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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탁영선생 회로당기(會老堂記)
1) 해설
이 글은 조선 초기의 저명한 학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이 지은 것으로, 숭선전이 건립되기 훨씬 이전인 15세기말에 수로왕과 허왕후에 대한 제례가 거행되던 김해부 소재 회로당(會老堂)의 유래를 적고 있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에 태어났으며, 자(字)는 계운(季雲), 호(號)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小微山人)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그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를 지낸 맹(孟)이다. 영남사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486(성조 17)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훈구파의 불의와 비리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이 때문에 훈구파로부터 극심한 반감을 샀고, 급기야 1498년(연산군 4)에 그가 쓴 사초(史草) 중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들어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어,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의 훈구파의 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史禍)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복관(復官)되고,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도승지(都承旨), 이조판서(吏曺判書)로 추종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며,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서 제향되었다. 회로당기는 『탁영선생연보(濯纓先生年譜)』에 의하면, 1491년(성종 22년) 11월 15일에 김해에 갔다가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2) 원문 및 해석
<濯纓先生會老堂記(堂弘治辛亥邑中父老創建今爲陵所講堂揭會老堂三宇)>
<탁영선생 회로당기<당은 홍치 신해년(1491)에 동내 어른들이 창건하여 지금은 능소의 강당으로 되었고 ‘회로당’이란 3글자가 걸려있다.)>
堂以會老名者 鄕黨父老之所會也 會之何爲 飮射讀法 無非會也
당(堂)의 이름을 '회로(會老)'라고 한 것은 향당(鄕黨) 부로(父老)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여서 무엇을 하는가?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 독법(讀法) 등을 행할 때마다 여기에 모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1)
1) 향음주례는 고을의 큰 잔치를 통해, 향사례는 활쏘기를 통해 유교적 예법을 익히는 행사이다. 이것들은 모두 덕망있는 선비들을 중심으로 향촌의 자치를 구현하고자 한 사림파에 의해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던 것들로서, 특히 김종직을 비롯한 영남사람들은 이 해상들을 주관할 기관으로 고을마다 유향소를 복립할 것을 주장하였다.
堂在府城之北 前十年間 府人金順孫 因故址而建焉 自祖宗朝 建議留鄕者非一 旣設而罷 尋復而又廢
회로당은 김해부의 성 북쪽에 있으니,2) 10년 전에 이곳 사람 김순손(金順孫)이 옛 터에다가 세운 것이다. 우리 조선의 개국이후 역대로 유향소(留鄕所)3)를 건의한 것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한번 설치했다가는 폐지하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복립했다가는 또 폐지하였다.
2) 지금 김해시 대성동 향교의 서편이자 논실마을의 근처인데, 거기는 아직까지 쉬로당(회로당) 골목이란 지명이 전한다고 한다.
3) 유향소는 조선시대에 지방의 사족(士族)들이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지방 수령에게 향촌의 사정을 자문하기 위해 조직한 기구이다. 흔히 향청(鄕廳)이라고도 불렀다.
飮射讀法等事 朝廷非不留意 而鄕黨無有任擧者 堂爲巋然之空舍矣
향음주례와 향사례, 독법 등의 일을 조정에서도 신경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향당에 그 일을 맡을 자가 없었던 것이니, 이로 인해 회로당은 덩치만 큰 빈집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歲己酉春 朝廷慮鄕俗之不古 特復留鄕所 立鄕正 而定令 州府五員 郡四員 縣三員 各推一邑之望 以任其責
그러던 중 지난 기유년(1489:성종 20) 봄에 조정에서 향속(鄕俗)이 예전같지 않음을 염려하여 특별히 유향소를 복립하고 향정(鄕正)을 세웠다. 그리고 영(令)을 정하기를, 주(州)와 부(府)에는 다섯 사람, 군(郡)에는 네 사람, 현(縣)에는 세 사람을 두되, 각기 그 고을에서 명망 있는 사람을 추천하여 그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金海府也 前義城縣令 金先生係錦 前靑山縣監 白啓英 前引儀 裵炯 前參軍 宋叔亨 與吾從兄 進士 金伯堅 實備五員之數 皆一府之望也 鄕有公事 皆於是堂會議焉
김해부에서는 전에 의성현령(義城縣令)을 지낸 김계금(金係錦)4)선생과 청산현감(靑山縣監)을 지낸 백계영(白啓英), 인의(引儀)를 지낸 배 형(培炯), 참군(參軍)을 지낸 송숙형(宋叔亨), 그리고 나의 사촌형인 진사(進士) 김백견(金伯堅) 등으로 다섯 사람의 수를 갖추었으니, 모두 김해 고을에서 큰 명망을 지닌 분들이었다. 이들을 고을에 공적인 일이 있으면 모두 이 회로당에 모여서 의논하였다.
