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파"는 1905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의 전시를 보고 '야수들 사이에 있는'라고 하는데서 용어가 유래되었으며, 야수파의 대표작가 마티스는 '수단의 순수함으로 복귀하려는 용기,이것이 바로 야수차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다.야수주의는 급작스럽게 태어났다기보다는 인상주의적 감각주의에 대한 도전이었고 보다 강렬한 감동에 대한 목마름에서 출발한다. 중류계급의 고상함과 아카데믹한 꾸밈 그리고 암시적이지만 모든 것을 숨기는 아르누보적 우아함등의 판을 치던 시대에 마티스,앙드레 드랭, 모리스 드 블라맹크, 죠르주 루오, 라울 뒤피 및 군소 작가들은 대담하고 다시의 화면에서 거의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솔직한 표현을 위해 직접성과 명확성을 추구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야수파들은 세기말적인 슬픔과 내성 그리고 상징주의 문학의 탐미성을 모두 벗어던지고 인상주의의 직접적이고 기쁨에 찬 자연의 포옹을 재생시키는 한편 후기인상주의의 고상한 색채의 대비와 깊이있는 정서적인 표현을 결합시키는데 만족했다. 이들은 모두 색채를 이전의 낡아빠진 묘사적 기능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야수파는 새로운 실험정신을 발휘한 작가의 색채를 통해 표현적 감정적 힘을 표현하고 과거의 전통을 깨는 것이다. 야수파는 넓은 추상적 색면을 중요시하여 묘사적 기능에서 조형적 자유를 추구했다. 따라서, 넓은 색면을 점차 추구하여 장식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세잔의 색면과 다른 것은 세잔은 보다 객관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그 의미에 있어서는 주관적인 색채 사용이 고흐의 고정을 계승한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야수파는 양식적인 변화에 주력하여 내용보다는 형태왜곡, 추상적 색채가 패턴화된 화면이 형태를 이루고 그림은 장식화된다. 일종의 조형적 표현주의라고 할수 있겠다.
야수주의의 형성에는 3개의 그룹으로 나뉠수 있는데 파리 국립 미술학교 귀스타브 모로를 중심으로한 마티스, 마르케, 망갱, 퓌이, 샤투파로 알려진 블라맹크,앙드레 드랭 그리고 르 아브르 출신의 프리에츠.뒤피,브라크이다. 야수파화가들은 반고흐와 고갱의 작품속세어 예술의 본보기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색채가 이미 자연의 재현 수단이 아니라 예술가의 감동, 사념의 표현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교훈이다. '나의 눈앞에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다 강렬하게 표현가시 위해서 색채를 사용한다.'는 반 고흐의 말이 야수주의 자체의 정의일수 있다. 야수파의 색채의 항연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1904년과 1906년에 전시된 세잔느의 회고전이 야수파 화기들의 전향에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야수파 화가들은 강한 개성과 기질,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화가들이었다.
야수주의의 일관된 특성을 추출해 내기란 매우 힘든데, 이론가와 이론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선 우리의 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색채의 강렬함이다. 오직 순색조에만 의존하고 각 색조간의 직접적인 대비,거친 터치,종래의 투시법, 양갑, 명암법을 무시하고 색조의 뉘양스,전조를 묵살한다. 또한 색조의 순도를 살리기 위해 깊이의 공간 표현을 가능한 생략하며 배경도 대상과 동일한 강도의 색채를 쓴다. 이러한 방법은 결국 회화의 평면성에로 복귀, 장식성의 강조를 초래하며 (고갱의 계승) 공간을 오로지 색채에 의해 포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상주의는 명암과 광선의 효과를 색채에 의해 묘사하려 하였지만 야수파 화가들은 색채 자체에서 광선이 배어나오기를 워했으며 광선이 색채의 조화 및 광휘와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야수주의 1907-1908년 주요 화가들의 관심이 색채로부터 입체감,양감,중량감,선으로 바뀌어지면서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 드랭과 블라맹크의 작품은 1908년부터 색채가 어두워지고 구조적으로 변하며 야수파의 본질을 끝까지 유지했던 화가는 마티스와 뒤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 마티스
