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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이주열 |
碑 岩 寺
鳥致院文化阮 鄕土史硏究委員
李 柱 烈
Ⅰ. 머리말 *李柱烈
Ⅱ. 비암사 설화 및 연역
Ⅲ. 여러 문헌으로 본 비암사 ① 지리지 ② 역사적문헌 ③ 비암사에 관한시 ④ 일제시대의 비암사
Ⅳ. 지정 문화재로 본 비암사 ① 국가지정 문화재 ② 도지정문화재 ⑴ 극락보전 ⑵ 3층석탑
Ⅴ. 비지정 문화재로 본 비암사 ① 아미타여래좌상 ② 괘불 및 괘불함 ③ 극락보전 안에 있는 탱화 및 불화 ④ 부도
Ⅵ . 결론
*연기군청근무 연기향토사연구위원 Ⅰ. 머리말
충남 연기군(燕岐郡)에는 천년고찰(千年古刹)인 비암사(碑庵寺)가 있다. 이 사찰은 조계종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 있으나, 우리 군의 대표적인 사찰로 군민들한테 사랑받고 있다. 그동안 비상(碑像)이 출토되기 까지는 이름 없는 암자로 인식되어 왔으나, 지난 1960년대 비암사 에서 비상들이 발견되어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미술사가한테는 꼭 한번은 방문해야하는 사찰로 인식이 되어왔다. 이 비암사는 백제 말기 또는 통일신라에 창건한 사찰로 알려지게 된 것으로 사찰로 유명하게 되었다. 충남에서 대표적인 사찰로 공주마곡사(麻谷寺)와 예산 수덕사를(修德寺) 손꼽는다면, 연기군에서의 대표적인 사찰로는 비상이 출토된 비암사(碑岩寺)을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비암사 에서 출토된 문화재만 관심을 가졌지 그 외의 문화재는 관심이 별로 없는것 같아서, 본인은 우리 지역의 대표적 사찰인 비암사를 널리 홍보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집필하게 되었다.
Ⅱ 비암사 설화 및 연역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 4번지에 위치한 비암사의 중수기(重修記)에는(주1) 고려초기에 창건되었고, 바위가 비석처럼 생겼다 하여 비암사(碑巖寺)라 부르게 되었다.(사진1) 그러나, 비암사 창건은 사역에서 비상이 발견되어, 백제말기 혹은 통일신라 초기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극락보전 앞에 3층석탑이 있기 때문에 고려중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비암사가 속해있는 전의면은(주2,), 백제시대 구지현(仇知縣) 으로 속해 있다가, 신라 경덕왕에 금지현(金池縣)으로 포함 되었다가,대록군(大麓郡)에 병합된 후, 고려때 전의로 고쳐서 청주목(淸州牧)에 속해 있다가, 조선태조4년(1395년) 감무(監務)를 설치한 후, 태종13년(1413)에 현감이 관리하다가, 태종14년(1414) 연기를 합하여 전기현(전기현) 으로 속해 있다가, 태종16년(1416) 각립으로 복구 후, 고종32년(1895)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충북 청주군의 덕평면(운강,부곡,양리,당리,내동,요곡,광암,평리)를 합하여 전의군이,동면,남면,대서면,소서면,북면,덕평면을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페합에 따라 연기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 비암사의 설화에 대하여 여러 개의 설이 남아있지만, 본인은 민 찬 교수가 쓴 “비암사 창사의 배경에 관한 설화적 접근”(주3) 중에서 실례할 수 있는 것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전에 비암사 에는 비구니들이 많았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멋진 신사가 저녁에 와서 절을 돌다가 새벽에 돌아간다는 것을 안 어느 비구니가 말을 걸어 친해지게 되자 같이 밥을 먹을 정도이고 서로 마음을 주고 정까지 통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이 신사의 신상에 대해서 물어도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절 부근에서 산다고 하여, 하루는 비구니가 큰 결심을 하고 이 신사의 뒤를 밟아보니 절 뒤의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비구니가 동굴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한 마리의 커다란 구렁이가 있었다. 구렁이가 비구니를 보자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당신이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난 사람이 될 수가 없다하며 슬픈 이야기를 하동굴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구렁이는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자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고, 비구니승도 절에 돌아와서 시름시름 아프다가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비구니와 구렁이자 비구니는 자신으로 인하여 인간이 못된 구렁이한테 미안함을 느낀 비구니는 평생 이 의 사랑을 생각하여 죽은 비구니를 구렁이와 함께 동굴에 묻었다고 한다. ② 지금은 비암사가 조그만한 암자로 변하였지만 전에는 후동절, 남절, 샛절, 성당절, 등 여섯군데로 이루어진 대 사찰로 지금의 마곡사가 말사이었다고 한다. 전에는 이 처럼 크고 웅 장한 사찰이 퇴락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다방리 사방골 동네 뒤에는 굴 바위라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춤을 추는 형상의 모습으로 있었는데, 절이 크면
주1) 권상로,『한국사찰전서 상권』,동국대출판부,1979,586쪽 주2) 연기군편찬위원회,『연기군지』,1988,231쪽 조치원문화원,『전의 향토지』,1997,740쪽 주3) 민 찬 『비암사 창사의 배경에 관한 설화적 접근』,한국언어문학 제61집, 2007.
