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찬 감동을 안겨준 당신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월드컵이 열린 지난 6월 한 달 동안 우리는 태극전사들과 함께 숨쉬며, 같이 웃고 울며 지냈다. 16강 진출이라는 애초의 목표를 훌쩍 넘어 세계 4위라는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국민 모두 붉은 악마가 되어 태극 전사들과 한마음으로 뛰었다.
여기 월드컵 4강 감동의 주역들의 지난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보았다. 23명의 태극 전사들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지면의 한계를 원망하면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날의 가슴 벅찬 감동이 한 때의 추억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으로 세계 중심에 우뚝 선 한국 축구를 지탱해야 할 것이다.
Writer / Chung Sun Kyung, Park Gi Hui
Photographer / Choi Eun Hee, Cho won jin
★ Guus Hiddink ★
국적 : 네덜란드 / 생년월일 : 1946년 11월 08일 / 대표팀 경력 : ’98 프랑스 월드컵 4위(네덜란드), 2002 한일 월드컵 4위(대한민국) / 프로팀 경력 : 네덜란드 리그 3회 우승(PSV 아인트호벤), 88년에는 정규리그 - FA컵 - 유럽 챔피언스 리그 우승 / 현역 생활 : 60년말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 1부 리그 리옹과 생에티엔에서 MF로 활동. 이어 아인트호벤, 넥 니메겐 등에서 뛰면서 네덜란드 대표선수로 활동.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 클럽 더흐라프샤프에서 시작해 아인트호벤에서 1년, 미국에서 2년 그리고 다시 더흐라프샤프에 돌아와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자신이 선수 시절 거쳤던 팀을 감독으로서 다시 거쳤다. 히딩크 감독은 1985년부터 1990년까지 PSV에 세 번의 우승을 안겨주었고 1988년 아인트호벤은 사상 처음으로 유러피언컵을 거머쥐게 됐다. 히딩크 감독은 매력적이고 개방적인 축구 스타일에 심취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를 떠나 감독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은 터키의 페네르바체 클럽이고 다음으로 1991년부터 1993년까지 2년 동안 스페인의 발렌시아에 몸을 담는다. 히딩크 감독이 메살라 경기장에 걸려있는 인종 차별적인 배너를 없애게 하자 스페인 내 추종 세력이 점점 커져, 스페인 국민들의 존경심을 한 몸에 받으며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스페인에서 감독 생활을 한 후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았는데, ‘98 프랑스 월드컵 대회서 아쉽게도 페널티 킥으로 브라질에게 패함으로써 네덜란드의 결승전 진출은 좌절됐다. 그리고 우연인지 모르지만 당시 네덜란드는 한국에 5-0 완승을 거두었다. 그 후 히딩크 감독은 스페인으로 돌아가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을 맡았고 이어서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로 이적했다가 결국 다른 세계로 활동 무대를 옮기기로 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01년 1월, 한국 축구대표팀을 맡기로 했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력적인 축구 스타일과 스타급 플레이어들하고만 상대할 것 같은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 감독이 유럽을 떠나 아시아에서 전술의식 훈련과 ‘킬러’ 본능 기르기와 같은 축구의 기본을 가르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드컵 개최국을 본선에서 이끌어 나가야 하는 임무가 부담으로 작용하기는커녕 그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이력을 갖고 있는 히딩크 감독이기에 한국에서의 기대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하지만 ‘히딩크 호’ 출범 후 일년 동안은 골드컵에서 미국 대표팀에 2-1로 패하는 등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히딩크 감독에 대한 언론의 비난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으나 그가 감독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대회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히딩크 감독은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워밍업 차원으로 치른 평가전에서 한국은 유럽 강호들을 맞아 선전을 펼쳤는데, 특히 핀란드를 2-1로 이겼고 튀니지와의 경기에서는 무승부를 거두었다. 