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개혁하려한 실학의 아버지 반계 유형원
유형원은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인조반정, 병자호란, 북벌운동 등 격랑이 휘몰아치던 시대를 살았다. 그는 조선 건국이래 쌓여온 모순들이 폭발하면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바로잡으려는 개혁자였다. 그는 국가개혁의 교과서라 평가받는 반계수록을 남겼고, 반계수록은 영조임금 때에 국정개혁의 지표가 되었다.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의 죽음
유형원은 1622년 북인계열의 남인사대부인 아버지 유흠과 여주 이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형원의 집안은 서울에 거주하는 문화유씨 적통으로 정통 양반가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유흠은 성균관 검열로 재직 중 광해군을 복위시키려는 옥사에 연루돼 감옥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유형원이 2살 되던 해였다.
유형원이 14살 되던 해에는 병자호란을 겪었고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생활을 하면서 어린 나이지만 나라가 약하면 치욕을 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릴 때 겪은 아버지의 죽음과 전쟁은 유형원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형원은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 국방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청나라에 복수를 한다며 하루에 300리를 달리는 연습을 하고, 사람들을 모아 조총훈련을 했다. 또 중흥위략이라는 병법서를 짓기도 했다.
아버지를 잃은 유형원은 5살 때부터 외삼촌인 이원진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이원진은 하멜표류기를 지은 하멜이 우리나라에 표착했을 때 하멜을 심문한 사람으로 성호 이익의 당숙이기도 했다. 성호학파를 형성해 실학을 체계화시킨 이익이 유형원의 영향을 받은 것은 혈연적 영향이기도 했다. 또 이원진이 서양인과 접촉했던 경험이 유형원에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 정약용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유형원은 여덟살에 서경과 역경을 읽는 천재였다고 한다.


반계서당.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전라도 부안의 은둔개혁자
유형원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2세가 되던 해 왕이 내린 문화유씨 땅이 있던 전라도 부안군 우반동으로 내려갔다. 정쟁으로 시끄러운 서울을 벗어나 낙향한 유형원은 반계서당을 짓고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유형원이 생각하기에 조선의 모든 문제는 양반들이 전국의 모든 토지를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유형원이 생각한 개혁안의 핵심은 균전론이었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땅을 분배하고, 양반 상민 구분없이 균등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농병일치를 이루면 부강한 조선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지지를 시작으로 이기총론 등 31세부터 49세까지 저술한 그의 책을 묶은 것이 유형원 필생의 역작인 반계수록이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을 완성하고 3년 뒤인 1673년 5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반계수록
유형원이 19년의 세월을 바쳐 지은 반계수록은 총 26권으로 그의 개혁사상과 이상국가 건설책을 담은 책이다. 후에 남인과 소론계열의 실학자들인 정약용, 윤증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개혁군주인 영조와 정조에게는 국정개혁의 지표가 되었다.
반계수록은 유형원 당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678년 성균관에서 숙종에게 추천했지만 무시되었고 주류 성리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18세기 들어와 성호 이익의 제자들인 안정복, 이가환 등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영조의 명으로 목판인쇄가 이루어졌다. 윤증은 "유형원이 지닌 학문의 정밀함과 뜻은 후세의 말 잘하는 선비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안정복은 "유형원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면 태평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조는 "유형원은 그가 지은 반계수록에서 말하기를 「수원은 지세를 따라 도시를 건설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수원에 성을 쌓는 일은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역 대신 내는 세금으로 충당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유형원은 실용성있는 학문으로 나라의 경제에 관한 글을 저술하였으니 기특하도다. 그가 수원의 지형을 논하고 도시를 건설하는 계책을 논한 것은 백년 전 사람으로서 오늘의 일을 환히 알았고, 착착 들어맞았다. 반계수록은 읽고나니 나에게 있어서 유형원은 아침 저녁으로 만난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영정조대에 수원 화성을 건설해 서울을 옮기려 했던 움직임을 유형원이 예견한 것에 감탄한 것이다. 실제로 정약용은 정조의 명으로 수원성을 축성하면서 유형원의 축성이론을 적용하기도 했다.
유형원의 실학사상은 성호 이익을 거쳐 다산 정약용 등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한 경세치용학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랜 인습 속에 쌓여 온 조선 지배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려 한 그의 개혁론은 비록 현실에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이 등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첫댓글 정치의 근본은 백성의 편안함이다. 백성의 편안함은 올바른 세제정책을 펴는 일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세금정책에는 백성들보다는 지배층의 권력에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더욱더 곤궁해진다. 오늘날도 사회지도층들은 백성의 피를 빨아 그들의 권력을 만들어나간다. 혁신이란 백성의 편암함을 창조하는 것을 유형원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