그 만큼 드나드는 손이 많아 수발을 거드는 동자승들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동자승들은 어떻게 하면 손님들을 좀 줄어불까하는 궁리 끝에 어느 날 도승이 나타나 이 방안을 묻자 앞에 보이는 굴 바위가 스님이 장삼을 입고 춤을 추는 형상 때문이라고 말하자 동자승들이 물래 바위를 밑으로 떠밀어 버린 이 후로 절은 점차 쇠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③ 비암사 절 뒤에는 한 웅덩이에 뱀이 살았는데, 그 뱀의 무리들이 범상한 모양이 아니어서 이 뱀을 섬기기 위해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④ 비암사에 기거하던 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절을 떠나기 몹시 싫어해 죽어서도 뱀으로 남아 절 주변을 맴돌았다고 하는데, 지난 1998년 절 중축공사하기 전 까지는 계속나타나 절 주변을 맴돌았고, 이 절 스님들도 보았다고 한다. 이상 4가지의 설화들 중에서 ②번을 제외한 ①,③,④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보아지는데, 뱀이 주체가 되어 비암사라는 寺銘에서 이런 설화가 나온 것으로 보아진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비암사가 언제 누구로 인하여 창건되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조선후기와 근대 및 현대까지 여러 번 중수한 사실을 정리하고자 한다. 전국의 대부분의 사찰이 여러전란과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폐사된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조선의 양 전란이후에 다시 중창한 건물이 현대까지 이어져 온 것이 대부분이다. 양 전란이후 그 누군가에 의하여 비암사가 창사. 중건되었는지는 도저히 알수가 없으나, 극락보전 앞에 3층석탑만이 고려중기의 것이고, 나머지 유물이나 여러 자료를 유추해 볼 때 분명한 것은 조선후기의 것만 남아있어, 그 이전의 유물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다름이다. 단지 비암사 에서 비상들이 발견되었으나, 이는 극락보전 앞 3층석탑의 상륜부에서 발견된 것으로 단정 지어 백제말 이나 통일신라 초기에 사찰이 창건된 것으로 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 당시의 비상이외에 다른 유물이나 유적 또는 사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무엇으로 증명하여 이 사찰이 백제말기 또는 통일신라 초기 나 고려중엽에 창건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비상들이 발견된 것이 삼층석탑 상륜부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옮겨와 무심하게 석탑의 꼭대기에 방치한 점이 하나의 이유이고, 다른 이유는 비상의 한 세트인 옥개석과 기단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인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① 원래 이 자리 말고 다른 곳에서 비암사 라는 사찰이 아니고 다른 사명(寺銘)이 있어 존재해 오다가 여러전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것으로 보아지고, ② 병자호란이후 불교계의 새로운 바람으로 중흥의 시기를 맞이하여 현 이곳 다방리 4번지에 비암사가 중건되었다고, 보는 바이다. 그 이후에 3~4번에 걸쳐 사찰의 주전각인 극락보전이 불심에 의하여 보수되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1) 양난이후 1924~25년 사이에 극락보전과 산신각의 여러 탱화불기에는 이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고, 소화13(1938)년명(사진2) 비암사 공적비 에는 시주 김택모라는 이름으로 보아 일반 개인이 주 건물인 법당을 완전 보수한 것이 아니고 일부만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2) 1957~1958(주4) 김진양 주축 과 문교부 및 교육구의 보조로 극락보전 지봉과 부연을 중심으로 해체보수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극락보전이 주 법당으로 사용한 점을 알수가 있다. (3) 1991년에는(사진3) 조치원에 거주하는 청신녀 정영희 여사가 유언으로 남긴 뜻을 받들 어 김인배,성배, 분들의 노력으로 대웅전을 재건하였다는 내용이 청신녀 초계 정씨영희 여사 공적비 에 기록하고 있다. (4) 1995~1996년(사진4)전 국회의원 박희부 씨가 비암사 사정을 들으시고 정부예산을 끌어와 여러 전각과 극락보전을 완전 해체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 비암사에서 발견된 비상으로 인하여 매년 양력4월15일에는 백제의 여러국왕과 대신, 국토안녕을 위하여 1983년부터 백제대제가 열리고 있는 점으로 보아 백제의 역대 왕을 위하여 제를 올리는 것은 전국에서 이곳 연기밖에 없다는 것은 충청인의 몸속에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활 것이며, 영원히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생각된다.
4) 주1 위의책 586~589쪽 Ⅲ. 여러 문헌으로 본 비암사
① 지리지
비암사에 관한 지리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다면, 18c부터(지도1) 만들어진 각 현의 지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아지며 현존하는 지방도 중에서 오래된 것으로 보여지는 여지도 와 호서지도 전의현 에는 비암사 부분이 표현되고 있다. 그 이후에도 각 현의 지방도가 표기되었으나, 대부분이 18c의 지도를 보고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② 역사적 문헌 우선 역사적 문헌으로 비암사 사명이 표현된 것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맨 처음 표현된 시기는 숙종6년(1680년) 이유태의 복제의 예에 관한 상소에 비암사에 관하여 처음으로 언급되어있다. (1) ~전략(주5) 일찍이 선왕조 때에 외람되게 복제(服制)의 예를 수의(收議)하라시는 하교(下敎)를 받들어 알지 못하는 것을 무릅쓰고 망령되게 헌의(獻議)했었습니다. 그러나 <복제에 대한> 국금(國禁)을 거듭 엄명하신 뒤에는 신과 송시열(宋時烈)간에 복제에 관해서 왕복한 말이 이미 없었고, 송시열이 신에게 긴 편지를 보내 나무랐다는 사실도 또한 없었으니, 이른바 대신(大臣)의 말이란 것이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엎드려 갑인년 무렵의 일을 생각해 보건대 도신징(都愼徵)의 상소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천추(千秋) 후에 전하께서는 적손(嫡孫) 노릇을 못하신단 말씀입니까?’라는 말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한 들으니 재상들도 이러한 말들을 하는 자가 있는데, 그 본의가 대개 ‘신 등이 효묘(孝廟)를 적자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함이라 하니, 말이 매우 흉악하고 음험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전의(全義)의 비암사(飛庵寺)에 있고 송시열이 마침 수원(水原)의 만의사(萬義寺)에 있을 때 서로 편지를 내왕하면서 말하기를, ‘송(宋)나라 영종(英宗)은 방계(旁系)에서 들어가 대통(大統)을 이었는데, 정자(程子)가 또한 적자(嫡子)라고 했으니, 하물며 효묘(孝廟)께서는 차적(次嫡)으로서 승격되어 적자가 되었으니 적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했더니, 송시열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후략~ (2)숙종10년(1684년)에도 복제문제로 인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비암사의 지명이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전략 (주6)효종이 승하하였을 때에, 송시열이 자의전(慈懿殿)의 복제(服制)를 의논하되 고례(古禮)의 차장(次長)에 대하여 기년복(期年服)을 입는 제도를 주장하였고, 이유태의견도 송시열과 같았다. 윤휴(尹?)·허목(許穆) 등이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설(說)을 수창 (首倡)하고,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송시열을 무함하여 예(禮)를 그르치고 통서(統緖)를 어지럽힌 것을 죄로 삼게 되니, 이유태가 스스로 당한 것이 송시열과 다를 것이 없다 하여 비암사(飛庵寺)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주5) 『조선왕조실록』숙종 6년 5월12일 條 주6) 『조선왕조실록』숙종10년 4월24일 條
지도1 전의현의 고 지도
(3) 인조7년(1629년)에(주7) 제작된 청강선생 후청쇄어(淸江先生 鯸鯖瑣語) 이제신(李濟臣)이 찬한 문집에는 전의이씨 족보을 보관하기 위하여 비암사가 수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1629년 이전에도 비암사가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주7) 이제신 [李濟臣, 1536~1583]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 몽응(夢應), 호 청강(淸江), 시호 평간(平簡)이다. 7세에 시를 지을 정도로 영민하였으며, 17세에 조욱(趙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564년(명종 19)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정자(權知正字)가 되었다. 이후 내직으로는 예문관검열, 성균관전적, 형조 ·공조 ·호조의 정랑을 거쳐 사헌부감찰,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외직으로 울산군수, 진주목사,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8
(4) 숙종38년(1712년)(주8) 논산 노강서원(魯岡書院)에서 간행된 노서유고(魯西遺稿) 노론과 서론의 시비문제가 된것이 복식문제로 비암사에서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5) 초려선생문집7권(草廬先生文集之七)(주9) 초려선생인 이유태(李유태)(1607~1684) 선생의 문집에 복식문제로 인하여 비암사가 명시되어 있다. (4~5)의 내용이 모두 복식문제로 인하여 숙종실록에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여진다.