히딩크 감독은 전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일자 백라인 수비방법을 개발했고 강도 높은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선수들의 기초 체력을 향상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그간 경험으로 얻은 다른 나라 선수들에 대한 지식을 이용해 외국 선수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히딩크는 이번 2002 월드컵에서 개최국인 한국이 체면은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월드컵 첫 승과 16강 진출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으나 결과는 우리가 기대한 것 그 이상. 세계 4위, 아시아 국가로써는 처음으로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지난 7일 고국으로 돌아간 히딩크 감독은 고향인 네덜란드 아인트호벤과 계약을 마친 상태이다. 아인트호벤과 2004년까지 계약을 한 것으로 미루어 많은 이들이 향후 2006 독일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이 다시 한국 국가대표팀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예견하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Good-bye’ 대신 ‘So long’ 이라는 여운을 남겼듯이…
★Hwang Sun Hong★
생년월일 : 1968년 7월 14일 / 출생지 : 충남 예산 / 신장 : 183cm / 체중 : 79kg / 포지션 : FW / 출신학교 및 클럽 : 숭곡초-용문중-용문고-건국대-레버쿠젠(아마추어 팀)-부퍼탈-포항 스틸러스-세레소 오사카-수원 삼성-가시와 레이솔 / 현 소속팀 : Kashiwa Reysol (JPN) / 국제 경기 데뷔 : 일본 (1988년 12월 06일)
이번 2002 월드컵 무대를 마지막으로 대표팀 유니폼을 벗은 황선홍은 한국에서 가장 경험 많은 선수 중 하나이다. 그는 지난 10년 간 상대팀에게 가장 위협적인 선수로서 대표팀과 그가 몸담았던 소속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처음 태극 마크를 단 1988년부터 14년간 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활약해 온 황선홍은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 속에 골 결정력 부족의 십자가를 홀로 지다시피 하는 운명이었다. 이번 월드컵 이전 기록으로 A매치 95회 출장에 49골이라는 수치에서 보듯 2경기 당 1골씩 넣는 세계 정상급 페이스를 유지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 대표팀을 위해 한 것이 없다며 더 나은 활약을 보여줄 것을 바라는 축구광들의 질타로 많은 고생도 했지만 또한 그는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축구 선수 중 하나이기도 하다.
황선홍은 2002 한일 월드컵까지 네 번의 FIFA 월드컵에 출전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94년 미국 월드컵에 잇달아 출전하며 정상의 길을 걸었지만 98년 프랑스 월드컵 직전에 치른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주전으로 선발되고도 벤치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 때 황선홍의 나이 서른, 축구선수로서는 전성기를 막 넘어 하향기로 접어들 때 그는 당시 소속팀이던 포항에서 일본 프로축구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하면서 선수생활의 전기를 맞았다. 당시 꿈이었던 유럽진출이 월드컵 출전 좌절과 함께 수포로 돌아간 뒤 차선책으로 택한 일본 생활이었지만 거기서 황선홍은 골 감각을 비롯한 선천적 재능에 경기를 읽는 능력과 넓은 시야 등을 갖추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지난 99년 J리그 득점왕에 올랐던 황선홍은 일본에서의 꾸준한 활약을 발판으로 34세의 나이와 설기현, 안정환, 최용수 등 쟁쟁한 후배들의 성장 속에서도 대표팀에서 가장 확실한 스트라이커로 평가받으며 월드컵 주전 자리를 예약했고, '히딩크 사단' 에 합류한 작년 6월에는 컨피더레이션스컵에서 2골을 넣어 한국을 2승으로 이끌며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임을 다시 한번 과시하며 많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황선홍은 월드컵 본선 첫 경기인 對 폴란드 전에서 첫 골을 넣으며 한국의 월드컵 첫 승리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또한 對 미국전에서는 눈가가 찢어지는 부상을 겪으면서도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는 투혼을 보여 온 국민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다.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주며 올해의 아시아 선수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황선홍은 아시아 최고 선수 중 하나이며, 이번 월드컵에서 이름을 날린 한국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다.
