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차를 마시기 위한 다도구의 하나인 차사발을 이야기를 하려면, 부득불 일본인들의 시각과 분류에 기초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안압지에서출토된 貞言茶명문토기로 보아 이미 신라시대때도 토기로 만든 다완을 사용했으며, 서긍의 고려도경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때도 청자다완이나 흑유잔 등에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조에는 차의 맥이 끊기다시피했으니 별로 말할것도 없지만, 한국차문화에서 차사발에 대해 그렇게 중요시 하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중국 또한 말차를 월주요의 청자나 길주요, 건주요의 천목다완에 즐겨 마시기는 하였지만, 차에 비해 차사발에는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 일본인들은 차사발을 엄청나게 중요시하여, 일부 차인들이 '사람이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차가 사람을 마시는 형국'이라고 욕할 정도로, 1500년대부터 자신들도 직접 만들고, 중국과 조선에서 차사발들을 수집, 분류하고 이름붙이기를 해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차사발을 설명하려고해도 우리 차사발의 대다수가 일본에 있고, 일본인들이 이름을 붙여놓고 분류하여, 일본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차사발을 설명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차인들도 차사발 이름을 일본식 발음대로 부르시는 분들이 많은데, 우리말이 있는것은 우리말 발음으로 하는게 바람직하고요, 두두옥(도도야), 교맥(소바), 어소환(고쇼마루) 등 우리 발음이 별 의미가 없는 명칭들은 일본 발음을 기준으로 하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이 다완을 원산지에 따라 분류할때, 중국 다완은 당물唐物, 우리나라 다완은 고려다완高麗物, 일본다완은 화물和物이라고 분류하는게 대부분입니다. 실제 우리나라 다완중에 고려시대 것은 청자사발이나 청자통형 다완 등 몇 안되고 거의 대부분이 15~6세기 조선시대의 것인데, 통상적으로 고려다완이라고 부릅니다.
차사발을 설명하기에 앞서 일본의 차문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일본의 차문화는 서기8-900여년경 처음 소개되었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1200년경에 송나라를 통해 다시 소개되어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는데, 1500년대 후반, 일본이 통일된 이후 서민들과 무사들의 마음을 부드럽게하기 위해 토요토미(1536~1598)가 정략적으로 센노리큐千利休(1522~1591) 등을 이용하여 다도를 장려하므로서 상류층에 급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다도계는 말로는 검약을 이야기하였지만 중국산 백자나 청자, 천목다완 등등 점점 화려함을 좇아가다가 급기야 토요토미가 온통 황금으로 꾸며진 다실(지금도 MOA미술관이라는 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에서 황금다완(황금천목다완이라는데, 황금색나는 천목다완인지 천목다완에 황금을 입힌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으로 차를 마시는 지경에 이르자, 이에 반발한 센노리큐가 초지우로(조선도공의 아들이라함. 주의:1592~1598년인 임진왜란전이므로 임란때 데려간 조선도공은 아님)에게 부탁하여 와비,사비의 자연스럽고 검약한 다도에 적합한 라쿠다완樂茶碗을 만들게 됩니다.
또한 그전에도 쓰이기는 했지만 자주 쓰이지는 않던 우리나라의 사발들을 쓰자 일본 다인들에게 조선의 다완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다회기茶會記'에서 고려다완의 명칭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1537년이고, 이도다완의 기록은 1578년 처음 보이는데, 텐쇼(天正)년간(1573~92)에는 그 수요가 급증하여 조선으로부터 많은 수의 다기를 가져갔습니다.
일본통일을 이룩한 토요토미의 해외 영토에 대한 야욕과 통일과정에서 오랜 내전으로 인한 무사, 영주 등의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 신흥 상업세력의 요구 등의 이유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1592~1598)을 일으킨 토요토미는 조선을 유린하면서 우리 민족을 죽이고 전국토를 황폐화시키고, 사회 질서를 붕괴시키고, 유물을 파괴하고 훔쳐가는 것은 물론, 우리나라 도공 등을 비롯, 기술자들을 잡아가 일본이나 서양에 노예로 팔거나 기술을 빼내가는 등 우리의 생명과 기술, 생활 문화 전반을 통해 엄청나게 큰 고통을 주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물론, 우리 차인들도, 임진왜란의 성격을 일본인들이 조선의 도자기를 흠모하여 일으킨 '도자기 전쟁'이라고 주장하는데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들이 끼친 피해 규모를 생각할때, 조선 도자기를 흠모하여 조선으로 들어와 다완을 구해가고, 자신들도 만들기위해 도공을 잡아갔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에 동조하기에는 우리가 입은 피해가 너무 크고 광범위한, 일본인들이 자신의 과오를 미화하기 위한 주장일 뿐입니다.
