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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5부작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1부 - 남다른 탄생과 변환점이 된 유년시절
2부 - 즐거움과 시련을 함께 음미한 중학시절
3부 - 삶의 전쟁터에 우뚝 피어난 두 송이 꽃
4부 - 극과 극을 체험한 평강공주와의 결혼
패션기술로 정상을 정복하다.
5부 - 인생 대모험: 패션을 떠나라! 성공의 황무지를 개척하라!
[산골소년에서 성공전문가로...]
제 3부: 삶의 전쟁터에 우뚝 피어난 두 송이 꽃
1974년 11월 24일
나는 16세에 체력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농사일은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태어나서 가장 먼 곳으로 가는 부산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도시에는 눈도 빼먹는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부산은 산골소년의 순수함을 빼앗는 곳일까? 나의 꿈을 완성시켜 줄 것인가? 그렇게 한 맺힌 돈을 벌게 해 줄 것인가? 두려움과 설레임 때문에 창 밖의 경치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털털 거리는 비포장의 흔들림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어머니도 착잡했나 보다. 우리는 서로 말없이 창가만 보고 있었다.
산골소년, 큰 물로 뛰어들다
6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부산 시외버스 터미널. 새까만 촌놈의 손에는 서너 가지의 옷 밖에 없는 보따리 하나 달랑 들려있다. 중학교 때 경주를 가 본 적은 있지만, 부산은 거대도시였다. 나의 눈동자와 머리는 이곳 저곳으로 어지럽게 움직였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높은 빌딩을 바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윽고 서면에 도착. 처음 본 친척 형과 형수였다. 저녁 식사를 차려나왔다.
"우와~~"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밥상만으로도 실감할 수 있었다.
한 그릇을 다 먹고 더 먹고 싶었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았나?"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바닥에 밥을 남겼다. 밥 남기는 것도 머리를 써야했다. 조금 남겼지만 많이 남긴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야했다.
밥은 조금 더 먹고 싶은데... 남긴 척은 해야하니... 바닥에 쫘악 얇게 펼쳐서 남긴 것이다. ㅎㅎ
이 방법은 그 이후도 10일 정도 계속사용했다. 그런데 어느날 이 전략을 써 먹지 않아도 됐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바닥에 얇게 밥을 남겼는데...
형수가 잔소리형 충고를 하는 것이다. 형수는 나에게 반말을 했다. 말도 거칠었다.
"삼촌, 밥을 다 먹지, 왜 꼭 조금씩 남기는거야, 귀찮게."
이 말을 짜증스럽게 말했다. 때문에 들으면 기분이 나빠야 정상이다. 그런데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밥을 다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나는 느꼈다.
자기 집에 먹을 것을 풍족하게 두고 남의 집에 먹으러 가면 여유있게 미소를 지을 수 있지만...
자기 집에 먹을 것이 부족한데 남의 집에 먹으로 가면 스스로 주눅들게 된다는 것을...
형님은 나를 보고 만족하는 눈치였다. 공장에 일할 사람을 구할 수는 있지만, 마땅한 사람 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형님은 나에게 당신이 운영하는 의상실에 일하라고 했다.
"에이~ 남자가 어떻게 의상실에 일을 합니까? 회사에 취직시켜 주세요."
"의상실에 남자도 있단다."
"그래요? 그러면 기술자는 월급을 얼마 받는데요?"
"6만원"
"우와~ 그렇게 많이 벌어요?"
"그러니까 빨리 배우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단다."
나는 다음날 남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바로 결정했다.
당시에 큰 회사에 7년 정도 근무한 노동자의 월급이 3만원도 안 되었는데...
두 배를 더 받을 수 있다는 사실. 그 한가지만으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돈 때문에 나의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시는가.
돈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갔다.
돈 때문에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돈 때문에 누나가 병원에서 치료도 못 받고 있다.
이런 한 맺힌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데 무엇을 따지랴.
그 날 부터 열악하기로 소문난 의상실 4평짜리 공장에 취직했다.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 어머니는 쓸쓸이 고향으로 가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고향으로 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 보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ㅠㅠ
어머니는 어땠을까? 그렇게 귀한 아들을 객지에 홀로 두고 가셨는데... 버스를 타고 가시는 동안 내내 우셨을 것이다. ㅠㅠ
나는 눈물을 삼키며 혼자 말했다.
"어머니, 돈 많이 벌어 맛있는 것 사드릴께요."
어머니는 자주 말씀하셨다.
"소고기를 실컷 먹어 보고 싶다."고...
나는 어머니의 소박(?)한 소망을 풀어 드리고 싶었다.
소고기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말해야겠다.
객지에서 첫 번째로 맞이하는 추석에는 차비가 없어 고향에 가지 못했다. 두 번째로 맞이하는 구정에는 월급은 적었지만 고향은 갈 수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어머니 선물을 사러갔다.
"싸고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을 사야 하는데... 무엇을 사나?"
그 때 나의 머리에 어머니의 말씀이 떠 올랐다.
"아유~ 소기름이라도 먹었으면..."
맞다. 소기름으로 사 가자. 가격이 문제이기 때문에 먼저 가격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아주 저렴했다. "이런 것을 못 잡수시다니..." 양을 듬뿍 달라고 했다.
드디어 어머니의 소원을 해결해 드리게 되었다. 기분좋게 소기름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갔는데...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소고기는 비싸니까... 할 수 없이 기름이라도 먹으려고 말한 것인데..."
아쿠~~ 이런~.