주8)윤선거 [尹宣擧, 1610~1669] 본관 파평(坡平). 자 길보(吉甫). 호 미촌(美村) ·노서(魯西) ·산천 재(山泉齋). 시호 문경(文敬). 증(拯)의 아버지. 1633년(인조 11) 생원시 ·진사시에 급제, 성균관에 입 학하였다. 1636년 후금(後金)의 사신이 입국하자, 유생의 소두(疏頭)로서 명나라에 대한 의(義)를 지키 기 위해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켰으며, 성이 함락되자 평민을 가장하여 탈출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금산(錦山)에 내려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성리학에는 당대의 대가였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절친한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가 학문으로 대립하자, 중립을 취하여 오히려 오해를 샀다. 죽은 뒤 아들 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墓碣)을 청탁하였으나 무성의하자 감정대립이 격화,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파된 원인이 되었다. 1715년 유계(兪棨)와 함께 펴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놓고, 노소론이 싸움을 벌여 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 1622년(경종 2) 복구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고,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노서유고》 《노서일기》, 저서에 《계갑록(癸甲錄)》 《우계연보후설(牛溪年譜後說)》, 글씨에 《김집묘갈(金集墓喝)》등이 있다.
주9)이유태 [李惟泰, 1607~1684] 본관 경주(慶州). 자 태지(泰之). 호 초려(草廬). 시호 문경(文敬).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인조 때 세자사부(世子師傅)를 지내고 1660년(현종 1) 호군(護軍)으로 공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663년 균전사(均田使)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내고 효종 즉위 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북벌계획(北伐計畵)에 참여했다. 3사(司)가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자 장문(長文)의 상소를 올려 김상헌의 충의도덕(忠義道德)을 높이 찬양하여 그 처벌을 극력 반대했다. 1675년(숙종 1)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윤휴(尹鑴) 등 남인(南人)의 배척을 받아 영변(寧邊)에 유배, 5년 뒤에 풀려났다.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처음에는 송시열과 의견을 같이 했으나 뒤에는 학문상 의견의 대립으로 절교했다. 치국경제 문제에서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경장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향촌조직과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의 실시 및 양전(量田)의 시행, 사창(社倉)의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이조판서가 추증, 금산서원(錦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초려집(草廬集)》 등이 있다.
③ 비암사에 관한 문서
조선후기 것으로 보이는 토지 관련문서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고문서1)
碑岩寺僧桂楥右謹陳所志矣段矣僧翁師衿得田畓文記中間閪失故日後憑考無路乙仍于田畓庫圓謄書後録仰訴爲白去乎情由參商教是後後考次立旨成給爲白只爲行下 向教是事官司主 處分戊戌十一月 日所志後縣内伏在寧字第五十七内二田四卜九束起内三畓六卜起餘字第十二田二卜七束起第十六畓四卜八束起十三内二田六卜陳廿六日印官 (揮筆) (押)(題音)憑考次立旨成給向事 廿六日(官印 三個處)
碑岩寺 승 桂楥이 우와 같이 삼가 소지를 올립니다. 승 翁師께서 금득(衿得)한 田畓文記의 부분을 잃어버린 까닭에 앞으로 후일에 증빙하고 참고할 만한 방법이 없으므로 전답고의 문서에 후록하기를 원하여 진정합니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살피시어 성급한 것을 입증하는 입지를 발급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나으리께서 처분하여 주시기를 삼가 청합니다.
무술 11월 일 소지
현내에 있는 영자전 제57 가운데 내2전 4부 9속과 내3답 6부를 포함하고 여자전 제52전 2부 7속을 포함하고 제16답 4부 8속을 포함하고 제13전 안의 2전 6부를 베풀어라 이십육일 다음을 고려하여 성급한 것은 입증하는 문서를 베푼다. 이십육일 윗글의 해석은 청주공항문화재감정실에 근무하고 있는 정재규선생에 의한것을 밝혀준다.
④ 비암사관한시
연기지에 수록되어 있는 연기8경을 중에 비암만종(碑岩晩鐘)과 팔경시(八景詩)에 비암사가 소개되어 본고에 재전재 한다.
비암만종(碑岩晩鐘)
가산 장재구(可汕 張在九)
백척비암수첩봉 (百尺碑巖數疊峰) 백척 의 드높은 비암산 봉우리가 첩첩인데 암승예불자오종 (庵僧禮佛自嗚鐘) 스님의 독경소리에 종소리도 은은하다. 종성공혹매진로 (鐘聲恐或媒塵路) 종소리 행여나 물들세라 주득귀운면면봉 (住得歸雲面面封) 돌아가는 구름 멈추게 하고 낱낱이 봉 하리
회운 윤철식(晦雲 尹哲植)
비암예불효오종(碑庵禮佛曉嗚鍾) 비암사 의 아침예불 새벽종소리 올리는데, 성철령구입입봉(聲撤靈區立立峰) 소리는 절 안에 번지고 산봉우리에도 올려 퍼지네, 경유촌계수준창(更有村鷄隨俊唱) 그 위에 촌닭이 뒤따라 소리치니 환성순척각상종(喚醒舜跖各相從) 잠 깨인 이사람 저 사람이 서로 따라 일어나네.
학해 임헌태(學海 林憲泰)
효산료숙고암종(曉山蓼菽古庵鐘) 고요한 새벽 산에 절의 종소리 올리는데 고산운간벽만봉(鼓山雲間劈萬峰) 구름사이로 올리는 일만 봉을 가르는구나. 법계비도삼각리(法界非徒三覺理) 세상에 불교의 삼각의 이치만 있는 것이 아니리라. 고교부세파미농(故敎浮世破迷濃) 옛 성현의 가르침이 미로에 빠지는것을 구해 주노라 팔경시(八景詩)
남파 임헌태(南坡 林憲泰)
등임당갑취람청(登臨唐岬翠嵐晴) 당산에 오르니 푸르스름한 람기에도 날씨는 맑은데 경유협산려고성(更有挾山麗古城) 산위에는 옛 성터 자리를 잡고 있네. 월백침원추저난(月白砧園秋杵亂) 가을달 밝은 밤에 다듬이 소리 오란한데 운심비사효종오(雲深碑寺曉鐘嗚) 구름 깊은 비암사 새벽종이 올리는구나. 무범금수풍천리(貿帆錦水風千里) 금강에 돛단 배 바람은 천리나 나부끼고
어화동진적수성(漁火東津笛數聲) 동진에 고기잡이배 등불이 깜박이고 피리부는 소리만이 여기저기들려오네 막도오봉잔조검(莫道五峰殘照歛) 오봉산 저녁노을 걷친 다고 말하지 말라. 용당암상별유청(龍塘巖上別遊晴) 용당바위 위에 놀기 좋게 개어 있네.