4) 김계금은 1405년(태종 5)에 태어나 1493(성종 24)에 사망하였다. 호는 서강(西岡),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454년(단종 2)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거쳐, 의성현령(義城縣令)을 지냈다.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김해로 돌아와 생림리에 서강정(西岡亭)을 짓고 도의를 닦았다. 세상에서는 그를 육일거사(六一居士)라 불렀다.
府故駕洛之墟 始祖首露王墓 在今西郭門之外 官禁樵牧 故事 父老具時羞 修祀事 旣撤 鄕人共餕 歲以爲常
김해부는 옛날 가락국이 있었던 곳이다. 그 시조 수로왕의 능이 지금 서쪽 성문 밖에 있으니, 관(官)에서 나무하고 풀뜯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예전부터 부로(父老)들이 때마다 음식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마치면 고을 사람들이 함께 음복을 하여 해마다 상례가 되어 있다.
余金海人也 先世相傳 以爲系出首露 而遠不可詳 每過陵下 嫌於郭崇 韜之拜子儀 而不敢自附然 猶隨鄕人之後列 陳俎豆
나는 본관이 김해이다. 선대부터 전해오기를 계보가 수로왕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는데, 너무 멀어서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번 능을 지날갈 때면, 곽숭도(郭崇韜)가 곽자의(郭子儀)의 무덤에 절했던 일을5) 생각하고는, 감히 스스로 다가가지 못한 채 이 고장 사람들의 뒷줄에 서서 제기를 진열할 뿐이었다.
5) 곽숭도(郭崇韜)는 중국 오대(五代)의 한 나라인 후당(後唐)의 재상, 자신의 근본을 잘 알지 못했는데, 당나라때의 유명한 재상이었던 곽자의(郭子儀)를 자기 조상이라고 칭하고서 그의 무덤에 절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去年冬 余自道州田墅而來 適値鄕人祭餕之日 大會於是堂 余趍拜父老於堂下 金先生迎謂余曰 此吾鄕人之俗也 相因已久 不奈有妨於古儀乎
그런데 작년(1490:성종 21) 겨울에 내가 청도의 시골집에 있다가 이 곳에 오니, 때마침 고을 사람이 제사지내고 음복하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이 회로당에 많이 모여 있었는데, 내가 당 아래에서 부로(父老)들께 절을 하였더니, 김계금 선생이 나를 맞이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고을 사람들의 풍속으로서, 계속해 온지가 오래 되었소이다. 행여 옛날의 의례에 저촉되는 것은 없겠소?” 라고 하였다.
余對曰 何妨 自古 帝王有功德者 絶世之後 其土民 莫不立祠 雜出於傳記 如堯舜大禹廟尙矣 後世漢之高祖 光武 蜀先主 皆有廟 齋人有祈焉 有告焉 得以祀之 雖不應經文 而邦人所以懷不盡之思 起千載之敬 在所不禁也
나는 답하기를, “저촉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옛부터 공덕이 있는 제왕(帝王)은 후손이 끊어진 후라도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전기에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 그리고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의 사당도 여전히 있고, 그보다 훨씬 후대인 한나라의 고조(高祖)나 광무제(光武帝), 촉한(蜀漢)의 선주(先主)도 모두 사당이 있어, 사람들이 기원을 하거나 고유를 할 일이 있으면 그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경전에는 부합되지 않더라도 나라 사람들이 끝없는 사모의 정을 지니고 천년을 이어온 공경심을 일으켜 하는 것이니 금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嘗考首露王 於後漢建武十八年開國 傳四百餘年十世 至末王仇亥 降入新羅 國除 至今千有餘年 玉跡熄矣 餘澤渴矣 鄕人猶薦苾芬不怠者 盖首露吾鄕生民之始王 追而報之 不容己者 此固吾鄕之善俗 宜吾鄕之世守也
수로왕의 경우를 살피건대, 후한의 건무 18년(A.D. 42)에 나라를 여시고, 10대 400여년을 전하여 마지막 임금인 구해왕에 이르러 신라에 항복하여 들어갔으니, 나라가 없어진 지도 천여년이 지났습니다. 왕의 자취도 사라졌으며, 남은 은택도 다 말랐을 텐데, 고을 사람들이 여전히 향기로운 제물을 바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대개 수로왕이 우리 고을 백성들의 첫 임금인 까닭에 추모하고 보답하기를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이 고을의 좋은 풍속이니, 앞으로도 계속 지켜 나감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先生曰善 國家復留鄕 欲善鄕俗 子以此爲吾鄕之善俗 則此會也 於此堂爲有光矣 吾旣以會老名 子當記之