아무튼,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상으로 땅과 다완중에 택일하게하자 대부분 다완을 선택하여 땅이 남아돌았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등 그 이후 차도구의 하나인 다완, 특히 조선의 다완에대한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으로 데려간 조선 도공들이 흙도 다르고 물도 다르고 유약재료인 나무도 다른 일본땅에서 당장 조선에서 만들던 것과 같은 도자기를 만들지 못하는 사이, 일본 다인들의 고려다완에 대한 욕구는 대단하였습니다.
임진,정유란이후 단절되었던 국교가 1607년 재개되고 1618년 부산에 왜관이 만들어지자, 도쿠가와막부에서 대마도주를 통해 동래부사에게 차사발을 주문하게 됩니다. 동래부사가 예조의 허가를 얻고 김해도호부에 부탁하여 관요인 김해요에서 구워 일본에 보낸 차사발이 고쇼마루쟈완으로 일본인들의 반응이 대단하여 일본에서 원하는 다완 모양을 종이로 절형(切型기리가따)을 만들어보내며 계속 만들어 줄것을 주문하자, 정부의 허가를 얻고 자신의 관할이 아닌 김해도호부 산하의 김해요에서 만들고 하는게 골치가 아팠던지, 동래부사가 자신의 관할인 지금의 경남 양산군 동면 법기리 창기마을에 창기요를 만들어 이라보, 귀얄분청,오기다완 등을 구워 일본에 보냈습니다.
일본인들의 다완 주문이 점점 많아지자, 일본인들이 직접 다완을 만들고자 1639년부터 왜관내에 가마를 만들어 조선과 일본의 도공을 데려다가, 하동과 진주의 흙으로 다완들을 구워 실어간 것이 고혼쟈완입니다. 조선도공과 일본도공의 갈등 등으로 1717년 가마가 폐쇄될때까지 꽤 많은 다완을 구워갔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한국다완高麗茶碗고라이차완)
1. 정호다완井戶茶碗(이도쟈완) :
대정호大井戶(오오이도), 고古이도(코이도,혹은 소小이도), 청靑이도(아오이도), 평平이도
2. 분청紛靑다완(三島茶碗미시마쟈완) : 덤벙(분인粉引:고비끼), 반덤벙(무지쇄모목無地刷毛目:무지하게메), 귀얄(쇄모목刷毛目:하게메), 귀얄분청철화(회분청繪粉靑에미시마), 상감(빗살무늬彫三島), 인화문(花三島)
3. 견수堅手다완(땡땡이다완)
4. 소바(교맥蕎麥)다완
5. 웅천熊川다완 : 웅천다완, 옥자수玉子手다완
6. 도도야(두두옥斗斗屋)다완,
7. 오기(吳器고끼)다완,
8. 이라보伊羅保다완 : 황黃이라보(기이라보), 정조釘彫이라보(구기보리이라보), 편신체片身替이라보(가타미가와리이라보)
9. 고쇼마루(어소환御所丸)다완 : 백무지白無地(시로무지), 흑쇄모목黑刷毛目(구로하게메), 김해金海(긴까이)
10. 고혼(어본御本)다완 : 조삼도彫三道(호리미시마), 운학雲鶴(운가구)
1. 정호井戶다완(이도쟈완) 이도다완은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당당하고 기품이 있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일본 다완을 통털어 최고의 다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도다완중에는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기자에몬이도를 비롯 중요문화제 3개, 중요미술품 19개가 있는 등 일본인들이 극찬하는 다완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기자에몬이도를 보고 쓴 글은 유명하고(다도와 일본의 미,김순희 번역,소화,1998년), 우리나라 다인들도 우리 차사발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만,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에 대한 이해부족과 한국인을 무시한다는 면에서 다시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이도다완은 대마디(죽절) 모양의 높은 굽, 부드럽게 펼쳐진 물레자국과 칼질자국, 안쪽 차고임, 두꺼운 비파색 유약에 굽쪽에 매화껍질모양의 유약뭉침 등이 특징입니다. 소이도다완은 대이도다완에 비해 크기가 조금 작은게 많고 구연부가 좁고 속이 깊으며 굽도 조금 낮지만 대이도와 동일한 태토와 유약이며, 둘을 나누는 기준은 물리적인 크기 보다는 대이도다완에 비해 크고 당당한 느낌이 덜하다는 느낌의 차이인것 같습니다. 청이도다완은 유약색에 약간 검푸른끼가 도는 차이가 있으며 소이도다완과 비슷하나 속이 얕고 구연부가 넓습니다. 평이도다완은 접시처럼 넓어 차가 빨리 식어 여름다완용으로 적합합니다. '이도'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 많은 설이 있으나 명확한 것은 없으며, 이도다완이 만들어진 곳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하고, 조선조 초기에 전국 곳곳에서 이도다완과 비슷한류의 도자기들이 만들어진듯하나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차사발 이도는, 대이도와 소이도는 경남 진해시 웅동면 두동리에서, 청이도는 하동군 진교면 백연리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거의 유력합니다.