금사 임병두(주10) (錦史 林炳斗) 석조봉전연일사(夕照峰前煙一蓑) 석양 노을진 봉우리에 저녁연기 들려있고 기암당반노쌍화(奇巖塘畔露雙靴) 연못가 멋진 바위는 한 켤레 신발처럼 드러나 있네 천청귀범원수락(天晴歸帆遠水落) 맑은 하늘 금강포구에 돛단배 돌아오고 침산추월다라사(砧山秋月多羅寺) 나뭇잎 떨어진 점산 에는 가을달만이 비치우네 소종효운출려성(疎鐘曉雲出麗成) 신라 옛절에서 올려 나오는 새벽 종소리는 구름속 에서 퍼져 나오고 고첩모금과람의(古堞暮禽過嵐擬) 고려 옛성의 담장 위에는 돌아오는 새의 발길이 바쁘더라 당산청여허람기(唐山淸如許嵐氣) 람기 어린 당산은 맑기도 맑구나 어화동진흥약하(漁火東津興若何) 고기잡이 배 돌아오는 나루에는 흥타령이 절로나오네
⑤일제시대의 비암사
우리 민족문화의 가장 암흑기 시대인 일제침략기에는 문화재가 수탈되는 것은 전국의 모든 사찰도 수난 당했지만, 비암사도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자료가 없어, 본고에서 표기할 수가 없는 것이 아쉬 을 다름이다. 그러나 본인이 조사해 본 바로는 동아일보 1927년7월18일(신문1)자 3면 명승고적 편에 비암사에 관하여 간략하게 기제되어 있는것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주10)금사 임병두는 1855년(철종6년)에 공주에서 출생하여 그의 나이 36세인 1855년 (고종27년)에 별시병과7위로 합격한 인물로 아마 고향인 공주로 낙향하면서 옮은 시로 추정된다.
신문1. 동아일보 1927년7월18일
Ⅳ. 지정 문화재로 본 비암사 ① 국가지정 문화재
1960년 대 을 기하여 이곳 연기지방을 중심으로 그동안 전국에서 발견된 예가 없는 비상(碑像)들이 발견되어 학계에 큰 관심을 불려 일으키 것이 바로 연기비상이다. 이에 관하여 서는 여러 동문과 선배들의 논문으로 대신 하고자 한다.(주11)
② 도지정문화재 (1) 극락보전(極樂寶殿) 연기군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 비암사의 극락보전(極樂寶殿)인데, 이 건물의 이름만 보아도 죽은 영혼을 위하여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로 인도하는데, 주목적 을 두고 건립한 것으로 아미타여래좌상불법과 비암사에서 출토된 문화재들과 일맥상통한다. 이 건물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1978년12월30일에 지정된 건물로,1974년에 보수되었고, 1995~1996년 전면해체보수가 되었다. 극락보전의 외부와 내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12) 1. 외부 평면은(주) 정면 3간, 측면 2간으로 내부에는 후면 쪽으로 치우친 곳에 2개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여기에 의지해 후불벽을 만들었다. 도리통 3간은 간사이를 거의 동일하게 설정하였다. 양통은 그 주간을 도리통의 주간과 거의 동일하게 설정하였다. 따라서 전체 평면은 간수와 같은 3:2의 비례에 가까운 구성이다.(사진5.도면1) 기단은 자연석을 이용한 막돌허튼층쌓기로 되어있다. 기단 윗면은 강회다짐으로 마감하였다. 초석은 막돌초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원기둥은 약간의 배흘림을 둔 것으로 보이며, 네 모서리의 귓기둥(隅柱)를 평주(平柱)에 비해 굵을 것을 사용하였다. 건물의 윤곽을 뚜렷하게 보이도록 함과 동시에 시각적으로 안정감 있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기둥 위에는 창방을 들였으며, 그 위에 평방을 두어 공포(栱包)를 설치할 바탕을 마련하였다. 창방은 귓기둥 상부에서 단면폭을 수장폭 으로 좁혀 뺄목으로 돌출하고 있으며, 그 끝 은 초각을 하여 장식하였다.
주11)황수영,「충남연기 석상조사」,『한국의 불상』,문예출판사, 1990,233~272 김리나,「통일신라시대 전기의 불상조각양식」,『한국고대불교조각사연구』,일조각, 1991,151~156 강우방,「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한국불교조각의흐름』, 대원사, 201~205 김창호,「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의명문」,『한국고대불교고고학의연구』,서경문화사, 2007,61~78 주12) http://www.koreatemple.net/에서 재 전제
공포는 내외3출목(내외7포)의 다포식으로 도리통과 양통의 모든 간에 각 2개씩의 주간포를 두었다. 주두와 소로는 모두 굽받침 이 없으며, 굽은 사절(斜切)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주심포는 4단의 살미를 둔 위에 보를 올렸다. 살미 외단은 제1단에서 제3단까지는 앙서형의 제공으로, 제4단은 권비형(卷鼻形)으로 하였다. 즉 초제공, 이제공, 삼제공, 그리고 4운공의 구성이며, 그 위에 삼분두 형식으로 마무리한 보머리를 노출시켰다. 내부는 살미 모두 를 한 몸으로 초각하여 보를 받친 보아지 형식으로 처리하였다. 주간포도 기본적으로 주심포와 동일한 구성이다. 다만 제4단 살미의 외단을 수서형의 익공으로 처리한 점, 그리고 그 위에 주심포의 보머리를 대신한 권비형의 6운공을 둔 점이 다를 뿐이다. 모든 살미는 상하 살미가 맞닿아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후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성이다. 첨차는 모두 교두형을 사용하였다. 첨차는 가장 바깥 출목선상을 제외한 곳에 모두 상하 2단의 첨차, 즉 소첨과 대첨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이 건물 내외1출목선상에 첨차를 3단으로 구성했음이 특성이다. 즉 제1출목선상에는 일반적인 크기의 소첨과 대첨 위에 다시 대첨보다 더 긴 첨차가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인 공포의 구성에서 변형을 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형과 연관해 주심포의 첨차 구성에도 변화를 준 점이 주목된다. 원래 공포의 가장 바깥 출목선상에는 하나의 첨차를 사용하며, 그것은 소첨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극락보전 공포의 가장 바깥 출목인 내외3출목에는 소첨이 아닌 대첨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공포의 구성에는 변화가 생겼으며, 그 점은 조선시대의 다른 건축에서는 보기 힘든 이 건물이 지닌 중요한 특성이다. 2. 내부 내부에는 어간 양측에 2개의 대들보를 걸었다. 대들보는 전면의 공포대 상부에서 고주까지 걸쳐 있으며, 후면 공포대에서 고주로는 퇴보를 걸었다. 대들보는 휜 부재를 사용하고 있다. 양측면 평주 상부의 주심포 위에서는 대들보로 충량을 걸었다. 그런데 이 가구에서 특징적인 점으로는 주심포 상부의 충량 외에 2개의 충량을 더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2개의 충량은 주간포와 중심선도 맞지 않으며, 그 중 하나는 고주에 삽입되어 있다. 이처럼 일반적인 충량 외에 추가된 충량을 사용한 것은 다른 건물에서는 보기 어려운 이 건물이 지닌 특성이다. 충량은 일반적인 경우처럼 공포대 상부와 대량과의 높이 차를 극복하기 위해 심하게 휜 부재를 사용하고 있다. 충량 위에는 측면 지붕의 서까래를 받치도록 하기 위해 외기도리를 사용하였다. 한편 네 모서리에는 추녀의 뒷뿌리가 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중도리 및 외기도리와 한 몸으로 결속시키는 강다리를 사용하고 있는데, 천장 아래까지 노출되어 있다. 