선생은 말씀하되, “좋은 말씀이오. 나라에서 유향소를 복립시킨 것은 고을의 풍속을 좋게 하려는 것인 바, 그대도 이 행사를 우리 고을의 좋은 풍속이라고 하였으니, 앞으로 이 행사를 이곳에서 계속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소. 내가 이미 이 당의 이름을 ‘회로(會老)’라고 지었으니, 그대는 기문(記文)을 하나 써주시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余起而復曰 今日會此堂者 皆父兄宗族而匪他 其所以講睦者 宜無不至 第一鄕必有一鄕之俗 而鄕俗因循 有善有不善者 其善者 雖不出於國家之典 而不可去 其惡者 雖自來舊習 而決不可存 率一鄕之子弟 化於善 戒於惡 非父老之責乎
나는 일어나서 다시 말하기를, “오늘 이 당에 모인 분들은 대개 부형(父兄)과 종족(宗族)이요 다른 분들이 아닌지라, 화목함을 도모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고을에는 반드시 그 고을만의 풍속이 있는데, 그 풍속이란 옛것을 따르고 좇는 것이어서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습니다. 좋은 것은 비록 나라의 법전에 나오지 않더라도 없앨 수 없는 것이며, 나쁜 것은 비록 옛부터 내려온 습속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온 고을의 자제들을 이끌어 착한 일에 힘쓰도록 하고 나쁜 일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곧 부로(父老)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今之留鄕 卽古之鄕大夫 三物八刑 所以敎而糾者 自有其事 其或父而不父 子而不子 兄而不兄 弟而不弟 夫而不夫 婦而不婦 不睦者 不姻者 下訐上者 吏漁民者 皆在所察 提撕焉 警覺焉 其甚者 告于有司 驅一鄕之善
오늘날 유향품관(留鄕品官)은 옛날로 치면 향대부(鄕大夫)로서, 삼물(三物)6)과 팔형(八刑)7)으로 가르치고 바로잡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그 일을 맡아, 아비로서 아비답지 못한 자나, 자식으로서 자식답지 못한 자나, 형으로서 형답지 못한 자나, 아우로서 아우답지 못한 자나, 지아비로서 지아비답지 못한 자나, 지어미로서 지어미답지 못한 자나, 화목하지 못하고 다투기를 잘 하는 자나, 아랫사람으로 웟사람을 거역하는 자나, 향리로서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을 모두 규찰하여, 가르치고 인도하고 경종을 울려 스스로 깨닫게 하되, 그 가운데서도 심한 자는 관청에 고발하여 온 고을의 풍속을 좋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6) 육덕(六德)과 육행(六行)과 육례(六禮)를 가리키니, 육덕에는 인(仁), 의(義), 예(藝), 지(智), 신(信), 화(和)가 있고, 육행에는 효(孝), 우(友), 목(睦), 인(姻), 임(任), 휼(恤)이 있으며, 육예에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가 있다.
7) 팔형(八刑); 주나라때 시행된 여덟가지 죄목이니, 불효(不孝), 불목(不睦), 불인(不姻), 부제(不悌), 불휼(不恤), 조언(造言), 난민(亂民), 불임(不任) 등이다.
反吾鄕於樸散之後 熙熙然 爲首露氏淳厖之俗 然後 還就此堂 把一盃酒 太平之春 則非徒一鄕之幸 乃國家之幸也
이렇게 하여 우리 고을이 질박하고 넉넉하게 돌아간다면, 수로왕시대의 순후한 풍속을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이 당에 나와서 술잔을 잡고 태평성대를 노래한다면, 이는 한 고을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온나라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前府使 李公蓀 曾充墓田之資 今府使 金公義亨 又得吾鄕之人 凡所以善吾俗者 父老方屬望焉
전 김해부사 이손(李蓀)은 일찍이 묘전(墓田)을 마련해 놓았는데, 지금 부사 김의형(金義亨)이 또 고을 사람을 얻어 릉을 보살피게 해놓았으니, 대저 우리의 풍속을 아름답게 만든 사람들이라, 부로(父老)들이 바야흐로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先是 金兄伯堅 營齋室五架於堂之西夾 有田以供祭用 有室以致其齋敬 而將之以黍稷 首露能不享乎 祭而飮 父老能無樂乎 白首他年 吾亦爲此堂之老矣
이에 앞서 나의 사촌형인 김백견이 회로당의 서쪽에 재실(齋室) 5칸을 지었는데8), 딸린 밭이 있으니 제사비용에 걱정 없고, 제사지낼 집이 있으니 편안히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햇곡식으로 제사를 올리니 수로왕께서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정성껏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할 수 있으니 고을의 부로(父老)들 또한 어찌 즐겁지 않으리! 머리가 희여지는 먼훗날 나 역시 이 회로당에 참가하는 부로(父老)가 되리라.
