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시장 사람들
안문자
온 동네가 잠이 든 것 같다. 우리 동네도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모를 정도로 고즈넉하다. 대낮인데도 안이나 바깥이 너무 고요해서 자꾸만 눈까풀이 내려앉는다. 바람 소리가 들린다. 순간, 주위가 어둑해지며 투두둑, 빗줄기가 창문에 줄을 긋는가 하더니 쏴~하고 소나기로 변한다.
나는 눈을 비비며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나기 소리가 생동감 넘치던 남대문 시장의 함성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창 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뜨자, 축제 같았던 그곳,남대문시장의 활기가 되살아난다. 시장의 활기는 소나기 소리를 덮고 더 가까이에서 들린다.사람 냄새로 가득했던 정겨움이 와락 다가온다.
서울을 방문했을 때다. 혼자 시장구경에 나섰다. 묵고 있던 곳이 명동 쪽이라 슬슬 걸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아픔이 있다고 해도, 드러난 고통이 세상을 흔들어도 내겐 모처럼 찾은 고국의 감격과 발자국이 남아있는 서울거리는 설레고 신이 난다. 방향감각이 둔해 지하도에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던 버릇은 여전했다.
번쩍이는 상점들이 진을 치고 있어서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다. 드디어 미로를 헤치고 올라서니 병풍을 친 듯, 멋있는 빌딩들이 우뚝 우뚝 서있다. 옛날엔 없었는데….두리번거린다. 아, 저기! 남대문 시장 입구가 보인다. 고향사람을 만난 듯 반가웠다.
시장은 옛날과 다름없었다. 숱한 세월을 보내고 왔는데도 낯설지 않다. 여기, 입구에 색색의 꽃들이 가득 했었는데. 까맣게 탄 얼굴로 몇 개의 양동이를 앞에 차려놓고 꽃을 팔던 아낙들이 있었잖아. 제철 만난 꽃들이 내노라 술렁댔는데 다 어디로 갔을까? 오라, 꽃 도매시장이 생겼으니 양동이의 꽃들은 필요 없겠구나. 시장의 계절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꽃 더미에서 한 아름의 꽃을 사곤 했었지.
상인들은 흥에 겨웠다. 살맛 나는 세상이라며 모두 웃는 것 같다. 옷 장수 아저씨가 산더미로 쌓인 옷들을 들추며 “싸구려~싸구려! 거저요, 거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잔치분위기의 먹자골목도 여전했다. 기름 냄새 풍기며 지지고, 볶는다. 국수 말이, 장국밥, 빈대떡… 침이 꼴깍댔지만 차마 앉아서 먹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재미가 이만저만 이래야지. 남대문 시장엔 북한에서 온 삼팔따라지들이 많다고 해서 ‘아바이 시장’ 이라고도 했었는데. 미제물건이 판치던, 가짜가 태반이라던 도깨비시장은 지금도 있으려나? 미국에 살아도 먹지 않는 소시지와 스팸, 말랑말랑한 버터를 사곤 했다. 그렇지, 맥스웰 커피도, 귀여운 유리병의 우리 아기 이유식도 숱하게 옮겨왔었다.
60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는 남대문 시장은 2만2,000평이란다. 매일같이 40만 명이 드나든다는, 볼거리 많고 먹거리가 풍성한 재래시장으로 손꼽히는 관광지의 하나라는데 숫자개념이 없는 나는 그 규모가 얼마인지 가늠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삶의 고달픔이 온 몸에 배어 찌들고 있었건만 싱글벙글 이었다. 동그랗게 둘러 앉아 배달된 국수를 후루룩,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도 돌렸다. 꾸밈없는 인정이 오가는 순박한 모습. 오랜만에 본 풍경에 공연히 가슴이 찡~했었지. 별로 신날 것도 없어 보이건만 즐거운 양 열심히 사는 모습들이 대견하다고 할지, 존경스럽다고 할지.
인간의 행복이 이웃들과의 살가움에서 오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했던 남대문시장 사람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도 정겨워 보였던 풍경들은 행복한 삶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했다.
아, 인생의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준 그 삶의 현장은 눈물겹게 반가운 내 나라의 공개된 따뜻함이었다. 국회에서는 핏대를 올리며 싸움을 하거나, 부자들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려고 서로 헐뜯는, 그런 소란스런 작태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저들의 훈훈하고 소박한 한마당은 활기차게 살아있었다.
짙어가는 황혼에 무미건조하게 주춤거리던 나는 즐거운 남대문시장 나들이에서 내가 사랑해야 할 삶의 의미를 가득 부여안았다. 옛날의 버릇대로 깎아주세요, 너무 비싸요, 두 개 사면 싸게 해 주나요? 헤헤, 남는 게 없는데…엇다! 그럽시다. 덤까지 얹어준다. 후덕한 미소를 나누던 그들과의 흥정도 즐거웠다.
정겨운 싸구려들 속에서 세 가지 거짓말 중 하나가 웃었다. 생활력 강한 시장사람들의 모습에도 편안하고 자유로운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 잔잔한 행복이란 쉽고도, 단순함이라는 것도 터득했다. 제법 두툼해진 잡동사니에 봉지마다 따뜻한 나눔이 사랑이라는 느낌도 함께 넣었다.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 즐거운 남대문 시장이여, 소박한 사람들의 따뜻함이여 영원 하라!
소나기 멎은 하늘이 청명하게 열렸다. 진주 알 굴리던 나뭇잎들 사이로 가을은 깊고도 조용히 잠기고 붉게 물든 잎들은 살랑대며 은밀한 노래를 부른다.
아, 남대문 시장의 함성이 사라진 내 주위에서도 삶의 기쁨이 샘솟는 이유들이 차고 넘친다. 감사로 충만해진 마음으로 파란 하늘을 바라본다.
‘앗, 무지개, 무지개가 떴다~.’ 빨주노초파남보가 빙그레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