2. 분청다완 분청다완을 일본인들은 삼도三島다완이라고 하는데, 박정상선생은 전남 무안이나 고흥에서 만들어진 분청그릇을 배로 실어가다가 지금의 거문도인 삼도에 마지막 정박을 한후 정동쪽에 있던 하카다항으로 갔던 것에서 삼도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시던데, 조선에서 일본과의 교역을 삼포에만 엄격히 국한하다가 삼포왜란이후 제포(경남 진해)만 열었는데, 제포에서 일본갈때 굳이 거문도로 나가서 갈 이유가 없으므로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분청사기는 14세기중엽 쇠퇴하는 고려 상감청자로부터 시작되어 15세기전반에 다양한 기법들이 개발되어 전성기를 이루다가 15세기 이후 점차 쇠퇴하며 조선백자에 흡수되다가 16세기 중엽 임진왜란때 소멸하였습니다. 비록 200여년의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만들어진 도자기지만, 한반도 중남부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빚어졌으며, 그 형태와 유약이 지역마다 뚜렷한 차이가 있고, 편안하고 소박한 것이 많아 우리 심성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도자기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분청사발들을 일본인들이 차사발로 이용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의 주문에 의해 창기,부산 등에서 다시 만들어 지기도 하였습니다.
분청의 기법으로는 선이나 면을 판후 백토나 자토를 넣는 상감기법, 도장을 찍은후 백토를 넣는 인화기법, 백토를 칠한후 그림 외의 부분을 긁어내는 박지기법, 백토 분장후 선을 조각하는 음각기법, 백토분장후 철화를 그리는 철화기법, 붓으로 백토를 그리는 귀얄기법, 백토물에 그릇을 담그거나 바가지로 백토를 끼엊어 전체를 분장하는 덤벙기법 등의 7가지 기법이 있으며, 문양은모란당초,연꽃,물고기나 추상적인 문양을 많이 그렸습니다.
분청다완중에 귀얄문다완은 경남 김해것이 제일 좋고, 전남 무안, 함평에서도 만들어 졌으며, 훗날 일본인들의 주문으로도 만들었습니다. 반덤벙다완은 전남 무안과 함평에서 많이 만들어져 '무안덤벙'이라고도 불립니다. 덤벙다완은 전남 보성 근처에서 생산된것으로 보고 '보성덤벙다완'이라고 불렀으나 실제로는 전남 고흥 운대리에서 생산되었습니다. 분청철화는 백토를 귀얄로 바르거나 덤벙분장을 한후에 철화 그림을 그린것으로 충남 계룡산에서는 귀얄분청에 철화를, 전남 고흥 운대리에서 덤벙에 철화를 주로 그렸는데, 계룡산에서 귀얄분청에 철화를 그린 다완을 계룡산다완이라 부르며, 특히 물고기 그림이 유명합니다.
3. 견수堅手다완(땡땡이다완) 고온에서 구워 단단한 다완으로, 조선조에서 백자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나온 다완입니다. 경남 김해것이 유명한데, 임란이후 일본인들의 주문으로 김해요에서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4. 소바(교맥蕎麥)다완 경남 내륙지방에서 이도다완보다 일찌기 만들어진것으로 보이며, 그릇 표면이 메밀껍질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것으로, 외형상으로는 덤벙 평다완과 유사합니다.
5. 웅천熊川다완(고모가이쟈완) 조선초 일본과 교역하던 삼포중 하나인 제포 바로 옆의 경남 진해시 웅천 지역에서 수출된 다완으로, 가마는 웅천가마터가 아닌 김해,창원 등지의 다른 곳에서 구운 것을 웅천,제포에서 수출한 것으로 보이는데, 형태는 제사때 탕국을 담는 그릇과 흡사하여 제기용으로 만들었을것으로 추측합니다.