9) 원래 김해부의 유향소에는 정당에 해당하는 회로당과 그에 딸린 서재(西齋)가 있었는데, 서재는 김백건이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때 회로당이 소실되자, 서재를 회로당으로 삼았다고 한다.
遂作延神歌 以與父老 歌曰 紫纓墮地兮 垂統綿綿 九干無主兮 有隕自天 海上定鼎兮 垂四百年 編戶居民兮 晜雲遠孫 歲時報事兮 父老駿奔 神鴉啼散兮 古木荒原 邊豆靜嘉兮 黍稷其芬 簫鼓鳴兮 不見不聞 神之來兮 如雲醉飽洋洋兮 何不福我元元 我民受賜兮 於以樂康 鶴髮鬖鬖兮 鳩杖鏘鏘 歌舞年年兮 其永無疆
이에 연신가(延神歌)를 지어 부로(父老)들에게 주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주색 끈이 땅에 내리더니 면면한 혈통을 이루었네. 아홉 간들 임금 없더니 하늘에서 내려오시네. 바다 위에 나라 세워 사백년을 이어갔네. 거기 모여 살던 백성, 구름 같은 후손을 이루었네. 해마다 제사올리니 고을의 부로들이 분주하구나. 까마귀 울고 흩어지니 거친 들판에 고목만 서 있지만, 깨끗한 제기엔 향긋한 햇곡식 가득하네. 북소리 피리소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건만, 신께서 내려오심은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도다. 맘껏 취하고 배불리 먹으니 이 어찌 우리 복이 아니겠는가! 백성들이 받은 은덕, 즐거움과 편안함이 바로 이것이로세. 학의 깃털이 너울거리고, 비둘기 지저귀는 소리 쟁쟁하다. 해마다 노래하고 춤추세. 영원무궁 이어지리!”
2.濯纓金馹孫涵虛亭記(탁영 김일손 함허정 기)
解釋; 2005. 5. 28. 金順大
金官古國也 多奇跡今府使崔候强幹爲辨旣新燕子樓凡所以賁飾古國之文物者无所不用其極直樓之北婆娑塔之南鑿方塘引虎溪之水而匯之築假島於波心以爲漸臺架屋其上摟茅而亭之橫波設畧勺種魚種蓮羅水禽鳧鷖鵁鶄之類而對浮沉焉
금관국은 오래전의 나라이다. 많은 기적이 있었으니 지금의 부사인 최공[1]이 튼튼한 기둥으로 연자루(燕子樓)를 새롭게 손질하였다. 많이 꾸며져 있기 때문에 옛 국가의 문물이 사용된 곳이 없다. 그 용마루의 바로 위 연자루의 북쪽과 파사탑의 남쪽을 파서 사각의 못을 만들고 호계의 물을 끌어들여 물이 돌아나가게 하고, 그 물결의 중앙에 인공섬을 만들고 높고 평평한 곳에는 집을 짓고 그 위의 누각에는 띠 풀로 지붕을 이었다. 정자의 옆으로 부딪히는 물결에는 물 떠는 그릇을 설치하였다. 여러 물고기와 여러 연꽃이 연이어 있고, 물새(水禽)와 오리(鳧), 갈매기(鷖), 해오라기(鵁鶄)등의 종류가 서로 물위로 오르거나 자맥질을 하곤 했다.
以小舠載妓樂中流棹歌作凌波之辭侯常邀賓客樂飮而投轄焉
작은 거룻배가 기생과 풍류를 싣고 물 가운데서 흔들리며, 노래 소리가 물결을 희롱한다. 최공은 항상 손님을 초대하여 음악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人視之若水仙然鏡面澄澄平凝漫皺樓觀城郭峯巒樹木日星雲物莫不倒影於其中而蘸焉
사람들이 보기에는 물에 사는 신선 같았고 거울면처럼 맑고 맑았으며, 평평하고 서로 엉겼다가 흩어지고 어지러운 주름이 잡힌 누각에서는 성곽을 내려다 볼 수 있고, 꼭대기가 뾰족한 산봉우리와 수목과 해와 별, 구름 등 거꾸로 비치는 그림자가 그 물속에 드리우지 않는 것이 없었다.