나는 그 때까지 내 돈을 주고 고기를 먹어 본 적이 없다. ㅠㅠ
그러나 내가 가지고 간 소기름으로 어머니와 이웃이 푸짐(?)하게 드셨다. 너무 많아 이웃집에도 나누어 주었다. ^^
오늘날에는 절대 먹지 못할 소기름인데... ^^
어머니의 소망은 이렇게 웃기게 풀어드렸다. ㅎㅎ 다음 구정 때는 돈을 제법 벌었기 때문에 좋은 고기로 사드렸다.
땀, 그리고 눈물을 삼키며
4평짜리 공장에는 10여명이 일을 했다. 옷에서 발산하는 먼지가 작은 공장을 뿌옇게 뒤덮었다. 먼지를 배출하는 환풍기 하나 없었다. 퇴직금, 복지시설, 초과근무 수당 등 이런 단어는 사치스런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나는 그런 것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 다만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나의 학력은 적어도 이 공장에서는 고학력이다. 초등학교 졸업이 더 많았다. 사람들은 나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렇지만 워낙 해야 하는 일들이 바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나에게 기술을 가르쳐 줄 시간은 없었다. 시간이야 내려고 하면 낼 수도 있었겠지만, 숙련된 기술자들은 자기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 주기 싫어했다.
내가 핵심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질문하면...
"야 임마~ 내가 어떻게 배운 기술인데 날 것으로 먹으려고 하냐?"
이런 식이다. 그리하여 나는 주로 기술자들이 하는 것을 훔쳐 보고 배웠다. 나의 타고난 강점인 눈썰미가 최고로 가동되는 시절이었다. ^^
산업시대 초기에는 농촌의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도시로 몰렸다.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하여 노동자가 넘치니, 자연히 임금도 낮다. 나도 월급은 없다. 잠자리는 일을 마치면 다림질 판을 치우고 그 위에서 잤다. 한 겨울에 난로도 없는 공장에서 얇은 담요 하나만 덮고 자기 때문에 새우잠을 잘 수 밖에 없다. 참으로 춥다. 일은 심하게 고되다. 한 달에 한 번만 쉰다. 11시쯤 기술자들이 퇴근하면, 자질구레한 일들을 정리하고 청소한다. 매일 12시면 빠르게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밤샘도 자주 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니 잠을 푹 자 보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 결국 어린 나의 관심사는 날마다 얼마나 일찍 마치는가에 달려있다. 그 날도 일찍 마치었으면 하는 바램을 안고 재봉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오늘 몇 시에 마쳐요?"
"응~~ 빨리 마칠 것이다."
"몇 시요?"
"2시에 마쳐줄께."
"..."
나는 이 말이 끝나자 마자 화장실로 달려갔다. 고향 쪽을 바라 보며 실컷 울었다. 남 보는데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다. 울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이다.
그래도 부모님 곁에 있을 때는 귀한 자식이었는데... 객지에 나와서 고생범벅이라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우스에서만 자란 아이가 야전생활을 견디기에는 너무 힘들다. 하지만 포기하고 시골로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악착같이 기술을 배워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다행히 공장에는 나의 친척이 있다. 나보다 6살 많은 이종 누나인데 일찍 도시로 나와 기술이 뛰어났다. 누나도 이곳에서 처음 보았다. 누나는 혼자 자취를 했는데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 자기 집에 나를 오게 하여 떡볶이 등 맛있는 것을 해 주기도 했다. 또 다른 중간 기술자 미스장 누나도 있었는데 역시 나를 귀엽게 잘 봐 주었다. 이 분들 때문에 고단함 속에서 따뜻함도 맛보았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꿔라
나는 내성적이라 자주 보는 사람들에게는 명랑하고 말을 잘 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나.. 자주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 하기가 무척 힘들고 부끄러웠다. 특히 여자들에게 말 하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이런 경우도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의 공장에 취직한 여자 친구가 명절에 고향을 찾아온다. 그러면 동창이라 어김없이 함께 놀자고 나를 찾아와 마당에서 부른다.
"철수야! 나 문숙이다."
방문 구멍으로 밖을 보니... 옷도 깔끔하고... 얼굴도 하얀 친구는 나와 격이 달랐다.
어머니에게 내가 말한다.
"나 없다고 해요."
"나가봐, 네 친구잖아."
"됐어요. 없다고 해요."
그리고 만나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내성적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은 수천명 앞에서 강연을 하다니...
혹, 내성적인 성격탓에 말하는 것이 힘든 사람은 나의 사례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말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자신도 그런 상태가 싫다. 나도 여자 앞에서 혀가 말리는 듯한 내가 싫었다. 그리하여 하루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못해 가지고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겠나?"
나는 이런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기로 결단했다. 바꾸는 전략은 단 하나의 문장으로 결정했다.
"여자들에게 무조건 말하자."
이 전략은 주효했다. 종종 전혀 엉뚱한 말을 하여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경우도 발생했다. 그 때마다 다시 말했다.
"무조건 말하자."
이런 행동방침에 따라 말을 한지 6개월 정도 지나자 힘들지 않게 여자들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년 정도 지난 뒤에는 길거리에서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접근하여 자연스럽게 말 할 수 있는 상태까지 만들었다. 와우~ 위대한 승리다. 참으로 획기적인 변신이다.
이쯤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의상실의 직책과 승진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서울과 부산의 호칭은 약간 다르다. 양장 기술은 부산이 전국 최고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부산의 직급체계를 설명한다.