내부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천장은 격자형의 우물천장으로 중도리와 외기도리를 경계로 그 안쪽의 천장을 바깥쪽에 비해 한 단 높게 구성하였다. 건물 내외는 모로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엄하였다. 특히 대들보에는 용을 그려 넣음으로서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정면 3간 모두에는 각 네 짝의 창호를 들였다. 네 짝 중 중앙의 두 짝은 쌍여닫이이며, 양쪽의 각 1짝은 중앙의 쌍여닫이와 사이에 문설주를 두어 별도로 구획된 외여닫이창으로 만들었고, 또한 하부에는 머름을 들여 쌍여닫이와는 창호의 높이를 다르게 구성하였다. 이처럼 중앙에 쌍여닫이를 두고, 양쪽에 문설주로 구획된 외여닫이를 두는 것은 비교적 고식(古式)에 속하는 방식으로 여기에도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불전 건축에서 벗어난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다. 창살은 모두 정자살이다. 양측면에는 앞쪽에 외여닫이 문을 두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심벽구조의 흙벽으로 처리하였다. 후면에는 어간에 외짝 문, 양 협간에 두 짝의 창을 두었으나 실제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극락보전은 공포에 세 가지 크기의 첨차를 사용한 점과 가구에 있어서 측면의 기둥이 위치하지 않은 곳에 충량을 두어 구조적 결속력을 강화한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평면의 구성과 기둥, 공포 및 가구 등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조선시대 후기 불전의 전형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극락보전은 조선후기(朝鮮後期)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⑵ 3층석탑 극락보전에서 약 20𝐦앞에 아미타여래좌상의 백호(白毫)와 일직선으로 삼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는데, 총높이399.8c𝐦로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119호로 1985년7월19일에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다. 이 석탑은 원래 이 자리가 아닌 것으로 보아진다. 언제 누가 이 자리로 옮겨는지 알 수가 없지만, 기단부(基壇부)가 없는 것을 1982년에(주13.사진6) 복원한 것으로 보아 비암사 부근의 사지(寺址)에서 옮겨오다가, 탑재를 분실하거나 또는 통일신라(주14) 말 유행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그 지역의 지세를 누르거나, 화기를 예방하기위하여 기단부를 자연암석으로 사용하는예가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나타내는 비보석탑에의한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는데, 이에 관한것은 충북 증평의 남아리사지3층석탑(사진7). 경남산청의 법계사3층석탑, 충북영동의 영국사망탑봉3층석탑이 그 좋은예라 할 수가 있다. 탑신부의 상대갑석은 2매로 이루어져 있고, 옥신괴임은 소실되어 없다. 1층탑신부터 3층까지는 각각의 별석으로 이루어져 있고,탑신석은 우주만 조핵되어 잇는데, 탑신의 너비에 비해 높이가 길쭉해 보이는 반면에 2층옥신부터는 급격히 낮아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과 옥개받침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층 각형5단의 탑신 받침대를 조출하였고, 상면에는 하나의 돌로 2단의 탑신 괴임대를 두었다. 낙수면의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면서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려 일부분이 반적되고 있으며 상륜부는 2매의 석재로 노반만 남아있는것을 기단부 복원공사 할 때 보수한 것이다. 그리고 석탑의 바로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사진8)으로 보이는 2매의 석재가 서로 약30cm정도 떨어져 있으며 우측에 있는 석재는 수직으로 약3 〬c 정도 기울려져 있다.
주13) 장충식,『신라석탑연구』,일지사,1987,56~60 주14)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충청남도 편」,『문화재안내문안집』,1987,41쪽 (3) 아미타여래좌상 (阿彌陀如來坐像) 비암사 극락보전 주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奉安)되어 있는데, 이 부처 조성재료는 소조불(塑造佛)이며, 크기는 193㎝ ,무릅폭 132㎝로 백색(白色)의 부처로 있다가 1970년대에 개금불사(改金佛事) 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연묵당 표구사 권사장님 증언) 이 부처님은 그동안 비지정 문화재로 있다가, 2007년9월20일에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183호로 지정 되었다.(사진9) 아미타여래신앙은(주15)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 하는데, 아미타불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뜻을 가지고, 모든 중생을 구원한다는 부처로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정토사상(淨土思想)으로 일본에 까지 전파된 신앙이다. 이곳 비암사에 봉안되어 있는 천개(天蓋)와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 사찰의 중심전각의 볼.보살상 위에는 지봉 모양으로 설치된 것이 닫집 또는 천개라 하여 범어(梵語)로Chatra라(주16) 하며 인도에서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귀인((貴人)들이 사용하던 것에서 유래하는데, 불교에서 는 불이나 불제자 에게 경의를 펴하기 위하여 장엄구로 활용하여 화려함과 엄숙함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곳 비암사 극락보전에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천개가 도금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불 비상이 발견된 후 어느 주지승이 칼로 글어내어 팔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지금도 자세히 보면 도금한 흔적이 남아 있다. 육계(肉髻)위에 정상계주가 있고, 중간계주는 나발(螺髮)에 있는데, 반달형의 모습으로 표현되어있고 육계부터 턱까지의 상호는 길쭉한 모습으로 눈 모습은 눈 꼬리가 위로 올라간 모습으로, 코가 양 미간에서 내려온 모습으로, 턱은 매우 살이 올라있는 모습이며 목은 굵고 삼도가 형식적으로 표현된 모습으로, 양쪽어깨는 쫙 열어진 상태로 매우 당당하게 표현되었고, 법의(法衣)는 통견(通絹) 으로 두꺼워 보이며, 좌측어깨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법의이지만, 우측어깨에는 법의가 살짝 거치는 정도로 표현되어 있어, 가슴앞의 승각기는 형식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수인은 아미타의 상품중생(上品中生) 으로 구품(九品)인을 취하고 있으나 양손가락이 완전히 마주 잡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수인(手印)의 수법이 나타내는 불상으로는 경북 대구의 파계사 목관음보살좌상(慶北 大邱把溪寺 木觀音菩薩坐像)과 경북 경주의 기림사 소조아미타불(사진10)(慶北 慶州 祈林寺 塑造阿彌陀佛)의 수인과 비슷한 양식으로 추정할 수가 있다. 