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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인근에는 붉은 벽돌 건물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로 마로니에를 중심으로 건축가 김수근의 걸출한 작품인 건물들이 야외 갤러리처럼 들어선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아르코 미술관이 있다. 지금 그곳에서는 20년 전 이 곳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을 막고, 지금과 같은 예술과 낭만이 숨쉬는 공간이 들어설 수 있게 하는데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던 김수근의 건축 회고전 <지금 여기, 김수근 전> 이 열리고 있다.
여름 땡볕이 팽팽하게 들어선 공원은 시간이 정지된 듯 고요하다. 그 공간을 뚫고 슬로우 모션으로 공원 뒷 쪽에 서있는 붉은 벽돌 적조 건물로 들어갔다. 이 역시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정의한 선생의 철학이 쌓여있는 건물이다. 선생은 벽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찬한 바 있다고 한다. “아무리 급해도 벽돌은 한꺼번에 쌓지 못하고, 한장 한 장 단정하게 쌓이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벽돌이 지닌 조소성은 무한히 인간화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이번 전시회는 김수근 선생의 문화예술 활동, 건축, 인간 김수근의 면모를 보여주는 코너로 나뉘어 세 전시실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제 3전시실로 들어서면 유별난 선생의 벽돌 사랑을 눈과 발로 직접 느낄 수 있게 된다. 왼쪽 사진을 한 번 보자. 선생의 설계한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는 국내외의 지역이 붉은 벽돌 바닥 위에 맵핑(mapping)되어 있다. 바로 흙으로 구운 붉은 벽돌 위에.
개인적으로 붉은 벽돌집과 미로처럼 닫힌 듯 열려 있는 공간에 집착을 보이는 나는 아르코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유년의 한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였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어디선가 어린 아이가 유혹하는 소리만이 좁은 계단통로에서 메아리쳤다. “나 어디있게, 어디있게?”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계단 난간의 좁은 틈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환청이다.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어른 한 사람 어깨 넓이보다 조금 여유있을 계단은 아래층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진다. 이런 곳에서라면 성당의 종탑으로 오르는 어두운 계단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서늘한 기억에 휩싸여 등골이 써늘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아르코 미술관의 모든 계단은 옥상으로 통하게 되어 하늘을 향해 뚫려있으니 무서워지면 계단을 뛰어오르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미 겁에 질린 사람들은 자신의 발자국의 울림에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겁먹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잘 알다시피 건물 내부에서 계단은 큰 방과 작은 방으로 들어갈 수도 빠져나올 수도 있게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어떤 장소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가끔은 바로 그 장소가 처음인듯 미시감(jamais vu)을 느끼곤 한다. 오랫 동안 공간 사옥에서 설계를 하고 있는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끔 계단을 따라 오르다보면 8층 건물 중 자신이 어느 층에 서있는지 모를 정도로 계단이 이어주는 위 아래가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친구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보니,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시감은 매우 중요한 감각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진다. 일상의 사물이 느닺없이 낯설어 보이는 지점에서 의문이 시작되고 사색의 계단으로 이르게 되는 것일 테니까. 그런 점에서 선생이 의도한 바대로 ‘공간 사옥’이야말로 그 안에서 사색이 가능하고 창작을 할 수 있는 ‘가장 사람다운 공간’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게
최근 선생의 작고 20주기를 기념해서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게- 건축가 김수근 이야기>라는 제목의 그림책이 출간되었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가장 먼저 건축가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보여주고, 선생이 사랑했던 붉은 벽돌 이야기와, 공간 사옥이 이야기가 뒤를 잇는다. 마지막으로 길과 건물을 둘러싼 풍경에 대한 선생의 생각도 소개되어 있다. 일반적인 그림책으로는 부피감이 꽤 있고 설명이 충실한 책이라 어른들이 보기에도 김수근 선생의 인생관과 건축 미학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서로 제격이다.