장관 - 맨 처음 배우러 들어 와서 심부름 하는 일
마도메 - 단추 등을 달고 바느질을 하는 일
나오시 보조- 수선하는 팀에서 가장 낮은 직급, 주로 다리미질을 함
나오시 시다- 수선하는 재봉사를 보조하는 일
나오시 미싱- 수선도 하고 바지 치마 등 간단한 옷을 만드는 재봉사
중년 보조 - 옷을 만드는 데 다림질 등 보조적인 일을 하는 일
중년 시다 - 재봉을 할 수 있게 준비하고 다림질을 하는 일
재봉사 - 미싱으로 옷을 만드는 일, 공장에서 가장 높은 기술력을 가진 직책
재단사 - 주로 매장내에서 근무하며 치수를 재고, 가봉을 하고,
옷의 패턴을 뜨고 천을 재단하는 일)
cf, 가봉: 옷을 완성하기 전, 중간에 대략적으로 만들어 입어 보고 수정하는 과정
디자이너 - 매장에서 고객을 유치하고, 관리하고 디자인을 하는 일
사장님 - 주로 고객과 시간을 보낸다. 공장관리는 재단사가 하는 편이다.
규모가 적은 의상실은 주인이 재단, 디자인을 함께 한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이 공장에서 배우는 코스는
장관생활을 1년 조금 넘게 한다. 마도메를 2년 정도 한다. 중년 보조를 2년 정도 하면 시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끝이다. 서울에서는 여자가 재봉을 많이 하지만 부산에서 여자가 재봉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남자들은 마도메 까지는 코스가 같다. 다음에 나오시 보조를 1년 정도 하고 나오시 시다를 1년 정도 한다. 나오시 미싱을 1~ 2년 하면 재봉사가 된다.
그러니까 입문에서 기술자 대우를 받으려면 5~6년이 걸린다.
나는 위의 모든 과정을 다 마스터했다. 이런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10명도 안 된다. 일반인들은 이런 과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패션디자인 하면 앙드레김만 연상한다. ^^
무일푼으로 쫓겨나다
내가 기술을 배우는 속도는 초고속이었다. 남들이 5~6년 걸려 올라가는 기술자의 자리를 나는 20개월만에 정복했다. 내가 최단기간에 양재 분야의 신기록을 세울 수 있었든 비결을 이제부터 알아보자.
나는 "매일 한 가지는 무조건 배운다."는 원칙을 정했다. 그 중에서도 봉제를 빨리 배우고 싶었다. 봉제가 공장에서는 가장 높은 기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월급도 제일많다. 그런데 재봉사 아저씨는 내가 미싱을 사용하면 꾸중을 많이 하셨다. 그 이유는 초보가 만지면 미싱을 고장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귀찮은 것이다. 그리하여 재봉사 아저씨가 11시쯤에 퇴근하고 난 후에 몰래 홀로 남아 이것 저것을 연습하고 했다. 재봉사 아저씨와 나는 서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
"너 어제 저녁에 미싱했지?"
"안 했는데요."
했다고 하면 야단 맞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리와봐, 이게 어디서 거짓말을 해, 한 대 맞어, 다음에 또 쓰면 죽는다."
"네! 안 쓸께요."
분명 퇴근하고 안 볼 때 사용했는데 어떻게 알까?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해답을 찾았다. 나 몰래 미싱에 표시를 해 두고 퇴근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미싱바늘 근처에 실이나 작은 헝겊을 두고 갔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다 쓰고, 표시물을 그 자리에 그대로 올려 놓았다. 다음날 재봉사 아저씨는 몰랐다. 속으로 나의 승리를 축하하며 웃었다. 그런 숨바꼭질은 계속되었다. 이런 악착스러움 덕분에 기술은 빠르게 내 속으로 스며들었다.
한 번은 재단되어 있는 옷과 똑 같이 못쓰는 천으로 재단을 했다. 밤을 꼬박 새우며 봉제하여 완성했다. 다음날 재봉사 아저씨에게 보여 주었다.
"이 것을 네가 만들었단 말이야. 정말이니?"
너무나 놀라며 물었다. 다른 누나들도 모두 눈이 두 배로 확장되었다.
"네, 제가 밤새워 만들었어요."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재봉사 아저씨께서 봉제로 하는 쉬운 일을 나 보고 하라고 아예 맡기셨다. 이제 공식적으로 미싱을 사용하도록 허락 맡은 셈이다. 이 일 때문에 공장에서는 나를 천재로 호칭하기도 했다. ㅎㅎ
양재에 입문한지 3개월만에 나는 첫 번째 진급을 했다. 하지만 일은 너무 힘들었다. 잠도 부족했다.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 놀러 가고 싶은데 차비가 없었다.
열심히 일은 했지만 불만스러웠다. 그런 불만스러움을 가정부에게 하소연했다. 가정부는 나의 친누나 고향친구였다.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
일종의 동정을 구하기 위한 푸념이었는데 이것이 실수였다. 가정부는 형님에게 일렀고, 불같은 형님은 그 즉시 나를 고향으로 돌아가는 차비만 주고 쫓아냈다. 4개월간의 형님집 생활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나는 고향으로 갈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할텐데...
"저 녀석도 도시에 적응 못하고 돌아왔네."
나에게 도시생활에 정착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리는 치욕적인 말이다.
가방을 들고 친구가 웨타로 근무하는 술집을 찾아갔다. 사연을 쭈욱 늘어놓았드니...
"야~ 잘 됐다. 여기서 일해라. 너는 얼굴이 잘 생겨서 팁을 많이 받을 수 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해 놓고 서면을 돌아다녔다. 돈을 많이 벌어도 술집에서 일하기는 싫었다. 누구나 삶이 가장 힘들때 달콤한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유혹은 달콤하지만 그의 열매는 쓰다. 훗날 내가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 보니 이런 결정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는 길잃은 개처럼 먼 곳은 가지 못하고 공장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어디 취직할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수야, 얼마나 너를 찾아 다녔는데..."
"어~ 누나가 어쩐일이예요?"
"가정부에게 말을 들었어. 너를 쫓아 보냈다고..."