其大半畝而渟滀演漾涵混太虛侯請名于左相魚公公以涵虛爲命弘治戊午仲夏予旣免艱自道州來糞祖塋暫休于塋傍別墅侯就訪仍邀我入城觀所謂涵虛亭者而記之衰病殘生支離在世山冠野服江湖其適也
그 태반은 밭이랑이지만 물이 괴어 있고(渟滀) 스며들어와(演) 출렁거려(漾) 하늘(太虛)이 잠기거나 뒤섞여 있다. 최공이 좌상 어공[2]에게 이름<지어주기를> 청하자 어공이 함허를 그 이름으로 하였다. 홍치 무오년(1498, 무오사화) 5월 나는 이미 파직당하여 도주(청도)로부터 와서 조상의 무덤을 청소하고 잠시 쉬면서 무덤의 옆에 있는 농막에 가니, 최공이 찾아와 자꾸 나를 초대하여 성으로 들어가 소위 함허정을 바라보았다. 글을 쓰기에는 노쇠한 병이 생명을 해치고 있어 이별하기 까지 세상에 있을 동안 산으로 갓을 쓰고 들로서 옷을 입는 것에는 강호가 적합하였다.
自以怯城市澁毫楮爲辭辭不獲則請候遙記之侯曰諾水性周流無滯而體則本虛虛故能涵物一有潢潦濁流浮苴漂梗於其流而沮其性則安能涵得如許哉
성으로 둘러싸인 시가지에서 벗어나 껄끄러운 붓과 종이를 사양하였으나, 사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글 쓰는 일이 어렵다고 청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머리를 꺼덕이면서 “물의 성질은 주위를 돌아 흘러 정체하지 아니하고 자체가 본래 속이 빈 것이어서 능히 모든 것을 하나같이 적신다. 웅덩이와 길에 고인 물과 더러운 물은 삼을 뜨게 하고 가시나무를 그 흐름에 따라 떠돌게 하니, 이런 성질을 막아서 쉽게 사물을 적시게 할 수가 있다.
夫人之一心用則動而无窮體則靜而本虛虛故 具五德而備萬物天地日月皆吾方寸中物也 一有邪思干其方寸則失 本體之虛而喪萬事之用應乎心而達乎政莫非汚下矣
대개 사람이 한번 마음을 사용해서 움직인다는 것은 형체가 끝이 없다는 것이고 정지되어 있다는 것은 본래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니 오덕을 갖추어 만물을 준비하면 천지일월이 모두 내 마음(方寸)속에 있는 것이다. 간사한 생각도 마음에 있으니 본체의 허상을 잃어버리면 만사의 능력이 없어지는 것이고 마음으로 다다르면 정치도 추잡해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公餘吏散群囂頓息岸巾登亭風月雙淸水涵虛耶虛涵水耶魚公之命名於是爲稱而崔侯樂之亦知其非常流也
공이 아전만 남게 하고, 군중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깨어지고 부셔지는 소리, 숨소리들을 해산시킨 후, 수건을 쓰고 정자에 오르니 바람과 달이 푸른 물과 짝을 이루어 빈 것을 적시고, 빈 것이 물을 적셨다. 어공이 이름붙인 것은 이런 것을 말하기 위함이니 최공도 즐기면서 또한 그 특별한 물 흐름을 알게 되었다.
請侯黙坐靜觀澄其心淸其慮以求本體之虛些小査滓不能累吾之胸次由是而天淵飛躍之妙亦可以理會喫緊矣
최공에게 청하여 말없이 조용히 앉아 바라보니 마음이 맑아지고 고민이 씻겨나가고 본체의 텅 빈 것을 추구함으로서 조금의 찌꺼기들도 쌓이지 않았다. 내 마음은 점차 이로 말미암아서 하늘의 연못으로 날아오르는 묘한 느낌은 또한 모여서 먹고 마시고 피우며 굳게 얽히는 것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若夫尙淸虛文風雅務稱譽於過客則非所知也 吾衰且病安能一憑水檻觀天光雲影之徘徊挹其淸而尋活水之源乎
대개 숭고하고 맑고 텅 빈 문장의 풍류는 우아하여 명예라 일컬으니 지나가는 손님으로서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쇠약하고 또 병들어 편안하게 물가에 의지하여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늘이 떠도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푸른 물을 떠서 살아 있는 물의 근원을 찾아볼까 한다.
遂書涵虛之景以歸崔侯侯名某字某某鄕人家世有分又倅鄕國義不可不書云
함허정의 경치에 대한 글쓰기를 마치고 최공에게로 돌아가니, 최공은 이름이 무엇이고 자가 무슨 사람인 모 마을사람으로서 집안의 문벌(家世)이 있으니, 작은 무리나 마을이나 나라의 도리로서 어쩔 수 없이 써서 남긴다.
