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지나 환갑 넘은 권사님들…, 여전히 복음의 파수꾼으로
◇15년전 류광수 목사와 다락방 말씀운동을 시작한 평신도들. 복음의 가치와 능력을 현장에서 직접 본 이들에게 그 구원의 감격이 남다르다. 렘넌트 운동의 뿌리가 되는 이들은 10여년이 넘게 다락방을 하고 있으며 참관 다락방으로 전국의 사역자들에게 모델이 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최일순 권사와 한행순 권사의 모습, 가운데 사진은 이옥연 권사(오른쪽)와 최두식 집사 부부의 모습. 오른쪽 사진은 우분옥 권사>1987년 다락방 같았던 12평의 교회에 모인 16명의 교인들을 상상해 보면 세계복음화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교인들도 40대 중반이 넘어선 중년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영도 동삼교회에서 쫓겨나듯이 그저 교권과 싸움이 싫어 바보처럼 훌훌 털어 버리고 나온 임마누엘 성도들은 새로운 목회자를 맞이할 사택도 없을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12평의 다락방에서 피아노 학원으로, 그리고 주위의 이웃들의 핍박으로 쫓겨 삼원스포츠 건물의 창고로 이동을 했다. 성도들은 먼지를 닦고 수리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그들은 그 모든 손길 하나 하나가 오늘날 세계복음화를 위해 일어나고 있는 렘넌트 운동의 물결로 이어질 것을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50만원을 주고 산 중고 피아노를 놓았던 자리는 내려앉아 바닥에서는 삐그덕 삐그덕 소리가 났다. 작은 공간에서 예배를 마치면 함께 밥을 해먹으며 교제를 나누었다. 그곳에서 류광수 목사(임마누엘 교회 담임·21세기 세계선교연맹 총재)는 "세계복음화, 전도운동을 해야 한다"며 교인들을 일깨웠다.
과거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르는 역사를 돌아보며, 한행순 권사(66)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전도운동이 일어나자 교인들이 불어났죠. 공간이 너무 작아 35평으로 이동을 했지만, 금요철야를 할 장소가 없었어요. 교육관도 몇 번이나 불이 났고, 기도원을 빌려서 철야예배를 드리기도 했죠. 그래도 목사님은 괜찮다며 믿음의 말씀들을 하셨어요. 성도들은 목사님을 따라 고신대학교 뒤의 외등 밑에서 메시지 듣고 흩어져서 기도했답니다." 한 권사는 또한 버스를 빌려서 철야예배 할 때도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복음메시지가 너무 은혜가 되어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락방'은 성도들에게 처음에는 생소했기 때문에 그저 류 목사가 하는 대로 성도들은 따라다녔다. 류 목사가 전하는 복음 메시지를 들으며 당시의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 또 복음 때문에 다락방 현장에서 살아난 우리의 어머니와 같은 분들이 지금은 환갑을 넘은 권사님들이 다 되었다. 그래도 이들은 처음 시작한 그 다락방 현장 현장에서 다락방 조장으로 EBS요원으로, 사역자로 10여 년 동안 복음의 파수꾼이 되어 다락방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 한행순 권사도 10년 이상 다락방 사역을 해오고 있다. 89년도 구역식구 7명과 다락방이 한 권사의 집에서 시작됐다. 당시 전도사였던 이성훈 목사가 다락방을 인도했는데 복음편지 메시지가 주로 선포되었고 새 신자들이 제법 많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때로는 메신저는 문갑 위에 앉아 다락방을 인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다락방은 현재 부산 합숙훈련 참가자를 위해 참관 다락방으로 선정돼 있으며 40-50여명의 전국의 일꾼들이 다락방을 참관하며 은혜를 누리고 있다.
"다락방에 찾아온 새 신자들 가운데는 영적으로 고통을 당하던 이들이 메시지를 들으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구토를 하기도 했답니다. 복음이 들어가자 사단의 세력이 발악하는 현장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현재 한 권사는 당시의 집을 아예 미션 홈으로 내놓아 그곳에서는 다락방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한 권사는 10여 년 동안 부산 교도소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 이옥연 권사(56)는 보통 사람들이 겪을 수 없는 사실적인 영적인 체험을 했던 증인이다. 한행순 권사와 동역하고 있으며 합숙훈련 시 참관 다락방이 열릴 때 이 권사는 전국의 사명자들이 영적인 눈이 열리도록 간증을 주로 한다.
"사단과 싸우다가 교회를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집안은 우상을 많이 섬기던 집안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고통을 당해서 무당을 찾아가면 무당들도 나에게 온 신이 너무 세서 함께 무속 일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부산 시내의 돈은 다 내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죠. 그런데 나는 무속 일을 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우리 외할머니가 무당이었는데 결국은 쥐약 먹고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귀신의 주특기는 가족과 분리시킨다는 것을 옆에서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나에게 사람들의 과거를 보여주며 모든 것을 알아 맞추게도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정신을 잃고 귀신이 들려서 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잠을 안 재우고 늘 귀신과 대화를 했어요. 늘 귀신과 같이 웃고, 지껄이고…, 귀신은 늘 내 옆에 있었습니다. 귀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보여주며, 자동차도 타게 하고, 버스도 타게 하며, 나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사단은 자기 말만 들으면 차도 태워주고, 호화롭게 해준다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떠나가면 나는 그 순간 차비도 없이 덩그러니 남아 버렸죠. 그러면서 그때 교회를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동삼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집에 혼자만 있으면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고, 교회만 가면 편안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하늘에만 계신 줄 알았지요. 그래서 밥만 먹으면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당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리스도 없으니까 절에 다니는 것과 같았습니다. 11년 동안 그렇게 교회를 다녔어요. 성경구절 하나도 못 읽으면서 말입니다. 설교시간에는 말씀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고, 잠만 오고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교회가 편하니까 교회에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1년만에 임마누엘교회에 따라와서 철야예배 때 류광수 목사님을 만났어요. 한 권사가 소개를 해줬는데 솔밭에 모여서 철야기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날 목사님이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갔는데 류 목사님이 솔밭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머리카락이 위로 솟구치며, 몸이 떨리기 시작했어요. 철야 예배를 드리며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한 권사님이 나를 류 목사님에게 데리고 가서 일대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받은 순간 몸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마치 어린아이를 여름에 업었다가 내려놓은 것처럼 몸이 가벼워졌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씀이 얼마나 꿀맛 같은지 읽고 또 읽어도 너무 좋았습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깊이 영접하고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고 영적인 눈을 열게 해주신 류 목사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영접하는 순간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확신이 들고 사단이 물러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권사는 전국의 사명자들이 영적인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이러한 고통을 당했다고 말하며, 참관 다락방이 열리면 교회의 식당에서 봉사하다가도 언제든지 달려온다.