6. 도도야쟈완(斗斗屋茶碗) 大阪의 생선가게 주인이 수입해간 다완으로 맑은 다갈색 몸체에 푸르스름한 유약이 조화를 잘 이루어 깊은 맛이 있다고 일본인들이 좋아한수수한 다완입니다.
7. 오기吳器다완(고끼자완) 나무로 만든 제사용 그릇과 흡사하여 조선초기 제사용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굽이 아주 높고 밖으로 벌어진 형태가 특징입니다. 임진왜란전에 조선통신사가 가져갔다가 숙소로 있었던 대덕사에 기증하고 온 오기다완부터 울긋불긋 단풍든것 같아 단풍다완이라 불리는 것, 임란이후 주문제작한 다완 등이 있습니다.
8. 이라보다완 이라보는 노랑이나 연다갈색의 모래가 섞인 소지로 구운것으로, 유약이 고르게 퍼지지 못하여 얼룩얼룩하다는 뜻의 일본말 '이라이라'라는말에서 나왔다고합니다. 기이라보,구기보리이라보는 일본의 주문으로 창기요에서 만들어졌으며, 구기보리이라보,천종이라보,편신체이라보 등은 부산요에서 일본인들이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모래를 안골라내고 만들어 표면이 거칠고, 물레에서 돌려 빚을때나 칼로 굽을 깎을때 모래가 걸려 표면에 줄이 가있고, 굽는 과정에서 모래가 터진 부분도 있는 것이 특징이며, 굽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깎은 구기보리이라보, 한 다완에 절반씩 다른 종류의 유약을 바른 편신체이라보, 일부러 흙을 모자라게 빚은후 다시 흙을 보테어 마져 빚은 것 등등 일본인들의 주문에 따라 만든 흔적이 역력한 다완입니다.
여담입니다만 현대의 도공들이 다른 다완들은 태토나 유약을 연구하여 재현하기도하는데, 이라보의 경우에는 요즘 도자기용 흙을 대부분 상품화된 정제된 것을 사서 쓰다보니 모래가 섞여있지않아 이라보의 느낌이 나는 다완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물레로 빚은후 표면을 못으로 긁기도하고, 내화석?이라는 돌가루를 섞어 만들기도 합니다만, 거친 느낌은 있지만 소성중에 터지는 효과는 못내는 한계가 있는 등 제대로 재현한 것 보기도 힘들고, 우리 미적 감각에 부합하는지도 의문인 다완입니다만, 일본인들은 제일 소박한 다완이라고 좋아한다네요.
9. 고쇼마루쟈완(어소환御所丸다완)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 일본간 교역에 이용되던 배 이름인 어소환御所丸에서 유래된 것으로, 토요토미로부터 권력을 잡은 토쿠가와德川家가 1639년 德川家에서만 쓸 다완의 형태를 종이로 만들어 보내어 島津義弘이 김해요에서 그 모양대로 만들어 어소환배로 실어가 豊臣秀吉에게 진상한 다완으로, 백무지白無地(시로무지)와 흑쇄모목黑刷毛目다완(구로하게메), 김해金海다완(긴까이챠완), 할고태割高台(와리고다이) 등이 있는데, 일본 라쿠다완과 유사한 형태에 아래쪽에 각이진 다완과 고양이가 할퀸것 같은 모양에 굽을 자른 김해다완이 유명합니다.
10. 고혼쟈완(어본御本다완) 역시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가져간 다완인데, 고쇼마루는 일본인들이 동래부사에게 부탁하여, 동래부사가 김해요나 창기요에서 만들어 보낸 것인 반면, 고혼쟈완은 일본인들이 부산 왜관내에 가마를 만들어 조선과 일본의 도공들을 시켜 1639년부터 1717년까지 직접 만들어간 다완들로서, 분청 조삼도다완, 어본입학다완 등이 유명합니다. 특히 어본입학(御本立鶴고혼다지쯔루)은 德川家光이 細川三齊를 축하하기 위해 그린 입학을 밑그림으로 만든 어본다완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산 다완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을 가져간 것은 청자다완,분청다완,이도다완,웅천다완 등이고, 나머지 소바다완, 도도야다완, 이라보다완, 고쇼마루다완, 고혼다완 등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주문 제작하여 가져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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