균 88명의 신도가 있었다. 이는 1개 장로교회 평균 43명보다 2배나 많은 숫자이다. 그밖에 7일 안식교회가 2개 교회에 55명의 신자가 있었고, 동아기독교도 1개 교회에 9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렇게 놀라운 성장을 하던 개신교는 일제 말기에 극심한 탄압을 받아 크게 위축되었다. 해방 이후 다시 개신교 교세가 확대되어, 1950년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감리교와 장로교 등이 여러 교파로 갈라지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장로교는 1951년부터 분열되어 1951년에 고려파, 1953년 조신파, 1959년 총회의 합동파 등이 분파되었다. 더욱이 선교지역 분할정책법의 효용이 사라져 각종의 교파형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그리스도교회(1945), 침례교(1952), 오순절교(1955) 등이 들어오고 지역에 따라서는 감리교, 성결교 등이 상호 침투하여 난립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뒤 개신교는 놀라운 교세 확장이 이루어졌다. 1992년 통계에 의하면, 충북지역내 장로교 549개 교회, 감리교 273개 교회, 성결교 98개 교회, 침례교 101교회, 오순절교 114개 교회 등이 있었다.
<충북지역 성공회 전래와 의의>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가 1887년 코프(C. J. Corfe)를 한국 선교 책임자로 선임하여 주교로 서품한 뒤 1890년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한구 성공회가 시작되었다. 서울, 인천, 강화지역을 중심으로 주근거지로 삼아 선교활동을 하던 성공회는 단아덕 신부가 1904년에 제2대 교주로 부임한 뒤부터, 수원을 기점으로 하는 정책에 따라 점차 선교영역을 부산, 평양, 진남포, 의주, 수원, 진천 등지로 확장하였다.
단아덕 신부는 서울 정동교회(현 서울 주교좌 성당) 주임사제였던 김우일(金 禹壹, Wilfreed N. Gurney) 신부로 하여금 1905년부터 진천지역 전도에 나서게 하였다. 그 결과 1907년에 진천지역 70여개 마을에 성공회가 전파되었다. 그를 바탕으로 1908년 1월 3일 진천에 성공회 성당이 축성되었다.
특히 성공회는 1908년에 전국을 서울, 강화, 수원, 진천 4개 지역으로 나누어 그 지역 관할 사제를 두어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그에 따라 진천 성공회 성당은 충북지역 선교 거점이 되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성공회가 빠른 속도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성공회 선교사들은 진천을 중심으로 음성, 청주, 괴산, 충주를 비롯해 이웃한 충남의 목천, 경기도의 안성, 직산, 여주, 심지어 강원도 원주까지 교세를 확대하여 각 지방에 기도소를 설립하고 그 지역 유력인사들을 전도하였다. 선교 외에 의료 및 교육?출판사업을 통해 서구문명의 전파에도 일조하였음.
진천 성공회는 1908년에 진명학교(현 삼수초등학교)를 건립하여 진천지역의 근대교육의 효시를 열었으며, 1909년에는 애인병원을 설립하여 서양의술을 베풀었다. 강화에서 활동하던 로스(A. F. Raws) 선교사 부부가 진천에 와서 병원을 세웠다. 병원은 예배당과 같은 크기의 한옥으로 지어졌으며, 서울과 제물포에 이어 성공회의 세 번째 의료선교사업이었다. 또한 진천군 이월면 송현리에 노동야학을 개설하고, 충남 병천과 천안 부대동에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이후 3.1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진천에 전파된 성공회는 청주지역에도 확대되어, 1907년 동산리교회와 1908년 묵방리의 묵방교회가 설립되었다. 청주시내에는 다른 지역보다 늦은 1910년대 후반에 들어와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1916년에 이미 청주?묵방?동산?가덕 네 곳에서 선교활동이 이루어지었다. 특히 진천 성공회 소속 영국 출신 신부인 류신덕(G. E. Hewleet, 1862-1930) 신부와 이도암(A. W. Lee, 1893-1950) 신부가 청주읍에 임시로 거처하면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또한 3대 주교 조마가(Mark Napier Trollope, 1862-1930) 주교의 지대한 관심으로 1920년대 초반 청주읍에 상당수의 교인이 있었다. 1927년 현재 성공회 성당은 공소를 포함해 11개소나 되었으며, 영국인 신부 2명을 비롯해 12명의 신부가 활동하였고 1,110명의 신자가 있었다.