그리하여 운 좋게 누나에게 발각된 것이다. ^^ 공장의 친척 누나는 내가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단다. 갈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누나는 나를 찾아 나선 것이다.
"자, 열쇠, 우리집에 가 있거라."
얼마나 고마운지... 나는 술집에 놓아둔 가방을 들고 누나의 자취 집으로 갔다. 누나는 다음날 시내 중심지에 나를 마도메로 취직시켜 주었다. 드디어 부산의 한 중심으로 진격한 것이다. 아주 말단 기술자지만 나는 최초로 월급도 6,000원을 받았다.
하루는 재단사가 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철수야! 너는 얼굴이 되니.. 디자인을 배워라."
"에이~~ 남자가 무슨 디자인을 배워요."
"아니다. 공장에 일하는 것보다 훨씬 전망이 밝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매장의 디자이너는 모두 여자들이다. 중심지에 단 한 사람의 남자 디자이너가 있었는데... 완전히 게이에 가까웠다. 그 사람을 보고 나는 끔찍했다. 나도 저렇게 해야 하는가? 결론은 '안 한다'였다.
훗날 생각이지만 내가 그 말을 따라 디자인을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랬으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발동한다.
여기에서 나는 깨달았다.
'인생선배의 말은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멘토(인생의 스승)가 있으면 더욱 안전하게 인생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돈보다, 빨리 배우는 직장을 선택하라
나는 해당 직책의 기술을 터득했다는 생각이 들면 더 높은 직급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말하면 해당 직급에서 숙련될 시간은 없다. 더 빠르게 진급하여 더 많은 월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도메로 취직한지 두 달만에 나오시 보조로 진급하기 위하여 자리를 옮겼다.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강하게 키우기를 원했다.
누나 집에서 또 쫓겨난 것이다. 누나 친동생인 강호가 의상실에 취직하러 부산에 왔기 때문이다. 강호는 나와 동갑이다. 또래에 비해서 어른 같은 나와 강호는 조금 달랐다. 누나는 강호 보다 명랑하며 재치있는 나를 더 귀여워 해 주셨다. 주로 강호에게 하는 말이 ...
"철수 좀 닮아라."였다.
누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나를 강호는 몹시 싫어했다. 누나가 없을 때면 나의 자존심을 팍팍 뭉갰다. 갈곳없는 나는 속을 부글 부글 끓이면서 참고 있는데... 드디어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철수야! 방세도 못낼 처지면 나가라."
나는 잠 잘 곳이 없었지만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돈은 없지만 당장 있을 곳을 찾아야 했다. 내가 받는 월급은 차비와 하루 한 두끼 정도의 싸구려 분식밥을 사 먹으면 없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 선금을 요구하지 않고 값이 싼 하숙집을 구했다. 자취방은 약간이라도 보증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구할 수 없었다. 월급을 타면 하숙비를 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한 달 후에 하숙비를 줄 수는 없다. 나는 미안하여 아침은 먹지 않고 출근했다. 저녁은 아주 늦게 들어오니 잠만 자는 셈이다. 결국 한 달 조금 넘어 하숙비를 조금만 주고 쫓겨났다.
이 때부터 공원벤치에서 잦다. 그래도 집에서 돈을 부쳐 달라고 하기는 싫다. 어머니도 살림은 어렵지만, 밥을 못 먹는다고 하면 빚을 내서라도 돈을 부쳐주실 분이시다. 하지만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빨리 돈은 버는 유일한 길은 기술을 빨리 배우는 것이다.
기술을 빨리 배울 수 있는 곳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무조건 자리를 옮겼다. 당연히 며칠 일한 것은 월급을 받을 수 없다. 이렇게 옮겨 다니니 돈은 더욱 궁핍했다. 일주일 동안 하루에 빵 한개만 사 먹고 물로 지낸 적도 있다. 때론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도 했다.
벤치에서의 잠은 새벽이슬 때문에 노력하지 않아도 새벽형인간이 된다. 나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수면도 부족하여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루는 이를 눈치챈 재봉사 아저씨가 나를 고깃집에 데리고 갔다.
"철수야! 고기 잘 못 먹지. 먹고 싶은대로 먹어라."
"고마워요."
정말 오랫만에 먹어 보는 고기라 허겁지겁 해치웠다. 그 날 저녁에 나는 설사 때문에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고기를 안 먹다가 한 꺼번에 지나치게 먹으면 설사가 난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이렇게 나의 노숙생활은 6개월 정도 계속되었다. 공원벤치... 의상실 친구들 집에 가서 빌붙기... 빌딩에 침입하여 잠자기... 등을 하며 지냈다. 처절하니 더 빠르게 진급했다. 나는 이런 생활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하여 더욱 최선을 다했다. 삶의 전쟁터에서 패잔병으로 남기 싫었다. 나만의 꽃을 피우고 싶었다.
때론 무리하게 진급하여 해고도 자주 당했다. 해고 당하기는 나의 주요한 성공전략이다. 해고를 세 번 당하면 해당 직급에 맞는 실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만 짤리면 해당 분야에 맞는 실력이 된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세 번 정도 해고를 당하고 난 후에는 그 직책이 요구하는 실력이 되었다. 그러면 다시 높은 직책으로 옮겼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기술을 배우며 진급했다. 해고를 당해도 3일 이상 놀아 본 적이 없다.
수입적인 측면에서도 해고가 오히려 이익이다. 낮은 직책에서 월급을 받으면 8,000원 정도 받는다. 그러나 높은 직책에서 세 번 해고 당해도 한 달에 1만원 정도 번다. 높은 직급은 월급도 12,000원 정도로 책정하고 가기 때문이다. 때로 인심좋은 주인을 만나면 해고시키기가 미안하니 일당보다 조금 더 준다. ㅎㅎ
맨처음 고용하면 실력이 부족해도 주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직 우리 집에 적응을 잘 못해서 그런가 보다."
