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연극제에 나온 봉화여고와 김천 한일여고에 이어 어제 영주여고에서도 "탑과 그림자"를 공연했다. 이런 사실이 잘 얘기해 주듯이 이 작품은 여학교 연극반에게 꽤 인기가 있는 작품이다.
연극반 지도교사로서 나는 별로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작품을 쓰신 이만희선생님의 의도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모두가 정신병자, 즉 물질적인 작은 이익 때문에 더 큰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정신병자임을 깨우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이 작품에 대해 받아들이는 정서는 다르다. 십대의 여학생들은 막연히 "싸이코드라마"를 좋아한다. 물론 죽음이나 정신병에 대해 관심이 많은 나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욕망에 비해 제약이 너무 많은 나이다 보니 아이들은 대부분 현실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탈출하기를-극을 통해서라도- 은연중에 바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신병자나 자살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탑과 그림자"에서 범하는 오류는 바로 이 작품이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은 모습은 나타내고 있음을 잊어버리고 "미쳤다"는 현상만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작품에서 늘 알맹이는 빠져 있고 좀 우스꽝스러운 인물의 형상화에만 매달렸다는 인상을 늘 받는다. 왜 이 사람이 미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나름대로의 "진실"이 각 인물들에게 분명히 있는데도 학생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미치기", "웃기기"에 바쁘다. 그러다 보니 대사가 우스꽝스럽고 억양도 이상하고, 행동에도 과장이 심하다. 이 극은 분명 소극(웃기기 위한 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항상 코메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웃기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웃기더라도 사람들로하여금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쉽게도 세 학교에서 모두 그런 "진실"은 보지 못했다.
학생들이 작품의 원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연극을 만들면 이 연극은 껍데기뿐인 연극이 된다. 이 점을 연극반 학생들이 좀 심각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작품 밑바닥에 깔린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연극을 만드니 "탑과 그림자"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공연하는 대부분의 학교는 늘 노력에 비해 나쁜 결과를 얻는다.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나는 대본을 택할 때 학생들이 실감할 수 있는 대본- 직접 느낄 수 있는 대본-을 고르라고 권하고 싶다. 배우가 온몸으로 느껴야 관객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세 학교 연극을 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감동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실력이 많이 모자랐지만 차라리 상주여고의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대사가 잘 안 들렸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눈물도 흘렸다. 연극은 우선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본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한일여고의 경우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으니 이 학교 이야기는 빼기로 하고, 봉화여고와 영주여고 학생들의 연극은 연극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비교해 보려 한다.
봉화여고 학생들이 만든 연극에는 땀 흘린 흔적이 확실히 보였다. 학생들의 뜨거운 연극 사랑과 의욕이 온 무대에 보였다. 눈빛이 뜨거웠다. 배우들간의 호흡도 척척 맞았다. 좋은 앙상블은 연습을 통해서만 나온다. 작품은 재미가 없었는데 아이들이 참 예뻤다. 학생 연극은 이래야지-연극하는 태도 말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뜨겁고 의욕적인 아이들에게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1등을 할 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는 봉화여고를 좋아하면서도 은근히 이 학교보다 더 나은 연극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마 관객으로서의 욕심이기도 할 것이고, 연극을 사랑하는 연극반 지도교사로서 경북 청소년연극에 대해 거는 기대이기도 할 것이다. 재미없는 연극, 감동을 주지 못하는 연극이 1등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좀 섭섭하기 때문이다.
이 "재미없음"의 원인은 첫째가 위에서 말한 작가의 의도에 대한 이해 부족이고, 둘째가 대사의 지나친 과장-이상한 억양-이고, 셋째가 빠르고 느리기의 조절 부족인 것 같다. 봉화여고 학생들은 아주 많이 노력한 흔적이 보였지만, 대사법에 대해 공부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끊어읽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곳이 많았고, 대사를 지나치게 우스꽝스럽게 과장한 곳이 많았다. 끝을 끄는 대사도 많았고. 이런 점들은 아주 부자연스럽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연극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재미있게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몇 편이라도 연극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주 어색하고 왠지 웃음을 억지로 짜낸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빠르고 느리기의 조절이란 배우와 배우의 대사 사이에, 또는 한 배우의 대사에서 어떤 부부은 빠르게, 어떤 부분은 느리게 해서 긴장과 이완을 확실히 표현하라는 말인데, 아마 연극을 많이 보고 디테일, 앙상블 단계에서 이 점을 좀더 신경 쓴다면 더 나은 표현이 될 것이다.