특히 서울 성 니콜라 기숙사 출신으로 경성의전을 졸업한 오기택이 1921년에 청주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는데, 1923년에 병원 옆에 교회를 개척한 것이 청주 수동교회였다. 청주 수동교회는 1935년에 진천 성공회 교회에 있던 이도암 신부가 사제관으로 이사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고, 1935년에 현재의 한옥식 수동교회 성당이 축성되었다. 그에 따라 청주 수동교회는 충북지역 선교의 중심지로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다.
청주 수동 성공회 해방 이전까지 충북지역 성공회는 6개 성당, 5개 기도소가 성립하여 운영되었으나, 일제 말기를 거치면서 교세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일제는 전시체제를 유지하면서 종교를 크게 탄압하였는데, 그에 따라 성공회의 교육사업은 물론 의료사업도 중단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진천 애인병원도 1941년에 문을 닫았다. 해방 이후에도 교세가 크게 위축되어, 성공회는 오늘날 아주 작은 교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충북지역 구세군 전파와 의의>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감리교 부흥사 월리암 부드(Willam Booth)에 의해 1865년에 창설된 신앙공동체로서, 1878년에 ‘구세군(救世軍, Salvation)이란 명칭으로 바뀌어 하나의 기독교 교단을 이루어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구세군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영국인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는 1908년 10월에 한국으로 들어와 서울 서대문구 평동에 자리를 잡고 선교를 시작하였다. 한국 구세군은 감리교와 장로교와는 달리 주로 중소도시와 시골을 중심으로 교회 영문을 건립하고 사회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16년에 구세군 교회는 전국에 68개에 이르렀으며, 교인도 4천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와 같은 구세군이 충북지역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911년에 충북 영동에 영문을 세우고 선교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14년에는 영동지방 지방장으로 설보덕(Bramwll Sylvester)이 임명되었고 그 다음해엔 첫 한국인 담임사관으로 김병규가 임명되어 활발한 선교 활동이 이루어지었다. 그 결과 구세군 영문은 영동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어, 심천영문, 내촌영문, 양정영문, 용산영문, 가동영문, 영강영문, 신흥영문 등이 설립되었다. 1927년 현재 구세군 포교소는 7개소로, 영국인 1명을 비롯한 12명의 사관과 277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영동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영동에는 구세군 병원도 건립?운영되었다. 영동 구세병원은 구세군 한국 전래 25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어, 1934년에 영동읍 계산리 야산 밑에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착공되어 1936년에 부분 준공되었다. 1942년에 완공되어 종합병원으로 개원한 영동 구세병원은 근대 의료시설이 낙후한 영동지역의 의료 혜택을 베풀었으나, 구세군이 일본의 2차 대전에 협조하지 않아 강제 폐쇄됨에 따라 구세병원 역시 일본의 소유가 되었다.
그렇지만 구세군은 영동지역을 벗어나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특히 구세군이 해방 이후에는 영동지역이 대전을 본영으로 한 충청지역에 속하게 되어 점점 그 위상이 낮아지게 되었다. 청주지역의 경우에도 1938년에 주로 일본인들이 참석하는 영문이 청주시 서운동에 설립되었으나, 1942년에 폐쇄되었다.
<충북지역 서양종교 문화유산>
2010년말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충북지역의 기독교 관련 유적지는 총 8개로, 종파에 따라 수를 세분화해 보면, 천주교가 5곳, 성공회가 2곳, 개신교가 1곳이다. 지역별로는 청주와 진천에 각각 2곳의 관련 유적지가 있으며, 그 외에 제천, 옥천, 음성, 괴산이 각각 1곳의 기독교 관련 유적지가 위치해 있다.
기독교 관련유적지 중에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6곳이다. 특이한 점은 지정문화재들 대개가 해당 교회나 성당과 같은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실제 베론성지를 제외하고는 옥천천주교회와 감곡성당, 청주성공회성당, 대한성공회진천성당, 청주탑동양관이 기독교 관련 지정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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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 이곳 원문보기 글쓴이: 장보
첫댓글 제가 아는 전순동 교수님이 쓴 글이가 했었슴...
진천에 성공회에서 세운학교 이름이 진명학원인가요? 어떤 자료에는 신명학원으로 나와서요~
진명학교는 병천교회에서 세운 학교명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