1주일 정도를 두고 보면 확실히 실력이 모자란 것을 알게된다. 그러면 매장에서 나를 부른다. 나를 부르는 것은 해고 하는 신호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부름에 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 해고 당할 때는 창피하여 일할 때 풀어 놓은 시계를 다시 가지러 공장에 갈 수 없었다. 그런데 두 번째 부터는 해고를 즐겼다. 해고에 대한 노하우가 쌓인 것이다. ^^
(사진설명: 고향의 아버지 산소앞에서... 20세)
노숙하게 이미지메이킹하라
내 나이 17세 후반.
입문한지 20개월만에 재봉 기술자가 된 것이다. 양재 신기록이다. 12살에 논을 갈은 농사 신기록에 이어 두 번째로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2년이면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심부름과 바느질 정도를 할 기간이다. 너무 빨리 진급을 하니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는 나이 문제다.
의상실에 취직할 때는 면접에서 두 가지 질문을 한다.
"일 한지 몇 년 되었느냐?"
"어디서 일했느냐?"
경력을 듣고서 어느 정도 일을 하겠다고 판단을 하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소개를 받고 들어가면 그런 일은 없지만... 나는 초고속으로 승진 했기 때문에 친구들도 나의 실력을 의심했다. 그러니 누가 나를 소개 해 주겠는가?
내가 만약 사실대로 2년 되었다고 말하면 절대로 채용하지 않는다. 보나 마나 아직 배우는 단계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내가 "먼저 기술력을 테스트 해 보시죠?"라는 말도 통하지 않는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를 부질없는 일로 취급해 버린다.
방법은 단 하나다. 나이를 올리는 것이다. 18세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중학교 졸업하고 2년 밖에 안 되었는데 재봉사라니.. 있을 수가 없다. 최소한 5년 이상은 되어야 재봉을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5살을 올리면 기술을 배운지 6년이 되는 것이다. 딱 맞다. 어떻게 하면 다섯살이 많아 보일까? 얼굴은 나이 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나는 이때 부터 여러가지를 연구하여 올린 나이에 맞게 이미지메이킹했다.
가장 먼저 거금을 투입하여 양복을 노숙한 것으로 맞추었다. 넥타이도 꼭 착용했다. 신발도 노숙한 것으로 구입했다. 말과 태도도 노숙하게 했다. 고향친구들이 찾아 오면 "후배라고 하라"며 사전 교육도 시켰다. 담배도 배웠다. 기침이 났지만 나이를 많게 보여야 하는데 무슨 대수랴.
이렇게 나이 들어보이려고 시작한 담배가 빠르게 진도 나가는 바람에... 나중에는 하루에 두 갑을 피웠다. 담배의 해악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25살부터 내 몸 어디에서도 담배를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배울 때 보다 끊을 때 수 백배의 에너지가 더 필요했다. 잘 못된 것은 처음부터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행히도 그렇게 친구들이 배우라고 권했든 당구는 배우지 않았다. 지금도 그 선택은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뭐든지 하게 되면 끝장을 보는 성미기 때문에, 당구를 배웠다면 아마 거기에 시간과 정열을 얼마나 쏟았을까?
이런 여러가지 전략 덕분에 나이는 완벽하게 올렸다. 나중에는 진짜 나이가 몇 살인지 나도 모를 정도였다. 나는 결혼할 때도 나이를 올려 말했다. 이렇게 올린 나이를 가지고 장모님께서 궁합을 보시고는 "너무 궁합이 좋다"고 결혼을 허락하셨다. ^^
심지어는 와이프에게도 결혼하고 6개월이 지난 후에 고백을 했다. 믿지 않아 한참을 설명했다.
이것 때문에 객지에서 사귄 친구들은 모두 나 보다 5~6세가 많다. 나와 동갑은 아주 어리게 보였다.
여기에서 성공의 원리를 배웠다.
'그렇다고 행동하면 그렇게 된다'는 원리를 이 때 터득한 셈이다.
즉, 성공자처럼 행동하면 성공자가 된다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렇게 되어진다.
이렇게 나이를 완벽(?)하게 올리니 어렵지 않게 취직대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두 번째의 문제는 부족한 기술이었다.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다르게 만드는 옷들을 다 경험하지 않고 진급했다. 그리하여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디자인과 원단을 만나게 된다. 또 겨울 바느질 방식과 여름 바느질 방식이 다른 것도 모른다.
이럴 때 해결방안을 마련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디자인이 들어 오면 핑계를 댄다.
"아~~ 어쩐지 이 디자인은 하기가 싫네. 에이~ 내일하자."라며 일단 미룬다. 그리고 그 디자인과 원단을 가지고 내가 배운 선생님께 찾아 간다.
"이거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다 배우고 나서 다음 날 기분 좋게 그 옷을 완성한다. 이런 방식으로 생소한 기술을 거뜬하게 해결했다. 그리하여 나는 못하는 옷이 없게 되었다. 이제 더 큰 곳을 향해 나가도 될 실력을 갖춘 것이다.
장사할 돈을 빨리 모아라
부산에 온지 1년이 지나면서 나는 거금(?)을 벌었다. 수입이 넉넉한 덕분에 그동안 너무 먹고 싶어 한이 맺힌 호떢도 20개나 사 먹었다. 학창시절에 항상 대접만 받아 마음이 불편했든 고향친구들이 찾아 오면, 융숭하게 대접할 수 있었다.
70,000원 월급을 받는 날.
30세 정도의 회사노동자가 받는 월급의 두 배 정도를 받았다. 현재 기준으로 따지면 3백만원 정도 될 것이다. 지금은 국민 소득이 많이 상승하여 3백만원도 흔하게 들리지만, 그 때의 7만원은 아주 거대한 돈으로 느껴졌다.