<주해>
[1]崔候; 최윤신(崔潤身);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첨사(僉使)를 지냈다. 조위(曺偉)·김종직(金宗直)과 함께 영남루(嶺南樓)에서 시문(詩文)으로 회유(會遊)하였다.
[2]魚公; 어세겸(魚世謙); 1430(세종 12)∼1500(연산군 6).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자익(子益), 호는 서천(西川)이다.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의 아들이고, 우참찬 어세공(魚世恭)의 형이며, 좌의정 박은 의 외손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문종 1년(1451) 생원이 되고, 세조 2년(1456) 동생 어세공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에 승문원 정자 · 봉상시 녹사를 거쳐 1459년 천추사(千秋使) 이극배(李克培)의 수행관인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예문관 대교 · 봉상시 직장 · 성균관 주부 · 예문관 봉교를 지냈으며 잠시 사헌부 감찰을 겸하기도 하였다. 1461년 이조 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한계희(韓繼禧)가 평안도 순찰사로 임명되면서 그를 종사관으로 천거하여 잠시 외지로 나갔다가 세조 9년(1463) 예조 좌랑 · 성균관 직강 등을 역임하고, 한명회(韓明澮)가 황해 · 강원 · 평안 · 함길 4도의 도체찰사로 임명되자 그의 천거에 의해 종사관이 되어 한명회를 따라 4도를 순행하고 돌아왔다. 그 이듬해 예조 정랑을 거쳐 1465년 이조 정랑이 되었다.
그 해에 병조 판서 김질 이 경상 · 전라 · 충청도 군적 도순찰사(軍籍都巡察使)로 가게 되었는데 세조가 직접 그를 천거하여 종사관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왕의 특명으로 승진하여 종부시 정으로 임명되었고, 예문관 직제학을 겸하였다. 세조 13년(1467)에는 승문원 참교 ·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춘추관 수찬관을 겸직하였다. 이어 우승지가 되었고, 예종 1년(1469) 남이(南怡) · 강순(康純)의 역모에 관한 옥사 이후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함종군(咸從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평안도 관찰사로 나갔고, 성종 즉위 후 성균관 동지사가 되고 성종 2년(1471) 예조 참판이 되었다. 1474년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내고 1479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상피법(相避法)에 의거하여 한성부 좌윤으로 임명되었다. 이때에 명나라에서 건주위(建州衛)를 치면서 우리 나라에 원병을 청하자 임금의 특명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3 · 4차례나 왕복하며 외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귀국할 때 《오륜서(五倫書)》 · 《국자감통지(國子監通志)》 등 귀중한 서책을 들여왔다.
그 후 전라도 관찰사 · 공조 판서를 역임하던 중 대간의 탄핵을 받아 일시 이조 참판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13년(1482) 봉조하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형조 판서 · 경기도 관찰사 · 한성부 판윤 · 호조 판서 · 병조 판서를 거쳐 1488년 말에는 홍문관 대제학이 되고, 이어 좌참찬 · 우찬성 · 좌찬성을 거쳐 연산군 1년(1495)에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 때에는 사초 문제(史草問題)로 탄핵을 받아 좌의정을 물러나면서 부원군으로 진봉(進封)되고 궤장(廓杖)을 하사받았다.
그는 학식이 뛰어났고, 소절(小節)에 얽매이지 않아 형조 판서로 재직할 때에는 출퇴근시간에 구애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 불리었으나 업무처리를 능률적으로 하여 결송(決訟)이 지체되지 않았다고 한다. 1483년 서거정(徐居正) · 노사신(盧思愼)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성종 21년(1490)에는 임원준(任元濬) 등과 함께 〈쌍화점(雙花店)〉 · 〈이상곡(履霜曲)〉 등의 악사(樂詞)를 개찬하였다. 같은 해에 《주례(周禮)》를 개주(改註)하여 바쳤고, 1492년 유자광(柳子光) 등과 함께 전해온 여러 진서(陣書)를 참고하여 《진법(陣法)》을 편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는 《서천집(西川集)》이 있다.
3. 濯纓先生臨錦堂記(탁영선생 임금당 기)
解釋; 2005. 5. 28. 金順大
虎溪之水出自盆山飛鳴㶁㶁流入北郭經婆娑塔縱一城通南郭朝宗于海其淺僅流束蒲而盛旱不渴盖有源之活水也
호계의 물줄기는 분산(盆山)에서부터 나와 떨어지며 소리를 내고, 북쪽 성곽으로 유입되어 파사탑을 거쳐서 성(城)을 지나 남쪽 성곽을 통하여 바다로 흘러 나간다. 그 물은 얕고 작은 양 밖에 흐르지 않으나 창포잎으로 뒤 덮여서 한창 가물 때에도 마르지 않는 수원지가 있는 살아있는 물이었다.