★ Ahn Jung hwan ★
생년월일 : 1976년 1월 27일 / 출생지 : 경기도 파주 / 신장 : 177cm / 체중 : 71kg / 포지션 : MF / 출신학교 및 클럽 : 서울 대림초-남서울중-서울기계공고-아주대-부산 대우-이탈리아 페루자(현재 임대 기간 만료) / 국제 경기 데뷔 : 멕시코 (1999년 6월 12일)
초등학교 때 선배의 권유로 축구에 입문했다는 안정환은 남서울중, 서울기공, 아주대를 거치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93년에는 고교 대표로 뽑혔고 94년에는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 97년에는 동아시아 대회 및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표를 지냈고 그 해 월드컵 대표팀 상비군에도 포함됐다. 프로축구에 뛰어 든 98년 베스트 11에 선정된 데 이어 이듬해에는 프로축구 선수로서 최고 영예인 MVP가 되었고, 2000년 7월에는 부산 아이콘스에서 이탈리아 페루자로 임대돼 빅리그에서 활약하고 싶다는 꿈을 마침내 이뤘다.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에 진출한 안정환은 90년대 후반 한국 축구에 불어닥친 ‘오빠부대’의 원조이기도 하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에 많은 여성 팬들은 가슴을 설레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잘생긴 외모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일부 전문가로부터는 멋진 플레이에 집착하다 보니 오히려 슛 타이밍을 놓치는 등 경기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고, 히딩크 감독도 부임 초기에는 안정환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체력이 떨어지는 데다 거친 몸싸움을 좋아하지 않고 수비 가담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 시즌을 보내면서 생긴 선진축구의 생존법과 대표팀에서조차 주전을 차지하지 못한 데서 나타난 위기감은 안정환을 바꿔놓았다. 공을 잡는 순간부터 마지막 슈팅까지 혼자 해결하려 하던 개인주의도 많이 개선되었고 슛동작도 불필요한 동작을 없애 훨씬 간결해졌다. 스페인 전지 훈련과 여러 평가전을 통해 그의 존재가치를 보여줬고 월드컵 본선 엔트리 최종 포함 가능성을 높여 놓았다.
공격형 미드필더 안정환은 히딩크 감독이 원하는 선수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해왔으며, 대표팀에 합류한 후에는 확실한 주전 자리를 꿰차기 위해 감독을 설득할만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 월드컵 미국전에서 보여준 동점골과 특히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터트린 헤딩 골든골로 안정환은 한국이 4강까지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덕분에 프랑스 AFP 통신사가 선정한 2002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10명의 스타’ 에 뽑히기도.
★ Hong Myung Bo ★
생년월일 : 1969년 2월 12일 / 출생지 : 서울/ 신장 : 181cm / 체중 : 73kg / 포지션 : DF / 출신 학교 및 소속팀 : 광장초-광장중-동북고-고려대-상무-포항제철-벨마레 히라츠카-가시와 레이솔-포항 스틸러스 / 현 소속팀 : 포항 스틸러스 (KOR) / 국제 경기 데뷔 : 노르웨이 (1990년 2월 04일)
홍명보는 한국에서 뿐 아니라 아시아 축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FIFA 월드컵에 네 번이나 출전한 그는 한국 수비를 리드하는 최고의 수비수이다. 철벽 방어를 자랑하며 팬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받는 그는 100 경기가 훨씬 넘는 A매치 출전 경력을 자랑하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이다. 주장이자 중앙 수비수로서 활약하면서 홍명보는 군더더기 없는 플레이와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 그리고 리베로로서 훌륭한 볼 배급 등으로 유명해졌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훌륭한 경기를 보여준 홍명보는 국내 팀인 포항 스틸러스와 계약했고, 92년에는 리그 MVP가 되었으며 92년, 94년, 95년, 그리고 96년에는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홍명보는 94년 미국 월드컵의 스페인과 독일 전에서 각각 한 골씩 두 골을 기록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프로팀과 대표팀에서 화려한 경기를 보여준 뒤, 홍명보는 1997년 일본의 J리그 팀인 벨마레 히라츠카로 옮겼고 팀을 ‘아시안 클럽 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그는 가시와 레이솔로 옮겼고 1999년에는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며 시즌을 마친 뒤 리그 MVP가 되었다. 2000년 홍명보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프로팀의 주장이 되었으며 이는 일본 프로팀인 가시와 레이솔에 기여한 그의 공이 결코 과소 평가되거나 부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K리그 포항 스틸러스로 돌아왔지만 홍명보는 여전히 상대 공격수들에게 부담을 주는 수비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체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동안 ‘히딩크 사단’ 에서 제외되기도 했었지만 끝내 그는 대표팀의 버팀목으로 남게 되었고, 팀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과 그의 경험 그리고 당당함으로 결국 한국을 세계 4위라는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번 2002 월드컵을 통해 홍명보는 유상철과 함께 국내 축구 사상 최초로 월드컵 올스타로 뽑혔다. 한국 선수들이 매년 FIFA가 뽑는 세계 올스타 멤버로 선정돼 친선경기에 참가한 적은 있지만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올스타에 뽑히기는 이번이 처음. 또한 홍명보는 로이터 통신이 선정한 베스트 11에 선정되었고, 아디다스와 FIFA가 주관한 최우수선수 투표에서 18%의 지지를 받아 브론즈볼까지 차지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에서 세계 최정상급 수비수로 도약했다.