집은 우리가 태어나 세상과 만나는 첫 장소이다. 하지만 그 집이 있기 전에 그 곳에는 땅이 있었다. 그렇다면 건축가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 그들은 횅한 땅 위에 있던 사람이 들어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을 한다. 그런데 김수근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 ‘집이란 언제 돌아가게 될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을 때 더 잘 느낄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집은 마음 속 깊은 곳과 더욱 가깝게 연결된다. 오래오래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집이란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다. 즉 선생에게 집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따듯한 곳이고 자연과 같은 공간이다. 그래서 김수근 선생은 집이 어머니의 자궁에서처럼 포근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건축가는 아무리 작은 공간일지라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 속에 아끼는 장소가 몇 곳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장소들을 기억할 때, 친구를 만났던 일, 혼자 울었던 일 등등,,,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고 함꼐 그 장소를 떠올린다. 김수근 선생은 장소는 두 개의 단어와 각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풍경’이다. 이 중에서도 ‘공간’이란 단어에서 쓰인 ‘간(間)’자에 주목했다. ‘인간’과 ‘시간’이란 단어에도 모두 독 같은 ‘간’자가 쓰이기 때문이다. ‘간(間)’이란 무엇과 무엇의 사이를 의미한다. 무엇과 무엇 사이의, 혹은 두 개 혹은 여러 개의 관계에서 열림을 지향한 우리 선조들의 인본주의적인 공간 배치의 미덕을 선생은 그의 건축에 적극적으로 끌여들였다. 우리 전통 건축물에서 보이는 대청마루나 누마루는 닫혀있지 않다. 안방과 사랑방은 이들을 인해 연결되고 이들은 마당을 향해 열려있는 공간이다. 여름날 대청 마루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한 번 쯤은 해봤을 것이다. ‘내부인 듯 외부인 듯 하늘과 별과 그림자가 보이는 곳인 대청 마루를 안과 밖 중 어느 쪽이라 해야할지? 억압되지 않은 공간적 영역은 아닐지?’
선생은 나쁜 길은 넓은 길이고 좋은 길은 좁은 길이라고 한 적이 있다. ‘왜 그럴까? 뻥 뚫린 넓은 길위로는 버스도 쌩쌩 달릴 수 있고, 길도 막히지 않으니 오히려 더 좋은 길이 아닐까?’ 그런데도 선생은 좁은 길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어렸을 적에 살았던 서울의 가회동과 원서동, 삼청동의 골목길을 떠올려보면 그 이유가 조금은 이해될 수 있다. 그곳은 흔히 ‘북촌’이라 불리우는 전통 한옥이 아주 많은 동네이다. 꼬불꼬불한 많은 길을 누비고 걸어다니고, 자전거도 타고, 제기도 차면서 놀았다는 선생에게 좁은 골목길은 작은 몸의 크기와 살갖에 알맞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좁은 길은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고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크기를 갖춘 ‘휴먼 스케일’이 있는 곳이다. 여기에 선생이 갖고 있던 ‘풍경’에 대한 철학이 맞닿아있다. 개발에 몰려 사람들이 서울의 종로 골목길을 없애고 쭉뻗은 새 길을 내자고 했을 때. 남대문 재래 시장을 없애고 반듯반듯한 건물들이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선생은 꿋꿋하게 이에 반대했다. 거기에는 길과 건축물이 반드시 서로를 위해야 하는 배려가 있어야하고 건축물은 아름다운 자연을 존중하며 세워져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반대였다.
집이 사람을 더 오래 소유하지, 사람이 집을 더 오래 소유하지는 못한다. 선생은 집은 연극 무대와 같아, 막이 내릴 때까지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여전히 우리에게 소유의 개념으로서의 집이 너무 크다. 비록 그림책이지만, 선생의 말은 소유로서 건축을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대성당의 종소리처럼 깊은 울림을 남긴다.
김수근 선생이 공간에 대해 늘 염두해두는 것이 ‘공간’과 ‘풍경’이라는 말은 앞서 이미 했다. 그런데 음악 역시 한 음이 울리고 다음 음이 울리기 까지 소리의 사이에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고, 소리는 시차를 두고 ‘공간’으로 울려 퍼져나가게 된다. 여러분도 커다란 대중 목욕탕에서는 작은 소리조차 사방의 타일 벽에 부딪혀 반사되어 돌아오는 동안 자기네 소리끼리 웅성거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또한 목욕탕과 같은 습기 찬 공간에서는 소리들마저 축축하게 젖어 어쩐지 무거운 느낌으로 들리는 것도 함께 느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크기를 가진 나무와 쇠로 된 파이프에서 만들어내는 소리의 공간인 파이프 오른관들이 하나의 거대한 미래 도시의 건축물처럼 서 있는 대성당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들어본 이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광장처럼 넓은 성당의 아랫 부분부터 생성되어지는 소리의 동심원들이 점점 원주를 넓혀가며 높은 곳으로 상승하는 비행접시같다는 상상은 해보시지 않았는지…. 엉뚱한 공상에 곧잘 빠지는 나는 언젠가 함부르크의 메르헨 교회에서 연주되는 파이프 오르간의 소리를 들을 때, 불규칙한 간격으로 날아 오르다 첨탑 어딘가에서 사라져버리는 비행접시들을 쫓아다니는 상상을 했었다. 