在城中左右堰石以障其溪流共其中而上構高樓曰燕子然樓高而溪潺不相稱也
성안의 좌우에는 방죽돌이 있어서 그 시냇물의 흐름이 <퍼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고, 그 위쪽에 지어놓은 높은 누각은 연자(燕子)라 하고 이 누각은 높으나 물 흐르는 소리 때문에 서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다.
又其下五十步許構一樓曰淸心樓稍低而溪稍渟水聲可及於客枕與水頗宜然未盡其勝
또 그 아래 오십보 쯤에 지어놓은 또 하나의 누각이 있으니 이름하여 청심루라 하고, 점점 그 안으로 시냇물이 흘러들어 고여서 물소리가 손님들의 베게머리까지 들리니, 그 물은 자못 그럴 듯 하였으나 훌륭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予常爲造物恨弘治癸丑春予奉綸音頒諭到府時府使丹陽禹公某館予於新堂堂在燕子淸心之間扁曰臨錦吾友月城李侯宗準所名而書者也
나는 항상 인공으로 만든 것이 한탄스러워, 홍치 계축(1493년) 봄에 나는 현악기 소리를 좋아하여 이를 알리고 가르치기 위하여 <김해>부에 왔다. 이때 부사는 단양 우씨인 우 무슨 관이었다. 나는 연자와 청심의 사이에 있는 신당에 있었고, 그 편액에는 임금이라 씌어 있었는데 이는 나의 친구인 월성 이씨인 이종준(?~1499,경주이씨)이 이름을 붙여 쓴 것이다.
予不鮮<=>解>所名之義宋隆德故宮有臨錦堂元儒有臨錦堂前春水波之句豈非以其波紋如錦堂臨其上而名耶
나는 그 이름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송나라가 융성하고 덕이 많았던 것은 임금당이라는 궁이 있었기 때문이고, 원나라에 유학이 성했던 것도 임금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봄에 물결이 구부러져 흘렀던 것[1]이 어찌 그 파문이 금당의 앞에 임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이름과 같지 않겠는가.
[1] 1494년 12월 성종의 승하와 연산군의 등극을 의미하는 가?
觀其中流架屋不樓而爽東西有廂溫凉異適曲曲欄干枚枚窓戶玲瓏完轉檻下溪流可附而手掬溪與堂明媚相照
그 안을 들어다 보니 지붕이 높게 걸쳐져 있고, 누각은 아니나 시원하며 동서로 길게 행랑이 있고 따스함과 서늘함이 이상하게도 적합하였다. 굽이 굽이진 난간에는 하나하나 창문이 있어 맑고 아름다운 것이 창문마다 완전히 달라져 보인다. 난간 밑의 계곡물은 한 웅큼 움켜질 수 있을 정도로 닿을 듯 하다. 계곡은 당(임금당)과 더불어 아름다워(明媚) 서로를 비추고 있다.
又羅天鵝海鷗數雙而游其波其鳴雝雝聲應棟宇驅而出之始覺其在吾坐下最奇事也
또 펼쳐진 하늘에는 거위와 바다갈매기 여러 쌍이 헤엄쳐 놀며 그 물결과 울음소리와 할미새들의 소리가 집의 추녀 끝에 와 닿아, 밖에 나와 처음 느껴보는 이 내가 앉은 자리가 가장 기이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取琴而彈之空聲相應淸和踈越大絃洞洞然益壯小絃鏗鏗然益楚又堂中第一奇也
가야금을 들고 튕기니 공중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서로 맑게 화답한다. 소리를 낮추니(踈越) 큰 줄의 소리는 동동 소리가 나며 점점 강해지고, 작은 줄의 소리는 갱갱하며 점점 선명하게 들리니 이 또한 임어당에서 가장 기이한 것이다.