★ Cha Doo Ri ★
생년월일 : 1980년 7월 25일 / 출생지 : 독일 프랑크푸르트 / 신장 : 183cm / 체중 : 73kg / 포지션 : FW / 출신 학교 및 소속팀 : 울산 양정초-울산 현대중-배재중-배재고-고려대 / 현 소속팀 : 고려대학교 (KOR) / 국제 경기 데뷔 : 세네갈 (2001년 11월 08일)
차두리는 지난해 대통령배와 9월 추계 대학연맹전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올림픽 상비군 팀에 합류하게 된 것이 월드컵과의 인연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현영민과 함께 대표팀의 연습경기 파트너로 나서 히딩크 감독을 사로잡은 차두리는 곧바로 대표팀 합숙 훈련에 합류했다.
축구를 하기에 안성맞춤인 체격과 체력이 히딩크 감독의 눈도장을 받은 지난해 10월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지만 그 동안 차두리의 발탁에 대해 시원하게 OK 사인을 보냈던 축구 팬들은 거의 없었다. 대표팀에 발탁된 뒤 스스로도 너무 뜻밖이라 얼떨떨하다며 자신 없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고, 그의 발탁을 둘러싼 찬반논란도 끊이지 않았었다.
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선수로 활약했으며 98년 프랑스 대회에서는 감독으로 대표팀을 이끌었던 세계적인 스트라이커 차범근의 아들로 유명한 차두리는 아버지의 거대한 후광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차두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바이엘 레버쿠젠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83cm의 키에 75kg,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스피드는 아버지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았지만 대학 1학년 때인 지난 99년 말 오른발 피로골절로 1년 이상 부상과 싸우며 독일로 건너가 치료를 받기도 했다.
파괴력 넘치고 스피드가 좋은 그는 충분히 아버지를 넘어설 능력이 있었으나 꾸준히 대표팀 경기에 기용됨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 못한 탓에 '속 빈 강정'이 아니냐는 비난도 끊임없이 터져 나왔었다. 하지만 지난 4월 대구에서 열린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전반 26분 안정환의 패스를 받아 A매치 12경기만에 첫 골을 터트린 데 이어 후반 최태욱의 추가 골을 어시스트해 그 동안의 부진에 종지부를 찍었다. 또 이 경기를 통해 차두리는 스트라이커 경쟁자였던 이동국을 밀어내고 당당히 히딩크 감독의 선택을 받아 본선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아버지의 영향력을 반영하듯 '차붐 주니어', '리틀 차붐' 이라는 별명이 붙어다니고 있지만, 차두리는 평가전과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준 기량을 인정받아 아버지가 뛰었던 독일 분데스리가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이름 석자를 전 세계에 알린 차두리는 아버지가 감독으로, 자신은 선수로 나란히 태극마크를 달고 자신의 고향인 독일에서 열리는 2006년 월드컵에 출전하고 싶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 Kim Tae Young ★
생년월일 : 1970년 11월 08일 / 출생지 : 전남 고흥 / 신장 : 180cm / 체중 : 73kg / 포지션 : DF / 출신 학교 및 소속팀 : 녹동초-고흥중-금호고-동아대-국민은행-전남 드래곤즈 / 현 소속팀 : 전남 드래곤즈 (KOR) / 국제 경기 데뷔 : 아랍에미리트 (1992년 10월 21일)
김태영은 미드필더로서, 수비수로서 역할을 모두 소화해내는 재주 많은 선수이다. 32살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저돌적인 플레이를 자랑한다. 수비수이기에 그리 화려하지도 않고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적도 없지만 60명이 넘는 선수들이 월드컵 주전으로 선발되기까지 보낸 1년여간에도 꾸준히 대표팀의 수비라인을 지켜왔다.