결가부좌(結跏趺坐)는 항마좌(降魔坐)로 보이는데, 오른발을 왼쪽다리위에 얹고, 왼발을 밖에서 오른쪽 다리위에 얹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법의가 다리에서 흘려 바닥에 까지 내려와 있는 모습이다. 1960년 초반에 이곳 비암사 삼층석탑 상륜부에서 비상들이 발견되고 얼마 후에 타락한 주지로 인하여 극락보전의 주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유물(服裝遺物)을 도굴하는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나서 ,불상의 조성연대(造成年代)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인데 안타깝게 생각된다. (다방리 마을주민들 증언)
주15) 김원룡 감수, 『한국미술문화의 이해』,도서출판예경,1994,240쪽 주16) 위의책 357쪽
(4) 괘불 (掛佛)
이 괘불은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의 불화로 1990년대 초대까지는 매우 손상되었으나 얼마전에 복원하여 매년 4월15일 백제대제(百濟大祭) 때에는 괘불을 걸어 백제의 역대왕을 위하여 대제를 지내고, 2007년9월20일 도지정 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받아 보호하고있다. 괘불은(주17) 사찰의 특별한 행사할 때 옥외에 불단을 만들고 괘불대에 봉안하여 부처님의 모습을 회화(繪畵)로 많은 대중을 부처님의 은총이 깃들게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와 티벳에서 유행하였고, 지금도 이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11) 괘불이 언제부터 행하였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기록으로 보며는 조선초기부터 기우제때 사찰의 중심건물 야외에 단을 쌓고 야외 법희 때 행하여진 것으로 보아진다. 문종 즉위년(1451)(주18) 세종의 명복을 위하여 안평대군의 원찰인 대자암 에서 “...수양대군이 여러 대군과 더불어 대자암에서 시식할 때 뜰 복판에 있는 현옥의 장축이 갑자기 부러져서 수양대군의 이마에서 피가 나는 사건”...으로 보아 야외에서 행사가 이루어 진 것으로 생각되며, 괘불에 준하는 대형 불화가 야외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진다. 순치(順治)13년명(年銘)(1657년孝宗8年)에 조성된 비암사 영산회괘불(靈山會掛佛)의 길이가 6.58m 폭4.59m로 수화원(首花園) 신겸(信謙)(주19)의 작으로 알 수가 있다. 영산회상도는(주20) 석가모니가 대중을 모아놓고 법화경(法華經)을 설하는 장면을 신앙과 관련지어 그림으로 표현하여, 그림내용이 독존(獨尊), 삼존(三尊),오존(五尊)이든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표현되어 영산회상도는 부분적으로 표현되었으나, 법화경변상도(法華經變相圖)라고 말할 수 있다. 법화경은 종파에 관련없이 조선시대에 유행한 것으로 이는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데, 큰 힘이 있다고 믿는 신앙적 차원에서 이 법화경이 종교적으로 기복적인 경향을 띠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까지 어느 학술지에도 비암사 괘불에 대하여 발표된 것이 없는 것을“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김창균씨가 조선조 인조 - 숙종대 불화연구 (朝鮮朝 仁祖 - 肅宗代 佛畵 硏究)”박사학위 논문으로 이 세상에 발표된 것을 늦었으나, 다행으로 여겨진다. 먼저 이 글은 김태영 박사의 논문임을 밝혀준다. 이 괘불은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는 군도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세분적으로 살펴보면 중심이 되는 불.보살이 화면 가운데 배치하고 인물의 크기를 중요도에 따라 달리하면서 화면에 다소의 여유 공간을 가득 체우고 있고, 하단에는 협시보살(挾侍菩薩) 입상인 문수.보현보살 (文殊.普賢菩薩)과 사천왕(四天王) ,제석천(帝釋天) 및 범천(梵天)을두고, 상단에는 10대 제 비릇하여 6구의 타방불과 용왕과용녀(龍王과 龍女), 팔부신중(八部神衆) 가운데 야차(夜叉))
주17) 장충식,「조선시대 괘불의 고찰」,『한국불교미술연구』,(주) 시공사,2004,199~202쪽 홍윤식,「불화」,『빛깔있는 책들』,대원사,20041989,8~9쪽 주18)『조선왕조실록』문종 즉위년 4월11일 條 주19) 신겸(1649~1657)17세기중반에 활동한 불화승으로 1649년 인조장릉 조화소 화승으로 활동하고,수화승으로 충북청주 보살사 괘불도와 충북청원의 안심사 괘불도, 1657년 충남 연기 비암사의 괘불도를 조성함. 주20) 위의책(주15)194,쪽 유마리.김승회,『불교회화』,솔,2005,18쪽 와 건달파(乾闥婆), 시방불이 복합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제부터의 비암사 괘불의 양식 및 인체모습에 따라 하나씩 논하고저 한다. (1)괘불의 얼굴모습 비암사의 영산회 괘불화에 표현되는 부처님의 나발(螺髮)은 굵고, 육계(肉髻)는 두루몽실하고, 정상계주는 표현이 안되어 있고, 둥글어진 얼굴에 큰 눈에 수염은 굵은 모습이다. 이는 효종(孝宗) 말엽에 가서는 , 양쪽 옆 머리가 넓어져 머리가 커 보이며 눈.코.입이 작아지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2) 신체의 형태와 손 모양 어깨가 넓게 벌어져 건장한 느낌을 주며, 무릅이 넓어져 안정감을 주고, 팔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자세로 팔이 유난히 가늘면서, 무릅위에 내린 새끼손가락이 살짝 벌려있는 모습이다. (3) 법의(法衣) 착의법 신체(身體) 형태(形態)에 못지않게 시기별 양식적 특징을 보이는 것이 법의(法衣)를 어떻게 입고 있느냐에 따라 한 요소로서의 몫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 불상과 괘불이라 할 수가 있다. 주존불이 좌상일 경우 영산회상도는 법의 착용법이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통견인(通絹印)과,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구분이 되고 우견편단은 세부양식에 의하여 오른쪽 어깨를 모두 드려내어 착용하는 방법과 어깨위로 살짝덮는 편형식(扁形式) 착용법이 있다. 오른팔을 무릅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짓고 있는 위의 두 가지 편단 우견식 착의법은 좌상이나 입상을 시기에 막론하고 나타내는 전형적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모습으로, 완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 방식이 일명‘신겸’(信謙)파의 작품에서는 보이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청주의보살사(菩薩寺) 영산회괘불화, 청원의안심사(安心寺) 영산회괘불화,연기(燕岐)의 비암사 영산회괘불화 이다.