어제 본 영주여고 학생들의 대사는 훨씬 나았다. 전체적으로 "대사법"을 공부한 흔적이 보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디서 끊어야 하고 대사의 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표현력이 부족하여 어색하게 하는 것과 아예 모르고 있는 것은 들어보면 금방 차이가 난다. 영주여고 "꾼들"은 대사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연기가 미숙한 학생들은 더러 있었지만 그건 "학생이니 미숙할 수도 있겠다"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연기력은 있는데 어떻게 대사를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식으로 연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숙한 편이 덜 거슬린다는 말이다. 아마 영주여고의 "탑과 그림자"가 좀더 재미있게 느껴졌던 것은 대사가 주는 거부감이 적었기 때문일 것 같다. 그리고 빠르고 느리고의 템포 조절 역시 더 잘 되었다. 의상이나 각 배우의 개성 표현 역시 신경쓴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꼽새할미"나 "공처가" 등이 필요 이상으로 자기 역을 부각시켜서 극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을 막았다. 연극에서 한두 사람이 스타의식을 가지거나 관객의 반응에 우쭐하다 보면 극의 자연스런 흐름은 순간 끊어진다. 그래서 연극은 "더불어 나누는" 예술이다.
그리고 학교 예술제 연극이라 그런지 관객의 시선을 끌기 위해 억지로 웃긴 부분이 많았다. 수정하지 말아야 할 곳에 손을 대 극의 흐름을 이상하게 바꾼 부분도 몇 군데 있었고 이 학생들 역시 대사를 지나치게 과장한 곳이 많았다. 그런 데다 "연출"이 없었다. 이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초점이 업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집중력이 떨어졌다. 배우들은 각각 관객을 웃기기에 바빴고, 웃다 보면 앞뒤가 잘 안 맞았다. 제목은 "정신병동 사람들"이었는데 연출은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두 시간 내내 배 잡고 웃다가 극장을 나오는 순간 내가 왜 웃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다 잊어버리게 되는 요즘 한국영화 한 편 본 것처럼 시민회관을 나오면서 나는 좀 허무했다.
그래도 많은 어려운 여건을 딛고, 이 작품 한 편 기어이 무대에 올린 영주여고 아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짜임새는 별로 없었지만, 대본을 자기들 나름대로 고쳐 보려는 의욕도 보였고 제법 극중극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꼬마선생의 엄마가 끝까지 극성스런 모습을 잃지 않고, 꼬마선생이 바라는 어머니의 모습을 발발이가 서사극 형식으로 대신 해 주는 모습은 신선했다. 아이가 미친 후 엄마의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이가 미친 후에도 "일류병"을 고치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좀더 사실적으로 다가왔고, 아이가 바라는 엄마의 모습은 영원히 아이의 마음 속에만 있다는 것이 더 슬프게 느껴졌다.
영주여고 "꾼들"은 연극에 대한 끼와 기본기를 갖추고 있어서 좋은 지도자를 만나면 참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있는 선생님이 "꾼들"을 맡아 준다면 연극을 몹시 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목마름을 채워 줄 수 있을 텐데......
연극을 만드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대본을 택하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열심히 땀흘려 뜨거운 연극을 만들었을 때, 그 때의 기쁨은 이루말할 수 없다. 연극을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이, 설사 이 다음에 커서 배우가 되지 않더라도, 연극 한 편 제대로 만들어 공연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대로 된 연극을 만들 줄 아는 학생들은 분명 인생을 제대로 사는 열쇠를 가지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