김태영은 93년 동아대 졸업과 동시에 국민은행에 입단, 2년간 실업무대에서 뛰다가 95년에야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을 정도로 초기에 빛을 보지 못한 케이스다. 또 90년 처음으로 대표팀에 발탁, 92년 아랍에미리트 연합(UAE)과의 친선경기를 통해 첫 대표팀간 경기를 치렀고 94년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 출전하기도 했지만 축구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 가운데 본선에서 뛰지 못했다.
그의 저돌적이고 전투적인 플레이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차범근 감독이 대표팀 감독을 맡은 후부터였다. ‘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활약한 김태영은 차범근 감독의 부름으로 97년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 이민성과 함께 대표팀의 오른쪽 수비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주전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첫 월드컵 본선 무대인 ‘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세계 무대의 높은 장벽만 확인했다. 이민성, 김도근 등과 함께 대표팀 수비라인에 동참한 김태영은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는 에르난데스에게 2골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또 0-5로 대패한 네덜란드전에서는 후반 최성용과 교체 투입됐으나 베르캄프와 호에이동크를 막지 못해 세 번째와 네 번째 골을 허용했다는 오명을 쓰게 됐다. 벨기에전에서도 김태영은 선발 출전, 끈질긴 대인마크로 1-1 무승부에 큰 기여를 했으나 ‘붕대투혼’을 펼친 이임생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었는지 히딩크 감독 취임 후 김태영은 송종국, 최진철 등과 함께 대표팀 수비라인의 핵심으로 줄곧 확고한 자리를 지켜왔다. 또 유럽 전지 훈련에서는 홍명보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히딩크 감독의 지시에 따라 처음으로 대표팀 주장을 맡아, 경기장안에서는 ‘호랑이’로, 밖에서는 ‘친형’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홍명보, 황선홍, 유상철에 이어 2002 월드컵 대표팀 선수 중 4번째로 많은 A매치 출전기록을 갖고 있는 김태영은 끊임없는 잔 부상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의 주전 수비수 자리를 지켜왔다. 이번 월드컵 본선 對 이탈리아전에서도 비에리의 팔꿈치에 맞아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도 얼굴에 보호대를 착용한 채로 남은 경기에 출전해 악착같이 상대 선수를 마크하고, 끝까지 볼을 쫓는 투혼을 보여 많은 박수를 받은 그는 유상철과 함께 대표팀의 차기 주장 후보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 Park Ji Sung ★
생년월일 : 1981년 2월 25일 / 출생지 : 서울 / 신장 : 175cm / 체중 : 70kg / 포지션 : MF / 출신 학교 및 클럽 : 세류초-안용중-수원공고-명지대(휴학)-교토 퍼플 상가 / 현 소속팀 : Kyoto Purple Sanga (JPN) / 국제 경기 데뷔 : 라오스 (2000년 4월 05일)
강인한 체력과 타고난 근성으로 히딩크 감독의 총애를 받은 박지성은 창조적인 플레이를 보여주는 미드필더로, 국내 프로축구를 거치지 않고 J리그로 직행한 유일한 선수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했지만 국내 프로 리그와 계약하는 대신 곧바로 일본의 교토 퍼플 상가에서 뛰며 범상치 않은 활약을 보여 주었다. 2000년 4월 동대문에서 열린 아시안컵 예선에서 태극마크를 달기 시작한 박지성은 2001년 1월 칼스버그컵 파라과이전 때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돼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기 시작했고, 이어 '2001 컨피더레이션스컵' 대회에서 한국이 승리를 거둔 2경기의 결승골을 모두 어시스트하며 한국 축구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이후 대표팀의 감초로 자리 잡은 박지성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해 설기현, 이영표, 송종국 등과 함께 한국 대표팀 세대교체의 선두주자 대열에 합류했다. 