(4) 광배(光背)모양 광배는 불교에서 성도(成道)한 부처뿐만 아니라 보살(菩薩)과 천왕(天王).제자(弟子).신중(神衆)등 제 권속(眷屬)들의 몸에서 광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조각에서 표현하는 광배는 두광(頭光). 신광(身光). 거신광(擧身光)이 있지만 회화로 표현할 때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회화로 표현하는 광배로는 키모양의 광배를 많이, 표현하는 데이는 조선시대(朝鮮時代)부터 키 형광배로 표현된 작품이 출현 한 것을 알 수가 있고, 2단2연협 으로 두광과 신광이 둘로 나누었느냐 하나로 이루어졌느냐에 따라 다르다. 두광과 신광의 테두리가 서로 평행을 이루는 것이 비암사의 괘불화 이다. (5)괘불의 색체 1) 법의 작품에 표현된 색체(色滯)는 구성 및 여러 가지 양식적 특징에 따라 조성 작가의 경향은 시대적 흐름을 가늠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비암사의 괘불의 불형(佛形).보관볼형(寶冠佛形) 주존불의 법의든지, 피부색 및 광배에 사용된 색체에 대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오른팔이 전부 노출된 편단우견식 불형 주존불은 대의 끝단과 오른발목의 이파리 장식을 처리하는데 녹색을 사용하고 있고 이와 달리 어깨위쪽을 살짝 덮은 편삼식의 우견편단 주존 불상의 경우 대의 끝단과 내의 및 발목 이파리 장식 모두 안감을 녹색 만을 표현하고 있다. 2) 피부색 괘불의 피부색은 보통 다섯 가지의 색으로 표현하는데, 색체에 따라 육색(肉色)(살색), 유백색(乳白色), 미색(米色), 연분흥색, 노랑색 등으로 괘불의 피부색을 표현하는데, 비암사의 괘불에 표현된 피부색은 황색에 호분(胡粉)을 썩어 나타내는 미색으로 얼굴 및 팔. 다리등에 표현하엿다. 3) 광배 광배에 표현하는 색체는 두.신광 전체를 일색으로 처리하거나 머리광배에까지 꽃무늬를 두는 경우가 보이는데, 대부분은 녹색을 사용하고 있으나, 몸 광배는 꽃무늬를 장식하거나 방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징으로 비암사의 영산회괘불 머리는 녹색이고, 방광(放光)의 색으로는 다섯 가지색으로 표현되었다.
4) 바탕처리 바탕 처리하는데 작가가 의도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불화역시 깨우친 자로서의 부처님을 묘사하는데 잇어, 효과적이고 신비스럽게 나타내고자 노력하고 있는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것이 바탕처리가 그 하나이다. 불화에 있어 각 등장인물들 간의 경제를 표현하거나 또는 신비로운 종교적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청 .적. 녹. 황. 백색으로 이루어진 오색구름을 차용하여 오색 빛을 사용하고 위쪽에 하늘을 나타내는 평면적 화면에 공간을 부여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비암사의 괘불화가 이에 속한다. 2. 비암사의 괘불만 아니라 이 당시의 괘불을 조성 하는데는 여러 명의 후원자(後援者)가 있어야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가 있는데, 대체로 기본적인 시주 자를 보며는 첫째 전반적인 개념의 시주 (괘불(掛佛).폭(幅).공양자(供養者)와, 돌째 그림그리기 위한 바탕마련을 위한 시주자(施主者)로 나눌수가 있다. 비암사의 영산회괘불을 조성하는데 후원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후원내용- 공양12명, 파탕(波湯)2명,양록(洋綠)2명,석자황(石雌黃)1명, 차청(車靑)1명, 수도황(水桃黃)1명, 하엽(荷葉)1명, 암채(岩彩)1명, 아교(阿膠)1명, 어교(魚膠)1명, 백번(白飜)1명, 복장(服裝)1명, □□11명, 후원자(後援者)36명과 승려(僧侶)2명- 공양(供養)2명 사민(士民)34명이 참가하여 비암사 영산 괘불화를 조성하였다는 화기(畵記)가 있어 이를 뒷받침 해 준다. * 파탕. 양록. 석자황. 차청. 수도황(水도황). 하엽. 암채. 아교. 어교. 백번 이라는 명칭은 그림을 그리는 알료 이든가 색을 혼합 하는것을 이루는 것을 말하는데, 이로 보아 그 당시 괘불을 만드는데 분업적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알 수가 있다. 이 괘불의 화기(畵記)를 보면 다음과 같다.
Ⅴ. 비지정 문화재로 본 비암사
2. 괘불함.
괘불은 평소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찰의 큰 행사에만 사용 것으로 이를 보관해야 하는 함이 있는데 이를 괘불함이라 하며, 사찰의 중심 건물에 보관하게 된다. 현재 비암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坐像) 뒤편에 나무로 된 긴 상자가 괘불함 이다. 이 괘불함의 크기는(사진12) 542×35×35로이나, 내부에는 아무표시 없이 보존되어 있는 상태인데 아쉽게도 뚜껑 左에서 145㎝ 부분에 깨어져 있는 상태이다.
③ 극락보전 안에 있는 탱화 및 불화
어느사찰의 부처님 후면이나 좌,우측벽면에는 탱화가 걸려있는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탱화에도(주21) 종류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우선 볼보살을 모신 후면에있는 탱화를 상단탱화 이고, 각종신중을 모신탱화가 중단탱화이고, 중단의 탱화중에서 독립적인 탱화 즉 산신.칠성.및 고인들의 위패를 모신것이 하단탱화로 구분한다.