마티스는 특별히 이 운동에 대해 어떤 창시적인 선구자로서의 객관적인 입지를 스스로 밝힌 적은 없지만, 화풍이나 연령을 고려할 때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신진 화가들에게 새로운 시각적 가능성을 열었다. 그는 모로에게 자유분방한 시각의 교육을 받고 1898년 모로가 세상을 떠나자 코르몽,카리에르의 스튜디오로 옮겨 작업을 하다가 코르시카,뚤루즈.생-트로페를 여행하며 자신의 회화세계를 확립하게 된다. 초기의 어두운 색조와 과장없는 평범한 주제로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1896년 무렵에는 드가,툴루즈-로트렉, 인상주의, 일본판화등에 눈을 떳고 르느와르와 세잔느도 알게 되었다. 그는 일련의 정물의 모작에서도 이미 세부표시를 지양하고 선과 색채를 구성요소로 단순화시키는 방향을 말한다. 전기야수파라고 불려지는 순수 색조의 난폭한 터치의 풍경화가 이때의 특징이며 또 생-트로페 체류시기에는 (1904) 폴 시냑과 작업하며 신인상파의 점묘주의 기법을 시도한다. 바로 그것이 "화사함, 고요함과 쾌락" 이다. 이후 마티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대담한 색채를 구사하게 되는 데 이는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의 주제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역할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보다는 그의 작품에 있어서 더욱 강조되는 부분은 바로 소묘에 대한 것인데,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그는 우리에게 그의 작품에 나오는 모든 요소들을 형태로 지각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를 다른 말로 언급하게 되면 작품의 모든 것이 장식적이라는 것이다. 나무, 배, 해변들이 단순한 공간으로 통일시키고 있는 선적인 패턴들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가 당시의 문학적인 사조와 어떠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작품은 "생의 환희"에 나타나고 있다. 현실도피라는 고전적 주제를 노래로 한 보들레르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마티스의 상상력이 문학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 지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중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작품 중 "마티스 부인의 초상화"가 있다. 이 작품이 전시되고 나서 그가 들은 것은 노골적인 괴벽이라는 비평가들의 어절수 없는 평가였지만, 지금도 코를 둘러싸고 있는 강한 녹색선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강한 표현, 얼굴을 채우고 있는 주황과 초록색은 인공의 묘한 깊이를 느끼게 하고 있다. 이후 마티스의 작품에는 비유럽적인 요소 (원시미술) 들이 상당부분 등장하게 되는 데 "분홍양파들이 있는 정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본질들을 줄여 버리는 이러한 일, 즉 표현해야 할 회화적인 요소들의 수를 감소하는 일은 마티스의 화가로서의 경력에 있어서 핵심적인 발전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옛 대가들의 교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순수회화의 문제에 사로 잡힌 명철하고 신중한 교양인이었다.
*********** 드랭
앙드레 드랭은 외젠 카리에르가 지도하는 파리의 작은 화실에 다니고 있었는 데, 그는 마티스의 매우 실험적인 작품에 대하여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 후 마티스와 고갱의 작품을 감사하면서 고갱이 추구한 화풍, 즉 전통적인 원근법을 없애 버리고서 화면을 응축시켜 장식적인 단위가 되게끔 한 것을 보고 그의 작품의 기풍을 확립하게 된다. 타오르는 강렬한 빨강, 초록, 노랑의 풍경화를 전시하면서 자연적인 외양에 의존하지 않고 상상력에 기인하는 것을 보여준다. 1905년부터 그는 볼라르가 의뢰했던 템즈강 시리즈에 열중하였으며 다양한 빛의 특질과 떠도는 안개의 짙고 옅음을 날카롭게 표현했는 데, 블라맹크와는 달리 개성과 주관이 합치된 인상파의 재해석쯤으로 이해하면 좋다. 또한 위의 작품에 임할 때의 그의 색채에 대한 표현은 어느 때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조화한 것은 아니었다. 1907년 이후의 드랭은 야수파의 표현은 아니었다.
*********** 블라맹크
특히 블라맹크는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으면서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원시적인 충동과 물결치는 색선과 강렬한 색채들을 이용한 충동적 작품을 남겼다. 그는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그의 회화와 조각에 결정적인 자극을 선사한다. 1906년 앙데팡전 이후 그는 관람자로 하여금 물감이 회화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주제 선택과 구성은 확실히 인상파에서 연원하고 있으며 실로 그의 구성요소의 배치방법은 피사로와 인상주의와 매우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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