너무 무서워 온 신경을 쓰며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는 거리 깡패도 많았다. 컴컴한 거리에서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때리고 돈을 빼았는 것이다.
받은 돈은 80% 정도 저축했다. 18살 때 부터는 기술력을 더욱 인정받게 되어 2개월치 월급을 선불로 받고 다녔다. 이 때부터 나의 기술력이 성장하면서 선불 액수도 점점 높아졌다.
이제 나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하지만 나는 돈을 아끼려고 친구와 같이 판잣집에서 자취를 했다. 저녁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돈을 아낀다고 두 개만 삶는다. 둘이서 눈치작전을 한다. 원래 나는 음식을 꼭꼭 씹어먹지만,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면 씹을 수 없다. 식을 시간도 없이 마구 삼킨다. 매일 저녁 친구와 나는 보이지 않게 라면 전쟁을 했다. ^^
퇴근하면서 산 밑의 판잣집을 지나갈 때마다, 얼마나 다짐을 했든지...
"빨리 돈 벌어 판잣집이라도 사야지."
나의 첫번째 재테크 전략은 '무조건 돈을 안쓰자'였다. 돈을 향한 나의 집념은 불독보다 더 강했다. 친구와 나누어 내는 자취방세도 아까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노총각 재단사가 자기 방에서 함께 살자는 제의를 해왔다. 아침밥을 내가 해 주고 방세는 내지 않는 조건이다. 돈이 안드는데 밥 해주는 것 쯤이야. 실제로 1년 정도 함께 있는 동안 반찬 만드는 것 때문에 고생했다. 연탄불에도 밥은 아주 잘 할 수 있는데... 반찬은 오뎅볶음, 콩나물 국, 고등어 구이 이 것 외에 별로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정말 아침이 괴로웠다.
이곳에서 두 번째로 죽을 고비를 넘긴 에피소드도 있다. 연탄가스를 심하게 마셨는데 친구가 술을 마시고 늦게 와서 악착같이 깨운 덕분에 살았다. 술이 고맙다. 다음날 친구가 말했다.
"술을 먹지 않았으면 한 두번 깨워보고 안 일어나면 나도 옆에서 잤을 것이다."
술과 친구가 나를 살렸다.
이 집에는 우리 말고도 두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참 대조적인 가족이다. 한 가정은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고... 한 가족은 불화가 끊이질 않는다. 나에게는 최고의 학습장이다. 행복한 가정을 볼 때는 "나도 이 다음에 결혼하면 저렇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했다.
날마나 싸우는 가정을 보면서는 "저 것은 너무 안 좋다.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행복한 주인집 아주머니는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이 보기 좋단다. 그리하여 내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고 이자를 받아 주었다. 만약 돈을 떼이면 자신이 책임지기로 하고...
이제 돈이 나를 위해 돈을 벌고 있다.
나는 더 빨리 돈을 벌기 위하여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의상실에서 퇴근 후에 일을 또 했다. 새벽 2~ 3시 정도면 마친다. 선불 받은 돈과 곗돈(나는 적금 이자가 적어 계만 넣었다.) 탄 것을 합하여 이자를 놓았다. 당시 이자는 5부였다. 이렇게 하여 이자로 생활하고 월급 받는 것은 100% 곗돈을 넣었다. 또 필요한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옷을 만들어 주고 돈을 벌었다. 이와같이 계속하니 돈은 빠르게 불어났다. 꼭 눈덩이 굴리는 것 처럼 커져갔다.
내가 목표로 하는 '나의 의상실을 가지는 것', 나는 그곳을 향한 고속열차를 탑승한 것이다. 고지가 바로 보인다. 야호~
(사진설명: 21살 때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적은 가계부, 매달 계획적으로 돈을 지출했다.
이 때는 이자와 기타 수입 등으로 생활하면서 월급 보다 더 많이 저축을 했다.)
유치장에서 보석을 캐다
매일 나는 집에 도착하면 12시를 조금씩 넘겼다. 어떨 때는 12시가 넘어 골목에서 골목으로 숨어 들어오기도 한다. 당시에는 12시 이후는 통행금지가 있었다. 또 미풍양속을 해친다며 장발단속도 심했다.
그 날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버스에서 내리자 12시가 다 되었다. 두리번 두리번 살펴 보아도 경찰이 없길래 차도를 가로 질러 뛰었다. 조금 뛰어 가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귀를 울리드니...
"이봐 ~ 거기 서.."
"이크... 달리자..."
17살 소년은 건장한 방범대원들에게 곧 잡혔다. 파출소로 끌려갔다. 2시쯤 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었다. 다음날 경범죄로 판사앞에 섰다.
"구류 3일.. 탕탕탕."
아구~~
나는 보행위반과 장발이라는 두 가지 죄목 때문에 벌금형이 안 되고, 경범죄로는 가장 무거운 유치형을 받은 것이다. 다시 호송버스를 타고 돌아와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되었다. 유치장 생활은 지옥이었다. 말로만 듣든 콩밥에 반찬은 장아찌 몇 개로 구성된 식사는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안 먹는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달라고 했다. 첫끼는 그렇게 굶었다. 다음 부터는 배가 고파 그것도 맛있었다. 빠삐용이 감옥안에서 벌레를 잡아 먹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낮에 누울 수도 없다. 잠 잘 시간이 되면 불을 끄고 무조건 누워야 하고 말도 못한다. 아침이면 기상벨이 울리고, 일어나 체조하고, 씻고, 밥 먹는다. 이때의 시간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생활 속에서 체험했다. 즉, 시간도 주관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조그만 창 밖으로 비추는 햇살을 보며 지겨움을 달랬다. 유치장 바깥에서 자유롭게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3일째 되는 날이다. 드디어 출소다. 2시에 출소시켜 준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침부터 2시까지가 1년 같았다. 이 때 겪은 3일간의 유치장 생활에서 나는 각오를 했다.