극락보전에는 후불탱화 및 여러 불화가 보호 받고 있는데,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번 호 명 칭 크 기 제작년도 1 영산 회상도 201✕258.5 1925 2 신중도 137.3✕134.1 1924 3 칠성도 132✕130.5 1924 4 독성도 98✕73 1924 5 산신도 98✕72 1924
표1. 극락보전에 봉안된 불화들 1.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사진13) 아미타여래좌상 후면에 걸려있는데, 하단부의 화기를 인용하면, 世尊應化 ...年乙丑十一月二十九日 燕岐郡全東面雲住山 極樂寶殿奉安于 綠化 ⃝ 秩燈明...供司比丘 ... 2. 신중도(神衆圖)는(사진14) 극락보전 좌측벽에 걸려있는데, 하단 중앙의 화기에 綠化秩 燈明比丘萬愚 誧呪比丘圓雄 持殿比丘道菴 金魚比丘湖隱 供司比丘初有 別座比丘昌變 都監兼 時住持 比丘完澤 化主淸信女河靑山 大施主秩 忠南燕岐郡全東面碑巖寺極樂宝殿幀佛事中 上壇後佛幀神衆七星 獨聖山神等五軸造 成出資施主 燕岐郡全義面東校理 居住 坤命辛未生 坤命辛未生朴和有 長子丁未生洪樂善 子婦甲辰生具氏 次子辛亥生 洪學善 孫女乙丑生勝南 願以比功德 普友於一刀 我等與衆 生皆共成佛 道 應化二千九百五十一年 十月 日 이 화기로 보아 1924년10월에 조성하였는데 발원자가7명이고, 크게 시주한 사람이전의동교 리에 거주하는 박화유라는 사람과 아들과손녀딸까지 기록되어 있는것을 알수가 있고, 신중도.칠성도.독성도.산신도도 같이 조성한 것으로 화기에 표시되어 있다. 3. 칠성도(七星圖)(사진15) 이 칠성도 역시 극락보전 左側벽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에 관한 화기는 좌우 하단에 기록된것을 보면, “綠化所 燈明比丘萬愚 誧呪比丘圓雄 持殿比丘道菴 金魚比丘湖隱 供司比丘初有 別座比丘昌變 都監兼 時住持 比丘完澤 化主淸信女河靑山雲住山碑巖寺 極樂宝殿奉安 應化二千九百五十一年 旧十月 日 大施主 忠南燕岐郡全義面 東校里 坤命辛未生朴和有 長子丁未生洪樂善 子婦甲辰生具氏 次子辛亥生 洪學善 孫女乙丑生勝南 願以比功德 普友於一刀 我等與衆生 皆共成佛道” 이 칠성도의 화기를 보면 신중도의 화기내용과 같은것을 알수가 있다. 4. 독성도(사진16) 역시 극락보전 좌측벽에 봉안되어 있는데, 화기는 중앙아래 에 기록되어 있는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大施主 全義 面居住 坤命辛未生 朴和有 長子丁未生 洪樂善 子婦甲辰生 具氏 次子辛亥生 洪學善 孫女 勝南 応化二千九百五十一年旧十月 日” 5. 산신도(사진17) 역시 극락보전 좌측벽에 봉안되어 있는데 화기는 촤측하단에 있는데 표기되어 있다. “ 大施主 坤命辛未生 朴和有 長子丁未生洪樂善 子婦甲辰生 具氏 次子辛亥生 洪學善 孫女乙丑生 勝南 応化二千九百五十一年旧十月 日” 이제까지 비암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있는 여러 탱화를 살펴본 결과2~4까지의 화기에는 한 가족이 불화를 불사한 것을 알수가 있다. ④ 부도
원래 비암사 부도는 극락보전 좌측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990년대 대대적인 보수공사및 정비사업으로 인하여 현 부도는 극락보전 우측 개울건너 산 밑에 위치하고 있다. 부처님의(주22) 유골을 모셔 놓은것을 부도(浮屠) 또는 묘탑이라고 하는데, 후대에 와서 승려들의 사리를 모셔 놓은것도 부도라 일켜고 있다. 이곳에는 2기의 부도가 있는데 그중 한기에는 음각으로 명문이 있고, 다른 한기는 무명의 부도로 있는데 명문이 있는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청한당(사진18) 성정탑 강희 갑오입탑 시주준례 (淸閑堂 性情塔 康熙 甲午立塔 施主俊礼) 이로 보아 이 탑의 주인은 성품이 어질고 깨끗한 스님인 청한당을 위하여 1714년(숙종40년)에 시주자인 준례라는 분이 건립한 것을 알수가 있다. 부도의 크기를 보면,기단(基壇)82✕78㎝ 탑신(塔身) 둘레 60.7㎝ 높이 89㎝ 상륜(相輪)74✕74㎝ 상륜높이 54㎝ 다음글은 전통사찰 관광정보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것임을 알려준다. “하대석상부에는 역시 음각한 쇠시리를 두어 탑신 받침부를 부각시킴으로서 조형적으로 하대석과 탑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배려하였다. 탑신은 원형평면으로 상부를 급격히 곡선적으로 좁힌 종형(鐘形)이고, 탑신상부에는 턱을 두어 옥개석을 올리기 위한 받침부를 두는 조형적배려를 하여 ‘청한당성정탑’이라는 명문을 음각으로 조핵하였을 뿐 아무련 장식을 볼수가 없다. 옥개석(屋蓋石)은 방형평면으로 모임지봉의 형상을 하고있고, 옥개석 아래면 에는 두 단의
주22) 위의책(주15)461~462,쪽 쇠시리를 두어 층급받침으로 표현하였으나, 쇠시리가 그 새겨진 깊이가 얕아서 형식화된 경향을 보이고, 처마끝은 매우 두꺼워 둔탁한 느낌이나 상대적으로 추녀부를 심하게 반곡시킴으로 둔탁한 느낌을 어느정도 해소 시키면서, 추녀부 아래에는 꽃으로 보이는 형상을 새겨 어느정도 장식의 경향을 갖추고 있다. 지봉면과 처녀는 직선적이고, 추녀마루역시 직선적인데, 지봉면에 비해 상당히 높게 처리한것은 과장된 수법으로 보인다. 상륜부는 원형평면의 연봉형식으로 간략화 되어 모임지봉이 절병통과 같은 모습이다. 연봉형 하부에는 하대석에 보였던것과 같은 물결무늬를 새김으로서 전체적인 조형상을 보이고 있다.
(2)무명탑(無名塔)으로(사진19) 청한당탑 옆에 있는 것으로 전체높이 124.5㎝ 탑신폭 64.5㎝로 조선후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련 명문이 없는 부도로 청한당보다는 크기가 작은 부도로 화강석으로 조형되었으나, 돌의 질은 약간 노란색을 띠는것이 청한당부도와 다르며, 조형이나 치석(治石)의 정교함도 떨어진다. 지대석(地帶石)과 탑신(塔身), 그리고 옥개석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있고, 지대석은 자연석을 방형 평면에 가깝게 사용되어 있다.
Ⅵ.결론 우리 지역인 연기군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사찰이 비암사인것은 누구나도 부인 할 수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비암사의 중수기에는 고려초기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지난1960년대에 3층석탑에서 발견된 3구의 비상과 연기지역에서 발견된 비상들을 볼때 이 지역이 특히 비암사를 중심으로 백제가 멸망후 유민들에 의하여 비암사가 창건되고, 비상을 시납하여 백제의 역대왕을 위하여 원찰(願刹)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이를 기르고자 매년4월15일에 백제대제(百濟大祭)를 지내온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가 있다. 비암사가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국가의 많은 전란으로 황폐되어 온것을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까지 법통을 이어 온 것을 알수가 있지만, 아쉬운 점은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의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운 점이라 할 수가 있다. 현재의 비암사에 있는 여러 문화재로 시대를 살펴보면, 주 건물인 극락보전은 조선후기의 것으로 보아지고, 앞뜰에 있는 3층석탑은 어디에서 옮겨온 것으로 판단되며, 괘불은 순치(順治)13년(1657년孝宗8年)이고, 청한당 부도은 1714년(숙종40년) 청한당이라는 스님의 것으로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괘불을 제작하여, 낙성식을 한 것으로 보아지고, 이 곳에서 입적한 스님을 제자들이 비암사 중수한 점을 기려 부도를 건립 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비암사는 연기군의 자랑이고, 영원히 보존되어야 하는 지역문화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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