그래서 모든 악기 중에서 가장 우주적인 소리를 만들어내는 파이프 오르간이 필요했던 기독교 중심의 유럽의 나라들에는 점점 더 높은 첨탑을 가진 교회가 필요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근거도 없이 추측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김수근 선생은 마산에 소재한 양덕성당이나 서울 불광동 교회, 경동 교회를 신에 대한 흠모의 높이를 보여주는 고딕식 첨탑으로 만들지 않았다. 솔직히 그 세 곳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지까지는 모른다. 하여튼 나는 교회마저 따듯한 품을 열어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집처럼 만들고 싶었다는 김수근 선생의 교회건물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듣고 싶다. 그 소리의 간격들이 만들어내는 울림의 포물선들이 궁금해진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오른간 이야기를 한 이유는 생상(Camille Saint-Saens, 1835-1921)이 교향곡 3번을 소개하기 위해서이다. 이 교향곡 3번은 오르간 연주에도 발굴의 실력을 갖고 있던 프랑스의 대작곡가 생상이 런던의 필하모닉협회로부터 교향곡 작곡을 의뢰받고 1886년에 완성한 특이한 편성의 곡이다. 보통 파이프 오르간과 같은 통주저음의 악기가 교향곡에 쓰인 경우는 생상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오르간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생상은 건축가의 대성당 설계도와 같이 아주 복잡하면서도 치밀한 악보를 그려냈다. 게다가 이 곡은 악기의 편성이 매우 방대한 3관 편성이고 다양한 형식을 갖춘 복잡함으로 말미암아, 한여름 밤 하늘을 수놓으며 각양각색의 빛의 스펙트럼처럼 레이저 쇼를 연상케 하는 확장된 소리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생상은 김수근과 마찬가지로 한 분야에만 관심과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수많은 곡을 작곡하는 한편, 시집과 희곡을 발표한 문인이기도 했고, 철학과 천문학에도 정통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천문학자로서 사막의 별들을 쫓아 다니던 그가 결국 알제리 여행 중 생을 마감한 것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 교향곡은 2악장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이 각각 2부로 나누어져 있어 통상적인 4악장 형식의 교향곡으로 볼 수 있다. 1악장의 1부는 아다지오의 느린 서주로 시작하다 빠른 템포의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옮아간다. 여기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메인 테미가 나오고 2부로 넘어간다. 2부는 피아니시모로 시작되는 서주에 이어 16분 음표의 잔물결 같은 현악 소리에 따라 노래하듯 제2주제가 조용히 이어지다, 그런 뒤에 오르간이 펼쳐놓는 아름다운 벨벳 카페트 위로 현악기가 사뿐히 걸음을 옮긴다. 제 2악장은 순환주제를 뚜렷하게 드러내며 스케르쪼로 화려하게 시작되는데, 이 때 더해진 금관 악기들의 비상하는 음들은 대성당 첨탑의 작은 창들 속을 빠져나가는 비둘기를 연상케한다. 2악장의 1부는 생상 특기인 푸가와 함께 마무리되고 2부는 화려한 음색의 오르간 연주로 시작되는데, 어느새 오르간과 함께 전관현악의 투티가 이루어내는 웅장한 소리들은 점점 장대한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며 대성당 첨답의 십자가에 닿게 된다.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이 오르간 교향곡을 발매했을 때 그라모폰 지는 “이 음반을 필적할 만한 음반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76년 녹음된 이 음반을 녹음하기 직전 파리 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의 음악감독이 된 바렌보임은 이 곡 연주에서 핵심이 되는 오르간 연주자를 직접 초빙했다고 한다. 가스통 리타이즈(Gaston Litaize)라는 프랑스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인 그는 당시 이미 육십대 후반에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완벽한 음반을 만들기 위해 바렌보임은 사르트르의 대성당의 파이프오르간을 원했고, 오르간 파트를 제외한 전곡은 시카고의 메디나 성당에서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연주했다. 그후 녹음테이프를 들고 파리로 돌와온 바렌보임은 리타이즈가 사르트로 대성당에서 연주한 오르간 파티 부분을 합쳐 이 웅장한 스케일의 교향곡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어떤 음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은 별도로 있는 것일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아르코 미술관’의 길고 좁은 계단에 어울리는 소리는 어린 시절 숨바꼭질에 열중하는 아이의 웃음 소리 말고 무엇일까? 사실 내가 ‘아르코 미술관’을 찾은 그날 저녁 제1 전시실에서는 즉흥전자음악회가 있었다. 그 때 속된 말로 ‘필(feel)을 받은’ 나는 필립 글라스(Philip Glass)의 음악을 소개할까 했지만, 너무 전위적으로 나가는 것이 김수근의 자연주의 혹은 인본주의 정신과 맞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음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 악기인 오르간이 주가 되는 생상의 교향곡 3번을 소개하게 되었다.
첫댓글 흑, 어려워서 시간 내서 자세히 읽어 봐야겠군요^^
제가 글을 어렵게 쓰는 경향이 많은가봐요. 아는 게 제대로 없어서 그렇지 않은가 싶어요. 제대로 잘 안다면 쉽게 말할 수 있을턴데....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