대표팀에서의 성장과 함께 지난해 일본 프로축구에서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일본 프로축구 J2였던 교토 퍼플상가로 진출한 그는 발군의 플레이메이킹 실력으로 지난 해 팀의 우승과 J1으로 승격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박지성이 히딩크호 출범 후 대표팀에서 맡아온 임무는 중앙 미드필드에서 빠른 공수전환으로 전체적인 게임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 올림픽 대표 시절 윙백을 맡기도 했던 박지성은 지난해 컨페드컵 호주전에서는 고종수 대신 왼쪽 미드필더로 기용돼 황선홍의 결승골을 돕기도 했다. 중국과의 평가전에서는 오른쪽 윙백으로 출전하는 등 자리에 상관없이 활약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난 3월 스페인 전지훈련에서 윤정환이 플레이메이커로 합류하면서 대표팀 내에서 입지가 좁아진 박지성은 경기 출전 기회가 적어져 한때 본선 엔트리 제외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으나, 이같은 우려를 비웃듯 히딩크 감독의 선택을 받고 본선 전 마지막 합숙훈련인 제주훈련에서 송종국과 함께 오른쪽 윙백 자리를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175㎝, 70㎏의 비교적 왜소한 체구지만 그의 가장 큰 장점은 90분간 꾸준히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는 강인한 체력과 성실한 플레이 그리고 타고난 승부근성이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보여주었듯이 그는 마지막 휘슬이 울리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달렸다.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바로 일어나 다시 달리고 또 달렸다. 그가 본선 對 폴란드전에서 넣은 그림 같은 골로 한국은 당당히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지난 9일 J리그의 시작에 맞춰 일본으로 돌아간 박지성은 유럽행 가능성이 커진 현재 상황에 대해 올해는 소속팀을 위해 뛰고 싶다며 올 시즌에는 일본 J리그에 남을 것으로 밝히고 있다.
[Shy Guy 박지성, 모교 수원공고 환영행사에 참석!]
지난 7월 6일 오전 12시 20분, 월드컵이 낳은 축구 스타 박지성이 그의 모교인 수원공고에서 주최한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 그의 인기를 말해주 듯 수원공고의 재학생은 물론이고 많은 수원 시민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어 환영식장 안은 엄청난 인파로 발디딜틈 조차 없었다. 오전 12시경 박지성은 미리 도착해 교장실에서 부모님과 함께 환영 행사를 기다렸고, 엄청난 카메라가 부담스러운 듯 연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수원공고 대강당에서 그를 환영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수원공고 시절 165cm, 52kg의 왜소한 체격이었음에도 지치지 않는 체력과 기량을 자랑했던 박지성은 고교시절부터 뛰어난 축구선수로써 이미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이날 그는 자랑스런 ‘수공상’을 비롯해 평생 무료 진료권을 받는 등 각종 선물을 받았다. 또한 행사 내내 강당 안의 열기가 뜨거워 와이셔츠를 풀어헤치며 계속해서 땀을 닦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여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몹시 쑥쓰러워하며 없다고 답해 장내에 있던 소녀 팬들을 설레게 하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박지성입니다. 뜨겁고 열렬한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수원공고를 졸업한 게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더 많은 관심과 사랑 보내주세요!”라는 멘트와 함께 교가로 행사를 끝마친 뒤 수원공고에서 수원경기장까지 이어진 카퍼레이드를 펼쳤고, 수원 경기장 앞에서의 팬사인회를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