酒半禹公囑予記予執觴而落之仍報公曰天壤間凡物必有與物相稱不得稱則不得造物之情矣
如草堂茅廬宜於處士而廣廈金屋宜於王孫易此則不稱也
술이 반 쯤 되어 우공이 나에게 독촉하여 글을 지어 달라하니 나는 집었던 술잔을 내려놓고 거듭하여 공(우공)에게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사물은 반드시 서로 부르는 이름이 주어져 있을 것인 데 이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마지못해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사물에 대한 본성 때문이다. 풀로 만든 집이나 띠로 엮은 초가집 같은 곳에도 의당 선비가 살고 있고, 넓은 대궐같은 집과 금으로 치장한 집에는 왕손이 살고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뀌면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漢有腠?王高閣巴有岳陽危樓然後壓洞庭彭蠡之浩渺工部之堂宜於浣花柳州之家宜於愚溪隨其人與其地莫不各有所稱金海古府也
한나라에 있었던 주왕은 높이 지은 집에서 살았지만 파(巴)땅의 악양에 매우 높은 집을 지은 후에는 무너지고 텅텅비어 정원은 메워지고 벌레들이 들끓는 황량한 곳이 되고 말았다. 공부(현재의 건설부)의 집은 당연히 완화(꽃들이 피는 깨끗한 곳?)에 있고 유주(?)의 집은 마땅히 우계(더러운 시냇가?)에 있으니 사람에 따라서 그 땅도 바뀐다. 이러니 이를 어찌 김해의 옛 관청이 있던 곳이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府中多少樓臺館舍沿虎溪而列者不一得禹公搆<構?>臨錦之堂而始稱噫擧而措之物物皆可稱也然欲其稱非知造物情者不可也
김해부 안에는 다소의 누대와 관사가 호계천을 따라 세워져 있었으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 우공은 임금당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 뒤섞인 사물들을 모두 이름 붙일 수는 있으나, 이름 붙여 부르고 싶다고 해서 이를 만들어진 사물의 본 뜻은 알 수가 없고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以此堂規制審禹公胸中有許多間架屋室其所以使心匠而運郢斤者其可知之矣未知公能有得於造物之情者乎
이 임금당을 만들어진 것을 살펴보는 우공의 마음속에는 많은 집과 건물에 대한 생각이 있었을 것이니 이는 그가 장인정신의 생각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만든 사람은 그 뜻을 알 것이나, 이를 알지 못하는 우공도 능히 만든 것의 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吾觀公偃然熊豹之姿早穿楊葉其有幹局有豪傑長城之望屈而爲此府亦天也 高牙大纛乃公之能事而簿書米鹽公亦无不能也 豈非隨事能稱者乎 然則公於造物之情不可謂不知也
내가 우공을 살펴보니 거드름을 피우며 거만하나(偃然), 곰과 표범과 같은 자세로 재빨리 버드나무 잎에 구멍을 뚫을 정도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幹局)이 있고, 호걸스럽게 큰 성채를 지을 희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굽히고 이 김해부의 부사로 온 것도 하늘이 도운 것이다. 높은 관아나 큰 둑을 공은 충분히 지을 수 있고 장부에 기재하는 일이나 쌀과 소금 등 세금을 받는 일도 우공이 못할 일이 없다. 이 어찌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이 따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공이 만들어진 사물의 본 뜻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公其更勵素節毋怠公之宅在漢都王城迎秋門外昭敬殿右斯文趙伯符尙僦居而停焉
공에게 이를 다시 독려하여 가을(素節)에 태만하지 말고, 공의 집이 한도(서울)의 왕성에 있으니 가을을 맞아 대궐 문 밖의 소경전[1]의 오른쪽에 대 유학자(斯文)이신 조백의 부적(?)을 숭상하여 모시고 있도록 하라고 했다.
[1]昭敬殿; 성종5년(1474)에 승하한 성종 비인 공혜(恭惠)왕후 혼전(魂殿)
予於前年訪趙而造其泉石甚勝而茅舍甚隘蕭然若處士之家心知公於泉石癖而産業疏也 今日來觀又知公泉石雖癖而所在如一治茅有制於公私也
내가 작년에 조선생을 찾아 갔을 때, 냇가의 돌을 주워 깔아서 아주 우아하게 해 놓았으나 띠 풀로 만든 집은 아주 좁아 쓸쓸하기까지 하였다. 처사의 집을 보니 마음으로 공을 알 수 있었고 냇가의 돌을 주워 쓰는 것은 공의 버릇이며 산업(돈벌이?)과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오늘 와서 보니 또 공을 알게 되었고 냇가의 돌을 주워다 쓰는 것이 비록 습관이긴 하나 그가 사는 곳이 하나 같이 띠 풀로 만든 것은 공의 개인적인 일이다.
公之堂旣與虎溪稱而予筆力拙奈不足稱乎堂何然金海吾鄕也 吾先大夫與先尊府通家之好雖不稱不敢辭
공은 이미 당을 호계라 부르고 있으나 나는 글 솜씨가 부족하여 그냥 당이라 하였다. 어쨌든 간에 김해는 나의 본향이다. 나의 선조이신 대부께서는 이전의 부사와 서로 집을 왕래하고 우호가 깊었으나 언급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