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豊山)은 경상북도 안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 하지현(下枝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영안(永安)으로 고쳐서 예천군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때 풍산으로 개명하였다. 1018년(현종 9년) 안동에 속하였고 1172년(명종 2년) 다시 설치하였으며 후에 안동에 속하여 지금은 안동군 풍산읍으로 남아있다.
풍산홍씨(豊山洪氏)의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1242(고려 고종 29년)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한 후 풍산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풍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며 고려말에서 조선 헌종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명성을 날렸다.
지경의 아들 홍애(洪崖) 간(侃)은 1266년(원종 7년) 문과에 급제하여 첨의사인(僉議舍人)과 지제고(知制誥)에 올랐으나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바른말을 하여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임지에서 졸(卒)하였다.
3세 유(侑)는 1294년(충렬왕 20년) 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 28년 문신친시(文臣親試)에 재차 급제하여 진현관(進賢館), 보문각(寶文閣), 춘추관대제학(春秋館大提學)에 올랐으며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5세 구(龜)는 승의교위 낭장(承義校尉 郎將)을 지냈으며 여말(麗末)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풍산으로 하향 도중에 지금의 고양군 벽제 성석리에 정착하여 그후로
6세 만은(萬隱) 재(載)는 1369년(공민왕 18년) 문과에 급제하고 소윤(少尹), 군사(郡事),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역임했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고 여말에 관직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12세 응복(應福)의 아들 천경(千璟)은 선조 34년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광해군 원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급제하였으며 한림(翰林)에 재직시 김연흥의 옥사와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뒤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남하(南下)하는 세자를 도왔으며 군민(軍民)을 진무(鎭撫)하도록 상소를 올려 독대인견(獨對引見)의 광영(光榮)으로 별좌(別座)에 제수되었으며 월정서원(月井書院)에 배향되었다.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증직된 수(脩)의 아들 모당(慕堂) 이상(履祥)은 선조(宣組)때 9년에 진사과에 합격하고 선조 1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다음해 전시문과(殿試文科)에 재차 장원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특은(特恩)을 받아 학문을 연마한 후 경상, 경기관찰사, 개성부 유수(開城府 留守)와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역임하였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예조참의로 왕을 서경(西京)까지 호종하여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당시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영남(嶺南)의 유생 문경호(文景虎)가 상소하여 배척하는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안동부사로 파천되고, 이어 청주목사가 되었다. 광해군 초에 대사간에 소명(召命)되고, 도헌(都憲)·부제학을 거쳐 개성유수에 올랐으며, 1793년 정조 17년 문경(文敬)의 시호와 부조묘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한사람으로 성리학적 실천윤리에 충실한 [이상]은 소학(小學)을 학문과 교육의 기본으로 삼아 제례의식(祭禮儀式)을 가례(家禮)대로 실행하였으며, [걸군소(乞郡疎)]에 나타나듯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또한 중민(重民), 애민사상에 입각하여 향촌의 안정과 교화에 노력하는 등 이도(吏道)를 잃지 않는 고결하고 청렴한 선비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슬하에 여섯 아들과 열한 명의 손자를 배출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하였다.
장자인 방(露)은 선조 36년 증광문과에 급제, 2도관찰사(二道觀察使)와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하였고, 동지하사(冬至賀使)와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수 차례 중국을 다녀왔으며 저서로는 지계예설(芝溪禮設)과 선조(先祖)에 제사(祭祀)하는 의식과 법도를 저술하였다.
둘째 아들 립(露)은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으며, 셋째 집(露)은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넷째 영(霙)은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이르고 인조23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다섯째 박(露)은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역임, 여섯째 탁(露)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영국공신(寧國功臣)에 녹훈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증직되어 풍산홍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인조 1년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결혼하여 영안위(永安尉)에 봉해진 모당공 이상의 손자 주원(柱元)은 인조25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가서 시헌력(時憲曆)을 구해 귀국, 신식 역법의 시행을 건의하였으며, 1649년(효종즉위) 고부(告訃)·청시청승습사(請試請承襲使)에 오르고 사은사로 1661년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당대의 풍류객으로 시를 즐겼다.
숙종(肅宗) 때 학자로 이름난 예조참의(禮曹參議) 주국(柱國)의 아들 만선(萬選)은 현종(顯宗) 때 진사시(進士試)에 올라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행실이 근엄하고 인격이 고매하여 당쟁에도 가담치 않아 세인들은 그를 「완인(完人)」이라 불렀다고 하며 주자학(朱子學)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實學) 발전의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농예(農藝)·의약(醫藥)·구황(救荒)에 관한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후일 실학사상에 중요한 공적을 남겼고, 류중림(柳重臨)·서유구(徐有矩) 등의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형조좌랑(刑曹佐郞) 난상(鸞祥)의 아들인 보(霜)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수찬(修撰)·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인조 5년 원주목사(原州牧使)가 되었다.
이해 이인거(李仁居)가 난을 일으키자 그를 원주에서 체포, 난을 진압하여 소무공신(昭武功臣) 1등으로 풍녕군(豊寧君)에 봉해졌으며, 1632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1638년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수(脩)의 셋째아들인 봉상(鳳祥)은 선조12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진강(臨津江)에서 전사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承政院道承旨)에 추증되었다.
이외에도 가문을 중흥시킨 인물로 영조(英祖) 때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른 만조(萬朝)는 일찍이 대사간(大司諫)·좌빈객(左賓客) 등을 거쳐 7도관찰사(七道觀察使)와 2도안찰사(二道按察使)를 역임, 우참찬(右參贊)·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숙종(肅宗) 때 대사간을 지낸 만용(萬容)은 영안위(永安尉) 주원(柱元)의 아들로 판서(判書)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1754년(영조31)에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된 상한(象漢)은 조헌(趙憲)의 문집을 간행하는 한편 창절(彰節)·민민(愍民)의 두 서원(書院)을 중수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1759년(영조36)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서 세손사부(世孫師傅)를 겸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領議政) 봉한(鳳漢)은 영조(英祖)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현보(鉉輔)의 아들로, 그의 딸이 혜경궁 홍씨로 유명하며, 영조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남긴 후 조선후기의 문화 부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동생 인한(麟漢)도 형조(刑曹)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상한(象漢)의 아들 낙성(樂性)은 정조(正祖) 때 좌의정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를 명나라에 다녀온 후 1797년(정조21) 80세로 궤장( 杖)을 하사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명문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만기(萬紀)의 아들 중효(重孝)는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형조·예조판서를 지냈으며 경전(經傳)에 조예가 깊었고 시집(詩集) 10여 권이 전한다.
정헌(正憲) 의호(義浩)는 의주부윤(義州府尹)·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우참찬(右參贊), 예조와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천주교를 탄압했다.
그외 정조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국영(國英)과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현주(顯周)가 뛰어났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謨)의 아들 석주(奭周)는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밝았고 문장에 있어서「십대가(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1795년(정조 19)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직장(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 「순조실록(純祖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한일합방이 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한 범식(範植)과 독립운동에 몸바친 충희(忠熹)가 뛰어났고, 진(震)은 통일독립정부수립(統一獨立政府樹立)을 위한 비상국민의회 의장(非常國民議會議長)으로 추대되어 명망 높은 풍산홍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남한(南韓)에 총 8,323가구, 35,1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댓글 큰오빠 살아 계실 적 족보 보는 걸 좀 배웠다가 다시 잊어버렸는데... 위에 자세히 나와 있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 수고 많은 기운님께 감사
좋은 자료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