"절대로 이곳에 다시 오지 말자."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있는 법이다. 유치장 생활도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었다. 시간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평범한 일도 크나큰 행복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고... 유치장은 갈 곳이 못된다는 것도 깨달았으니... ^^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머리는 잘리지 않고 나왔다. ㅎㅎ 형사가 머리를 깍으려고 서랍을 뒤졌는데 가위가 없었든 것이다. 다음으로 미루다 잊어버린 것 같다. 당시에는 장발이 대유행이었다. ^^
중심지로 진격하라
1978년. 20세
나는 변두리에서 1년 넘게 실력을 쌓은 후에 시내 중심지로 자리를 옮겼다. 중심지에서 가장 낮은 직급의 마도메로 일한지 2년 조금 넘어 재봉 기술자로 다시 입성한 것이다. 당시 의상실은 초호황이었다. 어떤 곳은 종업원 40명 정도의 거대한 공장도 있다. 물론 적은 곳도 있지만 나는 규모가 큰 곳을 선택했다.
이곳에서는 간혹 웃지 못할 일이 생긴다. 내가 아주 낮은 직급으로 일 할 때 만났든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다. 나를 알아 볼까봐 가슴이 콩당 콩당 파동을 친다. 그러나 세 가지 경우 때문에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첫째는 나의 외모를 너무 완벽하게 변신했다. 둘째는 내가 기술을 빨리 배우려고 직장을 자주 옮겼기 때문에 나하고 오래 일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너무 빨리 진급 했기 때문에, 그 때 본 그 아이가 지금의 기술자라고 연결하여 생각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다만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때부터 최고 기술자들에게 주는 선불(스카웃 비용인 셈, 실력에 따라 금액의 차이가 있으나 3~ 6개월 정도의 월급을 미리 줌, 그만 둘 때 반환함)을 받으며 일하게 되었다.
중심지로 진격한지 1년이 조금 지난 후에 부산에서 최고 기술자들이 하는 능력급제를 시작했다. 능력급제는 월급 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벌 수 있다. 또 혼자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팀으로 일을 한다. 한 팀은 3~ 4명으로 구성되어있다.
경력이 몇 십년 된 사람들에 비해서는 수입이 다소 적었지만 최고 수준이다. 내가 양재기술을 배우러 입문한지 5년만에 최고 기술자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게 된 것이다. 이 때 부터 나의 몸값은 마구 뛰어 스카웃 비용도 정상급으로 상승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기술력이 뛰어난 부산에서, 부산 중에서도 중심지인 광복동과 남포동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산골소년의 인간승리다. 이제 하나 둘 나의 꽃을 만들어 가고 있다.
연애도 일도 신나게
나는 일도 최선을 다해 했지만 연애도 신나게 했다. 별도로 연애를 위한 시간을 내지는 않았지만 워낙 환경적인 요인(?)이 좋기 때문에 저절로 연애를 할 수 있었다.
공장에는 여자들이 많다. 큰 공장에는 더욱 여자가 많다. 게다가 하루에 14시간 정도를 함께 일을 한다. 이러한 환경요인 때문에라도 자연히 좋아지게 되어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적으로 여자들이 먼저 나를 좋아했다. ^^
여자는 많고 상대적으로 남자가 귀했기 때문일까? ㅎㅎ
꼭 그렇지 많은 아닌 것 같다. 하나의 장점이 때로는 단점도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은 너무 속속들이 알면 신비함이 없어진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14시간 정도를 함께 바라 보고 말을 하며 일을 하기 때문에 서로를 너무 잘 안다. 때문에 같이 결혼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체적으로 여자들이 의상실에 일을 하는 남자를 싫어한다. 그리하여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결혼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으니... ^^*
다소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를 좋아하여 상사병에 걸려 입원한 사람도 있었다. 만나주지 않는다고 음독자살을 기도한 사람도 있었고...
지금와서 그 때 일들을 생각하면 빙그레 행복한 미소를 짓게된다.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어떻게 하면 여자들이 좋아할까?"라고 궁금해 하는 분들을 위해, 오래된 나의 경험을 뒤적여 요약해 봐야겠다.
내가 여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든 이유는 크게 5 가지 정도다.
첫째로 성실하다.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아껴쓴다.
둘째로 유머감각이 있다. 말을 명랑하게 하고 재미있게 했다.
셋째로 자상하다. 다리미 등 공장의 시설물이 고장나면 마음에 쏙 들게 고쳐준다. 나의 손재주 때문이다. 또 내가 기술을 어렵게 배웠기 때문에 친절하고 명확하게 잘 가르쳐 준다.
이 때부터 나의 가르치는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나에게 배운 제자들은 빠르게 배웠고... 최고의 대우를 받고 다녔으니까... 나중에 내가 최고 기술자가 되었을 때는 나의 제자라고 하면 기술자들 사이에 인정을 받게 되었다.
넷째로 미남(?)이다. 스스로 잘 생겼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당시에는 잘 생겼다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었다. 스스로도 잘 생겼다고 생각하여 영화배우를 하려고도 생각했다.