예수님을 영접한 뒤 이 권사의 집에서는 류 목사가 인도하는 중고다락방이 열렸다. 처음에는 5명이 시작해서 10명, 15명, 30명까지 모였다. 그러다가 이 권사의 집이 좁아 교회 옆에 천막을 쳐서 다락방을 옮겨갔다.
"청소년들에게 밥해주고 라면 삶아주는 것부터 했습니다. 주님밖에 몰라서 모든 것을 드리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쌀 한 되도 살만한 돈이 없었지요. 빚을 내서라도 라면을 삶아서 아이들에게 주었는데 하나님은 물 붓듯이 그 모든 것을 몇 배로 우리 집에 갚아주셨습니다." 이 권사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락방에서 조장역할을 해내었던 것이다.
한편 이권사의 남편 최두식 집사는 배를 타다가 쓰러져 뇌졸중으로 뇌출혈이 일어났는데 17일 동안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며 한쪽 무릎이 퉁퉁 부어 잘라낼 상황이었는데 다락방 식구들의 기도로 모든 것이 응답되어 다리도 잘라내지 않고 현재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 우분옥 권사(54)도 당시 다락방 말씀운동을 하고 있는 지산옥 전도사의 가정에 우 권사의 어머니 이영애 권사의 계돈을 돌려 받기 위해 찾아갔다가 은혜를 받았다. 창세기의 메시지를 들으며 우 권사는 자신의 어머니 이 권사도 이 메시지를 들으면 간염이 나을 것 같은 희망을 갖게 되었고, 확신을 가지고 어머니를 다락방에 모시고 갔다.
용한 점쟁이가 있다고 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갔지만 '죄, 사단'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영애 권사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며 화를 벌컥 내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다락방에 모인 이들은 이때 기도하며 우 권사의 가정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고 이 권사는 이튿날부터 정말 평안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살길이 이 길이 아니냐'며 은혜를 받기 시작한 이영애 권사는 우 권사와 함께 류 목사를 메신저로 동해다락방이 열렸는데, 우 권사는 이때부터 은혜를 받고 이웃의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 최일순 권사(63)는 영도 동삼동에서 소문난 여자였다. 술도 잘 마시고, 놀기도 잘했고, 남자들까지도 최 권사에게 급소를 얻어맞을 정도로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을 마시고 한참이나 답답한 심정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우 권사는 최 권사에게 말을 건네며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다락방으로 초대했다. 최 권사도 웃으면서 권유하는 우 권사의 인도를 따라 다락방에 어렵게 참가하여 3, 4번 계속 따라가게 되었다.
어느 날 최 권사는 수요예배에 참가하게 되어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는데 누르고 있는 듯했던 무거운 짐이 가벼워지면서 울면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1989년부터 90년까지 2년 동안 최 권사는 다락방에서 메시지를 들으며 많은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나도 다락방을 하게 해달라고요. 그래서 우리 집에서 다락방이 92년도 열리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화요일 지속하고 있습니다." 웬만해서는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간암으로 94년도에는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었다.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최 권사는 다락방을 한번도 건너 뛴 적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켜갔다. 다락방에 갈 수 있도록 환갑까지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최 권사는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락방을 인도하고 있다.
"협심증에 간도에 문제가 있었고, 혈압이 높아서 거의 죽은목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다락방에서 복음 전하라고 살려 주셨습니다. 전도 때문에 제가 살고 있는 것이지요." 최 권사는 그러면서 영적으로 힘든 6명과 다락방을 인도하며 조장과 사역자 역할을 감당해왔다. 현재도 환상과 환청으로 잠을 못 자며 고통을 받고 있는 김정임 자매와 8년째 사역을 하고 있다.
"조장사역을 할 때는 함께 다락방을 열고 있는 집의 청소도 함께 하고 참관인들 차 대접하고 구역원들 점심대접을 하는 등 사람들이 은혜 받도록 돕는 역할을 주로 합니다." 최 권사는 그러면서 목사님들은 슬슬 조장들에게 메시지를 전해보라며 권하며 사역자로 세워지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다락방 현장은 갈급한 영혼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요. 그곳에서 자신들의 답답한 것들을 풀어놓고 같이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화요일 다락방에서는 현장 복음메시지로 계속 돌아가며 주기도 하고 구역예배에서는 창세기부터 차례대로 모세 오경, 역대기서 등을 차례대로 풀어줍니다." 최 권사는 그래서 다락방은 하나님과의 언약이며 그 시간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선포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부산=김경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