지금은 잘 생겼다는 소리를 가뭄에 콩나듯 듣는다. 그것도 나이가 지긋한 사람으로 부터만... ㅎㅎ 세월의 여파가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상대적으로 그 시절에는 잘 생긴 사람이 적었을 수도 있다. 요사이는 대부분 사람들이 잘 먹고 스스로를 잘 가꾸니까 더욱 멋지게 보이지만... 당시는 먹고 살기에 급급한 시절이라 그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하나를 굳이 찾으라고 한다면, 똑똑하게 보였다. 무엇이든 일을 똑소리 나게 처리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사진설명: 아내의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연애를 많이 한편이다. ^^ 연애 덕분(?)에 여자들의 심리파악도 하게 됐다.
그런데 누나는 나와 달랐다. 시골에 자라면서 순박한 처녀로 지냈다. 누나에게 가장 큰 소망은 '도시청년과 결혼하여 지겨운 농사일을 그만하는 것'이었다.
누나는 22살에 결혼했다. 당시 누나가 나이가 많이 들어보인다며... 어머니는 빨리 시집을 보내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결혼은 시작부터 잘못 되었다. 우리는 상대의 거짓말을 분별할 정도의 판단력이 없었다. 아니, 어머니도 누나도 너무 순수했다. 어머니는 강박증이라 할 만큼 정직하셨다. 때문에 다른 사람도 정직할 것이라고 믿고 계신다.
마산에 직장이 있다고 속인 남자와 중매장이의 말을 그대로 믿은 것이다. 직장이 도시에 없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괴팍한 성질에다가 폭행을 일삼는 것이다.
이런 누나를 위해 처음에는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첫 아이도 2년 넘게 맡아 주었다. 금전적인 지원도 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지금까지 누나의 결혼생활은 불행의 연속선상에 있다. 하나 뿐인 누나의 불행은 나의 마음을 거인의 발로 밟고 있는 것 같다. 누나를 생각하면 내가 그 때 좀 더 강력하게 결혼을 만류했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만 든다.
누나가 결혼하고 바로 어머니는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이사오셨다. 이 때부터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결혼으로 자기인생 역전을 꿈꾼다. 파리의 연인이 히트한 이유도 신데렐라를 꿈꾸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혼은 지금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고양이 무섭다고 피하다가 가장 지독한 호랑이를 만난다. 먼저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최선이다. 혹, 나처럼 결혼에 대한 별 생각없이 연애하다가 대박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요행에 투자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결실의 꽃을 피우다
1980년, 나이 22세
나는 성실했다. 오직 돈만 보고 달렸다. 그리하여 씀씀이는 가급적 자제했다. 그러나 정말 사고 싶은 것은 참지 못하는 성미다. 사지 않으면 병이날 정도다. 그 중 하나가 전축이었다.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전축을 구입하는데는 거금을 들였다. 또 당시 부자(?)들의 상징물인 고가 카메라도 구입하였다. 이 사진기 하나면 해수욕장 가서 폼도 잡을 수 있었다. ^^
(사진설명: 의상실의 돌출간판이다. 아주 비싸게 주고 했다.
그 당시 간판으로는 파격적으로 내가 디자인 한 것이다. 이름도 눞혀 버렸으니... )
이렇게 절약하고...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 받은 덕분에 돈도 빨리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남들이 가는 군대도 가지 않고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신체검사에서는 특 A급 판정을 받았지만, 소집면제가 된 것이다. 외동에다가... 재산이 하나도 없고... 어머니의 연세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군부대에서 21일간 훈련은 받았다. ^^
내 나이 22살. 드디어 의상실을 개업했다. 내가 모은 돈 600만원과 빌린돈 400만원을 투자하여 그렇게 소망하든 의상을 오픈한 것이다. 이제 한 송이 꽃을 피웠다.
그 돈으로 집을 살까하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집 사는 것보다 장사하여 돈 버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했다.
그 시절 부산 변두리에 대지 50평 정도의 단독주택 집값이 500만원 정도했다. 집을 두 채 살 수 있는 거금을 들여 의상실을 개업한 것이다. 오늘날 50평 정도 되는 집을 부산 변두리에 구입하려면 2~ 3억 정도 할 것이다.
이때는 고급기성복이 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상실은 아주 잘 되었다. 고급기성복의 최고 브랜드가 '논노'였다. 한 달 곗돈을 500만원 불입했다.
(사진설명: 모아 의상실 내부, 장발이 심하다.
남방과 스카프는 손수 만든 것이다. 22세 때 ^^)
총각이 그럴듯한 의상실을 운영하니, 고객들이 중매를 서로 해 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창업하면서 디자이너로 입사한 한 살 연상의 여인과 사랑이 싹트고 있었다. 아내는 순정파다. 나와 연애할때 부모님이 약국을 하는 사람과 선을 보라고 해도 절대로 보지 않았다. 오직 나만 좋다고 했다. 훗날 "나의 어떤 점이 좋았느냐?"고 물었드니... "너무 성실하게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결혼이라는 생각없이 그냥 연애를 한 것이다. 아내는 자꾸만 결혼하자고 보챘다. 생각해 보니 나를 편안하게 해 줄 것 같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결혼을 결정했다.
결혼은 도박이라고 한다. 나는 그 도박에서 대박을 잡았다. 그렇게 하여 23살에 결혼을 한 것이다. 하지만 아내와 처갓집 식구 모두는 내 나이를 28살로 알았다.
아내는 연상이었지만 나는 오랫동안 나이를 올려왔기 때문에 아내가 어리게 보였다.
나는 드디어 삶의 전쟁터에서 두 개의 꽃을 피웠다.
그렇게 소망하든 의상실을 개업하게 되었고...
나를 온달장군으로 만들어 준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었으니...
그 꽃은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웠다. 고매한 향기도 넓게 퍼졌다.
* 다음 이야기에서는 20년 결혼생활과
23년간 패션업계를 항해하며, 검정고시와 대학교를 졸업한 생활을 조망해 보겠습니다.
* 이 글은 계속 업그레이드 할 것입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